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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역사학자 한홍구)
1부 미군정과 이승만 시절의 법관들
해방후 당시 총독부의 재판소의 판사는 250명 검사는 138명이었는데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변호사는 모두 420명 그중 한국인은 250명이었으며 38도선 이남에는 단지 150명이 있을 뿐이었다.
미군정은 친일 법조인을 걸러내기는커녕 무자격자들에게도 마구 변호사 자격을 부여했다.
-김용우 대법원장과 김병로 대법원장
미군정은 1945년 10월 김용무 변호사를 대법원장에 임명했는데 불과 넉 달여 만에 판검사 40명에 의해 불신임안이 제출되었다. 이는 대법원장으로서 부장판사에게 청탁의 메시지를 보낸일이 있었기 때문 김용우 대법원장이 사표를 제출했으나 미군정은 반려했다 이 후에 광주지방법원에서의 훈시내용으로 호된 비난을 받았다. ‘미군정 정책에 반대하는 자나 신탁통치와 좌파 이데올로기에 찬성하는 자를 엄중처벌해야 한다’ 라고 말했었다
1947년 좌익 계열 인사를 납치 살해한 ‘대한 민청 사건으로 기소되 김두한에게 벌금형이 선고되자 미군정 당국이 이 사건을 군사재판소로 이송토록 명령했다. 미군 24사단 군사재판소는 김두한 등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특사로 석방되었다.
대한 민국 정부 수립 후 첫 번째 대법원장으로 인권변호사 출신의 김병로가 임명 되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반민특위 특별재판장도 맡았는데 민족적 양심을 가진 보수파로서 친일잔재 청산의 의지를 보인 그는 친일파에 의존하려던 이승만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김병로는 경찰이 이승만의 비호 아래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특경대를 해산하자 맹비난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법부에 대한 이승만의 불만
이승만 정권이 행한 사법권 침해의 대표 사례로는 1952년의 서민호 의원 사건을 들 수 있다. 서민호는 댜창의 맹장으로서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서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서 의원이 순천에서 지방 순시를 하고 있을 때 권총 저격을 받았고 정당방위로 응대해서 육군대위가 사망한 사전이 발생했다. 당국은 살인죄로 구속했지만 국회는 석방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법원을 포위하고 시위대를 동원했다 안유출 부장판사가 석방조치를 내려서 서의원을 석방하자 시위대가 법원으로 몰려와 안유출을 죽여라라고 외치고 안 판사의 하숙집이 피습되었다. 이승만은 이 혼란을 빌미로 수산 경남 지경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들이 타 버스를 크레인으로 견인하는 등 초강수를 두면서 직섲게 개헌안을 바탕으로 내각 책임제를 자신의 뜻대로 혼합해 만든 개언안을 통과시켰다
사법부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정부가 무리하게 기소한 국가보안법 사건이나 정치적 이유로 옭아 넣은 뇌물 사전등에 대해 연거부 무죄를 선고했다. 아울러 국회는 삼권분립을 무시하는 이승만의 처사에 반기를 들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사법부가 행정부와 협의해서 법을 운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내었다.
-“언제든지 옷 벗고 변호사 한다”
김병로 대법원장 퇴임 뒤에도 법관들은 비교적 이승만 정권의 외압에 굴하지 않고 사법부이 제 역하를 다하기 위해 애썼다. 이 무렵 판사에 임용된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은 당시 법관들은“비위에 안 맞으면 언제라도 옷 벗고 변호사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권력의 입김이 재판에서 잘 통하지 않았다.라고 회고 했다.
1958년 진보당 사건( 진보당 위원장인 조봉암을 비롯한 간부들이 북한 간첩들과 접선하고 북한의 통일방안과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이승만은 당황하였고 시위대를 동원 대법원 청사에 난입하게 하였다. 정부수립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국 1959년 이승만 정권은 간첩죄를 적용하여 어용대법원장 조용순 체제 하에서 조봉암을 사형시켰다.
-직무유기로 고발당한 법원
이승만 정권이 법관연임법을 제정하자 서울지법 윤학로 부장판사는 행정부에 의해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 하면서 사표를 제출했다
이승만은 윤학로 부장판사 안유출 부장판사 유병진 부장판사들 20여병 법관의 연임을 거부했다. 이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법관의 신변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승만의 외압에 흔들리던 대법원은 결국 하급심 판사들에 의해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이 사퇴권고를 당하였다.
1959년 이승만 정권이 대표적 야당지 경향신문에 폐간 처분을 내렸었는데 대법원이 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때 4.19가 터졌다.
대법원이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자 서울고법, 서울지법 등 판사들이 긴급회의를 열고 조용순 대법원장과 대법관 정원의 사퇴권고를 결의하였다. 3.15 부정선거( 자유당 정권에 의하여 대대적인 선거부정행위가 자행되었던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 당시 선거관리위원장인 김두일 대법관과 선관위원이던 변옥주 대법관이 즉각 사임 이어 조용순 대법원장도 결국 물러났다.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한 시민이 경향신문 가처분 사건을 맡았던 조용순 전 대법원장 이하 대법관 전원을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하였다. 서울지검이 무혐의 불기소 처분을 내리자 고발인이 이에 불복하여 서울고법에 재정신청을 내는 등 사법부의 잘못된 관행에 정식으로 항의하는 사건이 있었다.
