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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록(日知錄)[顧炎武: 明]으로 본 삼한(三韓) 땅과 왜(倭)
2022년 06월 12일
○ 「우리나라 국민(國民)들은,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質問)은, “한국인(韓國人)을 무시(無視)하느냐? 하는 비아냥으로 들릴 수도 있는 문제(問題)다.”
우리나라를 제외(除外)한 여타(餘他) 많은 국가(國家)들을 보면 : 그 자신(自身)들의 선조(先祖) 또는 나라 역사(歷史)에 대해 대략(大略) 큰 줄거리는 학계(學界) 공통(共通)의 의견(意見)과 주장(主張)으로 만들어져, 누구도 ‘큰 이의(異意)’를 제기(提起)하지 않으며, 국민(國民)들 역시 초중고(初中高) 정도의 교육(敎育)을 받으면 거의 알 수 있을 정도(程度)가 된다. 꿰뚫어 볼 수 있는 수준(水準)까지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말하는 “한국사(韓國史) 또는 조선사(朝鮮史)”는, 「배우면 배울수록, 연구(硏究)하면 연구(硏究)할수록 오리무중(五里霧中)에서 헤매어야 하고, 이의(異意), 반론(反論), 심지어는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는 등 그 부작용(副作用)이 어머 어마할 정도(程度)라는 것을 자각(自覺)할 수 있게 되어버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또 ‘역사(歷史)’란 것을 증명(證明)하게 되는 것은, 『수천(數千), 수백(數百) 년 전(前)에 선인(先人)들이 기록(記錄)한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것, 여기에 유물유적(遺物遺蹟)등에 의해 하나하나가 증명(證明)되고, 고증(考證)되어 역사(歷史)에 실제(實際)로 있었던 사실(事實)로 판명(判明)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역사(歷史)라는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는 아에 초장(初場)부터 일이 꼬여 역사(歷史)인지, 소설(小說) 얘기인지를 구분(區分), 구별(區別)할 수가 없다. 역사서(歷史書) 또는 지리지(地理志)등에서 말하는 것과 실제(實際) 반도(半島) 땅이라는 매우 한정(限定)된 땅에서의 자연환경(自然環境)적 요소(要素)들인 『“지형지리(地形地理)인 지세(地勢)산하(山河), 특이지형(特異地形)…방위(方位)…풍토(風土)…토산물(土産物)…거리(距離)…종족(種族)…부족(部族)…경(京)…외성(外城), 내성(內城), 각지(各地)의 대규모(大規模) 성(城)…도회지(都會地)…호수(戶數)와 인구(人口)…금수(禽獸)등” 조선(朝鮮)의 백성(百姓)들이 일만(一萬)년…반만년(半萬年)을 살아왔던 땅(地)의 설명(說明)들이 하나같이 “다르다”는 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說明)될 수 없다.』
➤ 『즉(卽) “다르다”는 것은, “이 땅 반도(半島) 땅에서의 삶이 아니었다.”는 뜻이고, 이는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의 영역(領域)이 아니었다.’는 것이며,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설명(說明)에 따라, 더 넓고, 더 큰 대륙(大陸)의 땅으로 이동(移動)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가 노예(奴隷) 근성(根性)인 사대사상(事大思想) 우선주의(優先主義)와 태수(太守), 제후(諸侯)의 이야기로 만들어져 남의 지배(支配)를 받아야 비로써 살아갈 수 있는 비참(悲慘)한, 천박(淺薄)한 백성(百姓)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소국(小國)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또 지들끼리 끼리 치고받으며, 상국(上國)에 걸사표(乞師表)나 올리는 사대주의(事大主義)로 찌든 소국(小國)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이건 모두가 현대사(現代史)에서 벌어진 비참(悲慘)한 결과(結果)다.
