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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작성한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보고서의 공개와 관한 보도자료” (문서번호 베트남 00-11-14).
* 본 자료는 2000년 6월 1일자로 기밀해제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조사보고서로 미국사료관 문서관리소 (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에 RG(Record Group) 472로 소장된 문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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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 2302735, 미군 해병 연합행동소대 Delta-2소속 본(J. Vaughn) 상병의 증언
2월 12일 월요일 13시 30분 경 CAP D-2 해병대와 Sylvia 대위 그리고 Seacrest 하사관은 CAP D-2 서쪽의 제 1 루트를 통해 Phong Nhi 마을에서 작전 수행을 하고 있는 한국 해병대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한국군은 마을에 포격을 가한 다음 자동화기로 습격을 시작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집이 불타고 마을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민병대원 하나가 부상당한 소년과 여자를 소대로 데리고 왔을 때 비로소 나는 한국군이 마을의 민간인에게도 총을 겨누고 있고 따라서 더 많은 부상자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5시 경 우리는 Phong Nhi와 Phong Nhut으로 들어가 도와주라는 허락을 받았다. 우리의 경비대는 5명의 미해군과 26명의 민병대 그리고 S-3로 구성되었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사진 연구를 위한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가지고 갔다.
우리는 동쪽 경로의 잠복을 고려해 Phong Nhi근처의 넓은 루트를 선택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사진에 기록되어 있다.
사진 A: 처음으로 간 집
사진 B & C: 타버린 집들
사진 D: 재더미에 뭍힌 채 죽어 있는 마을 주민
사진 E: 마을 주민 두 사람이 이 불에 타 숨진 채 이 집에서 발견되었다
사진 F & G: 가슴이 도려진 채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
사진 H: 가장 큰 여자들과 아이들의 집단. 거의 모두 죽었음. 오른쪽 위의 여자와 아이들은 아직 살아있음. 사진 F & G에 있는 여자도 이 집단에 찾았음
사진 I & J: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은 여자와 아이. 아이의 머리에 난 총상이 증거
사진 J1 & J2: 사진 I & J에 있는 여자와 아이가 발견된 집단
사진 K & G: 볏짚에 가려진 채 도랑에서 발견된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
사진 M: 이 아이는 몸 어느 곳에도 상처가 없다.근처 연못에서 익사된 것으로 보임
사진 N: 총에 맞은 채 연못에서 발견됨. 사진 가운데 임신한 여자는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에 총을 맞음 (머리 앞이 날라감). 왼쪽 위의 아이는 사진 M과 동일 인물
사진 O & P: 20대 초반 여자 두 손 모두 손가락이 찢어지고 왼쪽 팔에 부상 당함. 미군 병사가 치료하고 있음
마을을 돌며 사진을 찍을 때 발견한 이상한 점 중 하나는 시체 더미 주위에서 총알자국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마을 주민 모두가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았거나 총검에 찔렸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진술서는 1968년 2월 17일에 미군해병 J. Vaughn 상등병에 의해 작성되었다.
J.M. Campanelli, 미군해병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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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1968년 2월 18일에, 조사보고사가 해병 제3상륙전부대의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TAB G)
(1) 미해병대와 민병대원의 진술에 기초한 자체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a) 1968년 2월 12일, 1중대, 1 대대부관, 한국 해병2사단은 진 군 도로1의 북쪽 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CAP D-2를 통과하였다. 그리고 CAP D-2의 북쪽에서 400m 떨어진 곳으로 10시 30분경 이동하였다. 부대는 서쪽에서 움직였다. 한줄로 전개되어 Phong Nhi 촌을 통과 Phong Nhut(2)를 향해 편대가 적진신속비행함.
(b) Phong Nhut(2)로부터 전투가 들려왔음. 그리고 오두막들이 타기시작하는 것이 보였음
(c) 13시 경, 촌락근접한 곳에서의 포병대의 사격 후 보병중대는 Phong Nhi 촌 으로 돌아옴. 사격총성에 이어 타오르는 연기가 관찰되었음. 1330분경 민병대 봉사 자들은 단도에 찔려 부상당한 어린 소년과 소녀를 이송해 왔음
(d) 13 30분이 지나자 마자, CAP D-2에 도착한 연합작전중대의 사령관인 Delta는
무전기에 의존 USMC 연락사무국에서 한국 해병제2산단에 접선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Call Sign : Past 6).................................................
