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의 밤
출 12: 1-42
애굽은 주전 3,00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애굽은 세계 4대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에 하나이다. 애굽이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창대한 나라였던가는 지금도 사막 가운데 서 있는 피라믿을 보아 알 수가 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내려가 살았던 주전 2,000년대는 국력이 가장 왕성하던 때였다. 이렇게 창대하던 애굽이 하룻밤 사이에 망한 역사를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가 있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장정 60만명을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세가 미디안에서 돌아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했을 때 바로는 더욱 심한 고역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웠다. 짚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라고 했다. 벽돌의 수를 채우지 못하면 매질을 했다.
노예를 부리는 사람이 힘이 없으면 노예를 부리지 못한다. 한 민족을 노예로 부려먹으려면 그 민족을 한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어야 한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다.
이러한 바로가 하룻밤 사이에 꺼꾸러지고 말았다. 맏아들이 죽었다. 바로의 아들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방백 재상들의 맏아들이 다 죽었다. 백성들의 맏아들이 다 죽었다. 감옥에 갇힌 죄수의 맏아들도 죽었다.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맏아들 까지 다 죽었다.
아들뿐이 아니었다. 소 말 돼지 양 염소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은 다 죽었다. 왕궁에도 곡성이요 민가에도 곡성이요 부잣집에도 곡성이요 가난한 집에도 곡성이요 한밤중에 온 나라 안이 곡성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이 곡성은 단순히 맏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만은 아니었다. 그 동안 계속해서 내린 피 재앙,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생축에 악질 재앙, 짐승에 독종 재앙, 불과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으로 인해 애굽은 망해버린 것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강과 농사와 가축과 왕궁과 백성이 다 망해버린 것이다. 완전 파멸 완절 절망에 빠진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하룻밤에 한 나라가 이와 같이 망한 역사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이러한 판국에 애굽 땅 한 모퉁이에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그 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고센 땅이었다. 고센 땅에는 한 집에도 곡성이 들리지 않았다. 한 집에도 맏아들이 죽지 않았다. 짐승 하나 다친 일이 없었다.
잔치치고는 이상한 잔치였다. 집집마다 양을 잡았다. 그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이어야만 했다. 정월 10일에 일제히 준비하여 그 달 14일 까지 간직했다가 14일 해질 때에 잡았다.
먼저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뿌렸다. 그리고 그 잡은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었다. 그 고기는 날 것이나 삶아서 먹지 않았다.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 까지 다 불에 구워 먹었다. 그 고기는 아침 까지 남겨 두지 않았다. 남은 것은 다 불에 태워버렸다.
음식을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었다. 아침이 되기까지 한 사람도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고 있다가 모세가 “일어나 애굽을 떠나자고 외쳤을 때 일제히 애굽을 떠났다.” 장엄한 출발이었다.
그 날밤 이스라엘 가정에 맏아들이 죽지 않은 것은 14일 해질 때 잡은 양의 피를 문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이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맏아들을 치려 들어갔을 때 문인방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뿌린 집은 그냥 넘어갔다. 그래서 이날을 기념하는 절기를 유월절(Passover)이라고 한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뿌리느냐 뿌리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살아서 애굽을 떠나느냐 남아서 맏아들을 장사 지내느냐 하는 문제가 문인방에 양의 피를 바르느냐 바르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애굽 사람들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알아도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일이었다. 양의 피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갈라놓았고 애굽 사람들은 장사를 지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을 떠나게 했다.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떠나 온 기사를 읽을 때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은 그들이 애굽을 떠나 온 것은 전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애굽을 떠나 올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바로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바로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로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은 영원히 노예로 남게 된다는 말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죽음이냐 노예냐 하는 기로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내었다. 이스라엘 민족 자신들의 힘으로는 애굽 땅에서 한 발자욱도 떠나 올 수가 없었다.
오늘 우리는 8.15 광복 48주년을 맞이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방을 맞이했던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날 힘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무지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날 가망이 없었다.
더욱더 한탄스러웠던 것은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을 잘된 것으로 알고 일본을 찬양하고 일본군의 압잽이 노릇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해방되었나?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방되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날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삼킨 일본이 미국도 넉넉히 이길 줄 알고 있었다.
또 미국이 일본에 이긴다 해도 한국이 일본의 굴레에서 해방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떨어진 원자탄으로 인해 일본은 손을 들었다. 그것은 애굽의 맏아들을 죽이는 열 번째 재앙과 같았다. 미국은 압박 당하고 있는 약소 민족들의 해방을 선언했다. 그래서 우리는 해방되었다.
