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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탐사한다
어떤가 말만 들어도 가슴벅차지 않은가
한강
강가에 있는 정자도 그렇지만 한강자체를 둘러보면은 내 어머니 모태에서 내 어린시절 장성항후에도
이강을 이 강물을 바라보며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오늘을 보내며 또한 내일이 온다는 막연한 기대
속에 살아온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 나이 70이 넘어 이름고 거창한 한강 탐방을 나온 것이다
경치좋은 한강 주위엔 압구정 소악루등 정자가 있었으니 먼저 들린 곳이 망원정이다
정자의 솟을 대문
망원정은 한강의 수려한 경치를 굽어보는 얕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디
인터넷복사함
망원정은 원래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세종 6년(1424)에 별서(別墅)를 마련하고 약간의 농사도 지으며
강상(江上)의 물결을 즐기던 곳이었다.
정자치고는 넘 귀티가 난다
역시 임금님과 왕손이 즐겨 찾던 곳이라 다르긴 다르다.
세종대왕님께서 직접쓰신 현판 신객님 사진 감사합니다. 글 인터넷펌 다운
세종 7년 가뭄이 계속되자 농민의 삶을 살피기 위해 서쪽 교외로 나왔다가 효령대군의 새 정자에
올랐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니 매우 기뻐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
효령대군은 왕이 행차한 것은 물론 정자의 이름까지 지어준 것에 감사하여 글씨로 이름을 날리던
부제학 신장(申檣)에게 글씨를 문장을 잘 짓는 변계량(卞季良)에게 내용을 기록
.
글 써올린 것은 글씨는 신장
문장내용은 변계량
변계량은 기문에서
“희우정의 제도는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다.
북악이 뒤에서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서 흐르는데,
서남쪽의 여러 산들이 막막하고 아득하여
구름·하늘·연기가 물 밖으로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하다.
굽어보면 물이 맑아 물고기ㆍ새우도 역력히 셀 수 있다.
바람 실은 배의 돛과 모래 위의 새들이 바로 정자 아래서 오가고,
천여 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상 위에 어른거린다.
여기에 풍악 소리가 요란하고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니
황홀하여 날개가 돋아 푸른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
마음이 자유스러워져서 바람 타고 신선세계에 노는 것만 같다.
눈이 아찔하고 머리털까지 곤두서는 듯하다.” 고 칭송하였다.
바람 실은 배의 돛과
모래 위의 새들이 바로 정자 아래서 오가고,
천여 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상 위에 어른거린다고
이 글을 보건데 이곳이 얼마나 경치가 아름다웠지 알수있을 것 같다.
희우정을 나중에 월산대군이 망원정이라 불렀음 인터넷복사함
답사할 때는 망원정 현판을 볼 수 없었으나 인터넷에서 펌함
정자 안에는 희우정
밖에는 망원정
우리가 앉아 해설을 듣는 것이 楊花 나루또는 楊花渡 (양화진 나루터) 사진 감사합니다.
인근의 양화진은 조선시대에 한강을 건너 양천김포 방향으로 나가는 큰 나루터로 수상교통의 요지
군사상 요충지였다.
똑같이 楊花津을 楊花鎭?라고 쓴곳은 한강도와 아울러 고려 때부터 중요한 도선장의 하나였음
조선
이
조선 초에 양천을 거쳐 강화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중요시되어
양화도에서 보유한 진선은 10척 내외의 관선과 이와 별도로 사선의 나룻배도 있다 한다.
양화진(楊花津)은 서울 마포구 합정(合井)동 있던 나루다.
한양(서울)에서 김포 부평 인천 강화 등 당시 경기 서부지역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
했다.
