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라든지 천지라든지 이러한 것들은 본래 없는 것인지 있는 것인
지 알 까닭이 없다. 나를 생각해도 본래 나라는 것이 없었던 것만은 사
실이다. 68년 전에는 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를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사니까 이 모든 것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
져보고 해서 있는 것을 안다고 한다. 내가 못 본 것, 못 만져 본 것에
대해서는 암만 생각을 한다고 해도 있다고 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직
내가 모르는 것을 있다고 하자는 것이 아니다.
본래 없는(本無) 이것을 있다고 하고 싶다. 본래 없는 것만이 참 있
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래 없는 것이 바로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다.
이렇게 없다·있다를 생각하면 철학이 나온다. 철학 중에도 유무(有
無)의 관(觀)을 말하려고 하면 한(限)이 없다.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다.
내가 나온 것을 도로 물릴 수 없고 외길로 보내기만 해야 하니 어찌
할 수 없이 이것을 정업(定業)이라고 한다. 누가 정했는지? 누가 마름
질한 것인지는 몰라도 마련해 놓은 것이다. 무슨 대리자가 있어서 한
것은 아니다. 이 일은 누구나 때놓을 수 없이 당해야 할 일이고 여기서
도망가지는 못한 정한 노릇이다.
있기는 생각이 있다는 것인데 있는 것부터 없어져 본무(本無, 하느
님)로 돌아가야 한다. 없어진다면 아주 실패하고 마는 것같이 생각이
드나 여기서는 본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본무(本無)로 가자는
것이다. 이같이 하는 것이 곧 덕(德)을 높이는 것이다. 덕(德)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얻고자 하는 것이니 이것을 높여주어야 한다. 덕(德)은
속알(얼나)이다. 속알 높이자는(崇德)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