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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장가들다
창세기 29:15-28
주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성령강림 후 제8주일이다. 한 여름에도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들이 무르익기를 바란다.
그물짜기 구약반을 공부하면서 새삼 느끼는 일이 있다. 성경을 공부하다보면 불편한 내용을 접하게 된다. 어떤 인물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젊은 야곱이 그런 인물이다. 야곱은 자기가 크게 되려고 형을 작게 만들었다. 자기가 중심에 서려고 형을 밀어 냈다. 농간을 부려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다.
물론 야곱도 인간이어서 자신이 저지른 결과에 대해 금새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형의 살해 위협을 받았고, 그 위협이 얼마나 직접적이었던지 하란이란 너무나 먼 곳으로 도망을 쳤다. 사실 야곱과 에서의 관계는 아주 흔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더 불편하게 느껴진다.
누구나 내면에는 ‘그림자 형제’와 ‘그림자 자매’가 있다. 남은 속여도 제 그림자는 속이지 못한다. 그림자를 속이려는 사람은 평생 그 꼬리를 밟히며 살아간다. 두려움과 죄의식으로부터 영영히 도망칠 수 없는 이유다.
야곱 이야기는 핵심적인 주제가 ‘축복’이다. 야곱은 평생 축복과 씨름하였고, 결국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은 그가 자기 그림자와 맞섰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함께 지닌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마주하였다. 결국에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였다.
‘야곱 3부작’ 중 두 번째 시간에는 비록 야곱이 꾀를 잘 부려도, 더 큰 술수를 부리는 외삼촌 라반에게 당하는 이야기다.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은 야곱에게는 힘에 부치는 사람이다.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야곱의 출세와 성공이 아니다. 그의 생애를 통해 축복을 쟁취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의 드라마에 초대하신다. 야곱의 이야기에 나를 대입하여 보자. ‘그때, 거기, 이스라엘 백성’을 ‘지금, 여기, 나와 우리’로 바꾸어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실감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의 드라마에 참여하는 사건이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야곱의 하룻밤 잠자리를 소개하였다. 야곱은 형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겨우 도망쳤으나, 하루도 안심할 수 없었다. 하란 외삼촌 댁으로 간다지만, 그곳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외롭고 먼 광야 길이었고, 그는 쫓기는 신세였다. 더욱 불안한 것은 하란에 가더라도 그에게 보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루스라는 곳에 이르러 쓰러져 잠이 들었다. 돌을 베개 삼아 누웠는데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 꿈을 꾸었다. 지난 주 마지막 부분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창 28:15).
야곱이 꾼 꿈이지만, 너무나 생생하였다. 자신의 불안감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야곱에게는 얼마나 힘이 되던지,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베개를 기둥으로 세웠다. 그리고 기둥 위에 기름을 붓고 선언했다. 야곱이 한 맹세를 보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1-22).
야곱의 돌베개는 이스라엘 신앙고백의 기초가 되었다. 더 나아가 그곳은 이스라엘 신앙의 집이요, 주춧돌이며, 기둥이 된 것이다. 바로 거친 광야의 잠자리에 계셨던 하나님, 그리고 도망자의 불안한 마음을 두드리신 하나님은 지금 내가 고백하는 하나님이시다.
야곱은 비로소 하란으로 갈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이런 야곱을 믿음의 눈으로 이해하자면 그는 자신의 생에 무한한 애착을 지닌 생의 투사와 같다. 그는 몸부림치는 인생의 도전자였다.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준다. 반면교사든, 모범교사든 그는 진지하게 자신의 생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든 인생들에게 불편한 선배이다.
2)
마침내 야곱은 하란에 도착한다. 사실 벧엘에서 길몽을 꾸었다고 갑자기 문제가 확 풀리는 것은 아니다. 당장 인생역전은 없었다. 하란에 도착해 외삼촌 댁에 머물며 새로운 잠자리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도망자인 그에게 보장된 미래는 없었다.
