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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배 할아버지, 히말라야를 가다-소원 편지
감히, 존엄하신 여왕님께 편지 한 통 띄웁니다.
저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서북쪽에 자리 잡은, 인구 5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인 ‘점촌’이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래서 거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여왕님께 편지 한 통 띄우는 그 이유는, 저의 이 편지를 읽어 가시는 동안에 저절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우시고, 정말 활달하시고, 정말 인간적이신, 그래서 여왕님의 나라인 덴마크에서뿐만이 아니라, 온 세계의 국민들의 마음에 편하게 담기시고, 그리고 온통 존경을 받으시는 여왕님에게, 편지 한 통을 쓰고 있는 2008년 9월 6일 토요일 새벽 5시는, 금년으로 60의 나이에 이른 제 인생에 있어, 가장 귀한 순간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혹 어떤 이는, 지엄하신 여왕님께 불손하다면서 저를 나무랄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여왕님을 향하여 ‘무섭다.’ 이렇게 거리감을 두면서 다가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왕님께서는, 스스로가 주위의 그런 거리감을 용서하시지 않으실 것 같은 분으로, 제가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느낀 그 이유도, 저의 이 편지를 읽어 가시는 동안에 저절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저는, 최근 인터넷에 올려 진, 프랑스 남서부에서 휴가를 보내시는 여왕님의 근황을 담은 몇 장의 사진들을 보고, 그 사진에 찍힌 여왕님의 너무나 서민적인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저, 우리 집 그리고 이웃 집 누이가 그렇듯, 편하게 다가온 여왕님의 그 모습은, 동쪽으로 먼 나라인 대한민국 땅의 한 남자인 저를 매료시켰고, 그렇게 매료된 사람은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직접 바구니를 팔짱으로 끼시고 재래시장을 돌아다니시기도 하고, 일반 시민들 틈에 끼어 줄도 서주시기도 하는 모습이 그랬습니다.
과일과 치즈 등 살 것들을 직접 챙겨 고르는 그 모습에는, ‘근검절약’이라는 그 진지함이 담겼습니다.
또한 소매가 있는 빨간 티셔츠에, 무릎을 덮는 연한 하늘빛의 스커트를 입으신, 그 나들이 차림새는, 화려함 속에 여왕님의 몸과 마음에 밴 절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활짝 웃으시는 모습으로 남편이신 헨릭 공과 와인 잔을 부딪치시거나, 녹음이 짙은 농장의 간이 의자에서 옆자리 남편에게 다가가듯 앉으신 모습이나, 여왕님 어깨에 슬쩍 걸친 남편의 그 손을 살짝 잡아주시는, 여왕님의 그 모습 모습들은, 하나하나가 ‘모든 평온함’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남편인 제게 그러하듯, 조금은 내민듯한 남편의 그 배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시는 모습은, 또 다른 여왕님의 여유로움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눈에 비쳐 들어온 여왕님의 그 모든 모습들은, ‘평범함 속의 아름다움’이랄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운치로 제 마음에 담겼습니다.
여왕님께서는 지난해인 2007년 10월 6일에, 우리 대한민국 정부의 국빈으로서의 초대를 받아, 사랑하는 남편과 왕세자와 왕세손과 함께, 우리나라를 방문해주셨습니다.
여왕님께서는 3일 동안 우리 한국 땅에 머무시면서, 수원에 있는 삼성전자와, 울산에 있는 현대중공업과, 경기 이천에 있는 도자기미술관 등, 우리 한국의 산업뿐만이 아니라, 문화예술에까지도 깊은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여왕님께서 가을 단풍이 익어가는 창덕궁을 찾아 경내를 거니실 때, 때마침 가을 소풍을 나온 어린 학생들이, 붉은 색 모자와 스카프를 곁들여 곱게 차려 입으신 너무나 고우신 여왕님의 모습에 반한 나머지, 연신 핸드폰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신문 기사도 봤습니다.
그 신문기사는, 여왕님께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은 역동적’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칭찬하기도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왕님의 우리 한국 방문 마지막 날인 2007년 10월 8일 청와대 만찬에서, 우리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덴마크 국민의 정신적 구심으로서, 높은 신뢰와 존경을 받으시는 분이신 마그레테 여왕 폐하를 중심으로, 덴마크는 세계 일류국가의 모범을 실현해가고 있습니다.’라고 치하를 하신 뒤, ‘우리 두 나라의 인연은 각별합니다. 반세기 전의 한국전 당시, 덴마크는 병원선과 의료진을 파견하고, 전후 복구과정에서도 큰 도움을 준 고마운 친구의 나라입니다.’라고 덴마크와 우리나라의 관계를 간단히 설명하셨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여왕님의 최근의 모습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왕님께 이 편지를 드리게 된 그 진정한 이유는, 여왕님의 지난 날 공주님 시절의 헌신적 발자취 때문입니다.
