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字]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붙이는 이름.
육조시대 晉나라 도연명(陶淵明365~427)은 이름은 잠(潛)이고
연명(淵明)은 자(字)이나 흔히 도연명으로 부른다.
호(號) 오류선생은 작품 <五柳先生傳>에서 유래한다.
이태백, 소동파처럼 성씨에 호를 붙여 그 사람의 이름을 대신하는
경우는 있지만 字로써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드문 예이다.
왕조시대 양반 남자들은 성인식인 관례를 행할 때 字를 받는다.
양반이라 하더라도 여자들에겐 字는 물론 이름[名]조차 없다.
남자들이 사용하는 당호(堂號)를 쓰는 경우는 있었다.
본관에다 성씨를 붙여서 부르니 딸네들은 모두 같은 이름이어서
실상 고유명사라 할 수 없다.
여인들의 이름이 없었음은 국가가 백성들의 노동력을 수취하던
제도인 역[役]과 관련된다.
말하자면 양반, 양인 여자들은 역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천인이 아닌 양인여자 이름을 굳이 호적에 등재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비롯된 풍습으로, 본명이 태어났을 때 부모에 의해
붙여지는 데 비해 자는 윗사람이 본인의 기호나 덕을 고려하여
붙이게 되며 자가 생기면 본명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명을 휘명(諱名)이라고도 한다.
흔히 윗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을 본명으로 말하지만
동년배 이하의 사람에게는 자를 쓴다.
다른 사람을 부를 때도 자를 사용하나 손아래 사람인 경우,
특히 부모나 스승이 그 아들이나 제자를 부를 때는 본명을 사용한다.
《논어(論語)》에서 공자는 제자 안연(顔淵)을 회(回),
자공(子貢)을 사(賜)라 부르고 있다.
또 공자는 본명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는데
중(仲)은 아우라는 뜻으로 공자에게는 형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지었고, 니(尼)는 그가 이산(尼山)에 기도를 드려
낳은 아들인 것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 습속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는 설총(薛聰)의 자가 총지(聰智)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자의 사용이 보편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동시대인인 원효(元曉)는 자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근세의 유학자들이 중국을 본떠 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호 [號]
본 이름이나 자(字)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
호는 흔이 자기 고향의 산이름이나 강이름을 쓰기도 하고
고전에 근거하여 가치관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다.
인명록을 찾다보면 같은 호를 쓰는 사람들이 여럿인 것은
후자에 근거한다.
본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한국이나 중국 등 주로 동양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호가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 ·사대부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다.
중국의 경우 호는 당나라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송나라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이태백(李太白)이나 송나라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본 이름인 이백(李白)이나 소식(蘇軾)보다도
호가 널리 알려진 경우이다.
호의 사용이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자들간에 학문적
교류와 편지 교환이 일반화되면서 본 이름보다는 호나 자를
사용하는 것이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는 대부분이 거처하는 곳이나 자신이 지향하는 뜻, 좋아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거처하는 곳이 바뀜에 따라 호가 달리 사용되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물건이 여럿인 경우 호는 늘어나게 마련이었다.
호는 집안에서 사용한다는 의미의 당호(堂號)와 시 ·서 ·화 등에
쓰는 아호(雅號)로 나누어지기도 했으나, 양자간에는 뚜렷한
구별이 없이 혼용되었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 이규보(李奎輔)의 경우는 초기에는
시 ·술 ·거문고 세 가지를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호하였다가 나중에는 구름에 묻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좋아하여
백운거사(白雲居士)로 호를 바꾸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로 호의 사용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주로 자신이
학문을 배우고 가르친 곳을 호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황의 퇴계(退溪), 이이(李珥)의 율곡(栗谷), 서경덕(徐敬德)의
화담(花潭)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문인들을 지칭할 때도 퇴계문인
화담문인 ·율곡문인 등으로 호를 사용하였다.
성리학자 조식(曺植)의 호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용어로서 노장사상에 관심을 가진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표현하였다.
호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조선 후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로서,
알려진 것만 해도 약 500여 개가 된다.
김정희가 많은 호를 사용한 것은 시 ·서 ·화에 두루 능하였던 예술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의 대표적인 호는 추사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선객(仙客) ·불노(佛奴) ·방외도인(方外道人) 등으로서 유 ·불 ·도
삼교사상을 망라하는 호를 사용한 것이 주목된다.
조선 후기 이래로 호 사전의 성격을 띤 많은 ‘호보(號譜)’들의 편찬은 호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해주고 있다.
1945년에 편찬된 《대동명가호보(大東名家號譜)》에는 호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있는데, 당(堂) ·암(巖) ·실(室) 등으로 끝나는 호가 많았다.
내용별로는 자신이 거주했던 곳이나 인연이 있었던 곳을 따서 지은 경우와,
인생관이나 수양목표를 한 경우, 완호물(玩好物)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서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주시경(周時經)의 ‘한힌샘’,
최현배(崔鉉培)의 ‘외솔’ 등의 호가 나타났으며,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김정식(金廷湜)의 소월(素月), 박영종(朴泳鍾)의 목월(木月) 등의
호도 우리에게 이름보다는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 외에 이상백(李相佰)의 호 상백(想白)과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호
이호우(爾豪愚)는 이름과 호의 음을 같게 한 경우이다.
오늘날에는 사회체제가 다원화되면서 2종 이상을 쓰는 호보다는 자신의
실명(實名)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문학 ·예술 등 일부 분야에서
호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호를 통하여 당시 인물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