(72 하단에서 멈춘 것: 번역안됨)
e) 약 1500시경 미해병, 지방군이 CAP D-2로부터 퐁니햄릿(Phong Nhi Hamlet)로 진입해 들어왔다. 미해군중 하나가 그들의 발견에 대해서 촬영을 해놓았다. (그 사진들은 TAB G 6번 동봉물에 첨부되었다. MAF III에 의해서 공급되었던 그 사진들은 공문에는 확인되지 않았다. 확인작업은 사진작가에 의해 행해진 사진검증 작업과 관련있는 macig에 의해 확인되었다. 본문에서 명시되지 않은 다른 여분의 사진들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진들은 본문에서 명시된 사진들의 목록과 관련이 있다). 퐁니(PHONG NHI)의 주민들은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사살되었다. 몇몇의 피해자들은 칼에 찔렸고, 한 젊은 여인은 가슴이 도려내어졌다. 69명의 시민들이 퐁니(PHONG NHI)와 퐁넛촌(PHONG NHUT)에서 죽임을 당했고 퐁니는 불에 의해 파괴되었다.
F) 이 작전은 촌장이나 관리들에 의해 허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화임무에 대해서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G) 한국해병제2여단의 여단장은 그 사건 이후에 해당마을의 촌장을 방문하여- 그러한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으며 마을 사람들을 위하여 30포대의 쌀을 주었다.
H) 검사관은 그날의 한국해병제3상륙전부대의 전투상보에 대해 조사했다. 한국해병은 퐁넛에서 제1중대가 작전을 수행한 것에 대해, 그리고 11시5분에서 15시30분까지 소총공격을 받아 한명의 부상자를 낸 것에 대해 비난했다. 상대편의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2) 주석 : 누가 퐁넛에 갔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마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D. 1968년 2월 20일에 사령관과 한국해병 제3상륙부대에 대한 보충조사에 내용이 보내졌다. 이 자료들은 특별한 주석없이 1968년 2월12일 한국해병 중대와 함께했던 2개의 미해병의 보고서에 보내졌다. (TAB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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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진술서의 요약
a) 9:30분에서 10:30분 사이에 한국해병중대는 CAP D-2과 CAP D-1 사이에 있는 1번 동\로에서 빠져나와 서쪽으로 이동
b) 퐁넛과 안탄(An Than)(에서 소총사격을 받았고 한명의 해병이 부상을 당했다. 후에 두번째의 한국해병이 소총사격에 의해 부상을 당함
c) 박격포가 퐁누 마을을 향해 설치되어 발사되었고 25-30명의 주민들이 그 곳으로부터 달아났으나 그 중의 몇명은 파편에 의한 상처를 입었다.
d) 한국해병은 그 마을을 지나쳐 갔다. (불명확)
e) 약 12시간동안, 한국해병들은 지휘그룹과 함께 마을로 들어갔다. 그들은 작은 연못과 대나무밭에 있는 시체들을 보았다.
f) 그 중대는 4번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던 퐁니 북쪽 600미터 근교에서 하루밤을 보냈다.
g) 이른 밤, 한명의 해병대원이 past1-4로부터 무전교신을 받았는데,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기때문에 어떤 누구와도 낮의 작전에 대해 논의하지 말것을 지시받았다.
(2) 주석
a) 작전에 투입되었던 한국해병들의 진술의 진의가 의심된다. 그들이 지휘그룹과 마을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12시간동안 1번 도로에 남겨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중대의 이동이 여러 마을과 관련해서 구분짓지는 않는다.
b) 중언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의 가치를 갖는다.
1. 한국해병은 소총과 포를 발사했다.
2. 한국해병 중대는 민간인학살이 행해졌던 그 지역에 있었으며, 그리고 그일이 있었던 밤동안 퐁니 북쪽 600미터 인근에 배치되었었다.
3. 한 해병에게 침묵을 지키라는 경고는 미해병 연락부대로부터 제2한국해병여단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c) 조사보고서나 또는 추가보고서에 포함되었던 미해병연락부대의 장교로부터의 증언이 없음
을 주목해야 한다.
-----------------------------------------------------------------------------e. 1968년 4월 16일, 사령관, 한국해병제3상륙부대의 공문 :
주제 : 1968년 2월12일 한국해병에 의해 행해진 전쟁범죄 보고서가 주월미군사령관에게 조사보고서와 추가보고서가 전해졌다. (TAB 1)
(1) 보고서의 요약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그 보고서는 한계가 있다.
(b) 전쟁범죄가 저질러졌다는 가능성이 있다.
