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베르그송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밖으로 보이는 건물, 산과 돌, 그리고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찻잔과 찻잔 속에 담긴 커피 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한다. 만약 누군가가 세상에 모든 것이 이미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사람은 극단적인 관념론자처럼 보일 것이다. 이 극단적인 명제는 마치 근대 영국의 관념론 철학자 버클리 주교(George Berkeley, 1685~1753)의 유명한 명제, ‘존재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버클리의 주장은 사과가 빨간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지각하기 때문이라는 극단적인 관념론의 견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베르그송은 자신이 결코 관념론자가 아니며 유물론자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물론 베르그송의 철학은 소박유물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소박유물론이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세상의 실제 모습이며 우리는 이 진실한 세계의 모습을 감각기관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믿는 태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소박유물론을 주장한 사상가는 거의 없다. 베르그송도 예외는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베르그송이 추구하는 것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이러한 목표의식을 반복적으로 표출하고 있기도 하다.
이미지라고 하면 우리는 어떤 사물의 가상적인 모습, 혹은 그것과 관련하여 마음속에 떠오르는 주관적인 인상을 염두에 두기 마련이다. 가령 자동차의 이미지는 자동차 자체가 아닌 자동차를 그려놓은 그림이나 혹은 자동차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상황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이 여기서 말하는 이미지는 다르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이미지는 ‘감각적 재료(sense data)’에 가깝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자동차는 분명 하나의 사물(chose) 혹은 물질(matière)이라고 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선 유선형의 날렵한 모습을 띠고 있다. 하나의 형태라는 이미지를 지닌다. 또 표면이 근사한 쥐색이라면 쥐색이라는 이미지를 지닌다. 그리고 몸체는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철판 또한 목재나 플라스틱과 감각적 데이터, 즉 이미지로 구별할 수 있다.
심지어 데카르트가 물체의 본질이라고 말했던 ‘연장성(extension)’, 즉 어떤 공간을 점하고 있다는 것 역시 우리가 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이다. 유령과 실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공간성일 텐데 이것 역시 감각적 재료에 의해서 구별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실제 사람과 유령은 다른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어떤 사물을 자동차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자동차는 자동차에 부합하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송이 어떻게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을 슬며시 넘어서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자동차라는 물질은 그것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을 종합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물질이 이미지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유물론적 견해에 잘 부합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미지라는 것은 인간의 감각에 의해서 파악되는 주관적인 측면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가령 소나 강아지는 인간이 보는 것과 같은 자동차의 근사한 색을 똑같이 지각하지 못한다. 쥐색이나 파란색, 딱딱함, 유선형의 날렵한 곡선과 같은 이미지는 분명 인간이 지닌 감각기관의 개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자동차라는 물질을 이루는 이미지를 인간의 감각과 무관하게 그것에 앞서서 존재하는 자립적인 물질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미지의 총합으로서의 물질이라는 베르그송의 견해는 유물론적이면서도 관념론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견해가 유물론과 관념론의 전통적인 대립을 넘어서 그것을 해결했다고 믿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상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