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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병대의 군복

나폴레옹 전쟁기의 착용된 군복들은 그것들 자체만으로도 미술 작품(works of art)으로 평가되었다. 그것들은 모든 군복사(史)를 통틀어 가장 정교한 장식의 장관을 대표했다. 당연히, (그 당시) 옷을 가장 잘 갖춰입은 연대조차도 오늘날엔 다소 어설퍼보일 수도 있다. 당시에는 그것들을 현대 병장(sergeant)들의 눈에 들 만큼 얼룩도 없고, 주름도 없고, 충분히 빳빳하게 유지할 수 있는 드라이 클리닝도, 증기 압착기도, 또는 세제조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군복은 17세기 중반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시작한 연대 제도의 도입에 따라 유럽에서 표준이 되었다." 군사 패션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군대의 예복은 그 나라, 그 역사, 그리고 전쟁에 대한 접근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군용 착용물은 수년간 급격하게, 수십년에 걸쳐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나폴레옹 전쟁기에 프랑스 보병대는 가장 아름다운 의복을 입었고, 동시대의 관조자들은 그들의 군복에 대해 전반적인 놀라움으로 가득찬 태도로 평가했다.
5.1. 자켓, 외투, 그리고 가죽 벨트
다양한 군대 사이의 차이점은 그들의 코트 색상에 달려있었다.1

프랑스군의 나폴레옹 시대 보병대는 붉은색 칼라(도약병들은 노란색 칼라)와 끝 부분이 흰색으로 되어 있는 (붉은색) 소맷동으로 이뤄진 암푸른색 자켓을 착용했다. 경보병대도 붉은색 칼라(도약병들은 노란색 칼라)를 지닌 암푸른색 자켓을 입었다. 하지만, 그것들의 소맷동은 빨간색이 아니라 암푸른색이었다.
전열 보병대의 외투는 하얀색 린넨이었다. 경보병대에겐 외투가 여름에 흰색 린넨이었고, 겨울에 푸른색 울(wool)였다. 흰색 울 외투는 백악으로 처리하여, 소위 옷을 "불태운다"(brele)라는 말로 이야기되기도 했다. 만약, 전투가 매우 더운 날에 벌어진다면, 몇몇 병사들은 자켓 없이 외투만 입었다.
보병대원들의 외복 중 또다른 물품은 흰색 가죽 십자걸이 벨트(crossbelts)였다. 실제로, 가죽 벨트의 자연스런 색깔은 누런색이었지만, 그것들은 파이프점토로 백화(白化)된 상태였다. 하나의 흰색 가죽 벨트는 오른쪽 엉덩이로 탄약 상자가 지지되도록 왼쪽 어깨에 매고 다녔다. 다른 흰색 가죽 벨트는 보병용 사브르를 지지했다. 사브르가 몇몇 보병들에게서 없어졌을 땐, 총검이 다른쪽 벨트로 옮겨졌다. 만약 1812년 이후의 소총병 중대 또는 추격병 중대의 예처럼, 사브르가 몇몇 병사들에게 지급되지 않았을 때, 그들은 한쪽에만 벨트를 찼다. 장교들은 십자걸이 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다.
1806년 영국 해군의 봉쇄 결과로, 직물을 염색하는데 쓰이는 인디고의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나폴레옹은 그의 전열 보병대를 위해 흰색 제복을 도입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1806년 4월 25일 칙령에 따라, 전열 보병대의 다음 연대들은 흰색 코트를 배정받았다. : 제3, 제4, 제8, 제12, 제14, 제15, 제16, 제17, 제18, 제19, 제21, 제22, 제24, 제25, 제27, 제28, 제32, 제33, 제34, 그리고 제36 전열보병 연대.(Journal Militaire Vol I 1806, pp 176-178)
그 다음 칙령은 모든 전열 연대를 언급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못마땅함을 표현했으며, 112개 연대 중 18개만이 이들 군복을 지급받았다. 이는 그가 아일라우에서 피로 뒤덮인 흰색 군복을 목격한 뒤로 벌어졌다고 얘기되어진다. 하지만, 나(필자)에게 있어선 이러한 이유는 다소 이상하게 들린다. 아일라우 전투는 눈에 내리는 겨울 날에 치러졌고, 병사들은 따뜻하고 긴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렇기에, 얼룩진 피는 그 밑에 착용한 흰색 코트가 아니라, 외투 위에서도 눈에 보일 수 있었다. 두번째로, 흰색 군복은 오스트리아군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그들은 줄곧 그것들(흰색 군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는 작센군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흰색 군복이 나폴레옹에게 지난 세기의의 구 체제를 상기시켰고, 그랬기에 그가 그것들을 못마땅해한 것이라 추측한다. 1807년 인디고 수입이 재개되었고, 암청색 코트는 복귀했다.

