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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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문 석
직장 은퇴 후 20여 년 세월을 보낸 공민식은 이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도 벅차다. 눈만 뜨면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 행선지를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다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느낌을 주는 때문이다. 이제 날이 가면 갈수록 그 무게가 점점 더할 것이란 것은 너무나 자명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절기상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이지만 다행히 민식이 사는 한반도 남녘은 포근했다. 민식이 용무를 마친 연제구 체력센터를 나선 것은 오후 3시를 약간 지난 시각이다. 한여름에 비하면 많이 짧아진 해를 생각해서 전철을 한 번만 갈아타면 목적지에 닿는 김해 연지공원으로 향했다.
김해 봉하마을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생존 시에 급조해 만든 경천철이다. 건설 당시에도 도시의 미관만 해치는 흉물이 된다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 딱 그런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민식은 오늘 그 흉물 덕분에 쉽게 목적지를 찾아가는 중이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마음이 어수선하다.
체력측정엔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서는 동작을 2분 동안에 얼마나 많이 할 수 있느냐는 항목이 들어 있다. 체육학과를 나왔을 센터 남녀 청년들은 어디로 보나 선진국 체력관리 전문가다웠다. 2분의 절반인 1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다. 젊은 여성은 1분 30초부턴 5초 단위로 소리내어 카운트했다. 그러고 보니 체력측정에서 2분은 꽤 긴 시간이다.
의자 3개를 V자 형태로 5~6미터 떼어놓고는 가운데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가 양측 2개 의자를 8자 형태로 빠르게 걸어서 돌아오는 횟수를 재면서 치매까지 테스트하는 모양이다. 뱃살이 있으면 통과하기 힘든 유연도 검사와 함께 이 항목은 노인에게 가장 힘든 종목일 것 같다. 20명 가까운 칠팔십 대 노인 중 혈압 수치가 높은 2명만 탈락했으니 민식은 테스트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평상시 걷기운동이나 자전거 타기 등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식이 사는 아파트 거실이나 서재에선 각성산과 동신어산이 또렷하게 조망된다. 중간에 대학병원과 신도시 상가 그리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섰지만 아파트 18층 높이를 밑돌아 지장을 주지는 못한다. 산 앞으론 낙동강이 바짝 붙어 흐르고 있어 자전거로 접근하긴 쉽지 않지만 민식은 강 너머 대동 백두산을 한 번씩 찾는다. ‘대동’ 지명도 ‘하동’이 맞는다는 말이 있다. 강 상류 ‘상동’에 먼저 이름을 붙인 후 하류 ‘하동’에 이름을 붙이려하자 이곳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하동'을 반대해 결국 ‘대동’으로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어쩌다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과 함께 점심을 먹고 난 후 대동 백두산을 한 번 가보겠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김해에 무슨 백두산? 하며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더욱 자주 찾게 되는 백두산이다.
민식은 한 번도 김해에 살거나 그곳에서 직장 근무를 한 적은 없지만 김해 추억은 꽤 많은 편이다. 그가 전력회사에 근무를 시작한 젊은 날부터 업무를 통해서 김해를 알았고 또 직접 현장도 찾아갔었다.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김해평야는 교과서에 나온 그대로 우리나라 몇 안 되는 곡창지대였다. 해마다 추수철이면 그야말로 황금벌판이 끝도 없이 펼쳐지곤 했다.
지금의 경전철 종점 삼계동에 육군공병학교가 주둔한 것 말곤 국도변에 작은 상가가 형성된 시내 중심지역과 대저와 인근 평강 그리고 대사리를 제외하면 김해는 촌락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민식이 몸담은 직장 사옥은 부산 서면 중심권에 있었다. 그 무렵 부산의 중심 상권이 남포 광복동 원도심에서 서면지역으로 옮겨왔고 새로 들어선 사상공단으로 옮겨가는 공장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대형 신발공장과 주물공장 등 공해산업도 다투어 공단으로 이전했다.
그렇다보니 당시 민식이 몸담고 있는 직장의 부산진영업소도 우리나라 최대 공업지역을 관장하는 영등포영업소와 서대구영업소 그리고 서울 명동과 충무로를 관장하는 남부영업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업무는 다소 고됐지만 직원들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부산진영업소는 판매전력 기준 전국에서 수위를 다투었고 예하에 가야, 구포, 김해출장소를 두고 있었다. 서면과 가까운 가야지역에도 개금까지 크고 작은 공장들이 줄지어 있었다.
구포나 김해지역에서 수금한 전기요금 지폐뭉치를 업무 담당자는 가방이나 휴대용 금고에라도 넣지 않고 옛날 책보처럼 보자기에 둘둘 말아 들고 영업소를 직접 찾아왔다. 금전으로 보이지 않도록 위장한 것 같았는데 민식은 그때 그 장면들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그때 구포에 관한 역사도 민식은 듣게 되었다. 부산이 생기기 전 동래였을 때부터 구포는 존재했다. 그 때문인지 구포시장 인근 전력회사 출장소는 도시인데 반해, 김해는 곡창지대 평야가 드넓게 펼쳐진 완전 시골로 민식은 치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김해에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김해지역에선 전기를 정상적으로 요금을 내고 사용하는 쪽과 불법으로 사용하는 쪽이 각각 반반인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송전선로를 통해 김해변전소에 들어온 전기를 소비자인 수용가에게 내보낼 때의 전력량은 계량기에 그대로 나타난다. 매월 전체 수용가 전기사용량을 검침해서 합산하면 선로손실 때문에 5% 정도는 적게 나와도 넘어가지만 내보낸 전기 절반이 없어졌으니 비상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평일에 영업소 문을 걸어 잠그고 전 직원을 풀어 김해출장소 관내 개별 수용가 도전 단속에 나섰다. 김해가 이런 사태를 맞았으니 공화당 출신으로 그곳이 고향인 K지점장은 그 심경이 오죽했을까.
그때 민식이 맡은 지역은 식만 울만 덕두 맥도 등 지금의 공항이 들어선 자리와 평강 대사리 일대였다. 그곳엔 농가마다 전기를 부정하게 사용하기 위해 몰래 만든 소위 코걸이란 도전용 기구를 집집마다 비품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밤에 탈곡기로 추수하는 마당엔 백열등을 대낮처럼 밝히면서도 전기계량기를 통하지 않고 부정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대사리 양장점엔 소비전력이 높은 대용량 전기다리미가 서너 대나 보였는데도 계량기를 통하지 않고 직결한 현장도 발견했다. - 다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