야곱은 하란에서 원치 않는 피난 생활을 한다. 도망자인 그에게 희망이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이 야곱이 직면한 현실, 입장, 선 자리였다. 야곱은 형 에서와 연로한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가로챈 대가를 혹독하게 치룰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상대가 외삼촌인데, 외삼촌 라반은 하란 물정 모르는 만만한 조카를 속이려고 든다. 전에 브엘세바 집에서 형과 아버지를 쉽게 속이던 야곱은 이제 객지 하란에서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다. 야곱은 ‘아야’ 소리도 못한다. 라반의 터무니없는 속임수는 예전에 야곱이 쓰던 수법과 똑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야곱은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행위 때문에 책임을 져야한다. 그 결과 ‘속이던 자’ 야곱은 ‘속임을 당하는 자’가 되었다. 조카의 약점을 이용한 라반의 속임수는 과거에 야곱 자신이 저질렀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하란에 온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며 처음 한 달 간 임시로 라반의 일을 돕던 중, 외삼촌의 제안을 받는다.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15).
외삼촌은 조카였지만, 정식으로 고용계약을 맺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야곱은 보다 멀리 내다보면서 정착하고 싶었다. 고생을 하다보면 금방 살 길을 찾는다. 기왕 하는 고생이라도 장기적인 안목이 생기게 마련이다. 야곱은 당장 고향으로 돌아갈 처지가 못 되니 오래 버티는 것이 살 길이라고 여겼다. 아마 그날그날 불안한 하룻밤의 인생이 아닌, 이젠 장기전을 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 대안은 바로 장가드는 일이었다.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16).
라헬은 외삼촌 라반의 작은딸 라헬과 혼인하고 싶었다. 라반도 동의하였다. 그러나 지참금이 없으니, 7년 동안 외삼촌을 섬기며 일하기로 약속하였다.
러시아 속담에 ‘바다에 나갈 때는 한 번, 전쟁에 나갈 때는 두 번,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다. 야곱은 장가드는 일을 추진하면서 좀 더 심사숙고해야 하였다. 7년 노동을 마친 후 라반은 혼인 잔치를 열어 주었는데, 그러나 외삼촌이 아내로 준 사람은 약속과 달리 아우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다.
이런! 첫날밤부터 속았다. 외삼촌은 약속을 위반한 이유를 설명한다.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26-27).
이와 같은 부당한 조건이라면 처음 계약하는 자리에서 미리 설명해 주어야했다. 외삼촌은 자기 집에 몸 붙여 사는 조카를 만만히 보고, 억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혼인기간 7일이 지나 라헬을 두 번째 아내로 주되, 이를 위해 7년을 더 일하는 것이다. 어쨌든 원치 않는 ‘1+1’을 떠안으며 장가지참금으로 무려 14년을 소비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이런 저런 외삼촌의 속임수 때문 야곱은 무려 20년 이란 긴 세월 동안 야곱은 인생의 쓴맛을 본다. 외삼촌 라반의 사기 실력은 풋내기 야곱보다 여러 수 위였다. 이렇게 형과 아버지를 ‘속이던 자’ 야곱은 외삼촌에게 같은 수법으로 ‘속임을 당한 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실패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다.
야곱이 든 장가는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장인어른이 저지른 혼인빙자 사기행각과 같았다. 그런데 신앙의 눈으로 살펴본다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야곱은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성숙한 기회가 되었다.
3)
창세기는 단순히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창세기는 인생의 지혜가 담겨있어, 믿음의 눈으로 읽으면 내 삶에 적용할 지혜를 얻는다. 창세기는 영어로 ‘제네시스’이다. 현대자동차는 최고의 차에 제네시스란 이름을 붙였는데 아마 ‘작품 중의 작품’이란 자부심을 담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세기는 나란 인생을 하나님의 작품답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만약 이전의 야곱 같으면 외삼촌에게 항의, 도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루스에서 돌베개를 경험한 야곱은 이전과 달라졌다. 이후에도 외삼촌의 속임수는 이어져 노동조건만 10번 바꾸었다.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31:41).
