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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한반도 위기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추리 소설이며, 등장 인명·지명·기관·사건 등은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제22화 역사의 반전]에서 계속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23화 빛과 그림자]
며칠 후, 동혁의 집무실.
잠깐 자리를 비웠던 동혁은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책상 위 서류의 위치가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아주 사소한 변화였다. 하지만 결코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담당 비서를 찾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잠시 후, 비서가 들어왔다.
“혹시 누가 다녀갔나요?”
비서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순간, 동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비서실의 보좌관들과 비서진 중 누구 하나도 그의 인연으로 뽑힌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사소한 의심조차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권력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빛은 강해졌다.
그러나 그만큼 그림자도 짙어지고 있었다.
그 시각, 대통령 집무실.
대통령 유상욱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국정원장 황병욱이 서 있었다.
“신규 펀드 대표 한순구, 연용철. 두 사람 모두 전 실장이 추천했다지?”
“네, 그렇습니다.”
“적임자들인가?”
“네. 두 사람 모두 외국계 회사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했고, 평판도 좋습니다. 대선 캠프 시절에도 열심히 뛴 사람들입니다.”
대통령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펀드 운용 실력은?”
“뛰어납니다. 요즘 방송에도 자주 출연해서 반응도 좋습니다.”
대통령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전 실장과 이들이 저녁을 함께한 날짜?”
그의 시선이 병욱에게 꽂혔다.
“내가 원장을 불렀던 그날 아닌가?”
“맞습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유토피아 신문 안혜경 기자, 그리고 오성 그룹의 박창근 부사장도 함께 있었습니다.”
병욱은 차분했다.
“안혜경…”
대통령은 잠시 그 이름을 되뇌었다.
“특이한 점은?”
“없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른 것이 전부입니다.”
병욱은 대통령의 안색을 살피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다만 뉴스로 접하셨겠지만, 각하의 남미 순방 중에 전 실장이 비무장지대를 방문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기금 이사장들을 여러 차례 만난 것도 특이한 동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눈빛이 번뜩였다.
“혹시 북한과의 핫라인에 닿은 적은 없는가?”
“없습니다.”
병욱은 깍듯이 허리를 숙인 뒤 물러났다. 대통령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결심한 듯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내일 저녁에 시간 어떤가? 나랑 술 한잔하세.”
다음 날.
청와대 집무실에 딸린 작은 만찬장. 오늘은 소박한 밥상이 아니었다. 한 상 가득한 음식들과 각종 술이 수북이 놓여 있었다.
그 식탁은 오늘 대통령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사실을 단번에 드러내고 있었다.
동혁은 최근 대통령이 경호실장에게 매주 도청 탐지를 지시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 기억과 겹쳐, 오늘 이 자리가 지난번 자신의 제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시 설렘마저 스쳤다. 그러나 곧 묘한 불안이 그 틈으로 스며들었다.
동혁이 식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생일상 같습니다. 왜 이렇게 풍성하게 차리셨습니까?”
대통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짧고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술은 뭐로 하겠나?”
여유는 없었다. 서두르는 기색만이 역력했다. 동혁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소주가 좋겠습니다.”
“나도 오늘은 소주가 당기는 날이네. 우린 역시…”
대통령이 술병을 들었다. 동혁은 손을 내밀었다. 대통령이 손으로 막았다.
“아니네. 오늘은 내가 먼저 아우님께 올려야지.”
술잔이 오갔다.
대통령의 지나친 예우. 메마른 말투.
잔을 받는 동혁의 가슴 속에 불길한 예감이 고개를 들었다.
대통령이 또 잔을 들었다.
“아우님, 우리의 영원한 우애를 위하여.”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그러나 그 울림은 묵직했다. 대통령은 수저를 들며 말했다.
“오늘은 자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했네. 어서 드시게.”
하지만 동혁은 이미 입맛을 잃고 있었다.
형님이라 부르던 호칭이 어색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처음으로 두꺼운 거리감이 감돌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였다.
