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32
5월21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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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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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msPGACjDhk
(박주민 바오로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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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환영과 호의가 아니라 피와 고통 속에서 성장해온 우리 교회>
올해 다시 한번 영광스런 순교자들의 숨결이 진하게 느껴지는 배론 성지에 와있습니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의 주교요지도 읽고 묵상하며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우리 가톨릭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박수갈채와 환호가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세상의 박해와 순교, 배척과 미움 속에서 꾸준히 성장을 거듭해왔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초대 한국 교회 공동체 역시 순교자들의 피를 자양분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환영과 호의가 아니라 피와 고통 속에서 우리 교회가 성장해온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교회의 창립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물든 세상과는 태생적으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신 분입니다.
세속의 권력자들이 언제나 취했던 노선은 한결같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의 번영, 현세적 안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노선은 방향이 정 반대였습니다. 불완전한 이 세상의 몰락이었습니다. 그 대신 외치신 것이 천상에서의 완벽한 복락이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세상 권력자들의 비리와 악행을 만천하에 고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취하신 노선이 이러했으므로 세상으로부터의 미움과 박해는 불을 보듯이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자기 한목숨 부지하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와 음해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유한함을 일깨우시며 하느님 나라의 영원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때로 결코 만만치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처신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다 보면 자주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래전 이러한 현상을 미리 예견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요한복음 15장 18~20절)
예수님을 스승이요 친구, 아버지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또 한 명의 순교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잘살기 위해서는 순교 영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순교자들의 후예들입니다. 우리들의 피 속에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토록 큰 은총을 입은 우리 순교자들의 후예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더이상 신유박해나 기해박해가 없는 오늘날의 이 시대, 우리 선조들이 지니셨던 그 놀라운 순교 정신, 순교 영성을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서 실천할까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너무나 간단하더라구요.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순교자의 마음으로 정말 용서하기 힘든 그 인간, 정말 꼴 보기 싫은 그 사람을 다시 한번 용서하고 포용하는 일입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이다.’ 라고 외치며 최선을 다해서 사는 일입니다. 앞으로의 1년을 내 생애 가장 멋진 1년으로 장식하겠다고 다짐하며 불꽃처럼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바로 순교영성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이란 것, 멋진 티브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호화찬란하다거나 특별하지가 않습니다. 때로 지루하고 때로 따분하고 때로 구질구질하고, 때로 엄청나게 구립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은 우리들의 삶입니다.
순교 영성을 산다는 것은 이렇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도 활짝 웃으면서, 기쁜 얼굴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인내가 신앙 활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로마서 8장 18절에서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매일의 고통을 기쁘게 견뎌내는 것 그 자체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참여하는 길이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환난에서 모자라는 부분”(콜로 1장 24절)을 채우는 일이며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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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한 사람만이 십자가를 희망으로 만든다
한 부모가 딸을 낳았는데 양 팔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아무 상관 안 하고 같은 나이 또래가 하는 모든 것을 시켰습니다. “양팔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게 많단다. 매일 네가 새롭게 할 수 있는 게 뭔지 찾아보렴.”
그녀는 손대신 발로 콘택트렌즈를 끼고 휴대전화 문자도 보냅니다. 피아노 연주도 문제없고 태권도는 검은 띠 유단자입니다. 마침내 정식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까지 땄을 때, 사람들의 입은 떡 벌어졌습니다. 팔 없이 비행기를 조종하는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양팔 없이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뿐이죠.”
제시카 칵스(Jessica Cox)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양 팔이 없으면서도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합니다. 그래서 그녀를 보며 많은 이들이 희망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고난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하고 그 고난을 또한 반드시 이긴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아마 그녀의 부모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딸의 장애도 희망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조: ‘왓칭: 상보성원리로 인생이 갈린다’, 김상운, 정신세계사]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난과 박해와 미움을 각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의 말씀이 아닙니다. 제자들보다 먼저 스승이 그런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예수님을 먼저 미워하고 박해하였다는 것을 아는 것은 박해 받는 사람들에겐 희망입니다. 예수님이 결국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무한히 긍정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당신이 우리가 세상에서 받을 모든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 고난을 모두 희망으로 바꾸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겪는 가난과 멸시와 배고픔은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희망으로 바꾸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링컨은 40대 후반까지 무려 여덟 번이나 선거에 낙선했고, 사업이나 해볼까 시도했으나 두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에디슨은 축전기를 발명하기 위해 무려 5만 번의 실패를 했습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고등학교 농구부에서 거절당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종일 울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는 선수생활 중 9,000번이나 넘는 슛에 실패했고, 300차례의 경기에서 졌습니다. 제 손에 동점골을 넣으라는 기회가 주어진 게 26차례나 됐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평생 수없이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슛을 잘 날릴 수 있게 됐습니다.”
