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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소개
‘배움’을 통해 ‘어질’에 이른 성인
공자는 지금부터 2,500여 년 전 B.C.551년 노(魯)나라의 도성이었던 곡부(曲阜) 인근에서 태어났다. 역사상 춘추(春秋)시대라고 불리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에 태어난 공자는 주나라 초기의 문화와 질서를 회복함으로서 중국대륙의 혼란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가 노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장차 그가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좌표가 되는 데에서 특별한 행운이었다. 노나라는 지리적으로 춘추시대의 역사가 펼쳐지는 중원의 한 가운데에 위치했고, 주대(周代) 문화의 건설자인 주공과 특별한 인연으로 인하여 문화적 보고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 왕조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고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되어, 대사구라는 벼슬을 하면서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의 계획은 주공의 신을 살린 질서 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으나 56세에 실각하고 말았다. 이후 14년간 문하생들을 테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를 계속하며 이상 실현을 꾀했다. 69세가 되서야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 양성에 전념하다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논어』에 묘사된 공자의 말년은 교육자의 모습으로 일관되어 있다. 현실정치의 무대 뒤로 물러난 공자는 전국적인 명망을 바탕으로 제자들에게 정치활동의 역량을 길러주는 교육활동에 전념했다. 전례가 거의 없는 이런 교육활동은 관학으로부터 독립된 중국 최초의 사교육이었고, 교육의 영향은 통치 집단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선비(士)계층 전체로 확대되었다. 제자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발현되었던 공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만년으로 갈수록 심화되었으며, 효용론적 관점에서 학문 그 지체를 중시하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교육과 학문에 대한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말년에 노나라에 돌아온 뒤, 훗날 유가(儒家)의 경전이 될『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주역』(周易)은 물론 예와 악에 대한 고전을 정리하는 등『육경』(六經)을 편찬했다.
>> 작품 소개
현대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인간학
『논어』는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문헌이다. 논어는 유가의 성전이며, 사서(四書)의 하나로 중국 최초의 어록이기도 하다. 공자와 그 제자 사이의 문답을 주로 하고, 공자의 발언과 행적 등이 간결하고도 함축성 있게 기재되었다. ‘논어’라는 서명 자체가 공자의 말을 모아 간추려서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논어』는 공자의 책으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공자가 직접 집필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과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책이다. 공자가 쓴 책은 『춘추』(春秋)가 유일하다. 또한 논어는 공자의 말과 행동만 담은 책이라고 할 수도 없다. 엄밀히 말해서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짧은 기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가 어떤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참 뒤에 제자들이 공자가 한 말의 기억을 되살려 기록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논어』는 총 2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편의 제목은 글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었다. 가령 ‘학이(學而)’ 편은 “學而時習之……”에서 따왔다.
『노자』(老子)에는 노자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 반면에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도처에 드러나고 있다. 그것이 아마『노자』와『논어』의 최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도『논어』에는 공자뿐만 아니라 공자의 여러 제자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담겨 있어서 매우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유교의 경서는 많지만, 그 중에서『논어』는『효경』(孝經)과 더불어 한(漢)나라 이후에 지식인의 필수 서책이 되고 있다. 그 해석의 전거(典據)가 된 것은 『논어집해』(論語集解)이다. 송(宋)나라 때에는 유교의 공맹사상에 의한 집주 통일화(集註統一化)가 이루어졌다.
특히 주희(1130~1200)가 사서(四書)로 삼고, 이를 통일하여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저술한 후에는 이것이 ‘논어집해’를 대체했다. 중화민국 초기 낡은 문화를 개조한다는 이유로 논어 비판이 시작된 이래, 논어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고 있으나 연구 또한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에도 일찍부터 널리 보급되고, 국민의 도덕성 형성의 기본이 되었다. 서구 각국에도 연구서나 번역서가 많으며, 최근에 들어서는 미국에서 특히 많이 나왔다.
공자는 제자나 문인의 개인적 특성과 수준에 따라 문답을 전개해나갔기 때문에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상황에 따라 답이 다르다는 점이 공자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다. 공자는 인(仁), 예(禮), 지(知), 덕(德), 효제(孝悌), 충서(忠恕), 천명(天命), 정명(正名)등 다양한 가치와 덕목을 논하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공자가 강조한 것은 바로 인(仁)이라 할 수 있다. 인이란 도덕적 규범과 행위의 규칙이 인간성의 깊숙한 곳에 내면화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질서와 규칙의 속박을 오히려 즐거워하는 정신적 능력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공자는 인을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민의 삶을 안정시켜 나갈 책임을 지고 있는 지배계층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궁극적인 덕목으로 내걸었다.