(제108연대 상급 장교의 조끼, 1812년경)
1812년 1월에는 소위 아비-베스트(habit-veste)가 도입되었는데, 훨씬 짧은 연미복(tails, 장교들의 연미복은 약간 더 길었다.)을 갖춘 코트였다. 흰색 턴앤백 커프의 경우, 소총병에겐 푸른색의 왕관을 씌운 "N"자가, 척탄병에겐 붉은색 수류탄이, 그리고 도약병에겐 노란색 호른을 지니고 있었다.
이 코트는 (필자의 의견에 따르면) 나폴레옹 시대의 모든 보병 군복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우아하다. 흰색(경보병대의 경우엔 암청색)의 흉갑(plastron)식 옷깃(lapels)은 끝부분이 흰색으로 되어 있었다. (경보병대의 경우엔 흰색) 소맷동은 끝부분이 흰색으로 된 붉은색으로 칠해졌다. 바딘(bardin) 대위는 이 코트의 디자인을 책임졌고, 이러한 이유에서 이 군복은 서구 문학에 있어서 '바딘 군복'(bardin uniform)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5.2. 이각모(bicorns) (1804년 전열보병의 복장, 대부분 이각모를 쓰고 있다.) 이각모는 혁명 전쟁과 제국 초기 시기에 걸쳐서 착용되었다. 이각모는 착용하기에 가볍고 편안했다. (그래서) 병사들은 이를 좋아했다. 프랑스 보병대는 그 유명한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역과 1806년 예나 전역 기간 동안 그것들을 착용했다. 소총병들은 모자에 부착된 파란색 또는 초록색 방울술(pompon)으로 반대로, 척탄병들은 붉은색 방울술로 구분되어졌다. 
5.3. 곰가죽 모자(bearskins)

곰가죽 모자(일부는 양가죽으로 만들어졌다.)는 1789년에 재도입되었다. 그것들은 몇몇 척탄병(과 경보병대의 총기병대)들만이 착용했다. 병사들은 쓰기에 편했기에 곰가죽 모자를 좋아했다. 이는 이각모보다 사브르가 내리쳐질 때 더 나은 보호막을 제공해주었다. 곰가죽 모자는 샤코보다 자르기 어려웠고, 헬멧보다 더 나은 속(padding)을 가졌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소 비쌌다. 1792년에 도입된 개혁들 중 하나가 전역과 행군을 하는 동안 곰가죽 모자를 이각모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곰가죽 모자는 검은색의 방수천에 쌓인 채로 소지되었다. 곰가죽 모자는 (그 내구도가) 6년 간 버티는게 보통이었다.
곰가죽 모자는 다소 높은 가죽 모자였다. 1801년의 칙령에 따르면 :
-척탄병(전열 보병대)의 곰가죽은 정면에서 재었을 때 37.9cm.
-도보 총기병대(전열 보병대)의 곰가죽은 29.8cm
-근위 기마 척탄병대의 곰가죽은 31.8cm
1812년에 발효된 바딘 규정에 따르면 근위 도보 추격병대의 곰가죽은 35cm 높이였다.