8월 14일 밤까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리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일본 사람들도 몰랐다. 8월 15일 정오에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세상은 180도로 바뀌었다. 어제의 종이 오늘은 주인이 되었고 어제의 충신이 오늘 역적이 되었고 어제의 죄수가 오늘 애국자가 되었다.
일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집과 상점과 땅과 재산과 권리가 다 우리 한국 사람의 것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오던 날 밤에 애굽 사람들로부터 금은 패물을 받아 나온 것과 같았다.
우리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자유를 되찾았고 총 한번 쏘지 않고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8.15 광복절을 지키는 의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데 있다.
만약 우리 한국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름과 성을 잃어버린 민족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불태움을 당했을 것이다. 땅과 재산과 인권을 다 빼앗겼을 것이다.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 한민족이라는 이름은 영원히 땅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와 내 자손들이 기모노를 입고 하이 하이 하면서 일본 사람 흉내를 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저주가 아닐 수 없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자.
왜 하나님이 우리를 일본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을까? 하나님은 이유없이 은총을 베푸시지 않는다. 그 이유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든 사람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든 하나님은 이유가 있으므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우리 민족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었던가? 순교자의 피를 보고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셨다.
1938년 한국 교회가 일본으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당한 후 교회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교회는 일본의 우상 신과 정면으로 부딪쳐 싸웠다. 그로 인해 200여 교회가 문을 닫고 2,000여 성도가 감옥에 갇히고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50여명의 순교자가 피를 흘렸다.
하나님은 문을 닫은 한국 교회를 그냥 두지 않았다. 감옥에 갇힌 2,000여 성도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순교자가 흘린 피의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오던 날밤에 맏아들이 죽지 않고 애굽을 떠나올 수 있었던 것은 죄없이 죽어 희생된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다.
우리는 8.15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피흘려 죽은 순교자들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유없이 해방을 주시지 않는다. 지금도 순교의 피를 흘리면 하나님은 그 댓가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낸 역사적 의의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온 후에 잘 살았나? 잘못 살았나? 잘못 살았다.
애굽에서 나올 때 60만 장정들은 다 광야에서 쓸어져 죽었다. 죽으면서 그들은 애굽을 떠나온 것을 한없이 후회했다. 애굽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편안히 살다가 편안히 죽었을 터인데 애굽을 떠나왔기 때문에 고생만 죽도록 하고 이 막막한 사막에 묻히다니 원통하다고 생각했다.
광야에서 태어난 2세 3세들도 마찬가지였다. 광야에는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장래가 없다. 희망이 없다. 왜 우리 조상들은 우리들을 이 광야로 끌어내어 이 고생을 시키는가? 조상들을 한없이 원망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잘 살지 못했다. 왕국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겨우 삼사 대가 지난 후에는 왕도 타락하고 백성도 타락하여 외국에 포로되어 가기도 하고 수천년 동안 지구상에 흩어져 유랑하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벡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었을까? 차라리 그냥 애굽에 살았드라면 더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애굽에서 이끌어 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서 약속한 구세주를 탄생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구세주로 하여금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유대 나라에서 예수를 나게 하시고 그 예수를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널리 전파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은 그 자체가 구원의 모형이 되었다. 애굽도 좋은 나라이다. 애굽에 살면 어려운 것이 없다. 편안히 살다가 편안히 죽을 수가 있다. 그러나 애굽에 사는 것은 노예로 사는 것이요 애굽에서 성공은 우상을 위한 성공 밖에 되지 않는다.
애굽은 언젠가는 망하는 나라이다. 애굽에 살면 애굽이 망할 때 망하고 만다. 그러므로 애굽을 떠나야 한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 가는 길이 비록 험하고 고달파도 그 길을 가야 한다.
가다가 쓸어져 죽으면 내 자손이 들어가 복을 받을 줄 알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고 광야에서 쓸어져 죽으면서 애굽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우리 민족이 8.15 해방을 맞이하면서 바랐던 것이 있었다. 자주 독립과 평화와 번영을 이루는 것이었다. 해방 후에 우리는 자주 독립을 했나? 평화와 번영을 누리었나? 해방이 되자말자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해방이 되는 그 날 평화가 깨어졌다.
번영은 물질의 번영은 어느 정도 이루었는지는 모르나 정신적 번영은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 북한은 공산주의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일본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더 나았을런지도 모른다. 해방이 되면서 바라던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해방을 주셨나?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나? 광복 48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해방을 주셨나? 해방 후에 우리에게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해방 후에 우리에게 주신 것은 기독교의 부흥이다. 해방 전에는 지역적으로 예수를 믿었는데 지금은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마을이 없다. 해방 전에는 가난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는데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무식자로 취급을 받을 지경이다. 해방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예수 믿는 사람의 수가 천만 명을 능가하고 있다.