‘논어’ 속의 대화는 생각하고 움직이는 공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때 공자는 혼자 동떨어져 있는 개인이 아니라 인간관계 중심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로『논어』속의 말은 공자의 인품, 즉 야망‧공포‧환희‧신념‧자기발견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 같은 농축된 말은 편찬한 목적은 논증이나 사건의 기록으로 그치지 않고, 독자들이 지금도 계속되는 대화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원문 읽기>
독해가이드『논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자의 배움에 대하나 todr가을 잘 이해해야 한다. 공자는 앎을 단순히 문자를 익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 육례(六禮)를 익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모든 배움은 한마디로 인(仁)으로 집약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논어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수사(修辭)의 함축성 때문에 표피적 이해로는 접근하기 힘들다. 또한 문장 간의 연계가 없는 듯하면서도 깊이 생각해보면, 공자의 인격으로 수렴되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상식적이고 통속적인 인생론으로 읽기보다는 인간 내면을 깊이 있기 성찰하는 글로 받아들여야 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워서 때에 따라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않으냐? 벗이 있어서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않으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 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냐?”[학이(學而)/1]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이 되어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이 되어 정립되었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현혹되지 않았고 쉰이 되어서는 천명을 알게 되었고 예순이 되어서는 귀가 순응했으며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더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위정(爲政)/4]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회(回)와 더불어 말해보면 종일토록 한마디 반론도 없는 것이 마치 바보와 같다. 그러나 물러난 뒤 그 행동거지를 살펴보면 또한 족히 들은 바를 구현하니 회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위정(爲政)/9]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옛 일을 되살려 새롭게 깨닫는다면 그것으로 스승을 삼을 수 있다.”[위정(爲政)/11]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위정(爲政)/12]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연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며 위태로워 진다.”[위정(爲政)/15]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유(由)야, 너에게 아는 것을 가르쳐주랴?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위정(爲政)/17]
자장(子張)이 녹을 위해 배우고 있으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많이 들어 의심스러운 것은 제쳐놓고 나머지를 신중히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많이 보아 위태로운 것은 제쳐놓고 나머지를 신중히 행하면 뉘우침이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녹은 그 가운데에 있다.”[위정(爲政)/17]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천하를 대함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없다. 옮음에 견줄 따름이다.”[이인(里仁)/10]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어져 있단다.”
증자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자 문인이 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신 것인지?”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이야.”[이인(里仁)/15]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로움에 깨치고 소인은 이로움에 깨친다.”[이인(里仁)/16]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슬기로우 것을 보면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슬기롭지 못한 것을 보면 속으로 자신을 살펴라.”[이인(里仁)/17]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집 남짓한 마을에도 반드시 나만큼 충신(忠信)한 사람은 있을 것이나 그도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못할 것이다.”[공야장(公冶長)/28]
염구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道)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부족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없이 간파하고, 배우되 싫증내지 아니하며, 사람을 가르침에 지치지 않는다. 나에게 달리 무엇이 있겠느냐?”[술이(述而)/2]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발분하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고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발로(發露)시켜주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을 때 세 귀퉁이로써 반응하지 않으면 뒤풀이하여 가르치지 않는다.”
[술이(述而)/8]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해서 빨리 그것을 구하는 사람이다.”
[술이(述而)/21]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 중 좋은 사람을 택해서는 그 좋은 점을 따르고, 그 중 좋지 못한 사람을 택해서는 그 좋지 못한 점을 고친다.” [술이(述而)/23]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학문에 있어서는 나도 남만큼 하지 못하겠느냐만은 몸소 실천하는 군자의 경지라면 나는 아직 얻지 못했다.”[술이(述而)/35]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를 통해 일어나고 예를 통해 서며 음악을 통해 이룬다.”[태백(泰伯)/9]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움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 자세로 하여라. 오히려 그것을 잃어버릴까 두렵구나.”[태백(泰伯)/18]
선생님께서 안연을 일컬어 말씀하셨다.
“애석하구나.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만 보았지 멈춰 있는 것을 보지 못해다.”[자한(子罕)/20]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배웠으나 요즈음의 배우는 사람들은 남을 위해 배운다.”[헌문(憲問)/25]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賜)야, 너는 나를 맣이 배워서 아는 자로 보느냐?”