조선말기(朝鮮末期)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통치자(統治者)들의 무능력(無能力)과 변화(變化)를 두려워하던 초짜 정치세력(政治勢力), 왕실(王室)에서의 권력(權力)싸움, 탐관오리(貪官汚吏)에 의한 부정부패(不正腐敗)와 뇌물(賂物)과 매관매직(賣官賣職), 이에 항거(抗拒)하던 민중봉기(民衆蜂起)등으로 얼룩진 왕조(王朝) 말기(末期)의 사회혼란(社會混亂)과 이에 따르는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의 득세(得勢)로 말미암은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는, 조선(朝鮮)의 일만(一萬)년 역사상(歷史上) 가장 비참(悲慘)한 결과(結果)를 초래(招來)하였다.
이는 기득권(旣得權)층들의 변화(變化)를 두려워하는 무사안일(無事安逸)로 이어진 비참(悲慘)한 말로(末路)였다. 인간(人間) 사회(社會)는 항상(恒常) 변화(變化)되고, 개혁(改革)되어야 만이 발전(發展)을 도모(圖謀)할 수 있어, 남의 지배(支配)를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변화(變化)를 두려워한다거나 개혁(改革)을 미루는 나라들은 번영(繁榮)을 누릴 수 없다.
이는 수천(數千)년 전(前)이나 2022년 오늘이나 변함없는 법칙(法則)이자, 진리(眞理)다. 누가 변화(變化)와 개혁(改革)을 두려워하고 이를 막으려 하는가? 바로 기득권(旣得權)층들로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 우익주의자(右翼主義者),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이다. 변화(變化)되고 개혁(改革)이 이루어지면 지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많은 특권(特權)들이 분산(分散)되고 없어지기도 하고, 범죄(犯罪)를 추궁(追窮)당해야 하는 결과(結果)도 오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는, ‘변화(變化)와 개혁(改革)’만이 미래(未來)의 후손(後孫)들에게 번영(繁榮)과 발전(發展)을 고루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變化)와 개혁(改革)’은 늘 계속(繼續)되어야 하며, 이를 저지(沮止)하려는 자(者)들을 과감(果敢)하게 사회(社會)에서 퇴출(退出)시켜야 하는 것이다.
과거(過去)의 봉건왕조(封建王朝)에서는 ‘변화(變化)와 개혁(改革)’을 주장(主張)하는 무리들을 “반역(叛逆) 또는 역적(逆賊)등으로 몰아넣고, 구족(九族) 또는 삼족(三族)까지도 몰(沒)하는 악행(惡行)을 저질렀다.”
또 현재의 제국주의(帝國主義), 공산주의(共産主義) 또는 독재정권(獨裁政權)등에서는, 이러한 “변화(變化)와 개혁(改革)을 주장(主張)하는 무리들을 향해 똑같은 수준(水準)으로 정치보복(政治報復)을 한다. 이게 뭔가? 바로 위에서 말하는 것들의 연장선(延長線)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정치제도(政治制度)는 제도(制度)대로 놀고, 정치보복(政治報復)은, 일상적(日常的)인 일이 되어버렸다.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國家)라고, 법치주의(法治主義) 국가(國家)”라고 말로만 떠들어댈 뿐이다. 무엇이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國家)고, 무엇이 법치주의(法治主義) 국가(國家)인가? 실제적(實際的)인 면(面)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삼류(三流) 국가(國家)’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우리나라 대한민국(大韓民國)은, 1945년 일제(日帝)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로 해방(解放)되고, 1948년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가 수립(樹立)되었고, 소위(所謂)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國家)가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이승만(李承晩) 전 정권(政權)의 헛발질, 독재정치(獨裁政治), 군사(軍事)쿠데타로 대표(代表)되는 “박, 전, 노”정권(政權)등의 독재정치(獨裁政治)와 철권정치(鐵拳政治), 반민주정치(反民主政治)는 반세기(半世紀) 동안 이 나라를 장막(帳幕)에 가둬놓았다.
시작부터 꼬여온 이 나라의 정통성(正統性)은,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 우익분자(右翼分子)들에 의해 망가져버렸다.