곰가죽에는 붉은색 깃털 장식과 흰색 끈이 부착되었다. 흰색 끈은 공식적으로 붉은색으로 대체되었지만, 흰색이 더 많이 쓰였다. 척탄병의 곰가죽 모자엔 발화하는 수류탄이 세공된 황동판이 있었다. 몇몇 동판에는 연대 숫자가 있기도 했다. 총기병의 곰가죽엔 동판이 없었다. 또한 동판이 없는 척탄병 곰가죽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1815년 고참 근위대에도 동판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공식 설명서에선 척탄병들에겐 황동판을 요구했다.
루셀롯(Rousselot)에 따름르면, 1804년 곰가죽 모자는 두각을 드러낸 전열보병 연대에 보상으로 가끔 주어기도 했지만, 단순히 그들이 곰가죽 모자를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 1805년 7월 경보병 연대의 총기병대는 "다가오는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연대 창고에 그들의 곰가죽 모자를 반환하고 대신 샤코를 쓸 것을 명령받았다.
1807년 프리틀란트에선, "포탄이 우디노의 포병 탄약차를 때렸을 때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한 무리의 쿠호른(Coehorn) 척탄병들을 쓸어버렸다. 평소대로의 우디노는 그의 하인에게 모든 곰가죽 모자들을 모을 것을 명령했다." (Arnold - "Napoleon's Triumph")
5.4. 버스비(busbies)/콜팩(colpacks)

더 짧은 가죽 모자는 버스비 또는 콜팩이라 불렸으며, 경보병대 사이에서 인기 있는 군모가 되었다. 예를 들어, 1806~1807년에 일부 도보 총기병대가 그것들을 착용했다. 1809년까지 많은 도약병들도 그것들을 채용했는데, 가령, 제10 경보병 연대의 도약병들과 우디노의 정예 사단의 도약병들이 대표적이다.
1806~1807년 전역에서 일부 총기병대는 붉은색 끈과 깃털 장식이 달린 곰가죽 모자를 썼다. 1811년 몇몇 경보병 연대는 그들의 총기병들에게 곰가죽 모자를 쓰도록 유지했지만, 다른 연대는 총기병들에게 버스비나 샤코를 지급했다.
5.5. 곰가죽 모자와 콜팩의 공식적인 종결
1812년 2월에 발효된 바딘 규정은 많은 변화를 도입했다. 예를 들어, 곰가죽 모자와 버스비/콜팩는 곰가죽의 부족 사태로 말미암아 공식적으로 생산 중단되었다. 전열보병대의 척탄병들과 경보병대의 총기병들은 붉은색 V자형 장식(Chevron)에다 상부나 하부에 붉은색 끈이 달린 샤코를 채용할 것을 명령받았다.
하지만, 제46 전열보병 연대를 비롯해 소수의 보병 연대에선 1814년까지 척탄병들에게 곰가죽 모자를 씌웠다. 그것들은 끈과 깃털장식이 없었고, 많은 것들이 동판 장식도 없었다. 소수의 경보병대에서도 곰가죽 모자를 유지하긴 했다.
5.6. 샤코(shako)

1800년대 초기엔 샤코라 불리는 높은 원통형 모자가 소개되었다. 샤코는 더 무거웠고 착용하는데 있어서 이각모만큼 편안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훨씬 높이가 높았고, 더 우아하게 보였다. "샤코"란 단어는 헝가리 후사르의 군복 일부분으로 헝가리식 이름인 '체스카(cseka)'에서 유래되었다. 곧 샤코는 거의 모든 유럽 군대에서 많은 연대들의 표준 군용 모자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지배적인 위치는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공식적으로 프랑스 보병대의 샤코는 1806년 2월에 인가되었고, 1807년까지 이각모를 대체했다.2 "웨스트포인트의 사관생도들이 오늘날 착용하는 샤코의 왜소한 자취를 일종의 고문 도구로 생각하는 현세대들은 그것들이 (한때) 엄청난 혁신으로 평가받은 새로운 모자였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두꺼운 펠트와 가죽 또는 전반적으로 삶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샤코는 사브르 자상, 총의 개머리판, 그리고 떨어진 요강으로부터 병사들의 두개골을 보호해주었다. 그것의 얼굴 가리개는 병사들의 눈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Colonel John Elting - "Swords Around a Throne" p 445)

프랑스군의 샤코는 검었고, 펠트 또는 널로 만든 몸통에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지는 형태였다. 전면에는 마름모꼴 형태의 황동판 위로 삼각무늬의 코케이드가 달려있었다. 샤코의 끝은 방수처리가 되어있었고, 검은 가죽으로 된 챙(peak)과 레이스가 위와 아래를 둘러싸고 있었다. 샤코의 각 면은 검은 가죽으로 된 V자형 장식으로 보강되었다. 샤코의 내부에는 술(絉, pompon), 샤코를 가리기 위한 천, 숟가락, 담배(tobacco) 등등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원정 기간 동안 그리고 전투 중에 빈번하게, 샤코는 왁스칠한 린넨, 방수포, 가죽, 또는 예를 들어서 샤코의 외관에서 검은색을 투과해 볼 수 있게 해주는 동물 지방초로 얇게 처리한 칼리코 왁스칠(a thin callico waxed) 등으로 보호받았다.

