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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5.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 기도생활의 반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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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5.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생활의 반석
주님의 기도는 너무 자주, 흔하게 바치는 기도이기에 고루하고 낡은 기도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완전한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미사여구와 성경말씀을 덧붙여 길게 늘어놓아야 기도를 잘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그저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 만족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이면서도 깊이 있는 기도이니, 입술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서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기도생활의 반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서 받는데 성령의 은총 없이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시며 '아버지'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도전의 순간에 언급하셨는데,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느끼지 않거나 그분의 자녀라고 여기지 않아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믿음이 없거나 어휘의 나열’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시선을 느끼게 해 줍니다. 아버지께 향하는 기도의 말은 미신에서 하는 주문처럼 소용없는 말들이 아닙니다. 나를 당신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주신 분에게 향하는 목소리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깨닫고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가 계심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기도는 모두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잊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친밀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하고, 후반부는 우리 서로간의 용서와 화해를 청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이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비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챙겨주게 될 때 주님의 기도는 완성됩니다. 그때 하늘 아버지를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자신이 아버지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이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사실 “참된 기도는 하느님을 친숙하게 대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앵무새처럼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대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과 사랑이 통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깊은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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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5.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2)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그렇습니다.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문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들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비록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처럼, 이 기도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선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합니다. 곧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고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고귀한 기도인지요?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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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성자의 반열로 들어 올리시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제가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이루소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생명의 빵이신 아드님을 양식으로 삼아 당신 안에서 영원히 살고,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소서. 다름 아닌 용서를 통하여 그러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 되게 하시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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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5.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국의 통일을 이룬 최초의 황제는 ‘진시황제’입니다. 진시황제는 능력이 있다면, 재능이 있다면 나라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간첩’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러자 진나라의 대신들은 이를 기회로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라고 상소를 냈습니다. 진시황제는 신하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나가라는 법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진시황제의 책사였던 이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상소를 냈습니다. 상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넓은 바다는 강물을 가려서 받지 않습니다. 태산은 흙을 가려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넓은 바다는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여야 비로소 바다가 됩니다. 태산은 모든 흙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태산이 되는 겁니다.” 진시황제는 책사 이사의 상소를 받아들였고, 외국에서 온 사람은 모두 나가야 한다는 법령을 철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나의 종교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다른 종교를 배척한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는 시작은 달랐겠지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에서 서로 석물리는 과정을 겪어왔습니다. 유대교는 바빌로니아 유배시대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지만 신학과 제도는 그리스의 철학과 로마의 제도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불교는 인도의 힌두교에 뿌리를 두었지만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중국의 사상과 철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고,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제도를 수용했으며 이슬람 특유의 신정일치의 제도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들 종교들은 모두가 우물 밖으로 나왔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우물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에 머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는 유대인들에게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메마른 대지에 골고루 내리듯이, 햇빛은 그늘진 곳에 골고루 비추듯이 복음은 진리에 목마른 이들에게 골고루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우물 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나만의 종교에서 벗어나 이웃한 종교와 화합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욕심과 나의 뜻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사는 길을 오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기도’의 삶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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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5.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한 대도 안 맞고 이길 수 없다.”
이 명언처럼 우리는 안 맞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삽니다. 아무런 고통과 시련 없이 편하고 쉬운 삶만 반복해서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야구 선수가 3할 타자만 되어도 최고의 타자 소리를 듣습니다. 이는 30%의 성공, 70%의 실패를 말합니다. 분명히 실패가 더 많습니다. 그래도 30%의 성공만으로도 가장 뛰어난 선수라고 평가받을 것입니다.
축구에서도 그렇습니다. 골키퍼는 단 한 점도 내주지 않기를 바라겠지만, 그런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명 골키퍼가 되려면 많은 골을 내주면서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거부하는 사람은 한 대도 안 맞고 이기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사람, 착각 속에 사는 사람, 헛꿈 켜는 사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준 명언을 제가 어디서 읽었을까요? 놀라운 진리가 적혀 있는 곳은 다른 곳도 아닌 화장실 안이었습니다. 바로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붙어있는 명언이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진리는 내 삶 너머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일상 삶 안에서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특별한 곳에서만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묻습니다. 그때 가르쳐주신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물었던 이유는 당시에 많은 유다인들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기도를 바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회당에서 18개의 축복기도를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회당이 아닌 곳에서는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기도를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화를 반드시 회당에서만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즉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가까운 관계이며 사랑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18개의 축복기도처럼 길지 않습니다. 꼭 성당에서만 기도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상관없이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함께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충분히 느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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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거나 하고 싶은 그 일을 하면, 아무 일이 일어난다(라이팅 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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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5.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기도 역시 평생 배움의 훈련이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공부해야하는 인간입니다. 배워야 하는 인간,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분은 수도승의 두 특징을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을 꼽고 있습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한 배움이요 공부입니다.