「“반세기(半世紀)를 이어온 이 나라의 보수세력(保守勢力)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반성(反省)과 각성(覺醒)없는 ‘사대사상(事大思想)과 친일(親日)괴 친미(親美) 사상(思想)’에 운명(運命)을 걸 정도로 집착(執着)해 왔고, 이로 말미암아 이 나라의 자주성(自主性)은, 땅에 떨어졌다.」
이런 현상(現狀)은,
➊ 일제(日帝)때부터 이어온 보수우익(保守右翼)계 정치인(政治人)들+그 후예(後裔)들
➋ 일제(日帝)때부터 이어온 기득권층(旣得權層)+각지 토호(土豪)들+ 그 후예(後裔)들
➌ 일제(日帝)때부터 이어온 부역매국언론(附逆賣國言論)]들+그 후예(後裔)들
➍ 일제(日帝)때부터 이어온 보수우익(保守右翼) 종교계(宗敎界)+그 후예(後裔)들
➎ 일제(日帝)때부터 이어온 친일(親日),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그 후예(後裔)들
➏ 변화(變化)를 두려워하는 자각(自覺)없는 일부계층(一部階層)과 그 후예(後裔)들에 의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정통성(正統性)과 자주성(自主性)이 후퇴(後退)에 후퇴(後退)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2022년 6월! 지금(只今)도 마찬가지다. ‘각계(各界) 각층(各層)의 내노라’하는 자(者)들의 전력(前歷)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위에서 말하는 것에 예외(例外)가 없을 정도(程度)다. 즉(卽) 소수(少數)만이 예외(例外)에 해당(該當)되고 있을 뿐이다. 그 나라의 정통성(正統性)과 각 정권(政權)의 정통성(正統性)이 없다면, 국가(國家)도 정권(政權)도, 그 날 이후(以後)부터 붕괴(崩壞)되고 무너지고, 망(亡)하게 되는 것은 인간세상(人間世上)에서 철칙(鐵則)으로 통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 이야기는, 일본(日本)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이 만들어 준 “조선사(朝鮮史)”를 가지고, 뼈와 살을 조금씩 붙이고, 형용사(形容詞)를 듬뿍 뿌려 만들어 놓은 “이야기 책”이다.
우리나라 학계(學界)는 일사불란(一絲不亂)하며, 확고부동(確固不動)하다. 일제(日帝)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로부터 인수(引受)인계(引繼)받은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오늘날 이의(異意)나 반론(反論)등은 역적(逆賊)으로 몰리며, 학계(學界)에서 무자비(無慈悲)하게 퇴출(退出)당해, 말 그대로 ‘밥줄’이 끊어진다.
여기서 가공(加工)되지 않은, 왜곡(歪曲)되지 않은, 조작(造作)되지 않은, “참의 역사(歷史)”란 곧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지지고 볶고 따지고 해봐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反復)하고 있을 뿐이다. 즉(卽)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만 밝혀지면 1차적인 논쟁(論爭)을 끝낼 수 있는 것이다.