* 샤코의 술(絉, pompon)과 깃털 장식(plume)
샤코의 끝에는 작은 술 또는 커다란 깃털 장식이 달려 있었다. 높은 깃털 장식은 일부 서전(緖戰)에 있어서 나폴레옹에게 선호되었는데, 그가 그것들이 그의 병사들의 외양을 확대시켜 적들로 하여금 너무 이르고 너무 높이 사격을 가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행진을 할 때 깃털 장식을 좋아했다. 하지만, 전투에서 그들은 그것들이 적군의 포병대와 척후병으로부터 너무 많은 주의를 끌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또한 키 큰 농작물 재배지 내로 숨거나 불의의 습격을 가해 적군을 기습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군인이라면) 적군은 당신이 그를 보기 전에 먼저 당신의 커다란 색색의 깃털 장식을 보았을 것이다.
술과 깃털 장식에는 다양한 색상이 존재했다.
-척탄병 중대(경보병대에선 총기병 중대)는 붉은색
-제1 소총병 중대(경보병대에선 제1 추격병 중대)는 암녹색
-제2 소총병 중대(경보병대에선 제2 추격병 중대)는 하늘색
-제3 소총병 중대(경보병대에선 제3 추격병 중대)는 주황색 또는 분홍색
-제4 소총병 중대(경보병대에선 제4 추격병 중대)는 자주색
-도약병 중대는 노란색
프랑스 보병대에는, 대대를 구분짓는 술이 없었지만, 비공식적으로 완전한 단일 색상의 술이 모든 중대의 제1대대에 장식되었고, 가운데 흰색인(white center) 술은 모든 중대의 제2대대에 장식되었다. 일부 연대 내에선, 흰색 술 안에 대대를 나타내주는 번호가 있기도 하였다. 그 다음으로, 붉은색 술은 제1 대대의 척탄병들을 위한 것이었고, 가운데가 흰색인 붉은색 술과 숫자 2는 제2대대의 척탄병들을 위한 것이었다.
1810년 11월 높은 깃털 장식은 폐지되었지만, 의복 부서에서 그것들을 1812년 12월까지 계속해서 팔았기에 여전히 착용되어졌다. 1811년 깃털 장식은 오로지 고위 장교들만 착용하는 것으로 허용되어졌다. 비공식적으론 깃털 장식은 몇몇 연대 내에서 척탄병들과 도약병들도 착용했다. 소수의 연대 내에선, 소총병들까지도 깃털 장식을 채용했는데, 가령, 제3 전열보병 대대에는 끝이 붉은색인 푸른색의 깃털 장식이 있었다. 크나큰 깃털 장식보단 작은 술이 더 인기가 있었다. 1812년 깃털 장식은 척탄병과 도약병들에게 재도입되었다.
*샤코의 끈(Shako cords)
행진과 점검을 때는 땋은 끈이 샤코에 부착되었다. 만약, 샤코를 전투 중에 착용해야된다면, 끈은 제거되었다. (끈은 몇몇 전투에서 비공식적으로 착용되기도 했다.) 끈에는 다양한 색상이 있었다.
-척탄병 중대(경보병대에선 총기병 중대)는 붉은색
-소총병 중대(경보병대에선 추격병 중대)는 흰색
-도약병 중대는 노란색
1810년 11월 땋은 끈은 폐지되었지만, 의복 부서에서 그것들을 1812년 12월까지 계속해서 팔았기에 여전히 착용되어졌다. 1812년에 다시 한번 끈을 폐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 황동 친스케일(chinsclaes)
1810년 11월에 약간 더 높은 샤코와 황동 친스케일이 도입되었다. 행진 중엔 황동 친스케일은 샤코의 얖면과 술에 매어졌다. 전투 중엔, 친스케일은 달리거나 뛰는 도중에 샤코가 고정될 수 있도록 턱 아래에 매어졌다.
* 1812년의 새로운 샤코