톨스토이가 죽은 뒤 그의 방을 정리하던 사람들이 방 안에 빼곡하게 쌓여있는 실패작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셰익스피어도 평생 154편의 시를 썼는데 성공한 몇 편 빼고는 형편없는 졸작들이었습니다. 음악의 신동이라 불리는 모차르트도 평생 600편이나 되는 곡들을 발표했지만 99%가 졸작들이었고 1%만 알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실패 안에서 희망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99%의 실패가 1%의 성공을 낳는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그리고 권력자들과 사제들에게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희망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수많은 실패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아 결국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실패를 품어야 실패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고 성공을 꿈꿉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 넘어지고 깨지고 실패하고 박해받고 미움받고 고통받는 것을 두려워하면 누구에게도 희망을 줄 수 없고 자신도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더 큰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큰 고통과 멸시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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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18-21 :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18절)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들로 만드시려고 고난을 겪으셨다. 그러나 우리를 계속 하느님의 아들들로 계속 남아있게 해 줄 고난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의 미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하지만, 주님께서 먼저 세상의 미움을 견디셨다. 우리가 이 세상의 비난을 받고 귀양을 가고 고문을 받지만, 주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일을 겪으셨다. 저주받은 세상은 박해를 하고 하느님과 화해한 세상, 즉 교회는 박해를 당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9절) 주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현세에 살지만 그것은 우리를 붙들어 놓을 수 없다. 세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같은 행동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똑같이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은 진리의 원수들과 싸워야 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20ㄱ절) 이 말씀을 제자들이 온갖 종류의 박해를 당할 것임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도 사악한 자들이 방자한 말로 그분을 공격했고, 온갖 말로 당신을 모욕하였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분이 받으신 모욕과 굴욕적인 상황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그분께 싸움을 걸더니,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시니까 제자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미 제자들에 앞서 당신이 먼저 박해를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20ㄴ절)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그분이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이 각자 자신의 행실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박해를 받으셨다.우리도 그분과 같은 길을 걸으려 한다면 박해를 당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얻는 길이다. 이것 모두가 역시 우리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행하고 열매를 맺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1절) 여기서 ‘그 모든 일’은 세상이 당신의 이름 때문에 우리를 미원하고 박해하고 우리의 말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주님 대신 우리를 미워할 것이며, 주님 대신 우리를 박해할 것이고, 세상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 속한 자들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완전히 다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으로 주님을 닮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은총을 청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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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외국 여행을 다녀오면 꼭 들려야하는 곳이 있습니다. ‘입국심사’입니다. 팬데믹이 끝나가면서 입국심사의 대기 줄도 길어졌습니다. 대기 순서는 두 갈래도 나뉘었습니다. 한 줄은 미국 시민이고, 다른 한 줄은 미국 시민이 아닌 줄이었습니다. 미국 시민이 먼저 입국심사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환승하는데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입국심사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에는 휠체어를 타시는 분들이 입국심사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기 줄은 길어지는데 입국심사를 하는 직원은 2명이라서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1시간 정도 기다리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휠체어를 타신 분들이나, 환승에 시간이 쫓기는 분들이 먼저 입국심사를 받는 것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시민이 타국에서 온 사람들보다 먼저 입국심사를 받는 것은 고려했으면 싶었습니다. 미국에 관광 온 사람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기보다는 적어도 미국시민과 비슷하게 입국심사를 받게 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돌아보면 사제이기 때문에 특별한 대우를 받은 적이 많았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타이어의 압력에 문제가 있다는 표시가 보였습니다. 교우분이 하는 정비소엘 갔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저의 차를 우선적으로 받아 주었습니다. 타이어에 큰 못이 박혀있었습니다. 못을 뽑고, 펑크 난 곳을 때웠습니다. 공기를 넣으니 타이어의 압력은 정상이 되었습니다. 정비소 사장님은 수리비를 받지 않고 오히려 커피 한 잔을 주셨습니다. 