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박경화⋅박사의 부자와 김종륜이 순교 전 피신했던 교우촌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 멍에목은 화남면 평온리 앵무당과 동관리 갈골과 접경지역이다. 멍에목(‘머미기’혹은 돌미기)으로 불리지만,
멍에목 윗마을이 구병리이고, 구병리의 위쪽인 북쪽 골짜기가 돌미기로서 이곳이 옛 신자촌이다. 멍에목은 최양업 신부가 사목 방문한
교우촌으로 1851년 10읠 15일자 8번째 서한에 나오는데, 병인박해 때 순교한 안 루카, 여 요한과 그의 아내 최씨 등이 살았던 충북 보은군
멍에목으로 일찍부터 이해되었다. 그 뒤에 멍에목 교우촌은, 정양모 신부가 보은군 내속리면 구병리 멍에목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혔는데,
현재 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상주시의 앵무당과 갈골과 돌미기는 속리산(1,057m)의 지맥인 구병산 능선을 경계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돌미기는 구병산(876m)의
서쪽 기슭 중턱에 자리한다. 인근의 교우 촌으로는 이윤일(요한)성인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갈골과 앵무당이 있다. 아울러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편지를 쓰고 여름휴가를 보낸 동관음사가 있던 절골〈화남면 동관1리 동관음사 터〉이 인접해 있다.
예부터 피난지로 알려진 이곳은 가마기를 거처 이곳에 피신 온 박경화(바오로) ․ 박사의(안드레아) 부자가 1827년 정해박해 때 상주 포졸들
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다시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박경화(바오로)는 옥사하고, 아들 박사의(안드레아)는 12년간
감옥에서 고생을 하다가 함께 옥살이를 해왔던 김사건⋅이재행 등과 함께 1839년 4월 14일〈양력 1839년 5월 26일〉에 대구 관덕정에서
48세 나이로 참수되었다.
박사의(안드레아)의 아들 소랑(사도 요왕) ․ 딸 모정과 모열은 나이가 어려서 석방되었는데 아들은 문경 여우목(문경읍 증평리〉에 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병인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1868년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한 김종륜 루카도 이곳으로 피신하여 숨은 적이 있었다. 충청도 공주 태생인 김종륜 루카는 어려서
입교해 뿌리 깊은 신앙을 갖고 있었다. 박해로 충청도 일대가 소란해지자 길을 떠나 경상도 상주군 멍에목의 교우촌으로 피신했던 그는
다시금 울산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결국 1868년 포졸들의 손에 붙잡혀 경주 진영으로 끌려가서 즉시 영장의 심문을 받고 울산 장대벌
에서 이양등(베드로), 허인백(야고보) 등과 함께 1868년 군문효수를 당하였다.
구병리는 19세기 중엽부터 정감록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라 전해지며 본래 보은군 속리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자연부락인 윗 멍에목이, 느진목이, 된목이 등 3개 자연부락을 병합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현재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 순교자
◆ 복자 김종륜 루가(1819~1868년)
김종륜(金宗倫) 루가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요, 족보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루가는 평소에 특히 화목함을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이후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언양 간월(현 경남 울산시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루가는 얼마 안되어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김종륜 루가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將臺)로 끌려나가 이양등 회장과 허인백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 복자 박경화 바오로 (1757~1827년)
박경화 바오로는,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33세 무렵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안드레아)는
그의 아들이다. 바오로는 입교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열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후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60세가 지나서 바오로는 가족들을 데리고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
하여 살았다.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으며, 4월 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었다. 상주 관장은 도저히 바오로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그는 관장의 명령에 따라 한 승려와 교리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관리들이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고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노령에다 여러 차례의 형벌로 인해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 옥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 (1792~1839년)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안드레아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안드레아는 가족들과 함께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1827년의 정해박해가 발생한 뒤, 안드레아는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그믐경 그의 가족들은 교우들과 함께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내
다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간 안드레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인내와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한 뒤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도 박사의 안드레아는 여러 차례의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는 차츰 쇠약해지게 되었고,
이에 그는 관장에게 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관장은 이러한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
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가 옥중에서 보여준 효행은 모든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 청주교구 ‘멍에목’ 교우촌, 성지로 지정
- 복자 박경화·사의 부자와 순교자 5위의 거주지이자 체포 현장으로 의미 지녀 -
청주교구(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2016년 8월 12일 자로 멍에목 성지를 신설했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 일대를 ‘멍에목 성지’로
지정하고, 초대 담당에 박진성 신부를 임명했다. 이곳은 2014년 8월 시복된 복자 박경화(바오로)ㆍ사의(안드레아) 부자의 거주지이자
체포된 곳이며,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방문했던 멍에목 교우촌 자리다.
박경화 복자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돼 순교했고, 아들 박사의 복자는 12년간 옥살이 끝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
했다. 또한 1868년 박해 때 울산 병영장대에서 순교한 충청도 공주 출신 복자 김종륜(루카)도 한때 보은 멍에목 교우촌에 피신했고,
순교자 안 루카와 여 요한, 최조이 부부, 여규신, 최운흥 등 5위도 멍에목 교우촌에서 체포돼 순교했다. 현재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의 일원으로 시복을 추진 중인 최용운(암브로시오)도 멍에목 교우촌의 회장을 지내고, 1867년 청주에서 순교했다.
교구장 장봉훈 주교 등은 이 같은 교회사적 의미를 반영, 여러 차례 답사를 거쳐 멍에목 교우촌을 성지로 지정했다.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