1812년엔 연대 번호가 새려진 반원형의 판 위에다가 끝에 왕관을 쓴 독수리가 있는 모습으로 구성된 새로운 판이 달린 샤코가 소개되었다. 삼객 코케이드는 부분적으로 도구리의 머리를 덮었다. 색색의 V자형 장식(샤코의 옆면)과 레이스(샤코의 위와 아래)는 정예 중대에게 도입되었다.: 척탄병은 붉은색이었고, 도약병은 노란색(몇몇 연대 내에선 초록색)이었다. 하지만, 일부 연대들은 척탄병과 도약병들에게 색색의 V자형 장식이 없는 여전히 구형 샤코를 사용했다. 이 같은 상황은 제8 전열보병 연대에서 일어났다. 깃털 장식은 척탄병과 도약병들에게 다시 재도입되었다. 샤코의 끈은 폐지되었다.
* 소총병, 도약병, 척탄병 중대의 샤코, 술, 깃털 장식, 끈, 그리고 어깨 장식

5.7. 반바지, 스타킹, 그리고 각반

(카빈총병과 척탄병의 각반 비교)
각반은 자갈이나 흙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느슨한 신발이나 잘 만들어진 신발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열 보병대의 각반은 무릎 위까지 왔지만, 많은 병사들이 그것들을 더 짧게 잘라냈다. 경보병대의 각반은 무릎 아래까지 왔고, 그것들의 위중심(top center) 부분에는 술(絉, tassels)이 흔들리고 있었다. 총기병병 중대의 술은 붉은색이었다.
전열 보병대에선 세 가지 종류의 긴 각반이 존재했다. : 행진을 위한 검은색과 흰색, 오랜 행군을 위한 회색. 1805년 근위 척탄병대의 율랑(Hulin) 장군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 "사령관은 행군 주중에 검은색 각반을 신은 몇몇 병사들을 지적해 왔으며, 그들에게 규정에선 회색 (각반)을 신을 것을 명령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검은색 각반은 행진을 위한 물건이었다. 하하지만, 여름에 행진을 위한 흰색 각반을 신는 많은 연대들이 있었으며, 겨울엔 반대로 검은색 각반을 신었다. 긴 흰색 각반은 1786년 의복 규정에서만 언급되었으며, 가끔씩만 표준 여름 복장이 되었다.3
1812년 1월에는 짧고 무릎 아래까지 오는 검은색 각반이 모든 보병대에 소개되었다. 새로운 각반은 전열 보병대와 경보병대가 행진과 전투를 위해 신었다. 경보병대의 각반의 술은 생산이 중지되었다.
1812년 전열 보병과 경보병대들은 긴 행군을 위해 짧은 회색 각반도 지급받았다. 고참 근위대를 제외한다면 흰색 각반을 신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열 보병대의 반바지는 흰색과 신축성 있는 양모 직물(woolen cloth)로 구성되었다. 경보병대의 반바지는 암청색이었다. 반바지는 각반 아래에도 착용될 수 있도록 충분히 길다고 생각되었지만, 많은 전열 보병대원들이 단지 무릎 아래와 각반 아래까지 오는 정도로 짧게 잘라냈다. 반바지와 스타킹은 병사들에게 무료로 제공되었지만, 보통 행진과 점검 등을 할 때를 제외하곤 거의 착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병사들이 그것들을 싫어했다. 병사들은 첫 야영지에서 스타킹과 반바지를 던져버리거나 원정 기간 동안 그것들을 "잃어버렸다." 프랑스 장교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러한 의복을 입는데 있어서 남성들은 체격이 좋고 균형이 잡혀있어야 한다. (...) 20세의 남성들은 아직 다 자라지 못했기에 -그게 아니라(nay), 우린 19세일 때 징집병으로 합류했다. 이 의복들은 그들에게 정말로 멍청한 인상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호리호리한 다리를 지닌 병사들은 두 물품을 싫어했다.
여기한 또다른 이유도 있었다. 반바지와 스타킹(과 기타 몇 켤레의 각반)은 배낭에 넣어 가지고 다녔고, 상당한 공간을 차지했다. 배낭 속에 새롭게 만들어진 공간은 병사들이 모은 약탈물과 잡동사니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각반의 부족은 프랑스 부대에서만 겪은 일은 아니었고, 예를 들어 1796년 오스트리아 군대는 4만 9000켤레의 각반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5.8. 바지

