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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유라시아의 역사』에서 필요부분만 쳤습니다.
산다(三多):청나라 말기 후레(庫倫:울란바토르)의 판사대신辦事大臣에 임명됨.
1911년 9월 청조는 러시아의 외교적 압력으로 몽골에 대한 신정책 추진을 중단한다고 발표함.
일본은 러시아와 맺은 두 차례의 협약(1907년, 1910년)을 통해 외몽골을 러시아의 세력 범위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몽골의 경우에는 러일 사이에 특별히 결정된 사항이 없었기에 일본은 러시아가 외몽골의 복드칸 정권을 통해 내몽골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경계했다.
러시아는 복드 칸 정권이 표방한 내몽골을 포함하는 전체 몽골족의 독립을 지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1912년 5월 관계 실무자 회의를 열어 몽골에 대한 중화민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한편, 외몽골에 한정하여 복드 칸 정권에 의한 고도의 자치 실현을 문제 해결의 목표로 정했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는 외몽골에서 자신의 경제적 권익을 확대한다는 것도 함께 결정했다. 러시아는 이를 위해 먼저 일본과 제3차 러일 협정을 체결하고, 이 협저엥 의거하여 내몽골에서 양국의 세력 범위 확정한다. 그 다음 러시아는 몽골 문제에 대한 베이징 정권의 자세가 여전히 강경하다고 판단하고, 1912년 11월 복드 칸 정권과 먼저 러몽 협정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이 협벙에서 복드 칸 정권의 자치를 승인함과 동시에 몽골 측으로 하여금 모올 지역에서 러시아의 광범위한 경제적 권익을 승인하게 했다. 이처럼 러몽 협정이 체결되자, 베이징 정권도 러시아와 협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리하여 러시아와 중국은 1913년 11월 5일 베이징에서 외몽골 자치에 관한 ‘러중 선언’에 서명했다. 여기에서 러시아는 외몽골에 대한 중화민국의 종주권을 승인하고, 베이징 정부는 대신 러시아에 복드 칸 정권의 자치를 보증햇다.
1911년 몽골이 독립을 선언하고 내몽골과 외몽골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일본과 러시아는 이저의 협의 내용을 재확인 하는 한편, 만주와 몽골 지역에서 다시 세력 범위를 확정했는데 이 협약에 따라 두 나라는 내모올을 베이징(동경 116도 27분)을 기주느로 동과 서로 나누고, 동쪽은 일본 세력 범위로 서쪽은 러시아의 세력 범위로 정했다.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러시아, 복드 칸 정권, 베이징 정권이 참여하는 3자 회의가 몽러 국경 도시인 캬흐타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1914년 9월부터 1915년 7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하여 몽골 독립 문제는 러시아가 주도한 사전 교섭에 따라 결말지어졌는데, 복드 칸 정권 입장에서 보면 전체 몽골족의 통합과 독립이라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러시아가 설정한 방침 말고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한편 베이징 정권 입장에서 보면 종주권이라는 다분이 명목적인 권리를 승인받았을 뿐 외몽골은 실질적으로 정치적 통제가 미치지 않는 지역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최악의 사태, 즉 몽골의 독립을 막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1년 후레에서 독립이 선언된 직후부터 많은 내몽골인들이 복드 칸 정권에 참여했다. 또 그 당시 내몽골의 19호쇼(旗) 가운데 39효소가 신정부에 합류하기를 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내몽골에서도 특히 적극적으로 복드 칸 정권에 합류하려 했던 곳은 바르가(巴爾虎)지방[지금의 훌룬 부이르(呼倫貝爾)]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중동철도가 통과하는 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러시아오의 외교적 고려에 따라 복드 칸 정권의 영역에서 제외되고, 대신 러시아와 베이징 정권이 별도의 ‘구역자치’를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한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바르가 구역 자치는 중국 군벌에 의해 외몽골 자치가 끝나는 1919년까지 지속되게 된다.
바르가 지역 몽골인은 외몽골과 거의 동시에 청조에서 독립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 과정에서 1911년 9월 10일 울드(額魯特)의 총관 성푸(勝福) 등 바르가 귀족들은 청조에서 독립할 것을 결의하고 청조 관리와 군대의 철군을 요구했다. 그러다가 외몽골이 독립을 선언한 직후인 1912년 1월 15일 하일라르(海拉爾)를 해방시키고, 23일에는 만저우리(滿州里)를 해방시켜 실질적인 독립을 선언했다. 또 이해 5월에는 담딘수렌을 외몽골에 파견하여 복드 칸 정권에 귀부하고 중앙 정부에 공납을 바쳤다. 그후 d 지역에 이해 관계를 갖고 있던 러시아가 바르가 문제에 개입하고, 베이징 정부를 다그쳐 ‘중아호륜조약’(1912년 11월 6일)을 체결하고, 이 지역을 중화민국 중앙정부 직할지의 특별 구역으로 확정했다.