그것도, 남의 나라가 아닌 바로 우리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우리 고향 땅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왕님께서 공주님 시절에 우리 고향 땅을 위해 헌신하신 그 뜻 깊은 사연은, 얼마 전, 저와 제 아내가 북유럽 여행 도중에, 여왕님의 나라인 덴마크를 찾아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덴마크에서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오래 전에 덴마크 남자를 사랑해서, 그 남자를 남편으로 맞은 우리 한국 여인인 이하나씨였습니다.
이하나씨가, 우리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바람직한 국가모델로 이스라엘과 함께, 여왕님의 덴마크를 지목해서, 우리 국민들을 앞서 이끌어갔던 역사적 사실을 잠깐 소개하고, 달가스, 그룬트비, 안데르센 등, 덴마크를 이끈 위대한 지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또 잠깐 요약 설명한 뒤, 그 다음부터는 지금 이 시대의 여왕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소개하는데 온통 집중했습니다.
그렇게 소개하는 중에, 잠깐 스쳐지나가듯 한 말 중에서, ‘문경시멘트’라는 제게 아주 익숙한 말 하나를, 전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왕님께서 공주의 신분으로서, 20대 중반쯤의 대학생이었을 때,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간, 폐허의 우리 대한민국 실상을 돌아보시고, 그 참상이 안타까워 우리 한국을 도와주셨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고향 땅인 문경 신기 마을에 시멘트 공장을 세워준 것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얼핏 제 기억에, 제가 열 살쯤의 나이에 초등학교 4학년쯤 다닐 때, 새로운 기계라고 해서 ‘신기’라고 이름이 지어진 마을에 시멘트 공장이 들어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공장을 바로 여왕님께서 공주시절에 지어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제 귀가 번쩍 띄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이하나씨로부터 여왕님의 그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저와 제 아내가 북유럽 여행 엿새째가 되던 2008년 7월 25일 낮 12시쯤의, 여왕님이 계시는 왕궁 그 바로 앞이었습니다.
♤친구와 땡볕에 비행기 구경하러 신기까지 먼 길을 걸어서 갔다. 저만치서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처갓집 여자와 같이 잠자리비행기를 타고 나타났다. 몇 사람의 기가 질리게 생긴 서양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손짓을 했다. 가까이 오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나와 내 친구들은 겁을 잔뜩 집어 먹었다. 무슨 큰 잘못을 했는가 싶어서 말이다. 친구 중에 누군가가 초콜릿을 주려고 그러는지도 모른다고 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그 서양 사람들이 우리들 있는 쪽으로 오더니 뭐라고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면서 손짓을 하는데, 그 손짓만으로도 우리를 한군데로 모으려는 것임을 금방 알았다. 갓을 쓴 노인들도 그리고 절반쯤은 훌떡 벗은 우리들은 훌 섞여서 모였다. 그랬더니, 그 서양 사람들은 그 모여 있는 우리들에게 사진기를 들이대고는 마구 찍어댔다. 못생긴 얼굴에다가, 햇볕에 그을어 검은데다가, 눈까지 찡그렸으니, 내 사진이 잘 나왔을 리가 없을 것 같다.♤
이 글은 저보다는 한두 살 어린 이상익이라는 이름의 제 친구가, 자기 나이 여섯 아니면 일곱 일 때의 기억을 돌이키면서, 새롭게 쓴 소위 ‘추억의 일기’입니다.
이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때 그렇게 서양 사람에게 사진 찍힌, 그 순간의 추억이 너무나 또렷해서, 지금껏 그때의 그 흥분이 수시로 그 가슴을 맴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자기 사진을 찍어간 서양 사람들 중에는, 혹시 덴마크 공주가 있었을 런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습니다.
제가 북유럽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여왕님의 우리 고향 땅에 대한 헌신적 발자취를 이야기 했더니, 이상익 그 친구는, 그렇게 반세기 전 어린아이 때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아이는, 이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하면서, 이런 모습으로, 이제 60줄의 중늙은이가 되어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정부의 인터넷 자료실을 찾아, 그때의 뉴스를 찾아봤더니, 이상익 그 친구가 그렇게 사진을 찍힌 그 날은, 바로 그 시멘트 공장이 준공되어 첫 불을 지피는 1957년 9월 28일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까지 참석한 성대한 공장 준공식 장면이 담긴, 같은 달 30일에 제작된 ‘대한뉴스 제 133호’를 보내드립니다.