대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대통령도, 실장도 없는 날일세. 오직 형과 아우만 있을 뿐이네.”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미리 짐작한 동혁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지난번 말씀드린 그 건에 대해…”
대통령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조금 있다가 하세. 식기 전에 먼저 드시게.”
이제 동혁은 이 자리가 불길한 만찬임을 직감했다. 그는 잔을 연거푸 비웠다.
잠시 후, 대통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언젠가 자네의 큰 포부를 펼칠 날이 올 거네.”
그는 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하세. 자네의 위대한 야망을 위하여.”
잔은 부딪쳤다. 그러나 동혁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대통령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난번 자네의 이야기, 기가 막혔네. 완벽한 기획이었어.”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난 할 수 없네.”
동혁은 그저 말없이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동지들을 지키기 위해서… 대통령은 자유로운 자리가 아니야. 당선되는 순간부터 그들에게는 빚쟁이와 인질이 되는 거지.”
대통령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조금만 뒤틀리면 바로 등에 칼을 꽂는 게 정치 현실이야.”
대통령은 순식간에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스스로 잔을 채웠다.
“자네도 봐 왔을 걸세. 단임제 대통령들의 비참한 말로를. 만약 이번 일이 틀어진다면, 세상은 완전히 뒤집어질 걸세. 그땐 나나 자네 인생도 파멸이야.”
대통령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다.
어느새 그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난 자네에게 죄인이야.”
그는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눌렀다.
“자네가 내 목숨을 달라고 해도, 난 내놓을 걸세.”
그 순간, 동혁의 머릿속에 오래전 한 장면이 스쳤다.
7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던 날.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런데 교도소 문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상욱이었다.
그는 말없이 동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세상에서 난, 자네에게 용서를 구할 그 어떤 말도 찾을 수 없었네… 정말 미안하네.”
그의 목이 잠겼다.
“나 때문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게 하고…”
상욱은 말을 잇지 못했다. 상욱의 뜨거운 눈물이 시멘트 바닥에 떨어졌다.
당황한 동혁이 그를 붙잡았다.
“선배님, 저는 한 번도 선배님을 원망한 적 없습니다. 그저 잔인한 운명이다, 그렇게 생각했고… 이미 다 녹여 냈습니다.”
그 말에 상욱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말도 들었네. 모두가 나를 변절자라 손가락질했지만, 자네만은 한 번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더군. 그래서 더 괴로웠네.”
상욱의 어깨가 떨렸다.
“나는 평생 자네에게 갚지 못할 죄를 지었어. 날… 용서하지 말게.”
“선배님,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용서는 없다 치고… 대신 소주나 한잔 사 주십시오.”
동혁은 그의 팔을 잡았다. 곧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고 포장마차 불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날 밤, 포장마차의 희미한 불빛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회한과 자책을 한 잔의 소주로 말없이 씻어 냈다.
동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대통령의 눈에 비친 그 눈물의 의미를.
대통령은 젖은 눈으로 동혁을 바라보았다.
“그때도… 자네를 아꼈기에 내가 허세를 부린 거야.”
그는 술잔을 비웠다.
“하지만 이번엔 자네를 위해서, 나는 또 한 번 비겁자가 되어야 할 것 같네.”
동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도 이제 마음을 비울 때가 되지 않았나? 우리가 함께 꿈꾸던 민주화도 이루어졌고…”
그 말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가 또 먹먹해졌다. 동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다 보면 어떤 말도 소용없을 때가 있었다. 동혁의 눈동자에는 원망도, 분노도 없었다.
“난 자네가 누구를 추천했는지, 자넬 따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네.”
동혁의 시선이 천천히 대통령에게 향했다.
“자넨 소신과 열정의 사나이야. 하지만 난 멈추지 않는 그 불굴의 집념이 몹시도 두렵네.”
대통령의 눈빛이 더욱 단단해졌다.
“만약 자네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난 자네가 추천한 이들을 모두 해임할 수밖에 없네. 이해하시겠나?”