군은 스타킹, 각반, 그리고 반바지를 (병사들을 대신해) 지불해 주었지만, 반대로 병사들은 더 값싼(하지만 편안한) 바지의 값을 치르기만 하면 되었다.
린넨 바지는 여름의 원정을 위해, 양모 바지는 겨울의 원정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각반과 반바지 위에 착용되었다. 캔버스(바짝 엮고 거친 솜 또는 린넨의 천) 또는 칼리코로 만들어진 바지도 착용되었다. 보통 바지는 염색되지 않거나, 회색, 연회색, 황백색, 베이지색 또는 파란색이었다. 린넨은 탈색될 수 있었기에 정말 하예지기도 했다. 흰색 양모 바지는 실제론 누르스름했고, 백악으로 문질러야했다.4
또한 프랑스군은 노획한 바지나 그것들을 만들기 위한 중고 현지 보금품도 착용했다. "(라이프치히 근처의 포스베이다(Probstheida)) 전 마을은 젖은 흰색 깃털들의 물결에 흽쓸렸다 : 프랑스 병사들의 바지는 다 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대체품으로 이불잇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모든 이불과 매트리스들을 갈갈이 찢어냈다." (Digby-Smith "1813: Leipzig" p 61)
5.9. 배낭

배낭은 외부에 털이 노출된 소(또는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그곳엔 병사들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많은 개인 물품들이 들어갔다. 'Extrait des reglament provisoure pour le service des troupes en campagne '라는 어구는 병사들이 전투를 준비할 때 그들의 배낭을 벗을 수 없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찰스 오만(Charles Oman) 경은 반도에서 다르마냑(Darmagnac) 보병 사단의 경보병 중대는 그들의 배낭을 벗어서 쌓아둘 것을 명령받았다고 보고했다 : "배낭을 벗어나 쌓아둘 것을 명령 받은 다르마냑 보병 사단의 8개 경보병 중대의 것들을 (데를롱(daywrlon)이) 모아두고, 무리들이 아레테스퀘(Aretesque) 둔덕의 영국군 진지를 향해서 척후병들의 떼가 몰려가기 시작했다."
5.10. 외투(greatcoat)

비와 눈에 대한 주된 보호복은 외투였다. 이는 인기 있고 편안한 복장이었고, 밑에 자켓과 함께 입거나 자켓 없이 그냥 외투만 입을 수도 있었다. 따뜻한 날에는, 자켓이 배낭 안에 말려져 있었고, 안 좋은 날씨거나 또는 야간 행군이 있을 땐, 프랑스 병사들은 자켓과 외투 둘다 입었다.
혁명 전쟁 기간 동안은, 표준화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병사들이 민간 외투, 망토를 입었다. 약간의 외투들이 병사 개개인, 하사관, 그리고 장교들에 의해 구입되었다. 또한 다소 소수의 노획환 외투와 점령한 국가에서 징발한 옷감으로 만든 외투도 있었다. 1792년 도입한 개혁책들 중 하나가 장교들에게 하늘색 외투를 입힌 것이었다.
1805년까지 외투는 병사들에게 지급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연대 자금으로 구입되었다. 1806년 4월 모든 전쟁 대대(예비와 경비병 대대는 제외)가 베에지, 회색, 파란색 그리고 갈색 외투를 지급받았다. 가장 흔한 것은 흐릿한 베이지색이었고, 그것이 공식 색상이 되었다. (Ordannance du 25 Avril 1806: "La capote ou redingote en drap beige.")
1812년 러시아 침공 불과 몇 달전엔, 외투를 표준화하려는 최초의 현실적인 시도가 이뤄졌다. 1812년에 발효된 바딘 규정은 제21 조항에 따라, 전열 보병과 경보병의 모든 외투는 "베이지 서지 울"로 만들어졌다. "전열 보병과 경보병 사이의 차이는 없어졌고, 더 나아가 보병대와 포병대 사이의 차이로 없어졌다. 모든 것들이 베이지색 외투였다.
바딘 규정에 관한 책에서 샤를 바르네(Carl Vernet)는 보병대와 포병대의 사병과 하사관들에게 회색 외투가 제공되었고, 장교들에겐 암청색 외투가 제공되엇다고 했다. 크노텔에 따르면 1813~1814년 전역기 동안 프랑스 전열보병과 경보병의 많은 외투가 칼라에 붉은색 부분을 지니게 되었다고 했다.
두번째로 가장 인기 있었던 외투의 색상은 회색이었다.
* 고참 근위 보병대는 암청색을, 신참 근위 보병대는 암회색 외투5를 입었다. 1815년 신참 근윋의 대다수는 암청색 외투를 입은 채로 전역에 참가했다.
5.11. 바딘 군복, 1812년

