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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건곤일회도첩’에 수록된 그림 중 일부. 자료사진
(조선시대 性풍속 교화)
‘산림경제’서도 금기 정해
“성관계 가능하면 줄여라”
도덕적인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조선시대에 남녀의 사랑은 엄격한 도덕적 규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기본적인 욕구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엄격한 규제와 사회 분위기에서도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사랑이 있었고, 남녀 간의 강렬한 사랑과 육체적 욕구를 해학적인 표현으로 담아낸 이야기들은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았다.
서민문학으로 일컬어지는 사설시조나 흔히 즐기던 고전소설에서는 일반적인 남녀 간의 사랑도 있지만, 다른 사랑을 훔쳐보는 관음증,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의 동성애에 관한 내용까지, 깜짝 놀랄만한 사랑 이야기가 천지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백성들의 성 풍속을 교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대부 계층의 성교육 흔적도 자주 보인다.
정철(鄭澈)이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백성의 성교육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다.
“여자 가는 길을 사나이 피해 다니듯이, 사나이 가는 길을 계집이 비켜 돌듯이, 제 남편 제 계집 아니거든 이름 묻지 말라”(송강가사 ‘훈민가’, 1580)
정철은 효과적인 홍보를 위해 백성들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시조의 형식으로 글을 지었다. 훈민가는 사설시조의 형식으로 원래는 양반계급의 허위의식을 풍자한 서민의 글이다. 말장난이나 욕설 등이 그대로 노출돼 거리낌 없는 폭로와 사회비판을 주제로 했다. 그런 형식을 빌려 캠페인을 벌인 것은, 지금으로 보면 강원지사가 성교육 캠페인으로 랩 가사를 짓고, 힙합을 했다고 보면 거의 비슷할 것이다. 눈높이에 맞춘 방식으로 성교육을 하려 했지만, 유교적 윤리관에 입각한 사대부의 시각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의 성 풍속을 교화하고자 했던 사대부의 눈물겨운 노력은 오히려 당시의 자유로운 풍속을 반증한다.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에도 성생활과 관련된 지침이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도가(道家)의 서적을 인용해, 성생활을 지향하는 바를 적었다. 도가에서는 성행위를 가능한 한 줄인다는 것이 기본 철학이다. 나이에 따라 횟수를 제한하거나, 성관계를 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미리 금기로 설정하기도 했다.
“성관계에서 금해야 할 11가지 때가 있다.
📌추위와 더위가 심할 때,
📌 배불리 먹었을 때,
📌술에 취했을 때,
📌기쁨과 노여움이 가라앉지 않을 때,
📌병이 아직 낫지 않았을 때,
📌먼 길을 걸어 피곤할 때,
📌대소변을 막 보았을 때,
📌막 목욕을 마쳤을 때,
📌여자가 생리를 할 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억지로 할 때….”
이런 경우는 모두 사람을 허하고 야위게 만들어 온갖 병이 나게 하니 마땅히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기에 더해, 전 국민의 의학서 ‘동의보감’에도 성생활에 대한 지침이 등장한다.
성생활에서는 ‘정(精)’을 핵심으로 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서 ‘정’을 보존하는 것이 건강과 장수를 위한 비결이라는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정’은 남성의 정액을 의미한다.
정액은 16세까지 모이면 1되 6홉이고, 안 쓰고 가득 찼을 때, 3되까지 가질 수 있는 한정적인 것이라며, 정을 낭비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은 16세부터 소모되기 시작해 결국 신체의 소모를 불러오고, 신체의 소모는 병을 다시 불러와 마침내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경고했다.
자, 그래서 성교육은 잘 이루어지고, 백성의 교화는 활발했을까? 이름 묻지 말라던 강원도관찰사의 캠페인은 성공했을까? ‘역사 속, 사랑과 운명’에 담기는 수많은 기록이 그 답을 말하고 있다.
김은양 전문위원ㆍ문화일보
감사합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