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아버지의 자살
뒤늦게 하나의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마 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난 2년간 여기저기를 다니느라 최근에야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다. 2010년 10월, 장애인 아들을 둔 가난한 일용직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초생활수급권과 장애아동수당을 주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 말이다.
그 아버지는 처음에는 용접공으로 일했다. 그러다 일자리를 잃고 건설일용직으로 전전하다 그마저도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 병원비는 그 아버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들을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장애아동육아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서둘러 신청하려했으나, 신청을 하려면 본인이 국민기초생활수급자여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기초생활 수급자 신청을 하려고 하니 본인에게 노동 능력이 있어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고 했다. 노동시장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 노등 능력, 그러니까 그가 ‘산노동’을 가진 존재라는 것 때문에 정작 아들이 죽게 생긴 것이다. 그는 ‘내가 죽어야 아들이 산다’는 정신 나갈 정도로 비극적인, 하지만 지금의 이 ‘정신나간’ 시스템에서는 과히 틀리지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버지의 해법’, 다시 말해 ‘아버지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몸놀리는 게 편치 않은 아들의 맘에 평생 무거운 짐으로 올려질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서가 더욱 사람의 마음을 후벼판다.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 내가 죽으면 동사무소 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 그는 ‘나 때문에’라고 썼다. 그리고 ‘동사무소에’, 그러니까 ‘국가’에 ‘잘 부탁한다’고 했고, 그것을 국가가 베풀어주는 ‘혜택’으로 묘사했다.
정말 누구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나 때문에’라고 말했다. 그런데 ‘의무부양자’를 1촌 친족으로 규정한 현형법 아래서는 그리 틀리지 않는 답변이다. 마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나를 죽여야 한다’는 아버지의 정신나간 선택이 또한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시 묻건대 누구 때문일까.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과거 공동체들에서는 공동체 성원이 모두 굶어죽을 수는 있어도 개인이 굶어죽는 일은 없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한쪽에서는 배가 불러 주체할 수가 없을지라도 다른 쪽에서는 굶어죽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게 ‘제가 못난 탓’이다. 그런데 폴라니가 말한 원시 공동체들에서는 굶어죽는 개인이 없다. 왜일까. 간단하다. 바로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혼자’ 살지 않고 ‘함께’ 살았던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오늘 강연을 시작하며 꺼내놓은 이 비극적 이야기, 누구 때문이라고 해야하는가. 폴라니의 생각을 빌려 답해 보자면 ‘국가의 부재’, ‘공동체의 부재’ 때문이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 했던 아버지, 아니 그 이전에 한 아들이 ‘장애인’으로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것, 그 가장 큰 책임과 의무는 국가, 다시 말해 그 자신의 부재에 책임을 져야 할 ‘국가’에 있다. 개인이나 가족이 아니라 공동체인 국가가 1차 의무부양자인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부재로, 자신의 무책임으로 사람을 죽인 존재가 자신을 마치 ‘혜택’을 제공하는 천사나 구세주인 양 행세하는 세상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이 사건은 ‘국가’의 자기 성원에 대한 ‘배신’, ‘함께 산다’는 말에 대한 배신이다. 국가가 대중들의 집합적 생존수단을 구축하기는커녕 그것을 계속 박탈함으로써 특정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가령 신자유주의 체제에서의 정부가 공적인 것들을 어떻게 사적인 것으로 팔아넘기는지를 보자) 국가가 자기 성원들을 배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국가를 통해서는 더 이상 ‘함께’ 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2. 체제가 거부하는 신체들
며칠 전 <장애인신문>(welfarenews)에는 앞서 죽음을 택한 아버지와 달리 투사의 길을 택한 어머니의 사연이 소개 되어 있었다. ‘아이가 살 수 없는 세상에서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어머니. “이 다음에 아이들이 컸을 때 부모는 이미 늙고 없어요. 발달장애인이 장애인생활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제도와 지원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우선 아이가 어떻게든 빨리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질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에요. 어디 가서 ‘밥 주세요, 물 주세요’ 못해서 굶어 죽을까봐 언어치료를 계속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나서 그는 “혼자서는 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투쟁 현장에서 나가니 나같은 상황에 놓인 부모들, 같은 생각을 가진 부모들이 함께 있다는 데 희망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그는 “부양의무제 폐지, 활동지원 시간 확대, 평생교육, 가족지원 등…. 그 어떤 의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지만, 자기 피부에 와 닿는 말들”들을 들었다고 했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에게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을 살리는 말들, 그것을 그는 자신과 처지가 같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살릴 길’로서 투사가 되기로 했다.