"군용 복장은 민간 패션의 자유분망함과 변덕스러움을 따르지 않아도 될 필요가 있다. 군용 양식은 여성들의 패션과는 같지 않다."
몇몇 대령은 가끔 그들의 부대를 엉망으로 만들고 추가 비용을 맞추고 자금을 투입하면서까지 그들의 연대에게 돋보이는 군복을 지급하려데 너무 낭비를 하게 되었다. 황제는 이 같은 상황을 불만스러워했고, 1811년 군복 예산을 절감했다. 대령들은 곧 황제에게 군이 완전한 군복 규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게 되는 전쟁 장관에게 격렬히 항의했다.
나폴레옹은 즉시 프랑스 병사들을 위한 적절한 군복을 연구하고 결정하기 위해 베르티에 원수(군 참모총장), 베시에르 원수(제국 근위대 사령관), 그리고 왈더 장군(근위 기병대), 큐리알(근위 보병대)로 이뤄진 위원회를 구성했다. 부시에(Bourcier) 장군을 의장으로 하여 근위대의 몇몇 장교들로 구성된 또다른 위원회는 이 같은 개혁과 관련해서 필요한 세부 사항에 대해서 다뤘다.
바딩 대령은 기록했다. "군용 복장은 민간인 패션의 자유분망함과 변덕스러움을 따르지 않아도 될 필요가 있다. 군용 양식은 여성들의 패션과는 같지 않다." 1812년에 발효된 규정으로 구체화된 위원회의 결론은 대체적으로 합리적이었는데, 편안함, 경제성, 간소성, 그리고 통일성을 강조했다.
현존하는 코트는 몸의 상체 부분을 덮고 병사의 엉덩이를 포호하기에 충분할 만큼 긴 연마복(tails)을 갖춘 "애비 베스트(habit-veste)"란 새로운 코트로 대체되었다. 샤코판은 단순한 다이아몬드형으로 되돌아갔다. 가죽 모자(곰가죽 모자와 콜팩)는 붉은색(도약병들에겐 노란색) V자형 장식과 끈을 갖춘 더 높은 샤코로 대체되었다. 그 사이에, (군의) 수중에 있던 군복은 바닥이 났다. 하지만, 연대들은 "마모(wear-out)" 기간을 연장시켰다.
1812년에 지급된 새로운 군복은 일반적으로 바딩 규정(the Bardin Regulations)이라 지칭된다. (1812년 프랑스 군대의 병사들에게 적용된 바딘 대령의 규정이라는 의미) 고참 근위대와 중견 근위대는 군 부대들과는 분리된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군복 규정이 있었기에 바딩 규정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새로운 군복은 몇가지 주된 변화점을 포함하고 있었다. :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더 짧은 검은색 각반이 전열 보병대와 경보병대에 도입되었다. 각반은 전열 보병대에겐 흰색이었고, 경보병대에겐 암청색이었다.
-전열 보병과 경보병 대대(척탄병과 총기병)의 정예 중대들은 붉은색 V자형형 장식과 붉은색 상하 끈(bands)을 갖춘 샤코가 적용되었다. 노끈(band)은 없어졌다.
-새로운 암청색 코트는 이전엔 더 짧은 뒷자락을 가졌고 옷깃은 이전엔 조끼가 노출되었던 부분을 가리면서 허리까지 확장되었다. 옷깃의 색깔은 바뀌지 않아, 전열 보병대는 흰색이었고 경보병대는 암청색이었다. 보병대의 칼라와 소맷동도 바뀌지 않아, 전열 보병대는 붉은색이었고, 도약병들은 노란색이었다.
새로운 군복은 아마도 1812년 러시아 침공 전에 다부의 제1군단에게만 지급되었을 것이다. 코엔 드 스메트(Koen de Smet)는 기록했다. "바딘 군복은 1812년에 도입되었고, 몇몇 부대(또는 부대들 중 일부)는 확실하게 러시아 전역 전에 그것을 지급받았다. 하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그들의 구(舊) 군복을 입은 채로 러시아 전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확실치 않은데, 1813년까지도 대다수의 부대가 이를 지급받지 못했고, 주요 전역(독일 내에서의 대전투, : 라이프치히, 하나우 등)에서만 지급받았을 뿐이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의 부차적인 전역를 치르던 프랑스 부대들은 구 군복을 입었다.

