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믿음에 목마르신 예수님
2열왕 5,1-15ㄷ; 루카 4,24ㄴ-30 / 사순 제3주간 월요일; 2024.3.4.
우주와 지구를 조성하시고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생명체 가운데 가장 정성들여 지어내신 인간과 믿음으로 통공하고 싶어 하십니다. 창조주와 피조인간의 통공이 창조의 목표였고, 그 통공으로 인간이 당신을 닮아서 사랑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게 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통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최고의 관심사는 믿음이고, 이를 인간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또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표징을 보여주시고 알아보기를 기다리십니다.
엘리사 시대에 나병에 걸린 시리아 장군 나아만이 이스라엘에 와서 치유를 청하자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로 하여금 요르단 강물로 그를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기적을 전해 듣고 또 실제 깨끗해진 나아만의 얼굴을 보고도 그 시대의 시리아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인정하면서도 그 기적이 하느님께서 존재하시고 또 일하고 계시다는 표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당신께서 자라나신 고향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카파르나움에서 보여준 기적을 또 다시 자신들의 눈 앞에서 보여달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버티었습니다. 그래서 무안하리만큼 답답해지신 예수님께서 시리아 나아만의 예를 들어 회개하지 않는 고향 사람들을 나무라시자, 그분을 벼랑에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토록 완고한 고향 사람들을 보면서 하는 수 없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물러나셨습니다. 당신을 죽이려고 들 정도로 살기등등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빠져나오셨는데, 조금 전까지 죽이려들던 그들이 이번에는 그분의 옷자락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습니다. 제3자의 눈에는 이것이 작은 기적일 만큼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 기적 같은 탈출이 그분의 복음선포가 공생활 내내 사람들의 불신과 냉소 그리고 무관심이 벽이 되어 부딪치실 때마다 일어났습니다. 성전을 정화시키신 그분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다시 올라가셨을 때에도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 주위에 몰려있던 군중이 두려워 손을 대지 못했으며(요한 7,30.44), 성전 옆 올리브산에서 간음한 여인을 두둔하시던 현장 등에서도 그러했습니다(요한 8,59; 10,31).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거나 믿으려 하지는 않고 도리어 완강하게 적대시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기를 시도하셨습니다. 진정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그분의 신적인 권능으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 목이 말라 물을 청하신 그분은, 정작 그 여인의 믿음에 목마르신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영적인 갈증을 해소하시려고 믿음의 물을 청하신 것이었고(요한 4,7), 그 믿음이야말로 그분이 배고프지 않을 수 있는 ‘양식’(요한 4,32)이었는데,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우리들의 믿음에 목말라 하신(요한 19,28) 예수님을 믿으면 결코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처럼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물을 마시면 우리는 다시는 갈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시편 42,2-3. 화답송). 그래서 우리는, “주님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사오니 언제나 주님의 은총으로 교회를 이끌어주시고 무한하신 자비로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를 보호하소서”(본기도)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눈치를 챈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께, “주님, 저희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루카 17,5) 하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오늘 전례는 미사의 말씀으로나, 전례 기도로나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촉구하는 표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표징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게 되면 구원받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분이 우리 삶의 기준이시며 또한 완성이심을 깨닫게 해 줍니다. 비록 우리 눈앞에서 시리아 장군 나아만 같은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낫는 뜻밖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우리는 그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우리 역시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선택되었으며 우리의 믿음을 하느님께서 바라신다는 것을 얼마든지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러한 사건들을 하나의 표준적 표징으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삶의 기준을 정할 수 있고 또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저 주어진 이 은총을 알아보는 믿음의 눈이 그래서 귀합니다.
대희년을 앞두고 모인 아시아의 주교들은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우리의 이 믿음이 발휘되어야 할 방향에 대해서 ‘아시아에서 펼쳐질 하느님 계획의 경이로움’이라는 표현으로 구체화시켰습니다.
“아시아 교회는 하느님께서 이 대륙의 남녀 인간들을 통하여 아시아 땅에서 그분의 구원 계획을 시작하도록 선택하셨기에 '우리 구원의 하느님'(시편 67,20)을 찬미하며 노래합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아시아에서 처음부터 당신의 구원 계획을 계시하시고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조들을 인도하셨으며(창세 12장 참조), 당신 백성을 해방으로 이끄시려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출애 3,10 참조).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에게 많은 예언자들, 판관들, 임금들 그리고 굳건한 믿음의 여인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찼을 때'(갈라 4,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시아인의 육신을 취하셨습니다. 이 대륙 백성들의 선량함, 문화, 종교적 활기, 그리고 양심, 동시에 모든 이의 선을 위하여 받은 신앙의 유일한 선물을 기뻐하면서, 아시아의 교회는 끊임없이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 117,1) 하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지에서 태어나시고 생활하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에, 서아시아의 이 작은 지역은 모든 인류를 위한 약속과 희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알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기 백성의 역사, 고통, 희망들을 자기 것으로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백성을 사랑하셨으며, 유다인의 전통들과 유산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제로 오래 전에 이 백성을 선택하셨으며, 그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성령의 힘 안에서 복음 설교를 통하여, 교회는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고자'(마태 28,19 참조) 나아갔던 것입니다. 전 세계의 교회와 함께, 아시아 교회는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신 모든 것에 경탄하면서, 그리고 “제1천년기에는 십자가가 유럽 땅에 심어지고, 제2천년기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심어졌던 것처럼, 제3천년기에는 이처럼 광대하고 생동적인 이 대륙에서 신앙의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리스도교 제3천년기의 문턱을 넘어갈 것입니다”(‘아시아 교회’, 1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