오래된 영상이어서 좀 조잡하기는 하지만, 여왕님께서 반세기 전에 우리 대한민국 우리 고향 땅을 위해, 그 어떤 귀한 흔적을 남겨놓으셨는지를 다시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 맞아. 돌가루 공장을 덴마크에서 지어줬다고 했어. 그 돌가루 공장은 우리 고향의 자랑거리였지. 돌가루 색깔의 작업복을 입은 그 공장 총각들은, 동네주민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어서, 세 딸 중에 아무나 골라가라고 할 정도였어.♤
황원현이라는 이름의 제 친구가 한 말인데, 시멘트 공장을 우리 고향 땅에서는 그렇게 우리 한국의 토속적인 말인 ‘돌가루’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렇게 돌가루공장이라고 불렀었습니다.
시멘트 공장에서 자재부를 맡아 오랫동안 일을 한 적이 있는, 저의 중학교 동기동창인 그 친구는 그래서 좋은 아내를 만났던 모양입니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 거대한 시멘트 공장이 생기면서 완전히 새로운 문명과 문화가 형성되었던 신기. 호롱불로 밤을 밝히던 그곳에 휘황찬란한 전기불이 공장주위와 채석장이 있는 산꼭대기까지를 밝혔었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흔한 전깃불 이야기로 웃어넘기겠지만, 그때로서는 놀라운 변화요, 신기한 풍경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장을 덴마크의 앳된 공주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 한국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세워주었다니! 놀랍고 놀라울 뿐입니다.♤
여왕님께서 지난 해 우리 한국에 오셨을 때, 그때 잠깐 들리셔서 고운 한복감을 사가지고 가셨던 바로 그 ‘동대문시장’에, 점포 하나를 가지고 있는 제 중학교 동기동창인 정용철 친구는, 우리 고향 땅에 시멘트 공장을 세워주신 분이 덴마크 여왕님인줄을 처음 알았다면서, 뒤늦게라도 그때의 그 고마움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해냈습니다.
지금은 호주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는, 조혜숙이라는 이름의 제 또래 여자 친구도 이렇게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우리 고향 명물 이었던 시멘트 공장에, 그런 깊은 역사가 담겨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때로서는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 또 공장이 있는 동네인 ‘신기’의 그 이름에 담긴 뜻이 ‘새로운 기계’라는 것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그런 사연도 모른 채,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나, 그 공장으로 소풍을 갔었습니다. 분수가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돌들이 잘게 부서져 나오는 것도 저의 그때 어린 눈에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여왕님의 모습을 사진으로라도 좀 보고 싶습니다. 여왕님처럼 우린 이웃을 위해 베풀어야 합니다.♤
이렇게 조혜숙 친구만, 그 시멘트 공장으로 소풍을 간 것이 아닙니다.
아래 사진에 담긴 제 친구들 모두가, 그때 그렇게 그 공장으로 소풍을 가서 새로운 세계의 기술과 문화에 경탄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여왕님의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우리 고향의 모습을, 저의 중학교 선배님이신 임무상 화백께서는, 이렇게도 아름다운 곡선과 푸근한 색감으로, 한껏 그 정을 담아 그림으로 그려주시고 계십니다.
신분으로야 어찌 감히, 여왕님 옆자리를 같이 하겠습니까만, 그저 따뜻한 마음으로는 늘 우리 같은 서민들과, 함께 자리를 하시는, 그런 여왕님께서는, 이 그림 한 점에서도, 마치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정든 이웃을 만난 듯, 따사로운 정을 느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저와는 같은 고향이 아닌, 박경숙이라는 이름의 제 친구 부인은, 여왕님께서 세워주셨던 그 시멘트 공장은, 결국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우리 한국을 부흥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면서, 시멘트 공장이 세워졌던 문경 땅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 전부가 감사해야 할 분이라고, 여왕님의 업적을 높게 기렸습니다.
저 역시 이번 북유럽 여행길에서, 여왕님이 우리 대한민국을 도우셨던 그 업적을 처음 알게 되면서 감동했고, 더군다나 20대 중반의 대학생의 나이에 이미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고 계셨던, 당시 공주님의 휴머니티에 또 정말 진한 감동을 했습니다.
13일 동안의 북유럽 여행, 그 여정에서의 감동 중, 가장 큰 감동을, 전 그렇게 여왕님으로 인하여 제 마음에 새겨 담았습니다.
제게 새로이 감사한 마음이, 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온 뒤 곧바로, 여왕님께서 베푸셨던 그 마음이, 지금도 살아 숨 쉬듯 하는 시멘트 공장이 있는 ‘신기’라는 마을을 찾았습니다.
고향 친구이고 중학교 동기동창인 김형래, 박희구 두 친구를 동행해서, 그 옛날 공장이 들어서면서 같이 세워진 신기초등학교를 찾아, 그 학교 현낙길 교장선생님의 학교 설립 유래에 대한 설명도 듣고, 이젠 주인이 바뀌기는 했지만, 옛 정취가 그대로인 시멘트 공장을 찾아, 공장의 지금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보기도 했습니다.
