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심양에서 첫날 밤
여장을 풀러 숙소에 들를 때는 잠시 비가 흩뿌리더니만 심양 고궁을 빠져 나오자 어느 덧 해는 뉘엿뉘엿 서편에 말갛게 가라앉고 있었다. 먼지바람이 잠든 심양은 비로소 자신의 냄새를 풍기며 이방인을 유혹했다. 심양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 우리는 중가(中街)로 향했다. 고궁에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차가 다니지 않는 광장 한복판에 들어서자 초현대식 큰 전광판이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수박과 멜론을 깎아 아이스케이크처럼 물린 과일 케이크를 단돈 3원에 주고 먹다가 허공을 올려보았다. 높다란 건물에 알록달록한 전류가 반짝이고 감전이라도 된 양 인파가 쏟아진다.
이제 도심은 어디를 가든 똑같은 형체의 괴물이다. 기이한 현상과 형상으로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아마 연암도 그 시절 휘황찬란한 점포 불빛에 눌려 잠시 허공중에 눈 맞춤을 했으리라. 하지만 그 시대의 연암의 부러움과는 전혀 다르다. 전광판에는 삼성 광고가 독차지하다시피 한다. 요즘은 어느 번화가를 가더라도 한국 상품이 번득이며 우리를 제일 먼저 반긴다. 심양 중가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스타일이라는 의류 판매 광고가 이를 말한다.
(중가 간판이 보인다)
일류로 통하는 한류, 당시는 종이에 담배, 우황청심환을 싸들고 먼 길을 나섰지만 이젠 그럴 필요도 없으며 그러지 않아도 서로들 탐내는 한국 상품이다. 길거리에서 조선족을 만났다. 귀신같이 우리가 첫 길임을 알아보는 사람들, 시원한 맥주 마실 곳을 찾는다하였더니 따라오라는데 알고 보니 술집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잠시 한 모금 축이려는데 2층 골방으로 안내하는 것이 못내 석연치 않았다. 자칫하다가는 돈은 돈대로 다 털리고 고주망태에 기분도 상하여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풍문이겠지만 그런 우려 섞인 사례를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허튼 믿음은 낭패를 자초한다. 우린 본거지로 돌아가 한 잔 하기로 했다. 돈이 축이나 위축되면 여행은 내내 불안해진다. 돈을 아낀다지만 아무리 그러해도 저녁나절 뒷골목 양 꼬치 향이 진동하는 곳에서 술 한 잔을 안 할 수는 없다. 연암도 심양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술 간판을 쳐다보았다.
연암의 글을 보면, <서로 손을 잡고 길 옆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 깃발에는 ‘相逢意氣爲君飮 (서로만나 의기투합하니 그대와 한잔하려고) 繁馬高樓垂柳邊 (높은 술집의 늘어진 버드나무에 말고삐를 묶는다.)’ 라는 왕유의 시구가 적혀있다.> <'하늘 위엔 술별[酒星] 한 알 번쩍번쩍 빛나고요/ 天上已多星一顆 인간 세상엔 부질없이 고을이름[酒泉]과 나란하네 / 人間空聞郡雙名.' 깃발에 펄럭이는 술맛 나는 금빛 글씨가 발걸음을 자꾸 재촉했다.>라는 표현이 있다. 술꾼들은 그 감칠맛을 제대로 안다. 술꾼이 뭐 어디 가겠는가.
누군가가 요즘 유행하는 말 한마디를 했다. '양꼬치엔 칭따오!' 우리는 외운 대로 씨타 루먼로 (서탑 도문로)를 말하고 택시를 탔다. 입구에서 내려 동네로 향했다. 그런데 밤이 되어 전광판이 요란하게 번쩍이니 낮에 본 느낌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기에 골목을 향하는 입구 모양까지 똑 같다보니 헷갈린다. 급기야 엉뚱한 데를 한참 누비고 다녔다. 엉뚱한 곳에서 조선 6학교란 간판을 보았다. 조선학교 6번째라는 말이 아닌가.