자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꿰고 있단다.”[위영공(衛靈公)/3]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일찍이 종일토록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 않으면서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무익했고 배우기만 못했다.”[위영공(衛靈公)/31]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앎이 그에 미쳤더라도 어짊이 그것을 능히 지키지 못하면 비록 그것을 얻더라도 반드시 잃고 말 것이다. 앎이 그에 미치고 어짊이 그것을 능히 지키더라도 장중하게 그에 임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앎이 그에 미치고 어짊이 그것을 능히 지키며 장중하게 그에 임하더라도 예로써 그것을 움직여 나가지 못하면 아직 최선이 못 된다.”[위영공(衛靈公)/33]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태어나면서 아는 자가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며 답답해서야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지만 배우지 않는 자는 백성들로서 최하가 된다.”[계씨(季氏)/9]
<원문 이해>
배움이란 무엇인가?
공자가 말하는 ‘배움’과 ‘가르침’은 단순히 어떠한 경지의 덕목에 이르는 수단이나 방법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이익을 취하는 수단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논어」에 나타난 배움은 이 책에 나타나는 인(仁)이나 의(義) 등의 여러 덕목 못지 않게 의미 있는 덕목으로 제시할 만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우선 공자는 배움을 자기 향상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을 찾지 못해 일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인간이란 결국 타고난 기량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배움이 사람을 궁극적으로 변화시켜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른 견해에 대해 공자는 모든 인간의 불안전한 상태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현재 상태를 극복하고자 나아갈 때 가능성이 열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염구가 자신의 힘이 부족함을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 된다는 점을 일깨운다.[옹야(擁也)/12]
그런 점에서 공자는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권장했다. 배움에 관한 공자의 기본입장은 그것이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한 데 있다. 그는 과거 역사의 집적된 경험과 지혜를 통해서만 가장 빨리 또 가장 균형 있는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위정(爲政)/11]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을 사실상 부인하고 배워서 아는 것을 도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으로 말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래서 배우지 않고 단지 생각이나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위영공(衛靈公)/31]
그런데 이 배움은 단지 종래의 고전이나 원리를 기계적으로 익히는 방식으로서는 부족하며, 그렇다고 구체적인 배움의 축적과정이 없이 골똘하게 생각만 파고드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본다. 즉 주체적인 사유를 통한 자기 이해가 필수적인 자세임을 설파하고 있다.[위정(爲政)/15] 그래서 더욱 제자들에게 바랐던 것은 자발적인 향학열이었다. ‘알려고 답답해하지 않으면 지도하지 않고 표현하지 못해 괴로워하지 않으면 일깨우지 않는다.’고 했다.[술이(述而)/8]
배운다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앎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배움은 무엇을 많이 안다는 것과는 다른 자세를 요구한다. 공자는 어떤 앎의 경지에‘미쳤다’(及)고 생각하면“오히려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을 특별히 경고하고 있다.[태백(泰伯)/18]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의 중요성을, 또는 자신의 앎을 절대화시키지 말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움을 단순히 지식으로 이해한다면 공자의 말을 헛된 이야기일 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가?1) 여기서 공자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도 아는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위정(爲政)/17] 인간에게서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일 것이다. 오히려‘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지라고 해야 마땅하다.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모른다는 것은 모르고 있는 그 상태 그대로 아는 것이 된다. 이로부터 배움이란 앎과 무지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포괄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스스로 어느 경지에“미쳤다”(及)고 생각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앎의 세계와 알지 못하는 세계 사이에 커다란 분리의 벽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배움은 한판에서‘수단’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목적’이 되는 것이다. 공자가 안연이 죽자“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통곡한 데에는 그가 배우기를 좋아했던 유일한 제자였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안연의 배움에 대한 자세는 결코 자신이 이미 이루어놓은 부분에 안주하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훌륭했다고 보았다.[자한(自罕)/20]
공자는 배움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언급도 하고 있다. 먼저 배움의 결정적인 수단으로 특정한 스승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함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구체적인 스승에게 배울 필요 없이 옛 일을 되살려 새롭게 깨닫는 것으로 스승을 삼아 배워갈 수 있다고 보았다.[위정(爲政)/11]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타인이 지니고 있는 자신이 갖지 못한 점을 배우는 방식으로 생생한 삶의 지혜를 배워갈 것을 말하고 있다.[술이(述而)/23] 또 한편 배움을 통한 진보의 과정은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가듯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겸허한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암시하기도 했다.[술이(述而)/18]
실천적인 전인적 앎