일본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베이징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 안부 파(安福派)를 지원하여 중일 군사 협정을 체결하고, 북만주를 일본군의 활동 범위로, 외몽골을 중국군의 활동 범위로 설정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 직후부터 외몽골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급속히 저하되고 있었는데, 중국은 이 기회를 틈타 몽골에서 세력을 회복하는 한편, 캬흐타 협정에서 합의된 외몽골 자치를 철폐시키려고 했다. 그리하여 안푸 파의 중심 인물인 쉬수정(徐樹정)이 후레를 점령하고 복드 칸을 압박했다. 중국의 강력한 압력으로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복드 칸 정권은, 1919년 11월 17일 부득이 외몽골의 자치를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이 무렵,바이칼 호 주변의 부랴트 몽골인들은 대 몽골주의를 내걸고 전체 몽골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복드 칸 정권 초창기에 나타난 대몽골주의는 청조 영내의 몽골족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데 반하여, 이번의 움직임에는 제정 러시아 영내의 부랴트 몽골인, 그리고 바르가를 비롯한 내몽골의 몽골족까지 가세했다. 이 운동을 지원한 사람이 반볼셰비키파인 셰묘노프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코사크 출신으로 어머니가 부랴트 몽골인이었으며, 일본 육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 무렵 시베리아의 정치 상황은 혼돈에 빠져 있었고, 간섭 전쟁(1918~1922, 일본이 구미 열강과 제휴하여 반볼셰비키파를 지원하기 위한 전쟁)에 참여한 열강의 지원은 점점 옴스크에 있는 콜차크 정권에 집중되었다. 그 와중에 세묘노프는 대몽골주의를 이용하여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려 했는데, 1919년 봄에는 그의 주도로 다유리야에서 전몽골 임시 정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임시 정부는 명확한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내부 항쟁으로 말미암아 얼마 안 있어 소멸하고 말았다. 그 후 시베리아 전황은 점점 볼셰비키파의 우위로 기울고, 콜차크 정권이 붕괴하면서 곧이어 세묘노프도 실각했다. 그런 와중에 세묘노프 군대를 이어받은 사람이 그의 부하이자 ‘발트해의 미치광이 남작’으로 불리는 운게른 스테른베르그이다.
한편 몽골에서는 중국 군벌의 강압으로 자치가 취소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몽골의 정치적 주권 회복을 목표로 내건 몇 개의 단체가 활동을 시작했다. 1919년 후레에는 독립적인 두 개의 정치그룹이 조직 결성 되었는데, 하나는 1919년 말 수도의 중심부인 ‘준 후레’에서 탄생한 후레파이고, 또 하나는 수도의 동쪽 끝 러시아 영사관 언덕에서 성립한 영사관파이다. 이들이 연대해 1920년 6월 경 몽골인민당을 결성하게 된다. 인민당은 처음에는 소규모의 비밀 조직으로 출발했다.
운게른의 반볼셰비키 집단은 1920년 10월 몽골을 침공하여 1921년 2월 후레를 점령하고, 중국 군벌이 무너뜨린 자치 정부를 수복하여 복드 칸 정권을 부흥시켰다. 그러나 곧이어 몽골 인민군과 소비에트 군대에 패배하여 1921년 9월 운베른은 처형된다. 아랫부분에 설명
운게른과 그의 군대의 잔악한 행위 때문에 몽골 국내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측은 일본과 중국의 반응을 보아가며 신중하게 정세를 분석하여 운게른 군대의침략의 계기로 서서히 몽골에 대한 군사개입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1921년 1월 이르쿠츠에 코민테른 극동서기국이 설립되었는데, 그 산하의 티베트-몽골부가 그 후 몽골에 대한 정치 지도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어 3월 초 몽골 인민당 제1차 당 대회가 몽러 국경 도시인 데드 시베에서 개최되고 임시 인민 정부가 수립되었다. 제1차 당 대회 문서를 보면 장기적으로 전체 몽골족의 통합과 독립을 전망하고 있지만, 당면의 과제로 자치의 부흥을 목표로 성정했다. 임시 인민 정부가 모집한 군대는 곧이어 캬흐타를 공격하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중화민국의 군대를 몰아냈다.(1920년 8월 13일). 몽골군은 이어 소비에트군, 그리고 극동공화국 군대와함께 후레를 공격하여 운게른 군대를 격파하고, 1921년 7월 11일 공식적으로 몽골 인민 정부를 수립한다.