나는 오늘 장애인 자식을 ‘살리기 위해’ ‘죽거나 투사가 되어야’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장애인들, 그리고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지금 이 땅에서 ‘내가 살아가기 위해’ 혹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죽거나 투사가 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사회와 공동체로부터 추방된 사람들, 국가와 정부로부터 배신을 경험한 이들은 비단 장애인들만이 아니다. 이제 정말 많은 이들이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집에서 쫓겨난 삶, 교육받지 못한 삶,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삶, 고용불안은커녕 아예 직업조차 갖지 못했던 삶,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 삶…. 우리 시대 민중들이 수십 년간, 적어도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90년대 후반 이후 도달한 곳이 그동안 장애민중들이 살아온 곳이고 또 투쟁을 시작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인 운동이 출발해야 했던 곳에 전체 민중 운동이 도달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는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민중들이 경험하는 공통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여러 우연과 인연의 도움을 받아 나는 뉴욕에서 일어난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이미 몇 군데서 이야기 한 바 있지만(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에 대해서는 <위클리수유너머> 웹진에 연재도 했고,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라는 제목으로 관련 내용을 이번 주에 출판했다.), 뉴욕에도 이집트식 ‘타흐리르’ 광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점거운동. 그 준비과정을 봤을 때는 솔직히 이 정도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오래 지속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나만이 아니라 준비한 당사자들 몇 사람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뭔가 일어났다’고 판단이 바뀐 것은 첫날 행진이 끝나고 주코티공원-이후 점거자들이 ‘리버티스퀘어’라고 바꾸어 불렀다-에 모여 토론이 시작될 때였다. 처음에 제안자들이 월스트리트의 황소상 근처에서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하고 재치있는 구호를 적어 피켓 시위를 하고 있을 때만 해도 재미있는 집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 이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찰이 점거 집회 예정장소를 원천봉쇄하자 점거자들이 주코티 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 누군가 “우리 모두 여기서 이야기를 하자”, “여기서 제너럴 어셈블리를 열자”고 선언하면서 상황은 놀랍게 변했다. 처음에는 쭈뼛쭈뼛하던 사람들이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주변 사람들과 곳곳에 작은 원들을 만들었다. 그러자마자 이러저런 말들을 마구 쏟아져나왔다. 집을 잃은 이야기, 의료보험 없이 아이들을 키우는 이야기, 직장을 잃은 이야기, 대학등록금이 너무 높아 학업을 접게 된 이야기…
그 열기는 정말 대단했고 며칠 동안이나 이어졌다. 비극에 비극이, 슬픔에 슬픔이, 울분에 울분이 더해졌고, 서로 다른 사연들이었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쉽게 공감했다. 주류 언론이 ‘알 수 없는 잡다한 요구들’, ‘지도부도 통일성도 찾아볼 수 없는 시위’라고 비하했던 그 다양한 목소리와 사연들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해하고 있었다. 경찰이 그곳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어찌보면 그들이 포위한 게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났다는 인상을 줬다. 그 동안 입속에서, 가슴속에서 웅얼거림에 지나치 않던 말들이 하나의 대중 언어로 짜이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지금 내게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 사람은 점거 초기에 곳곳에 대화의 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자기 처지를 한참 이야기하더니 울음을 터뜨리던 여성이다. 대화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표정은 너무도 눈에 선하다.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답답하고 불안한 상황을 한참 말하던 그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더니 이번 점거의 제안자들 중 한 사람에게 다가와 고맙다며 꼭 껴안았다. 자기 말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점거를 해줘서 고맙다고. 