누구는 자기 뿌리를 숨기려 안달인데 이들은 떳떳이 한글 간판 붙이고 한글로 말하며 조선을 따로 배우고 있다. 이국에서 느끼는 조선의 의미는 다른 상념을 남긴다. 내 동포라는 물컹한 그 무엇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며 짠해지고 울컥하게도 만든다. 겨우 찾은 민박집 근처, 지치고 배고픈 상황, 더 이상은 불에 달구어진 양 꼬치 집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가게 간판이 재밌다. 금(金)자 셋을 모은 글자가 “태”로 읽히는 지, 한자로 쓴 글자 옆에 한글로 “태”라고 글자를 달아 놓았다.
우리는 태산식당에서 한개 3원한다는 양 꼬치를 너나 할 것 없이 들고 물고 뜯었다. 아쉽게도 칭따오 맥주는 이곳에는 없다. 대신에 설화라는 맥주를 들이키며 박 박사가 '빼취하'를 선창하면 우리는 '당취평'을 연발했다. 이 말뜻은 “빼갈에 취하면 하루가 즐겁지만 당신에 취하면 평생이 즐겁다”라는 말로 우리가 자작한 말이다.
(양꼬치엔 설화)
내일은 하얼빈으로 가는 날. 초행길에 아침 6시 20분 기차를 타려면 4시 반에는 일어나 서둘러야 한다. 당연 일찍 자는 게 맞는데 하지만 우리는 이를 거부했다. 여행의 묘미, 자유와 벅찬 행복에 겨워서다. 12원짜리 수박 반통에 10원 짜리 빼갈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줌마와 즐거운 소통을 즐기다 우리는 꿈결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국의 낯선 밤인데 전혀 그런 기분이 안 드는 서탑 조선족 동네다.
다음날, 눈 떠보니 새벽 4시인데도 밖이 훤하다. 위도가 높다보니 이런 현상도 생기지 싶다. 어제 술 탓에 속은 쓰라린데 그냥 나설 수밖에는 없다. 택시비로 20원 주고 심양 북역에서 내렸다. 대국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건물들이 왜 그렇게 큰지, 불필요한 허세도 만만치 않다 싶다. 긴장한 탓이지만 너무 서둘렀나 보다. 6시 20분까지는 50분이나 남은 시각, 그 동네는 우리네 ‘장충동 왕 족발’ 같이 '李先生'이라는 간판이 어디에나 내걸려 있다.
상해서도 흔히 보았는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라면 방방곡곡 이선생 매출액은 아마 상상을 초월 할 것이다. 곳에서는 우육면을 판다. 상해나 북경은 맥도날드가 판을 쳤는데 여기서는 KFC(肯德基)가 주름을 잡고 있다. 어제 SK 버스 터미날에서 10원짜리 햄버거를 사먹었는데 값도 싸고 맛도 기가 막혔다. 우리는 이서방이냐 KFC를 저울질 하며 홀 안의 식당을 기웃했다. 아쉽게도 어제 맛본 10원짜리는 없고 최소 28원이다.
그러던 차에 웬 젊은 친구가 만두 한쪽을 누런 죽에 적시며 마시는 모습을 보았다. 보는 순간 ‘바로 저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옥수수 죽이었다. 어릴 적 먹었던 강냉이 빵에 강냉이 죽, 우리도 그 친구와 똑같이 주문을 했다. 주문이라지만 실은 그 친구의 그릇을 콕 찔러 가리키는 손짓이었다.강냉이 죽은 5원, 만두는 3원. 나는 만두를 하나 더 시켜 먹었다. 모두 다 먹은 값이 51원이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다. 그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 흔한 산물을 찾아라. 이를 특산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강냉이죽으로 속을 푼다)
연암의 글에서 그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불쏘시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수숫대를 활용한다고 했다. 바로 이곳에서는 수수나 옥수수가 흔하다. 이 사실은 조금 지나 기차를 타고서 바로 또 알았다. 산 하나 없이 펼쳐진 평원에 널려진 것은 푸릇한 옥수수 밭이었다. 어찌 산이 하나도 없는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광개토대왕비에 말을 달리다 산을 만났다는 대목이 나온다. 알다시피 산이 없기에 오히려 어디쯤인지 쉽게 간파가 된다.