○ ‘일지록(日知錄)’은, 고염무(顧炎武)의 역작(力作)이라고 전해지는, 곧 『고염무(顧炎武 : 1613~1682) : 명(明) 말 ‧ 청(淸) 초의 학자‧사상가. 자는 영인(寧人). 정림(亭林)이라고 일컫는다. 강소곤산(江蘇崑山)의 사람.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취지로 해서 역사‧정치‧경제 이외에도 음운학(音韻學)‧금석학(金石學)에도 정통하고, 청(淸)대 고증학(考証学)의 시조로 여겨진다. 「天下郡国利病書, 천하군국리병서」를 편찬하고 저서 「音学五書, 음학오서」 「日知録, 일지록」 「亭林詩文集, 호림시문집」등의 저서(著書)가 있는데, ‘일지록(日知錄)’은 필생(筆生)의 정력(精力)을 다 바쳐 편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일지록(日知錄)’ 속에 삼한(三韓)과 관계(關係)되는 기록(記錄)이 있는데, 명(明)나라 말(末), 청(淸)나라 초기(初期)의 인물(人物)로 박학다식(博學多識)했고, 특히 고증학(考證學)의 시조(始祖)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대가(大家)였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삼한(三韓), 왜(倭)와 관계(關係)되는 원문(原文)만을 발췌(拔萃)한 것이다.】
○ 原抄本《日知錄》作者:顧炎武 明
(1) 《三韓今人謂遼東為三韓者,考之書序,成王既伐東夷 : 삼한(三韓)은 지금 사람들이 말하기를 요동(遼東)에 있는 삼한(三韓)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서(書)의 서(序)를 상고해보면, 성왕(成王)이 동이(東夷)를 쳤다고 하였다.》
➊ ‘삼한(三韓)은 요동(遼東) 땅에 있었다’는 것이고,
➋ ‘삼한(三韓)은 동이(東夷)’로, 주(周)나라 두 번째 왕(王)이었던 성왕(成王)때도 이미 요동(遼東) 땅에 있었다는 말과 같다. ‘기원전(紀元前: BC) 1,115년 때’의 이야기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 동이(東夷)는 구이(九夷)이며, 뒤의 삼한(三韓)이며, 78개 나라를 말하는 것이 되는데, 기원전(紀元前) 1,115년 그 이전(以前)에도 마땅히 존재(存在)해 있었고, 이들이 말을 듣지 않자, 성왕(成王)이 군대를 보내 쳤다는 것이다.
또 『‘요동(遼東) 땅’은, ‘삼한(三韓)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문제(問題)는 그 요동(遼東) 땅이 어디에 있는 요동(遼東) 땅이냐?』 하는 것이다. 아래의 ‘세 가지 요서요동(遼西遼東)설’은, 꾸준히 그 ‘고증(考證)자료(資料)’를 찾아내고 있다.
➊ 오늘날의 신강(新疆) 성계(省界)와 아랄해(Aral 海)간의 강(江)의 동(東)쪽이다.
➋ 오늘날의 포창해(蒲昌海 : 르포노르 : 鹽澤) 주변의 강(江)의 동(東)쪽이다.
➌ 오늘날의 난주(蘭州)로부터 은천(銀川)으로 흐르는 하(河)의 동(東)쪽이다.
(2) 《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 : 마한(馬韓)은 서(西)쪽에 있는데 54개 나라가 있고, 그 북(北)쪽에는 낙랑(樂浪)이 있으며, 남(南)에는 왜(倭)와 접(接)하였다.》
➊ 마한(馬韓)은 서(西)쪽에 있다하였는데, 그곳에는 54개 나라가 있었다는 것인데, 요동(遼東) 땅의 서(西)쪽이란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까?
➋ 54개 나라를 이루고 있던 마한(馬韓)의 북(北)쪽에는 낙랑(樂浪)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곳은 또 어디냐? 더불어 마한(馬韓)의 남(南)쪽 땅에는 왜(倭)와 접해 있었다는 것이다.
➌ 결국(結局)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 방위(方位)등을 생각해 보면, 동서남북(東西南北)이 모두 넓은 땅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問題)는 마한(馬韓)의 남(南)쪽은 바다(海)가 아닌 육지(陸地 : 뭍, 땅) 땅으로, 그곳에 “왜(倭)”가 있었다는 것이다.
(3) 《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貊接. 진한(辰韓)은 동(東)쪽에 있는데 12개 나라가 있고, 그 북(北)쪽에는 맥(貊)과 접(接)하였다.》
➊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東)쪽에 있었다. 또 12개 나라가 있었으며, 그 북쪽에는 맥(貊)과 접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➋ ‘맥(貊)’은 ‘맥(貉)’으로 ‘북적(北狄)’이라고 하였으며, 전한서(前漢書)에서도 북맥(北貊)은 나라이름이며, 삼한(三韓)에 속해 있었다고 하였다. 하북성(河北省) 동(東)쪽 땅은 ‘북적(北狄)이 될 수 없는 방위(方位)’다.