몽골에서는 인민 혁명에 의해 인민 정권이 수립됐지만, 젭춘담바 쿠툭투(복드 칸)가 여전히 국가 원수 였다. 또 정권을 담당한 사람들도 혁명가라기보다는 오히려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요원들이 이들을 지도했는데, 초창기에는 부랴트 몽골인인 린치노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원래 레인의 세계 혁명 전략에서는 혁명이 달성된 지역은 모두 종래의 국가 휴영과 다른 연방으로 통합되도록(같지는 않겠지만 소비에트 연방을 생각해보면 될듯..) 되어 있었다. 실제로 1922년부터 1926년사이에 진행된 소비에트 연방 결성에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이 참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도 소련에 가입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봉건 세력을 제외한 민조주의자들과 광범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이 노선을 제기한 것이 코민테른 이었다. 1924년 1월 중국 국민당 일전대회 이후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국공합작이 이뤄졌다.
1924년 5월 31일, 소련과 중국의 외교 대표단 사이에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각서가 교환되고, 동시에 소련과 중화민국 사이에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반 원칙에 관한 협정이 조인되었다.(中俄大綱協定) 여기서 소련은 외몽골에대한 중화민국의 종주권을 승인했다.
소련과 코민테른은 몽골 상황을 과도기로 파악하고 확실한 미래상을 그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에서 국공 합작이 성공하고 중화연방 같은 정치 체제가 성립된다면, 몽골인민공화국이 거기에 가맹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몽골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담바도르지는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
메르세(郭道甫)를 비롯한 청년층은 몽골인민공화국이나 코민테른과 연락을 취하고, 세링 돈룹(白雲梯)등 국민당 계열의 몽골인까지 끌어들여 1925년 장가커우에서 내몽골인민혁명당을 결성한다. 이 당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데는 국공 합작을 지지하고 있었던 서북 군벌 수령 펑위샹이 큰 역할을 했다. 또 당시 몽골인민공화국 수뇌부가 대몽골주의 경향, 즉 내몽골과 외몽골의 통합에 열의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1927년 장제스가 일으킨 반공쿠데타는 국공합작을 붕괴시키고, 내몽골인민혁명당까지 분열 소멸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메르세는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세링 돈룹은 내몽골인민혁명당과 완전히 결별을 선언한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코민테른의 지도 방침은 파탄에 이르고, 몽골인민공화국에서도 극좌 노선이 채택되어 담바도르지를 비롯한 민족주의 성향의 지도부가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의 젊은이들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중국 혁명에 대한 전망이 없어지자, 그 후 코민테른은 몽골인민공화국을 외몽골로 제한된 범위에서 중국 정세와 분리하여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그들은 몽골을 중국에 통합시키지 않고, 명확히 개별 국가로 유지시키기 위하여 사회주의 개조를 급격히 강행했다.
내몽골 서부의 몽골 왕공들은 만주국 성립과 중화민국 정권의 약체화를 목격하고 난징 정부에 대해 고도의 자치를 요구를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 수니트 호쇼의 템축 동룹(德穆楚克魯普: 보통 덕왕德王으로 알려져 있음)인데, 그를 비롯한 몽골인들의 자치 운동은 처음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진격해온 관동군의 지원 아래 1937년 수이위안(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후흐호트)에 몽골연맹자치정부를 수립했다.(1937년 9월 1일)
한편 이날에는 또 다른 일본 괴뢰 정권인 찰남자치정부와 진북자치정부, 그리고 위의 몽골연맹자치정부는 일본의 뜻에 따라 ‘몽골연합자치정부’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템축 동룹 등은 앞으로 내몽골의 통합과 고도의 자치를 겨냥하고 자치 정부 명칭을 몽고연합자치정부라고 했다. 그러나 자치 정부는 진북자치 정부의 가담으로 한족이 인구 구성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하였고. 또 일본이 실권을 장악한, 그리고 일본의 대중 군사 전략 아래에서 만들어진 정권에 불과했다. (이때 내몽골의 동부지역은 만주국에 편입되어 있었는데...몽골연합자치정부가 병합하려고 했으나 일본에 의해 거부 된다)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몽골인민공화국에 대해서 ‘현상’을 유지하기로 합의 했다.(현재 외몽골과 내몽골이 합쳐져 있지 않는)
몽골인민공화국에서는 1945년 10월 중국에서 독립할 것인지를 묻는 투표가 실시되고, 반대표 없이 독립에 대한 의지가 확인되었다. 중화민국도 이 결과를 인정하고 일단 승인하게 되지만, 곧이어 발생한 국경 분쟁으로 그 승인을 철회해 버린다.