공자가 말하는 배움의 의미는 오늘날 학문과 지식을 이르는 의미와 사뭇 다르다. 우선 그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믿음에 회의적이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확정된 지식 자체는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앎을 의(義)에 비추어 따지는 힘이라고 본 것이다. 즉 어떤 진리가 자신의 옳음만을 주장하게 되면 곧 도그마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이인(里仁)/10]
공자가 배움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앎으로 가는 과정 자체에 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것을 머리에 채우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실천적 모습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것이다.[위정(爲政)/9] 따라서 배우는 자는 한갓 자신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취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의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전인적인 인간은 의로움을 삶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이인(里仁)/16]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배움이 자신의 완성에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헌문(憲問)/25]
또한 배운 사람은 특정한 영역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전문성이란 자본주의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될지는 몰라도 진정한 앎과는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전문적 지식이라는 말 자체가 남과의 비교를 통해 견주어질 수 있는 경쟁논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배움의 양태도 전인적 인격완성을 이루는 데 필요한 종합적 접근을 통해서 나타난다. 지식 문화 정신 삶 모두를 아우르는 배움의 추구에서 진정한 배움이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태백(泰伯)/9]이러한 배움의 결과 공자는 군자는 구체적 용도를 갖는 “그릇”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위정(爲政)/12]
한편, 공자의 배움이 갖는 위대함은 그의 천재성이나 성현과 같은 탁월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공자 자신은 절대로 성현이 아니며, 자신이 남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공야장(公冶長)/28]
그에게 있어서 학문은 지식을 넓히고 자의식을 깊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도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배움과 가르침에서 지극히 겸손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타고난 지식인도 아니고 지식의 도움 없이 사회를 변모시킬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타고난 지식인도 아니고 지식의 도움 없이 사회를 변모시킬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아니라고 솔직히 시인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공자는 신에게 호소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선지자라도, 진리를 환히 꿰뚫는 철학자도 아니었다. 단지 인(仁)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자기실현이라는 길에 나선 여행자들 가운데 다소 앞선 지점에 있을 뿐이었다. 학(學)은 학 자체로서 추구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예(禮)와 인(仁)이라는 윤리적 덕목과 뗄 수 없는 전인적 수양의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배움을 통해 궁극적 실현하려고 한 목표는 무엇인가?
인을 설파했던 공자는 인간을 위한 자신의 포부를‘늙은이들은 편안하게 하여주고, 벗들은 신용 있게 대하도록 하여주고, 젊은이들은 따르게 하여주는 것’이라고 소박하게 표현한다. 이것은 만인이 질서와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도덕사회를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세우기 위한 공자의 사상은 인간조건에 대한 전체론적 사상에서 출발한다. 자연 hr에서의 인간조건 같은 추상적 이론을 펼쳐나가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때 주어진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 이해를 사상전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공자의 목표는 사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고 정치와 사회 내에서 인(仁)을 배양하여 사회를 도덕적 공동체로 개조시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학자들의 공동체, 즉 군자의 모임이 필수적이었다.
공자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자기혁신과 사회참여라는 두 가지 사항을 강조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함(忠)으로, 남에게는 너그러움(恕)으로 대할 수 있었다.[이인(里仁)/15] 또한 공자는 (仁)을 얻기 위한 배움이 공동체적 노력이 되어야 한다는 ‘평범하고 실제적인’인식을 가지고 있다. ‘인자한 사람은 자기가 나서고 싶으면 남을 내세워 주고 자기가 발전하고 싶으면 남을 발전시켜주는 것’을 참된 자세로 보았다.
이처럼 공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개인의 도덕성 함양과 사회적 질서의 구현에 있어서 학문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신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쟁점파악>
논어의 ‘배움’과 ‘군자’개념이 현대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공자는“군자는 그릇이 아니다(군자불기(君子不器)”[위정(爲政)/12]라고 말했다. 군자는 그릇과 같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 그릇이란 각기 그 용도가 정해져서 서로 통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릇(器)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의미이다.
이는 막스 베버가 프로텐스탄트2) 윤리와 자본주의를 논하면서 바로 이 구절을 부정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널리 알려진 구절이기도 하다. 원래 예로부터 전문화는 아래층에서 하는 것이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 사람, 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배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 등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 신분에 요구되는 것이었다.
반면에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군자는 하나의 기능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육예(六藝) 즉,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예법, 음악, 궁술, 승마, 글쓰기, 셈하기)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이다.