제가 사제이기에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식사하기 위해서 줄을 설 때도 사제라는 이유로 먼저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사제라는 이유로 독방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입국심사에서 조금 기다리는 것을 힘들어 했지만, 사실 저는 참 많은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신 거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들판을 헤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 사도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레지오 단원들이 피정 갔을 때, 신부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의 첫째가는 직무는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출석이라고 답을 하셨고, 어떤 분은 선교라고 답을 하셨고, 어떤 분은 사랑이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기도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모든 답에 점수를 주시면서 가장 정확한 대답은 ‘자기 성화’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성화 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출석하고, 자신이 성화 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선교하며, 자신이 성화 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자신은 성화 되지 않았으면서 남을 성화시키려고 하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분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곧 지치게 됩니다. 힘이 빠지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신앙이 식어버립니다. 즐거웠던 일들도 시들해지고, 성당에 나오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재미가 없어집니다. 신앙생활에 깊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화 된 사람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도할 수 있으며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성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원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저 고철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만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냉장고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성화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연결될 때, 주님 곁에 머무를 때 성화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화 된 신앙인은 박해를 받을 수 있고, 고독할 수 있으며, 십자가를 지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를 살리는 길이고, 그 길이 영광과 부활의 길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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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5,19)
<신앙인의 소속감과 정체감>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살아갈 힘을 주고 삶의 방향을 바르게 해주는 것 가운데 소속감과 정체감이 있다. 이 둘은 실은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다. 내가 어디에 속에 있는가 하는 소속감이 분명할 때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감도 더 명확해진다. 소속감과 정체감이 확고해질수록 자존감이 커가고 영성생활도 성숙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8-27절의 내용은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겪게 될 세상의 ‘증오’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부분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그분의 모범대로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체험할 수 있다고 강조한 앞 대목(15,1-17)과 두드러지게 대조를 이룬다.
곧 사랑의 공동체가 증오의 세상과 직면한 셈이다. 이런 대조는 사실상 두 대목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면서, 사랑과 증오가 뒤얽힌 인간 삶의 실존 상태를 명확히 드러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거든 여러분에 앞서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두시오.”(15,18)
제자들은 예수님께 속해 있으므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도록 제자들을 격려하신다.(27절 참조) 예수님께 속한 제자들은 세상의 증오와 미움을 받고 그분께서 걸으셨던 길을 가야만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를 배척하고 하느님을 등진 세상은 제자들마저 적대시하고 증오한다(18-19절). 제자들을 증오하고 박해하는 이들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로서(22-25절 참조) 그들은 예수님을 파견하신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15,21ㄴ)
그러나 이 세상도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구원의 가능성은 있다.(14,31 참조)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면서도 구원의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 속한 제자들은 모든 증오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에 예수님을 증언해야 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15,20)는 말씀은 당신의 모범을 따르고 당신의 권위에 근거해서 행동해야 함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나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인가, 아니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예수님을 배척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인가?
세례를 받고 수도자로서 사제로서 축성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이 보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실제로 사랑과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살아냄으로써 그분께 속해 있음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신자인가 보다 신앙인인지가 더 중요하며, 박해나 고통 중에도 내가 어디에 소속된 누구인지를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명심할 점은 소속감과 정체감을 명확히 하는 것은 세상을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상황이 어떻든 나는 나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느님께 속한 사람임을 분명히 의식해야겠다.
내가 이런 소속감을 분명히 가짐으로써 신앙인으로서의 자아정체감이 커갈 것이다. 정체감이 분명해질 때 나는 하느님을 등지고 예수님을 배척함으로써 우리를 박해하고 증오하는 세상,심판의 대상이 되어 있는 세상까지도 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인관계로 눈길을 돌리면 내가 사랑의 사람, 사랑 때문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소속감과 정체감이 뚜렷해질수록 자신을 괴롭히고 분노케 하고 증오하는 이들까지도 품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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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님]
소신을 갖고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비판과 반대에 맞서야 하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것이 종교적 신념이라면 더 큰 저항에 직면합니다. 종교는 절대적 가치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제자들과 바오로 사도도, 당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의 신념과 다른 신앙을 선포하면서 적지 않은 이들의 반대와 비방에 맞서야 했습니다.