정말 어렵겠지만, 여왕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여왕님 나라의 어린 소년 소녀들이 대한민국 우리 고향 땅을 찾아, 여왕님이 공주님시절에 하신 흔적들을 살펴보게 하는 것도, 참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허락해주신다면, 우리 고향을 찾는 여왕님의 나라, 덴마크의 어린 소년 소녀들에게, 여왕님의 귀한 흔적을 진정한 마음으로 보여주고, 그들 마음에 담아서 돌아가게끔 해주겠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의 밥 한 끼가, 아프리카의 난민 소년 소녀들에게는, 한 달 식량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왕님께서 오래 전 공주님 시절에, 가난한 우리 한국을 위해 보여주신 그 마음이, 반세기를 지난 지금에 이르러, 세계 도처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미노의 손길로 번져갔으면 하는 저의 바람을, 제가 오늘 여왕님께 띄우는 이 편지 한 통에 정성스레 담아 봅니다.
제가 쓴 오늘 이 편지는, 지난 해 겨울에, 우리 집안에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로 맞아들인, 영문학을 전공한 우리 맏며느리에 의해, 정성을 다하여 번역되어져서, 여왕님 계신 곳으로 부쳐질 것입니다.
존엄하신 여왕 폐하께, 혹 불경스럽게 다가간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차! 실수!’일뿐, 저의 진정한 마음에 의한 것은 아님을, 깊은 이해심으로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은 우리 그 어릴 적에, 여왕님의 은덕을 입은 고향 친구들이 모여서, 우리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설악산의 최고봉인 해발 1,708m의 대청봉을 오릅니다.
밤새 올라, 대청봉 정상에서 일출을 보기로 했습니다.
내일 아침 우리 대한민국의 동해 앞바다로 솟아오를, 그 새로운 태양을 향하여, 우리 대한민국의 오랜 우방인, 덴마크의, 가장 큰 어른이시고 정신적 지주이신 마그레테 여왕님을 위해, 제 아내, 그리고 우리 친구들과 함께, 마음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여왕님과, 그리고 여왕님께서 마음으로 챙기시는 모든 주위의, 그 오늘이 건강하고 복되시고, 그 내일도 건강하고 복되시고, 그리고 다가오는 모든 날들이 또한 건강하고 복되시기를, 진정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이 기도문을 끝으로, 길고 긴 이 편지의 끝을 맺겠습니다.//
10년 전으로 거슬러 2008년 9월 6일 토요일 낮 12시쯤에, 내 그 편지 한 통을 썼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로 그 편지를 마그레테 2세(Margrethe II) 덴마크 여왕에게 띄워 보내드렸다.
편지의 끝쯤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내일 아침 우리 대한민국의 동해 앞바다로 솟아오를, 그 새로운 태양을 향하여, 우리 대한민국의 오랜 우방인, 덴마크의, 가장 큰 어른이시고 정신적 지주이신 마그레테 여왕님을 위해, 제 아내, 그리고 우리 친구들과 함께, 마음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마그레테 2세 여왕을 위해 기도를 드리겠다고 한 바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 다음날인 같은 달 7일 새벽 2시부터 악전고투하면서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고 또 올랐던 것이다.
물론 그 답을 받았다.
재미있게 편지를 읽어보셨다고 하셨고, 언제든 기회가 되어 덴마크를 찾으면 반겨 맞겠다는 답이었다.
박영석 대장과 그 대원들인 신동민 강기석의 모습이 새겨진 추모비에는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많이도 있었다.
그들이 술을 좋아했던지 술잔이 놓여 있었고, 담배를 좋아했던지 담배꽁초가 구석구석에 끼워놓고 있었고, 우리 대한민국을 빛낸 인물들이라고 생각했던지 작은 태극기도 놓여 있었고, 아름다운 그 삶을 기리려고 했던지 꽃다발도 갖다 놓고 있었고, 혹시 배를 곯기라도 했던지 잘라놓은 사과 한 쪽도 놓여 있었다.
특별한 흔적이 하나 있었다.
작은 쪽지였다.
그 쪽지를 펼쳐봤다.
‘소원 편지’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있었는데, 서툰 그 필체로 봐서 초등학교 저학년의 어린이가 쓴 것 같았다.
그 편지를 읽기 전부터 내 먼저 감동했다.
그 높은 곳까지 올라온 어린이의 도전 정신이 가상해서였다.
편지는 다섯 개의 소원을 담고 있었다.
한 줄 한 줄 그 편지글을 읽어나갔다.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감동의 글이었다.
그 마음씀씀이가 또 가상해서였다.
그 글, 곧 이랬다.
1. 엄마 병 낫게 해주세요.
2.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주세요.
3. 부자 되게 해주세요.
4. 부모님께서 건강하고 오래 오래 살 수 있게 해주세요.
5.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