동양 최고의 인생 교과서인,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해 놓은 책인 <논어>는 첫장을 배움의 기쁨으로 시작합니다. “배우고 때 맞춰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의 매력은 공부하는 인간이라는 데 있을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또 시토회는 수도공동체를 사랑의 학교로 정의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 수도공동체는 기도의 학교, 기도의 배움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과 섬김에만 아니라 기도에도 영원한 초보자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초보자라는 겸손한 자각이 학인의 기본적 자세일 것입니다. 사실 늘 낮은 자세로 겸손히 열려 있어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배움에 대한 사랑, 배움에 대한 기쁨은 우리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의 기본적 자질임을 깨닫습니다.
기도의 복음이 바로 루카복음입니다. 유난히 기도하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주님의 기도’이고 예수님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기도도 평생 배워야 합니다. 우리 수도공동체는 졸업이 없는 평생 기도를 배워야 하는 기도의 학교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표적인 기도는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일곱의 청원이 나오지만 루가복음은 이보다 짧은 다섯의 청원으로 이뤄집니다. 늘 배워도 늘 새롭게 와닿는 주님의 기도요 평생 배워야 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기도 노하우를 전수하십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단순하고 본질적인 삶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믿는 이들로서의 우리 삶의 자리가 잘 드러납니다. 인간이 누구인가?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하느님입니다. 아버지인 하느님을 찾는 인간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되기 위한 기본적 본질적 필수의 공부가 하느님 공부입니다.
“아버지”의 호칭으로 시작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부터 목이 메인다는 어느 수도자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요. 영세 받으니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셔서 좋다는 어느 분의 평범하나 진솔한 고백이 생각납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은 추상적 철학적 하느님이 아니라 인격적 대상으로서의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입니다. 우리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의 아버지인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세 특징을 가까움, 연민, 부드러움으로 요약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들이요, 서로는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자매들이라는 것입니다. 널리 깊이 보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의 인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한 가족을 이뤄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엊그제 수도형제들의 꾸밈없는 사랑의 순수한 축하인사를 받으며 영원한 우애友愛의 아가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이성간의 성애性愛는 일시적이나 주님 안에서 우애友愛는 영원합니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청원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바로 아버지 중심의 우리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방황과 혼란은 중심이 분명치 않음에서 기인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입니다. 꿈과 희망, 비전을 추구追求하는 인간입니다. 이런 아버지인 하느님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요, 우리의 궁극의 꿈이자 희망, 비전입니다. 삶의 중심 자리에 하느님이 아닌 우상이 자리 잡을 때 시작되는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예전 수도원 초창기 비전이 없다는 어느 형제의 비판에 우리의 영원한 비전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이라 답변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름다우며 도전적입니다. 모두를 하느님께 맡기는 일방적이고 무책임한 청원이 아니라 우리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협력을 요구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100% 하느님께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나한테 달린 듯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그대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입니다. 참으로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거룩함을 가리지 않고 거룩하심이 잘 드러나도록, 또 아버지의 나라의 꿈이 잘 실현되도록 도와 드려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의 숭고한 의무요 책임입니다. 이어지는 평범한 일상생활에서의 기본적이자 본질적인 세가지 청원입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날마다’바로 루카가 좋아하는 표현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날마다의 세 청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날마다 그 날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겸손이요 일용한 양식을 얻기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노력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용서받기위해 먼저 용서하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용서 역시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우선 용서하려는 지향을 지니고 용서하면 뒤에 용서가 따라 옵니다. 부단한 의식적 노력의 훈련과 더불어 자발적 용서의 습관화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사 일방적 청원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일상을 늘 깨어 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있음의 영성훈련도 필수입니다. 바로 이를 위한 비움기도, 향심기도, 마음의 기도등 온갖 종류의 관상기도의 수행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물론 모든 기도가 훈련입니다. 평생 영성훈련의 반복적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저절로 인간이 아니라 이런 기도를 통한 끊임없는 반복의 영성훈련이 건강한 영혼의 인간으로 만듭니다. 망각의 동물이기에 끊임없이 하느님을 기억하게 하는 기도의 훈련이 주님을 닮아 정체성 또렷한 참 내가 되게 합니다. 참으로 이렇게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온갖 수행의 영성훈련에 충실할 때 하느님께서도 감동하셔서 힘껏 도와주십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실수나 부족함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이를 겸손히 배움의 계기로 삼을 것이며 결코 배움의 열정에 지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배움을 사랑하고 배움을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갈라디아서 후반부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200주년 성서주석은 ‘바울로가 안티오키아에서 베드로를 꾸짖다.’로 또 새번역은 ‘바오로가 베드로를 나무라다.’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직제자도 아닌 바오로가 예수님의 직제자이자 수제자인 베드로를 크게 질책합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답게 살지 않고 이방인처럼 처신하면서,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유부단하고 일관성 없는 베드로의 자세를 꾸짖습니다만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겸손히 배움의 계기로 삼았을 것입니다. 이래야 전화위복의 삶입니다. 기도도 평생 반복의 훈련입니다. 평생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삶의 전례화요 전례의 삶화를 통해 날로 주님을 닮아 참내가 되어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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