나는 그때 이번 점거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깨달은 것 같았다. 안으로 삼켜야 했던 말들, 그래서 누구보다도 민중들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그 말들을 직접 내뱉을 장소를 열었다는 것 말이다. 미디어들을 포함해서 여러 대의자들이 대신 말해준다며 사실은 봉쇄하고 삭제했던 말들을 서로 만나게 해야 한다는 것. 앞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 투사가 된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의사에게 들을 수 없는 말들, 그런 의사들이 줄 수 없는 힘들, 사람의 살 길을 열어주는 그런 말과 힘을 같은 처지의 민중들이 서로에게 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지금 기억나는 또 한 사람은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였다. 박스종이를 뜯어 만든 피켓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석사학위를 땄다. 그리고 5만불의 학자금대출을 떠안았다. 2개의 파트타임을 뛰고 있는데 연금이나 보험제공이 안 되는 것들이다. 의료보험도 없다. 집도 없다. 거기에 아이 둘을 키워야 한다. 젠장, 완전히 엿같다.” 눈빛이 참으로 매서웠다. 어쩌면 앞서 자기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며 울음을 터뜨렸던 이만큼이나 그 역시 어디선가 자기와 자식의 살 길을 걱정하며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악에 받친 듯, 쏘아보는 눈빛이 매처럼 강렬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 또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죽거나 투사가 되어야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런던에서 일어난 시위 이야기를 하며 어느 미국 학자에게 뉴욕에서 그런 가능성은 없냐고 물었을 때 그는 웃으며 답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뉴욕의 가공할 경찰력에 대해서도 들었고, 뉴욕인들의 소비주의와 개인주의, 인종주의 문화에 대해서도 귀따갑게 들었다. 그러나 미국인이라고 삶을 견디는 특별한 유전자를 지녔을 리 없다. 다만 위기가 전파되는 시간과 양상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뭔가 합리적이고 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원칙이 어떻고 척도가 어떻고 법이 어떻고 하는 한가한 소리는 이제 충분하다. 지금은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을 때가 아니라, 그것을 재는 잣대 자체를 바꿀 때이다.
지난 번 어느 뉴욕 운동가와 이곳 노들야학을 방문했을 때 노들 교장선생님은 우리에게 ‘장애인은 자본주의가 거부하는 신체를 가진 것 같다’고 했다. 정말이지 장애인의 신체 형태나 속도는 자본주의에 맞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오직 상품화된 신체(생체 상품)로서만 장애인의 신체에 눈독을 들일 뿐 어떤 적극적인 생산적 지위도 부여하지 않는다. 교장 선생님은 이어 말하기를, 이 체제가 장애인의 신체를 거부하므로 장애인도 이 체제를 거부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그 말 그대로다. 체제에 맞춰가는 것이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체제 안에서 어떤 해방의 가능성도 발견되지 않을 때, 단지 체제 안에서는 추방된 자로서만 재생산된다고 느껴질 때, 그때가 바로 체제의 불가능성, 체제로부터의 해방, 체제 자체의 추방을 선언할 때가 아닌가 싶다.
3. 해방구 –삶의 지배 유형을 가능한 빨리 타도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맑스는 혁명이 세계 역사의 증기기관차라고 했다. 하지만 세계 역사는 아주 다르다. 아마도 혁명은 이 열차를 타고 여행 중인 인류를 위한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 인류의 비상 브레이크 잡기. 이 말처럼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점거 운동을 적절히 묘사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수십 년간 지속된 이 체제에 대해 “이제 됐거든(Enough!)”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변명도, 어떤 사탕발림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수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대안을 먼저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조차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지금은 일단 비상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이것이 민중들이 갖는 가장 원초적인 힘이고 권리다. 저항이든 혁명이든 반란이든, 그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다. 민중들은 역사의 지정된 궤도에서 이탈할 원초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이 힘과 권리가 민주주의라는 말의 본 뜻에 가장 근접한다.