(4) 《並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內亦與倭接。凡七十八國,百濟是其一國焉. : 병진(並辰)은 진한(辰韓)의 남(南)쪽에 있는데 또한 12개 나라가 있고, 그 내(內: 안)에 또 왜(倭)와 접하였다. 무릇 삼한(三韓)은 78개 나라였는데, 백제(百濟)는 그 중의 한 나라였다.》
➊ 병진(並辰)은, 변한(弁韓)=변한(卞韓), 변진(弁辰)을 말하는 것인데, 역시 12개 나라로, 그 땅에는 왜(倭)와 함께 접(接)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➋ 그렇다면 “마한(馬韓)의 남(南)쪽 땅도 왜(倭)와 접(接)했고, 변한(卞韓)=변한(弁韓)의 땅도 역시(亦是) 왜(倭)와 접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說明)은, 삼한(三韓) 땅, 남(南)쪽에 ‘왜(倭)’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➌ 오늘날의 역사통설(歷史通說)에 따르면 :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 동(東)쪽 심양(瀋陽)을 중심(中心)으로 요동지방(遼東地方)이었다고 한다면, 『반도(半島) 땅의 절반(折半)정도인 한강(漢江)이남(以南)은 “옛 왜(倭)”의 땅이었다.』는 이야기가 성립(成立)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강(漢江) 이남(以南)인 “경기(京畿)일부로부터 충청도(忠淸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제주도(濟州島)”는 옛 왜(倭) 땅이었고, 그곳에 살고 있었던 엣 백성들은 “왜(倭)”였다는 뜻이 된다. 이를 인정(認定)할 수 있나?
또 하나는 진한(辰韓)은, 오늘날의 경상도(慶尙道) 땅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일지록(日知錄)’의 저자(著者)는 말하기를 : 〈진한(辰韓)의 남(南)쪽에 ‘변진(弁辰)=병진(並辰)=변한(弁韓)’이 있었고, 그 남(南)쪽 땅에 또 “왜(倭)”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의 부산(釜山)으로부터 대마도(對馬島)와 열도(列島) 땅이 모두 육지(陸地)로 연접(連接)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한해협(大韓海峽)은 바다(海)가 아니라 뭍(땅: 陸地)이었다는 뜻이 된다.』 인정(認定)할 수 있겠는가?
➤ ‘삼한(三韓) 땅’은 동(東)쪽과 서(西)쪽은 해(海)에 한하고, 땅은 합하여 4,000리에 뻗쳐있었다[地合言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고 하였으므로 “남(南)”쪽은 육지(陸地)가 연이어져 있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다른 땅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疑問)은, “해(海)”자의 용도(用途)다. 오늘날의 바다였을까? 호수(湖水) 또는 큰 하천(河川)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 말은 곧 ‘당시(當時)의 삼한(三韓) 땅’은, 〈반도(半島)가 아니라 더 넓고 큰 땅에 있었다.〉는 것을 고증(考證)해주는 기록(記錄)인 것이다.
(5) 《三國·魏志:齊王正始七年,幽州刺史毋丘儉破高句驪,( )貊,韓,那奚等數十國,各率種落降. :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 제왕(齊王) 정시(正始)7년에, 유주자사(幽州刺使)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高句驪), ( )맥(貉), 한(韓), 나해(那奚)등의 수십(數十)개 나라를 깨뜨리니, 각 종락(種落)들이 와서 항복(降服)했다.》하였는데,
➊ ‘정시(正始) 7년’이면 기원후(紀元後: AD) 246년(年)으로 고구려(高駒驪) 동천왕(東川王)때의 일이다. 그러나 ‘관구검기공비.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열전(列傳)’에는 ‘244’년즉(卽) ‘정시(正始)5년’으로 되어있다.
관구검기공비[毋丘儉紀功碑]는, “길이 약 25.8㎝, 너비 약 26.4㎝, 비문의 서체는 한예서체(漢隷書體)이고, 자경(字徑)은 약 2.7㎝”로 “석각(石刻)의 일부가 1906년 만주의 집안현(輯安縣) 판석령(板石嶺)에서 도로공사 중에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솔직히 말해 ‘위조(僞造) 또는 제품화(製品化)된 것이다’라는 확률이 99,99%다. 왜냐하면 위의 ‘고염무(顧炎武)’도 말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사건(事件)이기 때문이다.