2. 5.16 군사반란과 사법부
법관을 직접 국민들이 뽑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늘 하고 있다
제2공화국 헌법이 법관 선거제를 채택한 것은 대통령이나 국회가 대법원장 및 대법관 임명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여 사법권 독립을 확고히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법관선출제는 사법의 민주화를 위한 획기적인 시도였지만 선출된 법관이라고 해서 꼭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우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고 누가 어떤 방식으로 법관을 선출할 것인가도 복잡한 문제였다.
법관 선출을 위한 선거인단 선거를 하루 앞두고 5.16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군사정권하의 사법부는 군사정권의 감독의 대상
육군소장 박정희 일당은 1961년 5.16 군사 반란을 일으켜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국회는 해산되었고 법원 역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거하여 재구성되었다. 정권을 탈취한 군부는 혁명 재판소와 혁명 검찰부를 설치하여 정상적인 사법부 기능의 상당 부분을 대체하는 등 사법권을 침해했다. 5.16 군사 반란 이후 1963년 12월까지의 군정 기간은 법원이 완전히 군부의 통제하에 있었던 사법부의 암흑기였다. 사건의 속전속결이라는 미명아래 극장에 법관을 데려다 놓고 재판을 진행하는 터무니 없는 일도 있었다.
군사정권은 군대 직무교육을 하듯 법관들에게도 특별교육을 실시했다. 211명의 판사와 226명의 검사가 일주일 단위로 교육을 받았다. 주된 교육내용은 군사혁명의 의의, 혁명입법 해설, 혁명과업의 방향, 공산주의 비판 평화통일론, 민.형사 실무등 어처구니 없는 사법부에게 굴욕적인 일이었다.
3. 무장군인 법원난입 사건과 동백림 사건
지금은 서울의 법원이 중앙과 동서남북 등 5개 지방 법원으로 나뉘지만 1963년까지는 서울 지방법원 하나였다. 그런데 군사반란을 일으킨 군부에게 서울지법의 깐깐한 법원장 김제형은 불편한 존재였다. 군사정권은 수시로 법관들에게 재판에 관련해서 정권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지만 김제형은 협조하지 않았다.
-이상한 ‘위인설관’
군부의 생트집에 법원 측의 반발이 고조되자 최고회의는 대법원장에게 처리를 일임한다고 한 발 물러서는 척했다. 최고회의는 법원조직법을 개정해 민사지법과 형사지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규정을 신설하였다. 형사지법 분리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정권의 개입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1964년 3월부터 시작된 한일회담 반대 시위와 관련해 학생과 시민을 연행해 서울형사지법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 영장 담당 양헌 판사가 일부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이튿날 새벽 4시 30분경 권총과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수도경비사 1공수 소속군인 13명이 경찰의 인도를 받으며 서울형사지법 당직실에 난입했다. 양헌 판사가 퇴청한 이 후에 집으로 쳐들어가 영장을 기각한 판사가 누구냐 라며 행패를 부렸다.
이 사건의 파장은 컸으며 대법원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엄중 항의했고 국회에서 야당은 이를 국기를 흔드는 난동으로 단정하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까지 준비했다 박정희는 6월3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 사건을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6.3사태로 비화되는 데 중요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동백림 사건과 괴벽보 사건
1967년 7월8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한의 대남공작단 사건을 발표했다. 유럽의 유학생과 교민들이 동베를린(동백림)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하거나 평양을 왕래하고 공작금을 받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200명에 달하는 사건관련자 중에는 프랑스 화단에서 인정받던 화가 이웅로 부부와 독일에서 활동해온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부부를 포함해 지식인과 사회저명인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동백림 사건을 중앙정보부가 해외에 있던 피의자들을 우방국 부권을 침해하면서 무리하게 국내로 연행해 와 국제적으로 크게 물의를 빚은 사건이다. 1심과 2심에서는 사형을 포함하여 중형이 선고되었으나 대법원에서는 간첩죄를 비롯해 대부분 무죄가 선고되는 등 파기환송 판결이 많이 나왔다. 이 사건의 판결에 중정 등 외부 압력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중정에서 작성한 [동백림 사건 등 증거보강 추가수사 계획]에는 검찰지원비 25만원 및 재판 후 지원비 추가분 25만원등 예산 책정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당시 쌀 한 가마가 5250원이었던 당시 시세로 볼 때 5만원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동백림 사건 재판과 관련하여 또 다른 의혹은 대법원 파기환송이후의 ‘괴벽보’사건이다. 대법원 선고 사흘 후인 1968년 8월 2일 서울시내에 애국시민회 명의로 “김일성의 판사를 잡아내라 북괴와 야합하여 기회를 노리는 붉은 도당을 처단하라”라는 내용의 전단이 배포되었다. 다음날도 대법원에서 가까운 배재중학교 법무부 반도호텔 그랜드호텔 대한공론사 부근에 역시 애국시민회 명의로 작성되 벽보가 붙었다. 조진만 대법원장에게는 “사법부 안에 용공판사를 두어서 되계느냐”라고 힐문하는 협박편지가 날아들었다.