때로 자신의 뜻과 다른 일을 겪을 때 바오로 사도는 좌절하지 않고, 그것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자신이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 없이는 생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반대받는 표적이 될 것임을 예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대부분 미움과 비난을 받으면, 그것이 나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라고 생각해서 분노하거나 좌절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는 미움이 이미 박해와 모욕을 달게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당신의 이름 때문이라고 확신하면 담대히 견디어 낼 수 있다고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한 일만 생겨야 하는데, 왜 여전히 고통이 많은지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믿음은 고통과 악이 없는 세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어 내는 능력을, 희망하는 능력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협력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는 능력을 줍니다.
그래서 때로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세상살이에 걸림돌이 되더라도 그 길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임을 믿는다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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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늘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과 이 세상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만큼 우리에게는 자주 갈등과 시련이 주어지지 않습니까? 주님의 가치관대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을 외면하고 홀로 살아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 세상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에 소중하며, 따라서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을 예수님의 가치관대로 변화시켜 나가야만 하지요. 물론 이런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가꾸어 나가는 노력보다도 세상을 타락시켜 나가는 악의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 생명을 경시하거나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 지나친 경쟁으로 말미암은 인간성 파괴 현상 등은 파괴와 죽음의 문화를 대표하고 있지요.
그럴수록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닌 예수님의 방식대로 사느라고 겪어야만 하는 온갖 종류의 불이익, 몰이해, 억압 등을 당하면 당할수록, 오히려 자신이 살아 있는 신앙인임을 느껴야 합니다.
이런 복음화의 여정을 통하여 우리의 고난은 진정한 기쁨으로 바뀌며, 참된 평화가 우리 안에 충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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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과 미움 사이에 내가 있습니다>
요한 15,18-2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미움 사이에 내가 있습니다>
내가 있기에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누군가 나를 미워합니다
모두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나일 수 없습니다
모두가
나를 미워한다면
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누군가 나를 미워하기에
나는 비로소 나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누구냐에 따라
나는 누구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누군가가
누구냐에 따라
나는 누구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이고 싶은가
나에게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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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증거되어야 하고, 기회는 많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사랑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상대를 속박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붙잡고 집착하며 기대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후회합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데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모욕과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고 선언하시며 당신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시고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사실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모두를 바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미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마지막 남은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두를 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할 기회는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지금 놓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또 다른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아무런 구속이나 강요가 없이 자유를 주는 사랑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날로 기뻐하고 자유롭도다. 사랑은 짐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기에….”(성녀 젤뚜르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데 있습니다. ”
사랑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잘 꾸며놓은 연극, 그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번 해 본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피에르신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나를 뽑아 세우셨으니 내가 예수님께 맞춰야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뽑으신 분에게 맞게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자유를 주는 사랑, 고통을 감당하는 사랑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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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아홉 달 만에 태어난 아기가 의사의 부주의로 뇌성 마비가 되었습니다. 의사가 아기 머리를 잘못 건드려 뇌가 손상되었고, 그 때문에 뇌성 마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로 자신의 인생이 시작부터 망가져 버린 것입니다. 아기는 열 살이 넘어서야 겨우 숟가락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난한 집안에, 아버지는 결핵을 앓고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아이는 하느님을, 부모님을 죽도록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우연히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얻은 새로운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그의 글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많은 이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라는 시로 유명한 송명희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그 이름’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이 시에서, ‘예수’라는 이름에 엄청난 비밀과 사랑이 숨어 있으며,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진 그 이름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이자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 이름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수많은 이들이 그 이름 때문에 고통당하고 모진 고문과 박해 속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숨져 간이들 대부분이 자신의 죽음을 영광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름’이 이들을 세상에 속하지만 세상을 초월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이 노래하였듯, ‘예수’라는 그 이름이 우리의 삶에도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자 기쁨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그 이름의 의미와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세상이 아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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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15,18)
<나 보다 먼저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나 보다 먼저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나 보다 먼저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나 보다 먼저 온갖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나 보다 먼저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나 보다 먼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나 보다 먼저 이 모든 것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이런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구세주로 믿고 따라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때문에 많은 부족함을 지닌 채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나도 예수님처럼,
너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너로부터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너로부터 온갖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너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너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도 예수님처럼,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부활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신앙인의 모습'이요, '참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내가 걸어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고, '부활의 길'입니다.