➋ 위의 기록(記錄)중에서 중요(重要)한 것은 : 『당시(當時) 고구려(高駒驪) 땅에는 수십여(數十餘) 개(個) 나라가 있었는데, 이는 모두 ‘고구려(高駒驪)의 제후국(諸侯國)’들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만약(萬若), 역사(歷史)에서 가정(假定)이란 존재(存在)할 수 없다. 어가지로 오늘날의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으로 가정(假定)해 본다면 :
➌ 〈오늘날의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과 ‘요녕성(遼寧省)·흑룡강성(黑龍江省)·길림성(吉林省)·흑룡강(黑龍江) + 극동(極東) 러시아(Russia) 땅·사할린[Ostrov Sakhalin: 樺太]·홋카이도[北海道]‘까지 육지(陸地)로 연 이어져(連接) 있으며, 이 모두가 삼한(三韓)의 땅이요〉,
➍ 〈반도(半島) 남(南)쪽의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제주도(濟州島)·열도(列島) 구주(九州)’까지 육지(陸地)의 땅으로 연이어져(連接)있으며, 이는 한반도(韓半島) 땅이어야 하고, 모두가 ‘삼한(三韓)의 땅’이어야 하며, 그 남변(南邊)에 왜(倭)가 있었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나 ‘바다(海)가 육지(陸地)가 되고’, ‘육지(陸地)가 바다(海)가 되는 일’은 ‘천지개벽(天地開闢)’때나 가능(可能)한 일이다.
○ ‘조선사=한국사(韓國史)’의 역사무대(歷史舞臺)는, 『한반도(韓半島) 땅은, 너무 좁고 좁아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펼쳐낼 곳이 없다. 더 크고, 더 넓은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땅일 때 가능(可能)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제(問題)는,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의 정서(情緖)다.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에 대한 관심(關心)은 지나가는 소나기처럼 그저 상관(相關)이 있을 때나 조금 관심(關心)을 갖는 척 할 뿐이다. 아마도 수십(數十)년이 더 흐르고 난 뒤의 우리사회는 재야(在野)조차도 발 디딜 틈이 없어지리라 추측(推測)된다.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국지전(局地戰)에서 세계대전(世界大戰)으로 확대(擴大)되어 세계화(世界化)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는 이대로 묻히고 말 것이다. 7,700만 국민(國民)들과 정권(政權)이 ‘한 맘’의 숙원(宿願)이 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오늘도 사대사상(事大思想)으로 무장(武裝)된 친미(親美)와 친일분자(親日分子)들이 활개를 치며 거들먹거리는 세상인데, 그런 세월(歲月)이 올 수 있을까? 〉
2022년 06월 12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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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로터스"님!
이 '어려운 시기', 관심과 성원에 감시드립니다.
"조선사=한국사"에 대한 잠시의 "열기"는 이제 추억이 되어버렸고, 얼마동안은 숨 고르기에 들어간 것 같은, 적막감만 감돌뿐입니다.
그래도 늘 관심을 갖고 성원해 주시는 여러분들이 계시기에, 함께 있다고 봅니다.
특별한 어떤 획기적인 계기가 있다면 모르되, 아마도 오랜 세월 "조선사=한국사" 이야기는 '수면 아래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이기 때문에, 누가 누굴 탓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광스러운 일입니다.
더더구나 보수우익들이 정권을 가진 오늘은, 앞으로 5년을, '조선사=한국사' 입장에서 보면 "암흑기"에 들어섰다고 보아도 무리없는 설명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보수우익들'의 뿌리가 사대주의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며, 특히 자주, 자립과는 거리가 먼 그들은, '조선사-한국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그저 일제로부터 넘겨받은 제국주의자들의 조선사만을 애지중지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건 진보정권도 대동소이한 일이지만, 특히 보수우익들은 열열히 신봉하는 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