그래서 일찍이 한양의 외백호 줄기가 한강으로 밀고 내려오다 강물에 막혀 불끈 솟구친 바위절벽인
잠두봉(蠶頭峯, 용두봉: 龍頭峯 이라고도 했고 지금은 절두산:切頭山이라 한다)
원래 양천 양화리에 있던 나루가 양화나루였기 때문에 이 양화나루에서
건너가는 한양 잠두봉 아래의 나루도 양화나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양화는 버드나무가 많아 꽃가루가 펄펄 날려 양화라 했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 갑신정변(甲申政變)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삼일천하가 되어 한많은 세상을 산 김옥균의 목을 이곳에 효시 되었다고 하고 우린
김옥균의 개혁정신이 서려있는 곳을 둘러보기도 함
절두산의 성당
또한 처참하게 죽은 천주교인들의 순교로
이 아름다운 이곳은 땅이고 강물이 빨간 피가 그대로 물이 되었다.
바로 옆 보이는자리가 절두산이고 이곳은 순교자의 묘지와 성당이 있으며
국내외의 천주교인들이 수난당한 곳이라 그분들을 고통스레 죽게한 형구 형틀이 그대로 있어
본 것만으로도 끔찍해 소름이 돋게 했다.
양화라고 이름지어진 것은 흐드러진 버드나무 꽃이 날리는 아름다움이 철철 넘던 곳이건만 ...
절두산 에는 김대건 그외 순교자분들의 돌 조각품들도 있었다
성지안에 순교자 조각
조용하고 고즈녁하여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느낄 수 있어 마음이 아렸다.
(절두산에 대한 것은 모르는 분이 업ㄱ을 것 같아 사진은 이곳에 생략한다. )
김대건신부 동상앞에서
또다른 나룻터는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한남동에 있는 한강진이라는 유명한 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작은 표지석하나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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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 곳에는 관선(官船) 10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세종 때 삼전도(三田渡)가 신설되면서 배 1척을 이관하여 9척이 운행되고 있었다.
특히조선시대에 중요시한 나루로서
송파, 노량과 더불어 삼진(三津)의 하나인데, 가장 왕래가 빈번하고 큰 나루
한강진은 삼전도(후에 송파진)와 더불어
대모산 기슭에 있는 헌인릉(獻仁陵), 그리고 나루 동쪽에 위치한 선정릉으로 가는 길목이며
장안의 부녀자들은 이 다리를 건너 봉은사(奉恩寺)로 불공을 드리러 다녔다고 함.
우리나라에 처음 놓인 다리 한강 쳘교
나라의 영욕을 같이 한 한강철교
한민족의 한이 서리 서리 서려있는 곳 감회가 새롭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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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어진 조선시대의 한강의 모습을 겸재 정선을 이렇게 남겨놓았다 몇 작품을 싫는다
양천 현령으로 가 남산을 보고 해뜨는 광경과 강물을 보며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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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겸재는
이 그림을 주고 이병연에게 글 한수 얻었다한다 아래 그 시를 적어본다
아! 멋과 낭만과 운치로 한 세상을 살던 사람들이다 .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산봉우리들 낚싯배에 가리고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이곳에 근대시인인 정지용시인의 글도 올려본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쳐 오르는 아침 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위에 조선시대 이병연시와 김영랑시를 올려보았다
둘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운 서정적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사람들의 미를 추구하는 촉각이...
지금 서있는 정자와 비교되어 옛서울의 운치가 정말 그립다
광진 나루 인터넷복사함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었다면 백제시조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하면서부터
이 광나루는 한강나루 중 가장 큰 나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큰 나루 또는 너른 나루라는 뜻으로 광나루라 부르지 않았나 한다고.
송파나루 인터넷복사함
송파진(松坡津)은 지금 송파대로가 석촌호수를 가르고 지나서 생긴
동쪽 호숫가에 있던 나루터
이곳은 서울과 남한산성 및 광나루에서 각각 20리씩 떨어져 있던 교통의 중심지
광주 읍소재지가 남한산성으로 옮겨지는 병자호란(1636) 직후부터 서울과 광주를잇는
가장 큰 나루로 떠오른 곳이다.
조선시대의 중요한 나루 광나루진 송파진 한강진 양화진 다 올린 것 같다
아! 그리워라
내가 전주이씨라 해도 중인으로 풀려
마포에서 거상으로 계섰다는 내 선조도 그립다.