뉴욕의 점거 운동 장소였던 리버티스퀘어 –사람들은 주코티공원을 이렇게 리버티스퀘어로 바꾸어 불렀다-는 비상브레이크가 걸리면서 생겨난 역사적 시공의 파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이 나라가 나아갈 길,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길이라고 불려온 모든 지배적 가치들은 거기서 규정력을 급속히 잃었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월스트리트의 ‘돈’과 메인스트리트의 ‘권력’이 가진 이미지는 전복되었다. 거기서는 ‘드림’이 ‘타도’되었다. 급격히 몰락한 백인 중산층들은 분노하기도 하고 불안해 떨기도 하면서 점거 장소에 밀려들어왔지만, 거기서 그들은 자기 이야기를 토해놓기 전에 장애인과 홈리스, 소수인종, 여성들, 미등록이주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점거 장소에서 여러 번 보고 들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권력자에게 대해 뭔가를 이야기하기보다,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듣고 싶어했다.
나는 이곳을 꿈이 타도되고 삶의 기본 유형들이 타도되는 장소, 하나의 해방구라고 불렀다. 그동안 판단금지되었던 신성한 가치들이 효력 중지되는 곳, 삶의 지배적 유형에 대해 의심하고 그것에 괄호치는 것(판단중지), 그것을 점차 더 깊은 곳까지 의심하는 곳.
3년 전 위기에 빠진 대규모 투자은행들에 천문학적 구제금융을 퍼붓는 걸 전체 경제를 살리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들이 정작 위기의 주범이며 구제금융을 제공받고도 보너스 잔치를 벌인 탐욕꾼들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정작 경제위기 여파로 길거리에 나앉게 된 서민들을 위한 복지예산은 축소하고 의료보험 개혁은 좌초시키는 정치권을 보며 사람들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타락에 분노했다(많은 이들이 이것을 민주주의가 아닌 기업통치체제라고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해방구 안에서 더 멀리 나아갔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채무자본주의) 일반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금융규제를 완화하고 부자감세를 추진해온 것, 집과 자동차 그리고 학비를 낮추기는커녕 모두 빚을 내서 해결하도록 고안된 시스템 위에 지난 삼십년의 체제가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어떤 이들은 미국에서 절대 금기어였던 ‘자본주의’ 일반과 ‘계급전쟁’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지난 한 세기 넘게 우리를 지배해온 시스템 일반을 거부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해방구 속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더 급진적으로, 더 뿌리까지 내려갈지는 알 수 없고, 그곳은 언제든 금세 닫혀버리는 그런 성격의 현장이기도 하다(물리적 장소로서 점거 현장은 이미 당국에 의해 철거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시공 안에서 사람들이 체험한 사건이다. 자기 사연을 털어놓고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자기주장을 피켓에 적고 다른 이의 주장을 따라 외치면서, 하나의 요구는 없지만 하나의 삶의 모습, 대안적 삶의 비전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먹을 것을 함께 나누고, 정치적 의견을 함께 나누고, 명상의 시간을 함께 갖고, 춤을 함께 추고, 노래를 함께 하고, 책을 함께 읽고, 소품들을 함께 만들고, 시위에 함께 나서면서, 그들은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거번먼트를 구축했다. 이것은 언뜻보면 아주 조잡한 공동체이지만 내 생각에 이 작은 공동체는 그동안 우리 삶을 지배해온 지배적 가치체계를 전복하고, 삶의 기본 유형을 교체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우리 체제의 모든 신성한 가치들을 의심하고, 어떤 선험적 자격이나 조건없이 서로를 돌보고 연대하는 일,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인 한에서, 어느 체제에서건 항상 우리가 물어야만 하는 물음과 실천들이 제한적으로나마 여기서 수행되고 있었다.