하풍가(哈豐阿)를 위시한 내몽골 활동가들은 울란바토르로 가서 내 외몽골 통합에 대한 원조를 호소하지만, 이 제의는 당시 외몽골의 실권자인 초이발산에 의해 거절된다. 이윽고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고, 내몽골까지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몽골측 출신 중국 공산당원인 울란푸(烏蘭夫)를 중심으로 하여 하풍가까지 참여하는 내몽골 자치 운동이 통합되고, 드디어 1947년 내몽골자치정부가 수립된다.
인도는 옛 영국령 인도 정청政廳이 갖고 있던 티베트에 대한 발언권을 계승한다. 그러나 인도 입장에서 보면 옛 종주국이 제국주의 시대에 획득한 영향력을 계승하는 것은 오히려 마니너스 유산을 상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도는 중국과 우호 평화 공존을 희망하고, 티베트 문제에 관해서는 가능한 중국과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몽골로 끌려간 만주 주둔 일본군과 민간인(1만 2318명으로 추정)은 울란바토르 건설 현장과 농장, 공장에서 강제 노역에 이용되게 된다. 이 가운데서 1618명은 사망하고 나머지는 1947년 말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들 일본 포로들은 울란바토르가 현대적 도시 모습을 갖추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 억류 일본인들의 회고록에는 몽골에 억류된 일본 포로 가운데 한인韓人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1912년 1월에 일리에서 혁명파가 봉기하여, 몽골 기인인 전前 일리 장군 광푸(廣福)를 임시 도독으로 추대하고 정부를 수립한다. 정부 구서원에는 회민이 한 명 포함되어 있을 뿐 현지 무슬림은 한 사람도 없었다.
선통제의 퇴위가 전해지자 투르판의 우룸치 성 정부 수뇌부는 사실상 정권을 방기한다. 이때 우룸치 지구의 지사였던 양쩡신(楊增*)은 교묘하게 경쟁자를 배제하고, 신장 성장 겸 독군이 되어 정권과 병권을 한손에 장악한다. 원난 성 출신의 과거(科擧)관료인 그는 청조의 지배 체제를 바꾸지 않은 채 신장을 자기의 독립정권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위안스카이 정부의 명의로 청대에 작위를 갖고 있지 않던 카자흐 부족장들에게 군왕이하 베이세, 타이지 등의 칭호를 부여했는데, 이는 전대의 체제를 그대로 계승하려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 전형적인 시책이다. 그는 또 신장을 외부 세계와 차단시키는 데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오스만 제국은 압둘하미드 2세나 청년 투르크 혁명에 의해 집권한 ‘통일진보위원회’ 정권도 모두 중앙유라시아 전역에 범투르크주의를 확사시키려고 했다. 실제로 통일진보위원회 정부의 한 사람인 탈라트 파샤는 1913년 말 이스탄불을 방문한 카슈가르의 순례자들에게 오스만 제국에서 카슈가르에 터기인 교사를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아흐메트 케말이라는 젊은 터기인이 당시 이스탄불에 유학하고 있던 카슈가르 출신 청년과 함께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를 거쳐 신장에 도착한다. 그는 카슈가르 동북부 알투슈에 현지 유력자의 지원을 받아 사범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카슈가르 지역 민족주의 교육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제국이 독일 편에 가담하자, 아흐메트 케말은 더 이상 활동을 못하게 되고 우룸치에 연금되게 된다. 그럼에도 카슈가르와 우룸치에서 아흐메트 케말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후로도 다양한 조류의 민족주의 활동에 참가한다. 뒷날 위그루인으로 신장 성 주석이 된 마스우드 샤브리와 신장 개방 당시 주석이었던 부르한도 아흐메트 케말과 친교가 있던 사람들이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제국의 범투르크주의, 범이슬람주의는 동투르키스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양쩡신의 보수적인 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부 진보파들이 1928년 7월 7일 그를 암살한다. 그러나 쿠데타는 그 날 밤으로 진압되버린다. 대신 양쩡신의 심복인 진수런(金樹仁)이 성 주석 겸 군사령관이 되어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진수런은 전임자에 비해 많이 평범했고, 양쩡신이 신중하게 대응한 무슬림 주민의 종교와 관습에 대해서도 배려하지 않았다.