동혁은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만찬까지 마련해 이토록 명확하게 말할 정도라면, 누구도 대통령의 결심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형님의 뜻, 잘 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결국 형님은 저를 해임하고, 제가 추천한 사람들은 살리기로 하셨군요.”
대통령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오늘 식사는… 이별의 만찬이었군요.”
마침내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또렷하게 말했다.
“형님은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유기하신 겁니다. 사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한반도를, 8천만 국민을 배신하신 겁니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분노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말은 칼이고, 침묵은 포댓자루라고 했다.
하지만 둘 중 무엇 하나도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를 조금도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없는 아이를 바라보듯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쉬면서 기다려 보세. 곧 더 나은 세상이 올 거야.”
대통령은 축 늘어진 동혁의 어깨를 조용히 다독였다.
동혁이 나가자, 대통령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선택 앞에서, 가차 없이 흔들리고 있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역사의 반전.’
대통령의 눈빛이 깊어졌다.
‘최소 2경 5천조 원. 미친 계산법.’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나 저 친구의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역사의 배신자일 것이다.’
그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았다.
‘순식간에 세상이 뒤집힐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 길을 택한다면?’
창밖의 어둠이 깊어지고 있었다.
‘나는 영웅이 될 것인가, 아니면 파멸한 범죄자로 기록될 것인가.’
그는 먼 산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산 아래 도시의 불빛들은 거대한 욕망의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그 파도 한가운데에서 이미 누군가의 운명이 흔들리고 있었다.
동혁은 홀로 사무실을 걸어 나왔다.
가슴에는 해임이라는 두 글자가 무겁게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 대통령이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촉촉이 젖은 눈길.
손짓의 의미.
그리고 마지막 희미한 웃음 속에는 아직 미묘한 믿음과 신뢰가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동혁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고단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에는 여전히 불길이 살아 있었다.
‘Some Day. 역사의 반전, 개미의 분노.’
혜경이 건네 준 시나리오의 제목이 눈앞에 켜지고, 귓가에 울렸다.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그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인류는 언제나 광기로 세상을 바꿔 왔다. 누군가는 미쳐야 한다, 그래야 인류의 문명과 역사가 제대로 굴러간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난 그 미친 자가 되어야 한다.’
밤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폭풍 전야의 고요였다.
그것은 거대한 반전의 서막이었다.
다음 날.
늦게 출근한 동혁은 사직서를 작성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대통령의 친필 메모 몇 장.
서명된 서류 두 장.
직인만 찍힌 A4 용지 세 장.
그는 그것들을 작은 서류 가방 안에 조심스레 챙겨 넣었다.
그는 사무실을 돌며, 놀란 표정의 비서실 직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다음 날 오전.
대통령 집무실.
국정원장 황병욱이 굳은 표정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어제 확인된 사안이 심각해 보고 드립니다.”
대통령의 시선이 서류로 향했다.
병욱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난번 각하의 해외 순방 기간 중, 전 실장이 중국을 다녀온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위조 여권까지 사용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통령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름은 최순복. 그런데 사진은 유토피아 안혜경 기자입니다.”
병욱은 계속 보고했다.
“이상한 점은, 위조 여권은 사용 흔적이 없고 출입국 기록에는 전 실장과 안혜경 본인 이름만 나왔다는 겁니다. 게다가 최순복 명의로 중국 비자까지 준비했지만, 그 이름으로 출국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대통령은 해외 순방 전 동혁이 독감을 이유로 국내에 남겠다고 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곧바로 퍼즐 조각들이 맞물렸다.
대통령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중국에서 누굴 만났는가?”
대통령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왜 위조 여권을 쓴 거지?”
병욱은 고개를 숙였다.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곧 확인해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안혜경 역시 감시 중입니다.”
대통령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서류를 덮었다.
“전 실장은 오늘부로 사임이야. 날개 잘린 마당에 이제 뭘 하겠나. 하지만… 계속 지켜만 보게.”