야곱은 심각한 노동계약 위반을 무려 6년 간 10번이나 감수한다. 이전의 야곱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야곱의 입장에서 두 아내를 얻게 된 사연은 비록 황당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행한 과거를 돌아보면 자업자득인 셈이다. ‘언니-아우’의 서열을 이유로 자신을 속인 외삼촌에게 항변하지 않았다. 장자권과 축복권을 가로채기 위해 ‘형-아우’의 순서를 함부로 무시하고, 속이려고 들었던 장본인은 바로 야곱 자신이었다.
야곱은 고난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더 새로워져야 했다. 그리하여 남편과 아버지로서 야곱은 더 성숙해져야 했다. 그래도 야곱은 견딜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그가 비빌 수 있던 언덕은 바로 신앙의 힘이었다. 그가 벧엘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현존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주었다. 하나님은 바로 믿음을 지닌 우리의 삶 한가운데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고난과 좌절의 가장 깊은 시름 속에도 함께 하신다. 그것을 믿음으로, 현실 가운데 고백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기에 야곱의 믿음은 자기 삶 한가운데에서 놀라운 발견이요, 깨달음이었다.
야곱은 자기가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던 곳의 이름을 본래 루스에서 벧엘로 바꾸었다. 그가 기도하는 그 자리는 바로 벧엘(하나님의 집)이었다는 고백이다. 가나안 사람들이 우상숭배하던 루스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벧엘로 바뀐 것처럼, 야곱은 그의 인생을 바꿀 전환점으로 삼았다. 벧엘은 구약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약속, 서원, 십일조’라는 신앙적 관습을 담은 중요한 지명이다. 또한 벧엘은 야곱이 찾고자 했던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되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한 야곱은 어디서든 벧엘의 믿음, 곧 하나님의 집의 믿음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가 장가들고 차례로 12명의 아들을 얻는 과정과 자녀들에게 이름을 붙인 내용을 보면 야곱의 고통과 회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루스에서 벧엘로, 새로운 이름을 고백하고 부르면서 야곱의 비전이 달라졌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희망을 지니게 되었다. 장차 이스라엘은 벧엘로 부터 예배하는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우리 색동교회 이름도 실은 창세기에서 비롯된다. 색동(色童)은 창세기의 ‘언약의 무지개’(9:13)와 요셉의 ‘채색 옷’(37:3)에 등장한다. 색동교회란 이름은 온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그런 자부심, 그런 믿음, 그런 비전을 갖고 있는가!
창세기에서 야곱 이야기는 대표적인 막장 드라마이다.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의 갈등에 이어, 라반의 두 딸로 야곱의 아내요 자매인 레아와 라헬의 갈등은 연달아 이어지는 막장 드라마와 그 속편이다.
그런데 야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놀라운 것은 야곱의 도망 길, 인생막장, 그 막다른 절망의 길목에서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실은 누구에게나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막장과 다름없다.
내가 독일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 막장이란 단어였다. 독일에 광부로 온 사람들은 고생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광산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막장도 견뎠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그뤽 아우프’(오늘도 행운을!)를 외치며 막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1970년 중반에 온 광부들 중에는 월남전에 다녀온 교인들도 여럿이었다. 그들은 그 시절 월남전보다 막장이 더 두려웠다고 말하였다. 그만큼 막장은 비유가 아닌 실제였다. 날마다, 매 순간 ‘그뤽 아우프’ 한낱 행운에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내게 필요한 것은 그때마다 달라지는 행운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요, 은혜이다. 누구나 야곱과 같은 순례자이다. 우리의 삶 한가운데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면 어떤 어려움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다. 그 막장에 선 심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다. 내 삶이 귀하고 뜻 있고 보람이 있다는 것은 막장을 넘어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믿음과 희망이 없다면 그야말로 인생 막장일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행운이 아닌,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 그런 은총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나와 색동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
첫댓글 누구나 내면에는 ‘그림자 형제’와 ‘그림자 자매’가 있다. 남은 속여도 제 그림자는 속이지 못한다. 그림자를 속이려는 사람은 평생 그 꼬리를 밟히며 살아간다. 두려움과 죄의식으로부터 영영히 도망칠 수 없는 이유다.
야곱이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은 그가 자기 그림자와 맞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