그래서 산을 지나쳤다는 근거로 저 아래 의무려산까지 왕은 내려갔다고 믿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의무려산은 심양보다는 오히려 북경에 더 가깝다. 아마 옥수수 죽을 우리 동네서 먹는다면 최소 3천원은 주어야 할 것이다. 2년 전 홋카이도에서 옥수수 삶은 것을 사먹었는데 설탕 끼를 한 옥수수 하나가 무려 4천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천원. 이틀 지나 길거리에서 군고구마 구워 먹듯 바로 군 옥수수를 하나 샀는데 단돈 3원이었다. 이곳 고장은 잣이나 살구가 또 유명하다고 했다. 내륙지방 한가운데인 이 고장에서는 아무래도 오징어가 귀할 것이다 싶어 나는 올 때 오징어를 몇 마리 사들고 왔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징어를 좋아한다. 이는 어제 오늘 터득한 맛이 아니다. 어릴 적 기억으로서 옥수수 죽을 순순히 생각해내듯이 살아온 내력으로서 몸 속 깊숙이 간직한 유전체이기도 한 셈이다. 나는 그중 한 마리를 안중근 의사 제사상에 올리기로 마음을 먹고 가져왔다. 필시 그도 이 맛을 모를 리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잣과 살구 그리고 오징어, 이 산물들이 내 예상대로 그대로 들어맞는지는 앞으로의 여정에서 두고 볼 일이다.
아무튼 맛나게 먹은 강냉이 죽이다. 지금도 그 맛이 삼삼하다. 단돈 5원으로 입맛을 자극한다는 것은 의외인데 이는 바로 숨겨진 인체의 비밀과 연관이 있다 싶다. 핏줄을 못 속이듯 체내에 밴 입맛도 어쩔 수는 없다. 이윽고 고속열차가 출발했다. 우리 돈으로 쳐 5만원 꼴이니 비싼 비용임에 틀림이 없는데 시속 3백 km로 달리니 시간 여행으로는 그만이다.
심양에서 하얼빈을 단 2시간에 가는 마당, 얼마 전 까지도 열 몇 시간을 달려서 드디어 하얼빈이나 장춘 길림성 용정에 닿았다는 글을 봤는데, 이제는 흘러간 역사가 되고 말았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를 위해 이 먼 거리를 어찌 달려왔을까. 자연 머리 숙여지고 그의 큰 신념이 가슴 속 깊숙이 닿는다. 1시간 쯤 지나 기차는 장춘에 잠시 섰다가 또 1시간 쯤 지나 이내 하얼빈 서역에 닿았다. 아침 8시 20분 하얼빈 도착. 그곳의 공기는 맑고 하늘은 푸르렀다. 이제 곧 안중근 의사를 만난다.
*** 돌아와 鑫자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는 흠으로 읽히며 중국에서는 신으로 읽히는 단어로 의미도 다소 차이가 나며 '대' 자는 아니었다.
鑫 기쁠 흠
1. 기쁘다 2. 사람 이름
[부수]金(쇠금
鑫[xīn]
1.
[형용사][문어] 재물이 흥성하다. [주로 상호(商號)나 인명에 쓰임]
첫댓글 연암은 조선사회와 같지 않고 세계에 열러있던 중국을 보면서 오로지 경국대전에만 진리요 참이란 조선의 가르침 하나만
갖고 살다가 중국에서의 다방면의 사상을 대하면서 그는 새로운 눈과 세계를 열었을 것을 생각하면 당시 조선의 識者들은
새로운 참에 대해 무던히 동경하고 그 꿈속을 헤매인걸 보면 새로운 세계관과 눈을 뜨게 해야 세계의 평화는 이룩되는게
아닌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