(c) 한국해병 제2여단 김연상사령관은 마을의 촌장에게 그가 조사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으며 사상자들은 포병과 베트콩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고 말했다.
(d) 베트남 정부 관리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으로 간주되어진다.
(2) 주석 : 사령관과 한국해병제3상륙부대는 전쟁범죄가 일어났을거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조사장교의 의견이나 결론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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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주월한국군의 사령관은 주월미사령관의 편지에 1968년 6월 4일 응답했다. (TAB K) 그의 편지는 서명되지 않은 한페이지 반 분량의 조사보고서를 동봉하고 있다. 각각의 편지는 아래와 같이 분류되어 보내질 것이다.
(1) 채 중장의 편지
(a) 베트남 생존자에 대한 관심 표명
(b) 주장되어진 사건이 전체적으로 조사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c) 한국 해병중대가 1978년 2월 12일 퐁넛 마을 주변을 일소했다고 인정되어지나, 퐁넛마을에 들어갈 아무런 상황이 없었음을 진술되고 있다. 대신에 11시간 30분에 그 중대는 퐁넛으로부터 완전 반대방향인 북서쪽 방향으로 1시까지 도착해야 했다.
(d) 유니폼으로 위장한 베트콩들이 그 지역 내에서 여러번 작전을 수행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e) 학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음모화되고 무자비하게 행해진 행동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f) 한국해병은 어떤 수단으로도 제네바 협약의 어떤 조약에도 위배되는 어떤 사건에도 연루되지 않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2) 보고서는 다음의 필수항목이 명시된 편지를 동봉하고 있다.
(a) 1968년 2월12일 퐁넛에서 사격을 받은 직후 한국해병대는 그 마을을 공격했다. 그 마을에 진입할 때 중대는 적군이 이미 떠났음을 그리고 민간부상자들이 떠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b) 퐁니마을에 무차별사격이 행해졌고 그로 인해 많은 손상을 야기시켰다.
(c) 중대는 퐁넛마을을 11:30분에 떠났고 1시에 다음 목표지역에 도착했다.
(d) 위장한 베트콩들은 한국해병이 떠난 후에 그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그리고 퐁넛마을과 퐁니마을에 무자비한 작전을 행한 한국군을 비난했다.
(e) 제2한국해병대대의 장교는 그가 마을에 30봉투의 싸을 줄때 그 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지 않았다.
(3) 주석 :
(a) 위의 두 서류에서 제공된 정보는 미해병, 민병,그리고 베트남 민간인들에 의해 제공된 정보와는 견해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b) 두 서류는 모두 한국군해병가 퐁넛마을을 11:30분에 다른 목표지역으로 떠난 것을 제외한 중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나타내지 않고 있다. 한국해병중대가 북서쪽으로 이동했다고 진술하면서 채중장은 중대가 이동했던 방향을 명시하지 않았던 조사보고서보다는 그가 가진 다른 정보에 기초했다고 말하고 있다.
(c) 두 서류의 작성자는 1시 30분에 퐁넛지역에서 제 1중대가 소총사격을 받았다고 명시한 한국해병여단으로부터의 상황보고서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d) 불행하게도 중대에 편입된 2명의 미해병은 그들이 지휘그룹과 퐁니마을에 들어간 후의 이부대의 이동경로를 따라가지 못했으며 시체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 중 한명은 퐁니마을의 북쪽 600미터 부근에서 부대가 밤을 보냈음을 명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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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퐁넛 마을 사건과 관련된 부분만 편집한거
퐁니 퐁넛 마을의 민간인 사상자는 총 69명. 퐁니마을에대해서 포격과 사격을 실시한것은 맞음. 한xx 칼럼 전문을 읽지 않아서 해당 기사에 왜곡과 과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음. 하지만 적어도 일부 극렬반전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한국군이 계획적으로 마을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건 사실이 아님.
출처:
https://m.cafe.naver.com/ArticleRead.nhn?clubid=26195433&menuid=40&articleid=2270&query=퐁넛
SongBirds님의 글입니다.
첫댓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민간인 사살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싶은게 아니라 구머씨를 비롯한 여러사람들이 계획적 학살을 했다고 제대로 된 근거없이 주장을 하니 문제인겁니다. 학살 피해자란 사람들도 본인을 학살한 주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이고요.
뭐 그렇죠.
베트콩 자체도 민간인 학살하고 돌아 다녔을 가능성도 다분해서 알수없는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