병욱은 놀랐다. 대통령이 툭 내뱉듯이 던진 그 말, 그는 더 묻고 싶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시선은 이미 창밖으로 향했다.
대통령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병욱은 말없이 물러났다.
그날 오후. 언론은 일제히 속보를 쏟아 냈다.
‘전동혁 비서실장 전격사임’에 관한 내용이었다.
일반 국민은 놀랐다. 그러나 청와대 내부는 이미 준비된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전.
동혁은 혜경에게 불쑥 제안했었다.
“대통령 해외 순방 기간에 중국에 다녀오지 않겠어?”
혜경의 눈빛이 잠시 반짝였다.
“우리 둘만?”
이내 그녀의 얼굴에 슬픔이 내려앉았다.
“정말 우리 둘만 가는 거야? 정연이… 너무 가엾잖아. 난 그 고통을 너무 잘 알아.”
금세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것이 기쁨의 눈물인지, 연민의 눈물인지 동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해. 물론 방은 따로 쓸 거야.”
“따로?”
그 한 단어가 불씨가 되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혜경은 탁자 위의 휴지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하얀 휴지들이 허공을 가르며 흩날렸다. 그 안에는 그녀의 실망과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단순한 여행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남겨지고, 누군가는 떠나야 했다. 그것은 세 사람의 사랑을 시험하는 일도 아니었다. 세 사람의 삶을 뒤흔들 폭풍 전야가 될 것이었다.
며칠 후.
두 사람은 베이징 공항에 발을 내디뎠다.
베이징의 밤은 찬란했다. 네온사인의 빛과 눈부신 유리 조명이 뒤섞여 도시 전체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콧수염을 붙이고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변장한 동혁과 혜경은 대동 레스토랑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훈제 요리의 짙은 향과 상큼한 자스민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붉은 벽감 사이로 흑단 목재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서는 수많은 샹들리에가 수천 개의 유리 방울을 흔들며 영롱한 빛을 쏟아 내고 있었다. 베이징에서도 권력자와 자본가들만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었다. 창문 밖으로 자금성의 붉은 지붕이 희미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안내원이 두 사람을 밀실로 안내했다.
황금 문양이 새겨진 병풍 너머에서 흘러나온 독특한 향이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곧 안쪽 문이 활짝 열렸다.
다부진 체격의 중년 남자가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바로 최상호라는 가명을 쓰던 남자였다. 한때 그들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갈라놓았던 남파 간첩. 그리고 이제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최고 수장으로 변신한 남자. 바로 최병일이었다.
남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와 은밀한 접선을 시도하는 순간, 방 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잔뜩 긴장한 채 낮게 깔려 있었다.
그들 곁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경호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병일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정말 반갑습니다. 이렇게 두 분을 한자리에서 뵙게 될 줄이야.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그가 눈짓을 보내자, 경호원들은 문을 닫고 조용히 사라졌다.
병일은 동혁의 손을 덥썩 잡더니 바로 끌어안았다.
“운명은 참 오묘합니다. 정말… 이런 순간이 찾아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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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은 긴장한 기색을 애써 감추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친숙한 사이라는 사실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병일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저는 두 분께 죄인입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두 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든 모두 들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여종업원이 들어오자 병일은 유창한 중국어로 주문을 했다. 그리고 선뜻 백 위안 지폐 한 뭉치를 건넸다. 여종업원이 놀라며 사양하자 병일은 웃으며 말했다.
“주방장과 나누시오.”
그의 호방한 웃음이 방 안의 공기를 잠시 풀어 주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위험한 접선의 기운이 여전히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병일은 돌아서던 여종업원을 다시 불러 세웠다.
“그리고 주방장에게 전하시오. 오늘은 내 생애 가장 귀한 손님을 모셨으니, 최고의 음식과 술을 내어 달라고.”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중국의 국민가수 등려군의 노래를 부탁했다. 혜경은 그 대화를 또렷이 알아들었다.