강 하류로 내려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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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그림 안현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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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붙인 이병연의 시>
계절 맛 참으로 좋은 때,
발 걷으니 산 빛이 저물었구나
웃으며 한 점 별같은 불꽃을 보고,
양천 밥 배불리 먹는다.
주고 받는 그림과 시
정선이나 이병연이나 어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인가.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는 것이 돈이나 권력이 다는 아닌 것 같다.
한강물과 바닷물이 싸우는 소리를 즐긴다는 소리는 얼마나 신기하고 기이한가
한강이 모든 강물을 대표하고 한강물은 양천 앞에서 바닷물과 부딪치므로 이 곳이 바로 종해
(宗海·우두머리 바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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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물의 신비를 느낀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바닷물과 강물이 싸운다는 소리도 처음듣고
그 싸우는 소리가 솔바람 소리치듯한다는 소리도 신기하지 않은가
종해헌은 예전 양천현의 이름으로 이 동혼에서 종해헌의 조수 소리를 듣는다고 했고
겸재가 현재 양천향교가 있는 그곳에 양천현 현령 동헌인 종해헌에 앉아서 조수 다투는 소리를 즐겼다고 한다
그것은 본래 서해는 潮汐干滿의 차가 큰 지역인데 그중에서도 한강물이 바다로 물머리를 들이미는 강화만의
일대는 격차가 자장 큰 곳으로 밀물때가 되면 조수가 한강으로 역류해 강물의 흐름을 막아 자연히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밀리지 않으려고 힘겨루기를 하는데
이때 나는 물싸움의 소리는 숲속에서 이는 솔바람 소리와 아주 흡사하다고 한다 신비하지 않은가.
최완수지음 한양겸재 책에서 뽑음
한간에서 바라볼 때 조망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 소악루
소악루는 서울 강서구 가양동 성산 동쪽 기슭에 있던 누각. 인터넷복사함
한강의 강폭이 넓어져 서호(西湖) 또는 동정호(洞庭湖)로 불리던 드넓은 강물을 동쪽으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세워졌으므로 소악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소악루는 소악양루(小岳陽樓)의 준말이니 작은 악양루란 뜻이니
악양루는 중국 호남(湖南)성 상강(湘江)도 악양(岳陽)현의 현성(縣城) 서문의 문루 이름이었다.
이곳에 올라서면 동정호가 정면으로 바라보여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고 함.
시성(詩聖)으로 받들어지는 두보(杜甫·712∼770)도 ‘악양루에 올라서(登岳陽樓)’라는 유명한 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이를 본받아 소악루라고 지은것이라???
이정도로 한강의 운치와 경치를 상상할 수야 있을까마는 아쉬운대로
다음엔 한강에 대해 알아보자
다 알 듯이 북한강은 금강산자락에서
남한강은 태백산 검룡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터넷 복사
태백의 광명정기
예 솟아 민족의 젖줄
한강을 발원하다ㅡ 이글을 읽으니 웬지 가슴이 찡하다
남한강의 물의 시작 인터넷복사함
검룡사의 샘물 솟아 오르는 모습 인터넷복사함
글 인터넷복사함
장한지고!
얼마나 힘차게 솟아오르는가
얼마나 힘차고 맑은 물이 펑펑솟고 있는가
이 신성한 곳에서는 손도 대기 어려울 것 같다.
평생을 먹고 마시는 생명수를 곁에 끼고 살았으니 이곳을 한번 가봐야할 것 같다.
한강의 역사
오늘의 한강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한강이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는 2000년 전 백제의 하남 위례성
시대와 삼국의 한강 유역 쟁탈 시기에서 출발한다.
또 1392년 조선 건국,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과 이후도 의미 있다.
서울 숭례문 입구까지 물에 잠기게 한 을축년 대홍수는
땅밑에 숨었던 암사동 신석기 유적지를 드러나게 했지만 제방 구축용 골재로 쓰려고
선유봉(선유도)을 폭파하는 빌미가 됐다.