이천 여 년 전 예수님께서 사셨던 세상이나,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때문에 나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 십자가는 '내가 만들어 놓은 십자가', '나의 행실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 길!'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
우리의 엄마이신 성모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
나를 위해서 그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신 예수님과 나에게 큰 모범을 보여주신 나의 전구자이신 성모님 손 꼭 잡고, 우리 모두 함께 그 길을 다시 잘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는 단식하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다."(요엘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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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독립적인 사람일까요? 아니면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독립적인 사람일까요? 당연히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을 독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남에게 잘 의지할수록 더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든 날 도와줄 사람이 있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믿음이 사람을 더 독립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으로 지금을 더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게 합니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을 약한 사람 취급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나’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상당히 독립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이 세상입니다. 나를 믿는다고 하지만 나의 한계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믿으며 의지하는 것이 우리를 약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음에 큰 힘을 얻어 힘차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의지할수록 더 독립적으로 지금을 잘 살게 해줍니다. 이렇게 주님께 대한 믿음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믿음을 쓸모없는 것이라 말합니다. 주님의 계명인 사랑은 힘없는 사람의 외침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을 굳게 믿는 사람을 자신들과 다르다면서 배척합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를 이룬 것은 성부와 성자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었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고 아버지를 앎으로써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느님 아버지를 모르고 그의 아들 예수님도 모르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하고 아들도 미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미움은 사랑으로 하나가 된 제자들도 미워하게 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을 자기들처럼 똑같이 추구했다면, 제자들을 자기네들과 한패로 생각했을 것이지만, 제자들은 철저하게 주님의 뜻을 따랐기에 세상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주님의 뜻인 사랑의 실천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합니다. 세상과 구별되면서 주님의 진정한 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반대를 받겠지만,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고자 하면 그런 반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주님의 편이 되어서 진정한 행복을 행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독립적인 모습으로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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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제자답게 사는 삶>
- 앞문은 세상에, 뒷문은 사막에 열려 있는 삶 -
지난 양일간 사랑에 대한 주제와는 아주 상이한 오늘의 복음입니다.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겪게 될 세상의 ‘증오’가 주류입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증오의 세상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12번 나오는 단어 “미워하다”가 이 짧은 단락에 7번(15,18-25) 나옵니다.
공동체 외부에서 오는 박해는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경험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박해는 초대교회뿐 아니라 조선시대 후기 천주교 박해시기에도 우리에게 흔히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순교자들도 많았고 나라 곳곳에 순교성지도 많습니다. 사실 오늘날 처럼 예수님 믿기가 좋았던 세상도, 또 박해없던 세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준비가 힘들었습니다. 평신도 해방신학자 김근수 선생의 해설을 일부 인용합니다.
“나는 요한이 세상보다 교회를 나무랄 것같다. 지금 한국에서 예수님께 대한 세상의 ‘불신’보다 예수님께 대한 교회의 ‘배신’이 큰 문제다. 요한 저자는 세상의 불신을 경험했지만 교회의 배신은 알지 못했다. 돈없으면 교회나 성당에 못 다닌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나온다. 요한 공동체가 세상을 세상에서 ‘미움’을 받았다면, 지금 교회는 세상에게 ‘실망’을 더 많이 주고 있다. 교회밖에서 비롯된 ‘박해’가 요한의 주제중 하나라면 교회 안에서 생기는 ‘부패’가 우리 시대 그리스도교의 주제중 하나다.”
참으로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답게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살아가야 할 절호의 시점같습니다. 문제는 외부의 박해가 아니라 내부의 부패와 타락, 분열이 문제입니다. 사실 교회는 박해시대에는 깨어 있었고 신앙도 순수했습니다.
박해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내부의 부패와 분열입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공동체 내부의 분열과 부패가 문제입니다.
박해하지 않아도 물질적으로 부요한 삶이라면 저절로 부패하여 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개혁은 언제나 세속화가 극심할 때 사막의 ‘고독’을 택했고, 물질적 부유함으로 타락이 시작될 때는 ‘가난’을 택해 순수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자발적 고독과 가난의 선택입니다.