나는 바로 이 점거 공동체 속에서 오늘 강연 도입부에 이야기했던 ‘함께’의 의미가 복원되고 있다고 본다. 나는 강연 초입에 ‘국가의 배신’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가장 그 존재가 필요했던 순간에 부재했던 국가의 배신에 대하여 말이다. 국가가 ‘우리가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함께’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증명이 되는 순간, 그러니까 국가가 특정 계급과 분파의 이해에만 복무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국가의 배신에 마땅한 응징을 해야 한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국가가 시민들을 배신할 때 시민들의 응징이란 무엇이어야 하고 무엇일 수밖에 없는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이 그 물리적 장소를 빼앗긴 직후 분노한 뉴욕 시민들은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꽤 많은 시민들이 정부에 불복종을 표시하며 길거리로 내려와 경찰에 스스로 연행되었다. 그때 한 학생이 이런 피켓을 들고 내 앞을 지나갔다. “우리는 배교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철학을 가진 민중이다. 우리, 당신과 나같은 민중들이 매일 역사의 진로를 바꾼다.” 국가가 시민들을 배신할 때 시민들 역시 국가로부터 얼굴을 돌려야 한다. 국가에 대한 시민의 배신! 정부가 우리를 버렸으므로 우리도 정부를 버린다는 생각! 그때만이 우리는 우리를 탄압하고 통치하는 정부로서의 거번먼트가 아니라, 우리 삶을 가꾸는 거번먼트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국가가 ‘함께 살기’를 배신한 순간 시민들에게는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언젠가 영국 작가 로렌스는 멜빌이 그 누구보다도 ‘집과 어머니에 대한 향수’, 우리를 포획하는 것들에서 가장 멀리 달아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완벽한 결합’이니 ‘절대적 이상’이니 하는 이상에 집착했다고 유감스러워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멜빌은 이상적 무기들에 집착했다. 나로서는, 나는 나의 무기들을 버리고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낡은 무기들은 썩는다, 새로운 무기들을 들어라, 그리고 정확히 쏘아라.”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태고적 물음을 반복한다고 해서 어떤 과거의 원시 공동체를 이상향으로 두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맑스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 물음을 더 고차적이고 새로운 형식으로 재발명해야 한다.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철저히 얼굴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첨단의 소통의 무기들을 사용해야 하고, ‘함께 함’을 가능케 할 새로운 정서들을 생산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이 체제가 확실히 변형될 때까지 어떤 협력도 거부한 채, 아주 냉담하게, 아주 급진적으로, 철저히 고개를 돌려야 한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돌린 고개를 우리 서로를 바라보는 일로 만들어야 한다.
4. 총파업-인류가 건 비상브레이크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국가의 배신을 철저히 사고함으로써만, 국가 권력에 매달려(특히 선거를 통해)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배신한 국가를 철저히 배신함으로써만 국가를 고칠 수 있고 또 국가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국가만의 문제이겠는가.
우리는 우리를 추방한 대학에 대해서도, 앎의 생산과 유통, 교육을 독점하다시피 해온 그 대학에 대해서도 그 배신을 따져 물어야 한다. 앎에 대한 접근을 돈에 장벽으로 막고 앎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대학의 배신에 대해, 어쩌면 우리는 매우 급진적인 냉담함을 보여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정당에 대해서도, 언론에 대해서도, 심지어 모든 정체성들, 그야말로 우리를 의식을 점령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수용을 의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례가 없다고 말했던 것, 예산이 없다고 말했던 것, 제도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원칙상 안 된다고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따져묻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때만이 우리는 불가능이 생각만큼 불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실 이 모든 물음이 응집된 것이 지금 제기되는 총파업에 대한 요구이다.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에서 사람들은 그야말로 온갖 요구를 내걸었다. 주류 언론과 정치인들은 통일성도 없는 잡다한 요구들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집을 잃은 자의 요구가 대학등록금을 낮추라는 요구, 시설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요구, 저상버스를 도입하라는 요구보다 더 긴급하고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모든 요구들은 똑같이 절박하고 똑같이 긴요하다. 점거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의 사연이 똑같이 소중하고 절박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정책이나 제도 때문이 아니라 체제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 그것은 사실 딱 하나를 요구하는 것이다. 즉 체제를 바꾸라는 것이다. 개별 정책이나 제도로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오히려 하나의 요구만을 제시할 때 지금의 체제는 그것을 금세 왜곡시켜버린다. 가령 대학등록금을 낮추라고 하면 저리대출을 꺼내드는 식으로 말이다).
이 체제를 향해 ‘모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달리보면 이 체제에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오직 원하는 게 있다면 ‘체제의 중단’ 내지 ‘체제의 교체’ 뿐이다. 여기에는 뭔가를 거래할 것이 없다. 가령 영국의 인도 지배에 저항했던 간디가 보인 ‘비타협’. 식민주의 체제와는 거래할 것이 없다는 단호함. 요구하는 게 있다면 오직 식민지 체제의 종식 뿐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총파업의 정신이다.