하미(하밀)의 군왕 가문은 동투르키스탄 토착 지배자로는 처음으로 청대 강희 연간에 복속하고 ‘자삭’에 임명된 우베이둘라를 시조로 하여, 그때까지 하미에서 소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수런은 군왕인 샤 막수드의 죽음을 계기로 이 소왕국을 없애기로 한다. 때마침 하미 북쪽 작은 촌락에서 현지 소녀를 무리하게 취하려던 한족 장교와 그 부하가 결혼 당일 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회토귀류 문제로 긴장 상태에 있던 하미에서 대규모 무장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군은 한족 거주 구역인 하미의 구성(舊城)을 포위했는데, 성 정부군의 증강을 앞두고 간쑤의 무슬림 군벌인 마중잉(馬仲英)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마중인 군대는 하미의 신성을 포위하고 톈산 동부의 북쪽 기슭에 위치하는 바르쿨까지 진출했지만, 일리 방면에서 신장 성 정부군이 접근하자 다시 간쑤로 퇴각하게 된다. 한편 농민과 유목민을 위주로 하는 하미의 반란군은 북쪽 산지로 철수했다.
마중인 군대의 침입을 계기로 1932년 말 투르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910년대 이래 혁신적 교육 운동을 벌여온 지식 계급의 비밀 결사 멤버들이 반란을 지도했다. 그들은 정치와 사회 개혁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와 동시에 일부 종교 지도자들도 행동을 같이 했는데, 그 가운데는 반란에 참가하는 것이 지역 무슬림의 절대적 의무라고 포고를 발하는 자도 있었다. 반란군은 한때 투르판 시 전역을 장악했지만, 신장에 들어와 있던 러시아 백군(이들은 귀화군歸化軍으로 칭해졌다) 잔당을 포함한 성스차이(盛世才) 휘하의 성 정부군에 쫓겨 서방으로 퇴각하고 전투에서 많은 지도자를 잃게 된다. 성스차이는 3월 중순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뒤에 투르판은 마중잉 군대에 점령된다.
한편 간쑤 회군의 침략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던 타림 분지 남변 호탄에서도 봉기가 발생했는데, 이곳에서는 1933년 2월 마드라사 교사인 무함마드 아민 부그라가, 그 전해부터 비밀리에 조직한 혁명 그룹을 동원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한인 관료를 축출하여 신정부를 수립한다. 이 정부는 호탄의 종교 지도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일리 출신으로 소련과 터키, 그리고 인도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는 사비트 다물라를 샤이흐 알 이슬람(이슬람의 수장이이라는 의미), 앞서 언급한 무함마드 아민 부그라를 아미르 알 이슬람(이슬람의 장군을 의미)으로 추대했다.
호탄의 반란군은 야르칸드와 카슈가르 방면으로 진격하고, 샤비트 다물라는 1910년대 이후 카슈가르에서 근대화 운동을 주도해온 사람들과 투르판 봉기 지도자로서 카슈가르에 와 있던 사람들을 규합하여 1933년 11월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한다. 그는 하미의 반란 지도자로 명성이 자자한 호자 니야즈(당시에 그는 카슈가르에 없었다)를 공화국 총통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수상으로 취임했다. 공화국은 내부적 약간의 교육, 사회 개혁을 포함한 엄격한 이슬람주의를 채택하고, 대외적으로 영국과 터키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으려 했다.
한편, 우룸치도 마중잉 휘하의 회군이 닥쳐올 기세를 보이자, 그곳에서는 4월 12일 쿠데타가 발생하고 얼마 안 있어 성스차이가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는 상황을 일시에 타개하기 위해 소련군의 개입을 요청했다. 소련 정규군은 이를 수용하는 형태로 1934년 1월 신장으로 진군하여 마중잉 군대를 패주시킨다. 헌데 이상하게도 마중인은 이번에는 간쑤로 퇴각하지 않고 서쪽으로 가서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붕괴시켜 버리고, 소련과 교섭하여 소련으로 망명해버린다. 이때 공화국 총통 호자 니야즈는 소련의 사자와 접촉하여 신장성 부주석으로 취임하기로 하고, 사실상 공화국 최고 책임자인 사비트 다물라를 붙잡아 성 정부에 인도했다. 이렇게 하여 1931년부터 1934년에 걸쳐 고양된 반란과 독립 운동은 통일적인 지도부를 성립시키지 못한 채 중도에서 좌절하게 된다.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에서는 같은 종교를 갖고 있지만 한어를 구사하는 회족回族은 , 대체로 한족과 함께 배제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슬람 사회의 구성원은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동투르키스탄 원주민에 한정되었다.
