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설교(12.02.26)]
/ 짐을 서로 지라 (이장우 목사)
------------------------------------
[주일오후설교]
/ 시편141편 성경공부
갈라디아 6:1-5 짐을 서로 지라 2012. 2. 2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오늘 말씀 2절을 보시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합니다. 짐을 서로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갈라디아서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법아래 들어가는 것이 저주아래 들어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을 다시 봅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항상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법과 그리스도의 법이 다릅니다. 모세의 법아래 들어가는 자는 저주아래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1-6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율법의 기능과 뜻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뜻을 알고 나니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율법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틈을 타서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은 완성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인간도 육신의 행위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하였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법으로 해방시킨 것입니다. 로마서 8:3-4절을 봅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한 마디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임을 갈라디아서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자신의 율법 지킴이나 자신의 선행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나서 거듭난 자신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율법을 지켜낸다는 신율주의도 결국 육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데 이것이 사망에 이릅니다. 그러나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러면 영을 따르는 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따르는 것입니까?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어야 절로 열매를 맺듯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서 그로부터 모든 은혜와 생명을 공급받고 사는 것이 영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그 어떤 성령의 열매가 나와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인 양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받고 있기에 성령의 열매로 나오는 것은 금지할 수도 없습니다. 봄에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는 것을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오늘 본문을 1절부터 다시 봅니다. 여기서 범죄 한 일이란 발을 헛디디거나 함정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복음을 믿고 따르다가 유혹에 빠져 육신의 일로 돌아간 자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들을 신령한 너희는 온유함 심령으로 바로 잡으라고 합니다. 신령하다는 말은 성령이 임한 자들을 말합니다. 성령이 임한 자라면 온유함으로 그들을 바로잡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바로잡는 다는 것은 어그러진 것을 고친다는 의미입니다. 팔이 부러지면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깁스하여 목에 매달고 다니는 것처럼 바로잡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자들이 교회 안의 범죄 한 일에 대하여 다루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소문내기 바쁘지 않습니까?
2절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지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합니다. 어떤 형제가 죄를 범하였을 때에 성령이 임한 자가 온유함으로 바로 잡는 것처럼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무거운 짐들을 서로 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2절의 짐은 혼자서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말합니다. 5절에서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하는데 이 짐은 가벼운 짐입니다. 각자가 담당해야 할 짐이라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자기 편하기 위하여 모른 체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짐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어떠한지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으로 법으로 해방시켰습니다. 이렇게 해방된 자들은 율법의 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이란 단 하나의 계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이며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런데 이 법을 율법처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내가 지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입니까? 이런 질문이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을 바울사도에게서 봅니다. 고린도전서 9:21절입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하나 스스로 종이 된 것이라고 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복음을 위하여 복음에 참여하고자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 중에서 율법 없는 자에게는 자신이 하나님께 율법이 없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요한복음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갈라디아서 5:14절을 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다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누가 이루어내셨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이루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모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시고 승천시키신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을 보내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그 은혜의 선물을 담아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성령을 따라 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25-26절을 봅니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않습니다. 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어떻게 교회끼리 또 교인끼리 노엽게 하고 투기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실상은 우리 안에 날마다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육체의 일이라고 지적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에서 선한 경쟁이라고 하면서 경쟁을 부추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고 성령으로 살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서로 짐을 지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서로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해서 다시 여러 가지 법조문과 같은 행동강령을 만들어내고 피라미드 구조 같은 조직을 만들어 사람들을 다스려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축복과 저주라는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신비체험이나 금욕적인 것을 통하여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사는 것은 눈에 보이는 누가 지시하거나 명령하지 아니하는데도 자기가 져야할 짐을 지게 됩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 편하고자 도망가지 않습니다. 자기의 짐을 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짐까지 지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3-5절을 봅니다. 자신은 아무 짐도 자지 않으면서 무엇이나 된 것처럼 남을 판단하며 사랑이 있으니 없느니 하는 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살피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랑이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는 있는데 너는 왜 없느냐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의 짐을 진다는 것은 각자가 주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서로 짐을 지는 그리스도의 법이 어떻게 성취가 됩니까? 잠언서 6:6-8절을 봅니다. “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이 말씀의 일차적인 목적은 게으른 자에게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는데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은다는 말씀입니다.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없는데 개미들이 협력하여 엄청난 개미집을 만듭니다. 베짜기 개미는 나뭇잎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여 자르고 붙여서 자기들의 집을 만들어 냅니다. 제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계속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일 저녁에 교육방송에서 다윈 이야기를 하는 이화여대 최재천교수의 강의를 보면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이 사람 이야기는 자연에서 보고 배우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가우디의 유명한 성당 건축물이 개미의 집을 보고 설계한 것이라고 합니다. 스페인에서 130년 동안 건축하고 있지만 아직 완공되지 않은 유명한 건축물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은 흰개미가 만든 집보다 온도조절이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베짜기 개미이야기도 하면서 잠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두령도 감독도 통치자도 없는데 어떻게 개미들은 그렇게 서로 협력하며 서로 자기의 일들을 그렇게 알아서 하는가를 알기 위하여 미국의 유명한 연구소에서 연구를 십년동안 하여서 발표한 한 마디가 self-organization 자율형성, 자기조직화라는 말로 설명하였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설명된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개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서로 협력하여 집을 만들어내고 사회를 구성하는지에 대하여 물리학과 생물학과 여러 가지 다른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나온 결과가 이 단어라고 합니다. 이런 학문을 통섭이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통섭으로 연구하여 나온 결과가 자율형성인데 제가 보기에는 아주 궁색한 답변입니다.
잠언 30:24-28절입니다. “24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25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26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27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28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개미, 사반, 메뚜기, 도마뱀이 지혜로운데 이런 지혜를 누가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타조가 알을 품지 않고 모래 속에 버려두는 것도 하나님께서 타조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욥39:17). 그러므로 개미나 메뚜기가 임금이 없고 감독자도 없어도 자기들이 서로 협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은 서로 짐을 지지 않습니까? 물론 인간도 때에 따라 협력을 합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이익을 있을 때에 협력을 합니다. 이런 협력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동물로 보는 학자들의 책들 중에 이기적인 유전자 이타적인 유전자라는 제목들도 있습니다. 인간이 이기적이지만 않고 이타적이라고 하지만 그런 이타적인 행동도 결국은 자기의 유익을 위한 행위입니다. 살신성인의 정신도 결국은 더 큰 자기를 살리기 위하여 행동들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똘똘 뭉친 인간들이 함께 연합하여 한 일이 무엇입니까? 창조주를 살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사야 1:2-4절입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 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개미와 메뚜기와 도마뱀과 소나 나귀보다 더 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이런 자들은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한 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신 길입니다. 그 결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제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이 성령이 임한 자들에게 역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짐을 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개미에게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서로 협력하여 일을 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각자의 일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감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지만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누가 시키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1-6절을 봅니다.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마케도니아 교인들이 극심한 어려움에 있었습니다. 극심한 어려움이란 아침을 먹었는데 점심을 걱정해야 하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이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얼굴도 모르는 형제들을 위하여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누가 시킨 것입니까? 명령하거나 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연보에 자신들이 참여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구하였다고 합니다. 짐을 서로 지는데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모든 부요함을 버리시고 성도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모습을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서로 짐을 지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도 주어지기를 구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면 절대로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짐을 지지 않고 피하려고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구하지 않아도 이 법이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 과정이 고난이며 환난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또한 넉넉하게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