그 다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선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지구의 서반부에 복음을 전하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되어 가면 포로되어 간 그곳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사를 하려 가면 장사하려 간 그곳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움을 해서 이기면 이긴 그곳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해 전파되는 복음은 지구의 동반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인도 네팔 필립핀 태국 인도네시아 월남 중국 일본에 복음을 전할 민족은 우리 한국이 아닐까? 한국에 넘쳐나는 신학생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보낼 선교사가 아닌가? 한국 교회에 재정이 남아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교비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닐까?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복음을 지구의 서반부에 전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20세기에 들어와 한국을 일본의 굴레에서 해방시킨 것은 한국 백성으로 하여금 지구의 동반부와 남반부에 복음을 전함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일본의 굴레에서 해방된 것이 우리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 그 뜻을 이루어 드리자.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몸과 마음과 시간을 바치자. 우리의 아들딸을 선교사로 보내자. 우리의 재산을 선교비로 바치자. 우리의 휴가를 선교지에서 봉사하자.
우리가 우리를 일본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날에 우리 민족은 세상에서 일등 국민이 될 것이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별과 같이 빛날 것이다. (끝)
유월절 규례
출 12: 43-51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대대로 지켜오는 삼대 절기 중에 하나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삼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어디 가 살아도 이 세 가지 절기를 꼭 지켰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이 세 절기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백성 중에서 이름을 제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70인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자손들이 400년을 지내는 동안 저희들도 모르는 사이에 애굽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풀려 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하나님은 모세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비상한 능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굴레에서 풀려나게 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만약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굴레에서 풀려나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영원히 남의 나라의 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굴레에서 해방된 사건은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모든 일은 모세가 지시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명령을 백성들에게 전달했다. 1월 14일 밤이 되었다. 집집마다 일년 된 흠없는 수양을 잡았다.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발랐다.
그리고 가족이 함께 어린양의 고기를 먹었다. 고기는 날 것으로나 삶아서 먹지 않고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그 고기를 이튿날 아침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온 가족은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그날 밤에 애굽 땅에는 큰 곡성이 들렸다. 집집마다 장자가 다 죽었다.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앉은 여종의 장자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은 다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곡성을 들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왔다. 이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이다.
그러므로 유월절 규례는 애굽을 떠나오던 날에 하던 대로 행하게 했다. 유월절은 매년 1월 14일 저녁부터 21일 까지 이레 동안 지켰다. 그 이레 중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로 모여 일을 하지 않고 제사드리는 일만 했다.
이 이레 기간 중에는 누룩을 성회 사방에서 일체 보이지 않도록 했다. 누룩은 죄의 상징이었다. 누룩이 한 덩어리만 들어가도 반죽 전체를 술로 뜨게 하는 것 같이 죄는 한 조각만 있어도 모든 사람의 마음을 부패시키기 때문에 유월절을 지키는 첫째 준비는 죄를 버리는 것이었다. 죄가 마음속이나 눈에 띄지 않게 되었을 때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 음식은 말할 것도 없이 어린양이었다. 양을 잡을 때에는 그 뼈를 꺾지 않도록 했다. 양의 고기는 첫 유월절 때와 같이 날 것으로나 삶아 먹지 아니하고 불에 구워 먹었다. 먹되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다. 무교병은 역시 누룩을 넣지 않은 떡으로 죄를 없이한 순결을 의미한다.
쓴 나물은 고난을 의미한다. 양의 고기는 14일 저녁에 다 먹고 이튿날 아침까지 남기지 않도록 했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고기는 성물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유월절 어린양은 반드시 하나님이 택하신 곳 성전에서만 잡게 하고 백성들이 사는 성안에서는 유월절 양을 잡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되니 전국에 흩어진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킬 때에는 다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유월절 양은 성전에서 잡되 유월절 음식은 가정에서 먹었던 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은 것을 보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이 유월절 음식은 누구나 다 먹을 수 있었나? 이방인은 먹지 못하게 했다. 거류인과 외국인 품꾼도 먹지 못하게 했다.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게 했다. 동거인이나 타국인이라도 할례를 받은 자는 누구나 유월절 음식을 먹게 했다. 이것은 민족적 차별이나 인종적 차별이 아니다.