이 점에서 총파업은 일반적인 파업과 아주 다르다. 주어진 체제 안에서 그리고 개별 공장 안에서 노동 조건이나 지위의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과 달리 총파업은 체제 안에서 주어질 수 있는 어떤 급부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노조들의 총파업 요구에 익숙하다. 그러나 벤야민은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을 이렇게 구분한 적이 있다(<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정치적 총파업의 지지자들은 체제 안에서의 권력 교체(혹은 이익 분배의 변경)를 원하는 것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조직 자체가 일사불란한 통일성을 유지해서 소위 ‘질서있는 총파업’을 추구한다. 거대한 힘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파업 지도부는 상대방과의 거래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파업은 이 점에서 반대급부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권력은 기껏해야 하나의 특권층을 다른 특권층으로 교체하는 것이 될 뿐이다. 이와 달리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은, 오늘 강연 맥락에서 말하자면, 체제의 중단과 폐지를 목표로 선언하다. 여기서는 “승리의 물질적 이득에 대한 무관심”이 표현된다. 이 철저한 무관심, 비폭력적이만(이것을 폭력이라 부른다면 ‘신적 폭력’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철저히 비타협적인 급진성 , 그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총파업의 요구는 체제로부터 가장 고통받는 자들, 누구보다 체제의 중단을 간절히 원하는 자들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어쩌면 도망의 형식을 취하는 데서 시작할 수도 있다. 이 체제를 못 견디므로 거기서 도망쳐 나오는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 두 보이스(Du Bois)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들의 도망을 총파업이라고 불렀다(<<Black Reconstruction>>). 당초 노예해방은 남북전쟁의 이슈가 아니었고, 북부에서는 전쟁 초기만 해도 남부의 재산권을 침해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로 노예해방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노예제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노예들의 도망이 시작되면서 남부의 산업은 붕괴되었고, 북부 역시 도망 노예의 전략적 중요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된 남부의 지도자들이 온갖 당근을 내놓았지만 노예들은 냉담하게 도망쳤다. 두 보이스는 그들이 단순히 일에 지쳐서 농장에서 도망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도망노예의 생활은 더 혹독하고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어떤 위험에도 불구하고 체제로부터 도망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철저한 도망이 노예제라는 체제를 완전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겠다.
이득을 노리는 영리한 노예의 길이 아니라 도망 노예의 길, 다시 말해 노예제 자체로부터 도망치고 빠져나오는 것이 총파업의 길이다. 역사적으로 총파업은 체제의 한계로부터, 체제에 대한 거부로부터, 그것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역겨움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체제 안에서 통합되는 길을 찾아나선 이들이 아니라 체제 자체로부터 탈주한 이들, 체제의 중단을 요구하는 이들로부터 나왔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총파업에 대한 요구는 노동조합의 몫으로 받아들여져왔다. 실제로 민주노총을 비롯해서 여러 노동 단체들이 총파업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어쩌면 총파업은 노동조합이 요구하기 이전에 노동조합에 요구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총파업은 현 체제에서 조합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조합적 이해의 극복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총파업은 이 체제에 대한 중단의 요구이자 탈퇴의 선언이다. 그것은 체제 아래서 힘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체제 아래서 가장 억압된 자들, 그러기에 그 체제의 한계를 폭로하고 체제의 중단을 가장 강하게 열망하는 자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다. 이탈리아의 자율주의 여성운동가 마리아로사 델라 코스타(Mariarosa Dalla Costa)는 여성들의 총파업을 촉구하며, “노동인구의 절반(남성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고 있을 때 다른 절반이 부엌에서 일하고 있다면 총파업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총파업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노동인구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가사노동을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의 총파업 돌입이야말로 파업을 총파업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오늘 장애운동가들이 가득한 이 자리에서 우리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현 체제에서 가장 고통 받았기에 또한 이 체제의 중단을 누구보다 갈망하는 장애인들의 참여가 없는 비장애인들의 파업은 총파업이 아니라고 말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