오늘 점심, 그녀는 동혁과 함께 중국 국영방송국 아나운서 왕 추이와 외교관 차오 지후이를 만났었다. 두 사람은 혜경이 북경 특파원으로 있을 때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동혁과 혜경의 재회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이 사람은… 적이라기보다, 의외로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중국어를 모르는 척하며 병일의 말을 듣고 있던 혜경은 내심 마음이 조금 놓였다.
병일은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두 분을 위해 최고의 음식과 술을 준비하라 했습니다.”
잠시 후, 등려군의 애절하고 감미로운 선율이 홀을 채웠다.
병일은 잔을 들어 올렸다.
“두 분의 사랑이 이 노래처럼 영원하길 바랍니다.”
어색하던 분위기는 서서히 풀어졌다. 병일은 애주가답게 중국 술의 역사까지 화제에 올렸다.
“오늘 나온 이 술, 우량예(五糧液)와 구이저우(貴州)는 천 년의 향을 고스란히 담아낸 술이지요. 오늘 드시고 남으면 선물로 가져가세요.”
옆 테이블에는 술병이 가득 쌓여 있었다.
새삼 그의 넉넉한 배포가 느껴졌다.
세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오십 도에 이르는 강렬한 알코올이 목을 태우듯 스며들었다.
동혁과 혜경은 동시에 기침을 터뜨렸다.
“커억… 컥!”
병일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처음엔 그렇습니다. 두 분의 사랑도 그랬었지요.”
긴장과 웃음이 교차하는 술자리였다.
그러나 곧 대화는 무겁게 기울었다.
병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작 핵심은 감춘 채, 역사를 바꾸겠다는 말씀만 되풀이하신다면 성사 여부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동혁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곧 아시게 됩니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합니다.”
순간, 병일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침묵의 냉기가 세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병일이었다.
“내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무거웠다.
“오늘 내가 이것 하나만 말씀드리겠소. 옳고 그름도 중요하오. 그러나 먼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흥미와 감동이오.”
그의 차가운 시선이 동혁과 혜경을 향했다. 그때 혜경이 나섰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흥미와 감동은 넉넉할 것입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결국 병일이 먼저 잔을 들어 올렸다.
“내가 두 분께는 큰 죄인이니, 일단 추진하겠소.”
그가 씩 웃었다.
“그럼, 또 건배합시다. 이번엔 오늘 이 자리의 암호로. 자, 최순복과 석병일을 위하여!”
그들의 잔이 부딪치고 건배가 이어졌다.
그때, 그녀가 미소 지으며 여권을 꺼내 보였다.
“최순복이라니… 좀 어색해요.”
병일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름만 보면 순수한 북한 여인이지요. 그 이름의 주인공은 제가 꼭 지켜 드리겠소.”
그의 호탕한 웃음에 분위기는 어느새 다시 부드러워졌다.
잠시 후, 병일은 소형 폰 하나와 손바닥만 한 암호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암호책 표지에는 붉은 잉크로 선명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숙지 후 폐기.
병일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혜경 동지는 이것으로만 나와 연락하시오. 암호는 간단합니다. 다만 반드시 폐기해야 하오.”
혜경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바로 암기하고 폐기하겠습니다.”
그녀는 폰과 암호책을 핸드백에 넣었다.
그러고는 병일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시오.”
“북한은 미국이나 일본과 관계를 개선할 의지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경제 개발에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병일은 짧게 웃었다.
“우리는 자존심 하나로 사는 나라입니다. 어림없다고 봐야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우린 굶어 죽어도 고개는 안 숙입니다. 그게 우리 방식이오.”
만찬은 끝났다.
떠나려던 병일은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두 분께 죄인인 제가 언젠가 그 빚을 갚을 날이 오겠지요.”
그는 정중히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둘만 남겨진 만찬장. 방 안을 짓누르던 긴장이 풀렸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식탁 위에는 미처 비우지 못한 술잔들만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혜경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