이방인은 왜 먹지 못하게 했나? 이방인은 죄에서 구원 받은 감격이 없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거류인과 외국인 품꾼도 마찬가지다. 거류인과 품꾼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에게 하나님의 어린양의 고기를 줄 수가 없다. 할례를 받은 자는 종이나 외국인이나 동거인이나 차별이 없이 누구나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서약한 사람이다.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약속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은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유월절 음식은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별 만찬이다. 이 만찬에 초대받은 사람은 영생이 보장되어 있다. 이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이다. 이 만찬에 초대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구원 얻을 사람이다.
이 만찬에 초대를 받지 않고 참례하려고 하는 사람은 쫓겨나고 만다. 가롯 유다가 그래서 쫓겨났다. 유월절 만찬에 참례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영생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하는 판가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방인이다. 할례도 받지 못했다. 우리는 유월절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다. 그러면 우리는 영생과 상관이 없는가?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와 상관없던 유월절이 우리와 상관 있는 유월절로 바뀌었다. 그것이 성찬식이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예수님은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은 나의 살이라고 하셨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바 곧 나의 피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받은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어린양의 고기와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고전5:7-8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우리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그 뼈를 꺾지 않으므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다. 그 고기를 이튿날 아침까지 남기지 못함 같이 오늘 우리는 성찬상에 올라간 떡과 잔은 내려서 깨끗한 곳에 처리한다.
그 고기를 날 것으로나 삶아서 먹지 않고 불에 구워서 먹는 것 같이 불같은 고난을 참고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본다. 그 고기를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은 것처럼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한다.
유월절 음식을 이방인과 거류인과 품꾼은 먹지 못하게 한 것 같이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참석하지 못하게 한다. 세례 받았더라도 죄와 벌 아래 있는 사람은 삼가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먹을 수가 있다. 세례 받은 여러분들은 성찬에 참례하고 주의 일에 힘쓰시기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음 유월절은 애굽을 떠난 지 일년이 되는 정월 십사일 저녁에 시내광야에서 실시했다.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오늘 우리는 하모나교회가 설립된 후에 처음으로 성찬식을 거행하려고 한다. 오늘 우리의 감격은 평생 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베푼 유월절 잔치에 참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침 사람이 죽어 시체를 만지고 시체에 가까이 했기 때문에 그들은 부정케 되어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 “시체로 인해 부정케 된 사람이나 먼 곳에 여행 중인 사람은 2월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키라. 그러나 부정케 된 일도 없고 여행 중에 있지 않으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성찬식에는 참석해야 한다. 교회에서 성찬식이 있다고 광고를 하면 성찬식에 참석하도록 계획을 세워야 한다. 부득이 해서 성찬식에 참석하지 못하면 다음 성찬식에 참석하면 된다.
그러나 성찬식에 참석할 수 있음에도 고의적으로 회피한다던가 성찬식에 참례하기는 하나 뜻도 모르고 참석하는 사람은 성찬식의 거룩한 뜻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된다. 성찬식에 떡과 잔을 뜻있게 받으면 복이 되고 성찬식의 떡과 잔을 뜻없이 받으면 저주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고전11:29-30에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고 했다. 삼가 조심함으로 성찬을 받으시기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첫 유월절을 여리고 평지에서 지켰다. 첫 유월절을 지킨 이튿날 40년 동안 먹은 만나가 그쳤고 그 날부터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실로에 모시고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에는 성전에서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믿음을 저버리게 되자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유월절은 중단이 되고 말았다. 유월절이 끊어진 때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때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왕은 왕이 되자마자 성전을 청결케 하고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 중단된 유월절을 부활시켰다.
히스기야는 왕이 되었을 때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말하자면 남북 통일된 유월절을 지켰다. 그 때 히스기야는 수송아지 1,000과 양 7,000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1,000과 양 10,00 0마리를 회중에게 주었다. 칠일 제사가 모자라 다시 칠일을 연장하여 십사일 동안 유월절을 지켰다.
요시야왕은 왕이 된지 18년에 성전을 청결케 하고 성전을 청결케 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전 국민에게 유월절을 지키게 했다. 요시야왕은 자기 소유의 양떼 중에서 어린양과 어린 염소 30,000과 수소 3,000 마리를 유월절 제물로 바쳤다. 요시야왕이 지킨 유월절은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가장 성대한 유월절을 지킨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킬 때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때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을 때가 신앙이 타락한 때였다. 오늘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며 살 때가 언제인가? 성찬식을 뜻있게 맞이할 때가 아닌가? 오늘 성도들이 믿음을 잃어버릴 때가 언제인가? 성찬식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 때가 아닌가?
성찬식의 의미를 바로 알고 성찬식의 뜻을 좇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음으로 새 생명을 얻어 생기에 넘치는 새 출발이 있기를 바란다. 주님의 살과 피가 주는 교훈으로 놀라운 충성과 헌신이 있기를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