요즘은 빈부의 격차와 더불어 교회공동체는 물론 나라공동체에 심각한 문제는 좌파와 우파의 이념을 통한 극단화와 내적분열입니다. 참으로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리스도파가 어떻게 이를 통합하고 치유할 것인가가 우리 교회의 중요한 책무가 되었습니다. 다음 말씀에서 우리의 신원이 잘 드러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주님이 세상에서 선택한 우리의 신원이요 다행히도 우리는 세상의 미움이나 박해는 받지 않습니다. 문제는 공동체의 세속화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세상을 성화해야할 교회공동체가 세상에 속화되는 것이 문제요, 그리하여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으로 거룩해져야 할 우리 교회공동체입니다.
세상을 성화해야 할 공동체가 세상에 속화된다면 이보다 큰 재앙도 불행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숨을 걸고 매일, 평생, 끊임없이 우리 삶의 중심인 거룩한 주님의 성전에서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 수행에 올인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세상에 닫힌 섬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빛과 소금과 같은 공동체가 될 때 부패하지도 타락하지도 변질되지도 분열되지도 않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선교입니다. 선교활동은 공동체의 숨통과 같습니다. 바로 이런 선교의 모범이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그 일행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이처럼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물론 선교활동에 전제되는 바, 교회 공동체의 절대적인 후원이요, 바오로와 그 일행이 선교활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그대로 선교활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내적 타락과 분열, 나태함에 대한 최고의 처방도 이런 주님 향한 열정과 순수임을 깨닫습니다.
관상이든 선교활동이든 결정적 역할을 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바오로의 눈부신 2차 선교여행중에도 성령의 인도가 결정적입니다.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 밤 환시 체험에서” 대목에서 보다시피 바오로 일행의 선교사들은 늘 성령께 깨어 열려있음을 봅니다.
성령의 인도에 활짝 깨어 열려 있을 때 공동체나 개인은 결코 부패하거나 타락하거나 분열되지 않습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습니다. 성령의 효소가 활발히 작용할 때 발효인생에 발효공동체요 성령에 닫혀 있어 성령의 효소가 없으면 곧장 부패인생에 부패공동체로의 전락일 것입니다.
새삼 우리 수도자들의 정주생활을 생각하게 됩니다. 참된 정주는 안주가 아닙니다. 샘솟는 우물같은 정주의 삶이라면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 같은 안주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정주의 삶입니다.
예전에 써놨던 산과 강이라는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밖으로는 정주定住의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유동流動의 강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끊임없이 강처럼 흐르는 내적여정의 회개와 쇄신의 정주생활일 때 부패와 변질, 타락과 분열도 예방될 수 있습니다. 제자의 관상과 선교사의 활동은 믿는 이들 모두의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그리하여 정주의 삶을 사는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라면, 앞문은 선교의 세상에, 뒷문은 관상의 사막에 열려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요약한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시중 한 연을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정주는 바로 환대와 직결됩니다. 환대의 집인 수도원이자, 환대의 사람인 수도자들이요, 이런 환대를 통한 치유와 평화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정주의 환대를 통한 선교를 ‘존재론적 복음 선포’라 일컫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환대의 삶을, 또 제자의 관상과 선교사의 활동이 조화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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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1c-m_Iv86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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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5, 21)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하느님이시다.
보내신 분을
아는 것이
신앙의 참된
중심이다.
모든 출발은
중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참된 중심은
이와같이 우리
삶의 자리인
뜨거운
마음에서
마음으로
깊게 전달된다.
중심을
잃어버리면
사랑도
사라진다.
미움과
사랑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은
사랑의 진리를
실천한다.
가장 적절한
사랑은
하느님께서
물려주신
우리들의
정체성이며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가장 좋은
실천이다.
보내신
하느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보내신 분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과 박해의
현실적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참된 일치를
위해 역사의 현장
우리 삶의
현장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이시다.
사람 속으로
사람 속으로
들어오시고
세상 속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오시어
참사랑을
회복하신다.
미움으로
닫혀진 관계를
다시 사랑으로
여시는 분이시다.
이와같이
열리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보내신 분을
알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들의
관계이다.
관계의
그 중심에
뜨거운 열림
사랑이 있다.
진짜 사랑이
있는 곳에
진짜 신앙인이
있다.
중심이 올바로
섰을 때 올바른
사랑도 따라온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참된 삶의
중심을
다시 잡아야 할
열림의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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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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