또한 결정적인 변화는
1967년 제1차 한강개발과 1982년 제2차 한강종합개발이 몰고 왔다.
한강의 자원과 이용
한강이 자원으로서 갖게되는 가치는 대체로 유량과 수질에 의해 결정되며
한강은 유량이 남한에서 으뜸으로 가장 규모가 큰 강에 해당된다.
한강의 유역 면적은 남한에서 가장 넓으나 세계적 하천에 비하면 좁고 유역 연강수량이
여름철에 집중되어 유황(流況)의 기복이 심하다.
이러한 유황의 불안정성을 줄이기 위하여
댐을 만들어 왔다.
댐 건설은 생활용수, 관개용수, 공업용수 등의 각종 용수와 전력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한강을 젖줄로 삼아야 하는 수도권 인구는 남한 전체의 절반 정도까지 차지한다.
[관광자원]
한강은 넓은 유역 면적과 긴 유로 연장, 인구 및 산업 생산면에서의 절대적 위치,
역사상 전략적 요충지인 점 등을 고려할 때, 여러 유형의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북한강-춘천권은 파로호·춘천호·소양호·의암호·청평호 등의 인공호수와
이들 호반 주변의 남이섬·구곡폭포·등선폭포·팔봉산·공작산·용소 등의
명승·산악, 청평사·상원사·흥국사혈거유지(穴居遺址) 등의 문화 사적이 즐비하여 하나의
밀집된 관광권이 즐비함
- 현황과 전망 -
한강이 불과 100년 만에 천지개벽을 했다.
물난리를 막아 보겠다는 치수(治水)에 대한 집착과
인구의 광적인 서울 집중에 따른 택지 제공 교통로의 필요성이 개발을 불렀다.
게다가 휴전선이라는 인공 장애물이
한강의 서해 출구를 가로막으면서 안보적 측면도 겹쳐 아라뱃길을 새로 뚫은 까닭이다.
한강의 변화에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이 있었다고는 하나
섬(河中島)이 사라지고 모래톱과 습지도 더불어 자취를 감춘 것이다.
19세기 초만 해도 매년 1만 척을 헤아리는 황포 돛배가 사람과 물자를 싣고 광나루(광진),
삼밭나루(삼전도), 뚝섬나루, 한강나루, 동작나루, 마포나루, 노들나루(노량진), 양화나루를
오갔지만 흥청거리던 뱃노래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29개의 다리가 덩그러니 놓였고 나루는 다리 이름으로 남았다.
골재 채취용으로 폭파했으나 20년 만에 되살아난 밤섬(율도)을 제외하고
강폭이 최대 900m에 이르는 넓디넓은 강이 텅 비었다.
여울과 소(沼)마저 사라져 생명력과 자정력을 잃은 강변에
60㎞에 이르는 콘크리트 호안이 일사불란하게 펼쳐진 곳이 됨
대규모의 개발에 의해 한강은 기적을 만들어 냈고,
기적을 낳았던 한강은 이제 몸살을 앓고 있으며.
한강의 인공화와 서울의 거대화로,
강에서는 본디의 모양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강물은 오염되어 있고 한강과 강물이 만들어 놓은 지형이 단기적 시각에서 조급하게 개발되어
쾌적 쉼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데... 마음이 아리다!
다만 밤섬만이 하중도 가운데 유일하게 철새 도래지의 옛 모습을 지켜내고 있다고 한다
두물머리
사랑한다 한강아!
난 하남에 살고 있는 것이 큰 축복으로 여겨 일부러 대대토박이인 서울을 버리고
하남에서 사는 것은
한낮이면 걸어서 15분이면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미사리강이 있고 심심하면 차로 양수리 퇴촌 두물머리를 즐겨간다
물이 좋아서
하늘이 좋아서
하늘과 물이 접해있는 환상의 세계를 꿈꾸는 듯 바라보는 것이 좋아서...
순교지 절두산은 나중에
회장님 총무님 사진 찍어주신분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2016년 3월 19미사리강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