원래 타림 분지 오아시스 정주민은 고유의 민족 명칭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 그들은 단지 청나라 통치자들같은 이교도에 대해서는 자신을 무스림이라 부르고, 이방인에 대해서는 에를리크(토착민)라 자칭하고,때로는 호탄, 카슈가르등 오아시스 이름을 호칭의 일부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지역 거주민들의 민족 명칭은 엉뚱하게도 소련에서 전해졌다. 소련으로 이주한 동투르키스탄 출신자들(이들은 대부분 1881년 일리가 다시 러시아에서 청조로 반환될때에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다)은 1921년 알마아타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러시아의 투르크학 연구자 세르게이 말로프의 제언에 따라 고대 위구르의 명칭을 민족명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이 명칭은 신장에까지 알려지게 되엇고, 1935년에는 ‘민족 평등’을 표방한 성스차이 정권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웨이우얼’(維吾爾)이라는 한자식 표기도 정해졌다.
실권을 장악한 성스차이는 민족 평등, 반제, 친소련 등 진보적 정책을 표방했다. 민족 평등 정책은동투르키스탄의 총통이었던 호자 니야즈를 성 정부 부주석으로 임명한 것을 비롯하여, 일부 위구르 및 카자흐 유력자를 성 정부와 지방 행정 기관의 요직에 배치했다.
성스차이는 또 일본의 침략으로 신장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신장 출입자에게 비자를 요구했다. 그는 국민당 정부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하는 한편, 소련으로부터 고문과 코민테른 요원(중국인)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정부 기관과 비밀 경찰을 직접 장악함으로써 신장은 소련의 위성국 또는 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성스차이는 정세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개시키기 위하여 1937년 토르츠키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코민테른 요원을 체포하여 추방하고, 그 후임으로 옌안에서 초빙한 공산당원을 임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스크바를 직접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소련 공산당 입당 원서를 내는 등 소련과 관계를 교묘하게 유지했다.
성스차이는 1940년에 두 번째로 숙청을 개시하여 소수 민족 출신의 고위 간부를 잇달아 체포파거나 구금하고,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독일이 우위를 보이자 돌열 반공反共으로 돌아섰다. 그는 1942년 동생 성스치 암살 사건(이 사건은 성스차이가 계획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을 구실로 다시 국민당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신장에 주둔하던 소련인 고문과 적군赤軍 을 돌려보냈으며,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민(毛澤民)을 포함한 다수의 중국 공산당원을 체포 또는 살해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의 우위가 확실하게 되자 성스차이는 다시 친소 정책을 주창하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지만, 1944년 9월 국민당 정부에 의해 해임되어 충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후임으로 신해혁명에 참가한 이후 국민당원으로서 오랫동안 변경 지대의 통치에 관여해온 우중신(吳忠信)이 임명된다.
알타이 지구의 카자흐 유목민인 케레이 부족의 오스만은 1941년 겨울부터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고, 몽골인민공화국과 소련의 도움으로 소련에서 훈련받은 카자흐족 달릴 칸 그룹과 연대해 1944년 10월 ‘알타이민족혁명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일리 지구에서는 이미 민족 해방을 목표로 내건 비밀 조직이 성립되어 있었다. 이들은 1944년 10월과 11월 일리 계곡의 닐카(尼勒克)와 쿨자 시내에서 봉기하여, 11월 12일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이들 봉기들은 소련 적군의 관여하여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위에서 알타이의 카자흐족, 그리고 마찬가지로 소련의 영향 아래서 조직된 타르바가타이의 게릴라 부대도 일리 세력(동투르키스탄공화국)에 합류하게 된다.
공화국 임시 주석에는 우주베크인 종교학자 알리칸 토라가 취임하고, 정권 내부에서는 최초 봉기를 지도한 친소파 위구르 지식인 압둘 카림 압바소프가 유력자로 군림했다. 공화국은 총병력 1만 5000명으로 구성된 민족군을 편성하여 타르바가타이, 알타이 지구의 혁명 세력과 연대하고, 일부는 톈산 남부 지역으로 진출하여 1945년 9월에는 우룸치 서쪽 마나스(瑪納斯) 강에서 신강 성 정부군와 개치했다. 충칭 정부에 의해 파견된 장즈중(張治中)이 우룸치에서 소련의 총영사와 면담하고 중재를 요청함에 따라 10월부터 양측은 평화 교섭시 시작된다. 애초에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은 이 평화 교섭을 국가간 교섭이라 주장했지만, 소련의 중재로 ‘신장 민중 대표’라는 자격에 만족해야 했다. 교섭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계속되되었데 그런데 1946년 6월 소련이 공화국 주석인 알리칸 토라 소련으로 납치하고 공화국은 자주적 해산을 결의하게 된다. 1947년 7월에는 신장성 연합 정부가 발족하고, 공화국 실력자인 아흐마드 잔 카심이 부주석, 압바소프가 부비서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1948년 6월 혹 7월 연합 정부는 사실상 붕괴되고, 옛 공화국 측은 모두 일리로 퇴각하는 한편, 실력으로 본래 영역을 계속 유지했다. 장즈중은 성 주석 자리를 일리 출신이자 국민당 극우 그룹인 CC단과 관계가 있던 마스우드 샤브리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가 일리 측과 교섭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알고 대신 현재 타타르 공화국의 카잔 근교 출신 부르한을 주석으로 자리에 앉혔다.