* 그들은 전투에서 무얼 입었을까?
바딘 규정에 따르면, 보병대에겐 몇 가지 군복들이 있었다. : 하나는 훈련과 연습을 위한 것, 하나는 근무를 위한 것, 하나는 행군을 위한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행진을 위한 것.
-훈련복(Tenue d'exercise) : 흰색 조끼, 경찰 모자(bonnet de police)와 포켈렘(pokalem)이라고 불리던 천 모자, 탄약통, 솜으로 만든 훈련용 바지, 짧은 각반, 물통 등등
-근무복(Tenue de service) : 암청색 코트, 샤코, 탄약통, 바지, 짧은 각반, 배낭, 물통 등등
-행군복(Tenue de route) : 조끼 위에 입는 베이지색 외투, 반대로 암청색 코트는 둘둘 말아서 배낭 위에 올려놓고 다녔다, 보호용 천으로 덮은 샤코와 탄약통, 바지, 각반, 물통, 잡낭 등등
-행진복(Grande tenue) : 암청색 코트, 베이지색 외투는 둘둘 말아서 배낭 위에 올려놓고 다녔다, 샤코, 탄약통, 각반 내부의 발목까지 오도록 착용하는 울 트리코 작업복, 짧은 각반, 물통, 잡낭 등등

그래서, 전투 시에 그들은 무엇을 입었을까?
나폴레옹 이전에도, 사령관들은 그들 병사들의 외양의 가치를 깨달았다. 외양엔 적군에게 인상과 겁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예를 들어, 때때로 적들은 로마의 군단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는 그들이 최상급의 장비를 갖췄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시대의 전투에서, 프랑스 병사들은 행진용 군복의 색조를 낮춘 버젼을 있었다. (소규모 전투 또는 척후전일 때는 따질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황제는 병사들에게 "중요하고 신나는 일에 참여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를 원했다. 페종세크(Fezensac)에 따르면, 1812년 보로디노에서 모든 연대들은 "그들의 행진용 군복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연히 부대의 외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용기, 규율 그리고 훈련도였다. 1809년 사칠레(Sacile)에서 제8 기마 추격병대의 병사들은 거들먹거리는 자들로 가득찼고, 그들의 공적을 떠벌렸다. 그들은 그 전투에 배치되기 위해 완전한 정장용 군복을 갖추었다. 불행히도, 그들은 오스트리아 후사르들에게 패주하여 강으로 도망쳤다. 이는 형편없는 군복을 입은 보병대를 즐겁게 했다.
원정 기간 동안 그리고 전투 중에 빈번하게, 샤코는 왁스칠한 린넨, 방수포, 가죽, 또는 예를 들어서 샤코의 외관에서 검은색을 투과해 볼 수 있게 해주는 동물 지방초로 얇게 처리한 칼리코 왁스칠(a thin callico waxed) 등으로 보호받았다.
*시기별 프랑스군 복장의 변화
(1804~1812년 시기의 프랑스 전열 보병대,
공병, 군악대장, 마스터-드러머, 드러머, 호른 연주자, 피리 연주자)


(1804~1812년 시기의 프랑스 소총병)


(1804~1813년 시기의 척탄병과 도약병)


(1813~1814년 시기의 프랑스 전열 보병대,
바딘 규정 적용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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