공자의 인문주의적 관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를 읊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다.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이지 결코 인간적인 논리는 아니다. 소로우가 「월든」3)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의 비극은 발전할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같은 것’, ‘아는 것’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기를 강요받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진정한 의미는 오늘날의 의미로 보면 귀족들만의 특건적 품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를 갖는 ‘배움’과 ‘앎’의 추구가 갖는 의의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공자에게 군자와 소인의 구별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계급적. 신분적 구분이 아니라, 윤리적 기준으로 나누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공자의 인간학과 관계되는 것이며 나아가 동양학의 인간학과도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양학에서 최고의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이다. 인간을 최고의 위상에 두려는 것이 동양학의 인문주의(人文主義)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가치, 즉 인간적인 논리는 경쟁과 효율성과 합리성의 논리에 밀려나고 있다. 자본의 논리가 석권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보편적 상황이다. 따라서 논어의 이 구절은 신자유주의적 자본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로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베버의 경우 기(器)는 한마디로 전문성이며, 그가 강조하는 직업윤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이 전문성에 대한 거부가 동양사회의 비합리성으로 통한다는 것이 베버의 논리이다. 근,s 군자불기(君子不器)를 전문성과 직업적 윤리 즉,‘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의 거부로 이해했다. 분업을 거부하고 뷰로크라시(官僚性)를 거부했고 전문성을 위한 훈련을 거부했고 이윤추구를 위한 경제학적 훈련을 거부했다고 이해한 것이다. 베버는 그것이 바로 동양사회가 비합리적이며 근대사회형성에 낙후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베버의 논리는 자본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전제하고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논리이며, 자본주의경제체제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을 동력으로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다. 전문성은 곧 경쟁논리이기도 하다.
현대의 학문은 전문영역으로 세분화되었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전문적 지식을 습득한다는 의미 이상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자연과학을 하니까 인문학은 몰라도 된다.’거나 반대로‘나는 인문학을 하니까 자연과학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리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본자. 그에 따라 지식인상도 특정한 전문기능을 가진 작업인에 가깝게 변했다. 학문을 가르치는 사람도 ‘학문의 상인’ 이상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학문’은 삶의 문제로써 인간다운 윤리를 실천하는 것과 동떨어져 있다. ‘배움’은 출세와 명예 그 밖의 일신의 생존을 위한 이익우구의 도구요 수단일 뿐이고 앎이란 구체적 기능을 뒷받침하는 세세한 지식의 집적일 분이다. 인격적 자기수양은 '학문'이란 영역에서 사라져버렸다. 그결과 학문이 사회에 대해 갖는 책임성은 단지 그것이 낳는 효율적이고 가시적인 성과, 즉 경제적 이익에 기여하는 의미로 축소되었다,
동양적 수양론과 현대사회
그러나 현대사회가 복잡하게 세분화될수록 학문이 갖는 사회적 책임과 실천적 중요성은 오히려 커진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스럽게 되면서 ‘진보’ 의미조차 반인간적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 날, 전통적 지식인에 못지않게 전체적인 관점이 필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과학도가 자신의 연구 결과가 인류를 파멸시키더라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지식기술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과거 핵무기 개발을 반대했던 과학자들이 추앙받는 까닭은 그들이 단순한 지식기술자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는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따라서 오늘날 어떤 개별학문도 사회적 책임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학문’은 전인적 인격향상과 이를 통한 사회적 실천을 목표로하는 본래적 의의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자기반성을 근본적 바탕으로 하는 동양적 수양론이 도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문과 삶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행합일이 전제되지 않는 앎을 추구하고, 그런 앎이 정당한 것으로 평가될 때, 무책임하고 반인륜적 지식이 양산될 것이다. 현대의 문제가 싶어갈수록 공자의 ‘배움’에 대한 가르침은 더욱 강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연습문제>
1)논어에 나오는 ‘배움’의 의미로 볼 때, 학문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2)공자가 말하는 배움의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3)“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오늘날 상황에 비추어 어떤 의미를 갖는가?
1) 이 대목에서 서울대가 2005학년도 논술고사를 위해 발표한 두 번째 예시문의 얘기를 해야겠다. 제시문(나)에서는 공자의 ‘앎‘에 대한 태도를 노자의 ’앎‘에 대한 태도와 대립되는 것으로 놓고 있는데, 그건 공자에 대해 너무 단편적이고 일면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여기처럼 공자도’앎‘의 세계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절대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공자에 대한 바른 해석이다.
2)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검소한 생활과 더불어 직업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열심히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면 신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바탕이 되고, 상공업에 종사하던 부자 중산 시민층의 환영을 받게 되어 상공업은 발전한다는 것이다.
3) 소로우(Thoreau Henry David,1771~1862) 미국의 사상가이자 문학가로, 월든 호반에서 자연친화적인 생활을 하면서 현대문명과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 문재재기를 굴과 강연, 실천적 행위로서 보여 주었다. 「월든」(Walden, or Life in Woods,1854)은 ‘숲 속의 생활,이라고 하며, 1854년 여름부터 1847년 가을에 걸친 월든 호반의 생활을 바탕으로 쓴 미국문학의 고전이다. 소로우는 1846년 7월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절하다 투옥 당했으며, 그때 경험을 기초로 쓴「시민불복종」(Civil Disobdience, 1849)은 간디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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