1949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양쯔강을 건너고 국공 내전이 끝나감에 따라,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소련에 파견하여 스탈린과 양국의 여러 문제를 정리하도록 했다. 아마도 이 회담에서 일리 문제에 대한 중소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류사오치와 동행한 덩리췬(鄧力群)은 모스크바에서 곧바로 일리로 가서 아르마드 잔과 교섭했다.
한편, 마오쩌둥은 8월 일리의 수뇌들에게 편지를보내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정치 협상 회의에 참석하도록 촉구했다. 아울러 그는 “여러분들의 수년에 걸친 투쟁은 우리 전체 중국 인민의 민주주의 운동의 한 부분입니다.”고 언급함으로써, 동투르키스탄공화국과 이리,알타이, 타르바가타이의 3區 혁명을 중국의 혁명 운동 가운데 포함시켰다. 아후마드 잔, 압바소프, 달릴 탄을 비롯한 지도부는 정치 협상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소련의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베이징으로 향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탑승한 비행기가 8월 27일 바이칼 호 주변에 추락하게 된다.(이때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의 유력자 대부분이 사망함. 그리고이 사고는 3개월이 지나 공식적으로 보도 되었다) 공화국 수뇌부 가운데 난을 피한 샤이프 웃딘 아지즈는 서둘러 정치 협상 회의 대표 자격으로 베이징으로 가서, 중국 공산당의 지도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공화국 수뇌부가 사망한 후 덩리췬은 다시 우룸치를 방문하여 성 주석 부르한 및 국민군 사령관 타오즈웨(陶峙岳)와 회담을 갖고 신장과 평화적 해방을 수용하도록 촉구했다. 이때 1930년대 바난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무함다드 아민 부그라는 중국 공산당 지배를 거부하고, 동조자들과 함께 우룸치를 떠나 파키스탄으로 갔다가 이어 터키로 망명하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직전인 1949년 9월 26일 신장 성 정부는 마오쩌둥 앞으로 전보를 보내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끊고 중앙의 인민 정부가 내리는 명령에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미 란저우, 시닝까지 진군한 인민해방군은 즉시 우룸치를 향하여 12월 일리를 진주했다. 인민해방군이 진주한 뒤에도, 3구 혁명에서 일익을 담당했지만 후에 동투르키스탄공화국과 결별한 카자흐족의 오스만이나 국민당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하미의 욜바르스 등은 무력 항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욜바르스가 1950~1951년 겨울 티베트를 거쳐 타이완으로 망명하고, 오스만도 1951년 4월 체포되어 처형되에 따라 무력 항쟁은 막을 내렸다. 또 전임 성 주석 마스우드 샤브리는 체포되어 구금 중 사망했다.
몽골족 출신 중국 공산당원인 울란푸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이러한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내몽골자치정부를 성립시켰다. 내몽골인민혁명당 창설자인 메르세의 제자로 만주국 관리를 지낸 바있고. 한 때 내 외몽골 통합에 힘을 기울인 하풍가가 취임했다.
부랴트 몽골어는 폐기되고, 대신 러시아어가 도입되었으며, 소련 정부는 부랴트인과 다른 지역 몽골인들의 통합 음직임을 차단하기 위하여 1958년에 모든 공식 명칭, 즉 가치공화국 명칭, 민족 명칭, 언어 명칭, 그리고 지역 명칭에서 ‘몽골’이라는 말을 삭제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부랴트공화국은 몽골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소련의 한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중국 혁명파들의 몽골 인식
출처는....나중에 알아오겠습니다.
제가 평소 이당시 사람들의 골..티벳에 대한 인식에 대해 궁금했었거든요...
청조의 변판대신 산도(三多)에게 청군과 중국관원들의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孫文의 경우에도 1912년 1월 말에 몽골 왕공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한족과 몽고족이 원래 같은 종족(同種)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몽고족과 한족의 종족적 구분을 반대하고 있고, 2월 중순 몽골 왕골들에게 보낸 편지(전문)에서는 漢, 滿, 蒙,回, 藏족의 오대 민족이 하나로 합해져서ㅕ 하나의 중화민국이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족공호가 제창되던 것과 같은 시기인 1912년 2월에, 손문이 ‘만주와 몽고 지역의 할양’을 조건으로 일본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얻으려는 협상을 일본측과 진행한 적이 있다.
혁명파 인사들의...몽골이 제2의 조선이 될 것이라는 우려조의 표현이 있다.
몽골문제와 관련 1912년 5월말에 혁명파 신문이던 민권보에 실린 한 논설은 중국이 이제 망국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
영국이 무창기의의 소식을 전해진 직후 티베트인의 대중 무장투쟁을 지원하여 라싸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관원들을 쫒아내고..
宋敎仁은 지난달 중국에 속해 있던(현재는 일본이 차지해버린) 조선과 같다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몽골에 대한 군사정벌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한 거슨 대체로 1912년 6월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몽골의 독립요구가 서몽골 지역으로 확대되어 가고 러시아와 몽골간의 협정체결을 위한 러몽간의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8월말 내지 9월 초에 가서는 몽골에 대한 무력 토벌론 곧 정몽론 주장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기에 이르렀다.
정몽 주장이 어느정도의 국민적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고보인다.
정몽의 주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자 손문도 적극적인 항전을 주장하고 나섰다.
1912년 12월초에 발표된 한 전문에서...50만의 신병을 양성해 외몽고와 북만주에 파병하고 계속해서 6개월마다 50만씩 증병해 간다면 만몽지역에서 러시아를 쫒아낼 수 있을 것이다는 매우 낙관적인 입장을 밝히고 나섰던 것이다.
일부에서는 봉건적 귀족지위를 그대로 용인하면서 몽골의 독립요구를 무마하겠다는 원세개 정부의 방침이 공화정체라는 민국의 정치체제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8월초에 신강총독 楊增新이 북경 정부의 명령으로 호브뜨 지역으로 출병을 시도한 적도 있다.
‘혁명의 와중에 한 뼘의 영토(寸土)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자주 반복되어 나타내고 있었던 것은...
손문은 1920년대 이후에 가서는 오족공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한족중심의 민족융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었으니, 예컨대 1920년 11월의한 강연에서 손문은 ‘청조가 이미 망했지만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여 민족주의가 계속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제는 오족공화를 그만두고 각 민족이 융합되어 하나의 중화민족이 되어야 비로소 민족주의가 완성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921년 12월의 또 다른 강연에서는 장 몽 회 만이 모두 자위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넓은 민족주읠ㄹ 발휘하여 이들 소수민족들로 하여금 한족에 동화하도록 함으로써 하나의 큰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하는데 이것은 한인의 결정(自決)에 달려 있다고 하여 오족공화론을 근본저그로 부인하고 민족동화를 주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동화정책의 원인이 다른 소수민족들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말하기 까지 하였던 것이다.
첫댓글 이틀전에 글을 올려서 기달렸다가 올리까 생각하다가..그냥 올려봤습니다.
혹시 이런 생각해본적 있습니까? 오스만 제국하고 청나라하고 맞붙으면 누가 이길까? 좀 유치하죠.. 제가 본 책중에 이색적인 부분이 있어서요..뭐냐면...1860년대 당시 청나라 외번인 위구르, 이슬람 지역에서..청조에 대항하여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사를 보신분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국 위구르 문제해서 동투르키스탄공화국 이런 말 나오쟎아요..아무튼 ..청나라 말기에 이쪽에서 엄청난 봉기가 일어납니다. 근데 이때 오스만 투르크가 등장합니다. 오스만이 당시 카슈카르의 지도자인 야쿱 벡이란 사람에게..무기를 무상으로 지원해주거든요. 신기하지 않나요..야쿱 벡은 오스만에..뭐랄까..종주권이랄까..아무튼...당시
오스만제국이 범이슬람주의 해서...당시 이슬람 국가들에게 어떤..그런 영향을 줄때거든요..그리고 위구르도...투르크족과 언어 나 역사적으로 관련이 많거든요..나라이름도 동투르크스탄....
이글은 태도불량님이 글을 올리신다음에 올리는 것입니다. 더 나중입니다..답글 형식으로 글을 올린것입니다...제목이 좀 뒤로 갔죠..Re:를 제가 지웠습니다. 원래 제가 많이 올리지만..그래도 조금이나마..쫌..기다렸다는것을 ..알려들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