이 사건에 대한 직접적 해명이나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4.1971년 봄과 여름, 사법부의 결정적 판결 두가지
박정희는 1971년 4월 27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거센 도전을 간신히 따돌리고 어렵게 3선에 성공했다. 박정희의 세 번째 임기 첫해는 촛불에 덴 이명박의 첫해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박정희의 1971년은 1년 내내 빈민과 노동자, 대학생은 물론이고 의사 판사 교수 기자까지 너나없이 데모에 나섰고 각계각층 민중이 또렷이 제 목소리를 대던 시기다.
-국가배상법 ‘위헌’판결
1971년 7월1일 박정희는 제7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었다. 대학가에서는 교련 반대 데모로, 6월16일에는 수련의들이 파업했고 사법부에서는 획기적 판결을 연이어 내놓아 박정희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6월2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대법관회의)는 군인이 전투훈련 및 직무수행 중 전사 순직 공상으로 유족연금 등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제외한다”
라는 국가배상법 제 2조의 단서조항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의 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으로 군인의 희생으로 국고손실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를 배척했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위헌법률심판권이 대법원에 있었는데 대법원이 위헌법률심판권을 적극행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부여당은 1967년 국가배상법을 전면 개정하면서 군인등의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제한 한 바 있다. 베트남전과 이라크 전에서 우리의 인명 피해는 실로 컸는데 정부여당은 이런 인명소실을 줄일 적극적 조치를 휘하는 대신 군대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나 그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박정희는 대법원의 위헌판결을 막기 위해 법원조직법을 개정하는 편법을 동원했다.
대법원은 1971년 6원 대법원합의체에서 국가배상법 제2조가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국가와 개인사이의 첨예한 이해대립이 걸린 문제에서 사법부가 개인의 편에 서서 국가의 기본권 침해를 지적함으로써 왜 삼권분립이 필요한지를 분명히 밝힌 셈이었다. 1972년 10월 17일 또 다시 탱크를 앞세워 헌정질서를 짓밟은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어 대법원에서 위헌 법률심판권을 빼앗아 헌법위원회로 넘겼고 위헌의견을 낸 판사 9명을 모두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또 박정희는 유신헌법에서 군인 군속 경찰공무원 등은 국가에 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못 박아버렸다. 이 조항을 1987년 헌법을 개정할 때도 살아남아 현행 헌법에도 가장 부끄러운 조항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 우리는 어떤 법률이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생각할 때 헌법 재판소로 가져가 위헌 여부를 물어본다. 그런데 군인 등은 헌법에 떡하니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되어 있으니 제아무리 유능한 변호사가 수십 명 붙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니 군대 가서 죽으면 갯값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다리]지 필화 사건
박정희의 제7대 대통령 취임 직후에도 사법부로부터 다리지 필화 사건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다. 다리지는 사상계가 폐간된 직후인 1970년 9월 김상현이 창간한 월간지다. 매월 2만부가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당시 김대중 후보를 적극 지지하던 김상현 의원이 운영하던 잡지였다. 1970년 11월호에 실린 임중빈의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이 프랑스 5월 혁명과 뉴레프트의 활동을 본받으라고 권유하는 내용으로 국외 공산계열과 북한을 찬양했다며 반공법 위반으로 검찰은 임중빈을 기소했었다. 필자 임중빈은 김대중 후보의 자서전을 대필하고 있었다. 임증빈 구속은 김대중 후보 측이 기획한 자서전이 선거 국면에 맞추어 제때 발행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다리지 사건의 재판장은 목요상 판사로 김지하 시인의 유명한 오적 필화사건까지 맡게 되었는데 재판에 대해서 강한 판결을 내리도록 위협과 외압이 잦았다고 회고했다. 목요상 판사는 자신의 직권으로 보석허가와 무죄판결을 내렸으며 이 여파로 감시를 받았고 주위 사람들까지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이로 정부가 법원을 손 볼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는데 이는 곧 사법 파동으로 이어졌다.
5 사법파동, 사표를 쓴 판사 37인
1971년 6월과 7월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과 서울형사지법에서
행한 시국 사건에 대한 연이은 무죄판결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만천하에 고취한 것이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 사건이나 동백림 사건 당시의 괴벽보 사건은 법원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권력이 법원을 몹시 불편해 했음을 보여준 사례다
사법파동의 주역이던 홍성우 변호사나 최영도 변호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사법파동 이전까지 법관들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법부의 독립성
3부 재판장 이범렬 부장판사 배석 최공용 판사 참여서기 이남영등 세 명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증인심문을 위해 제주도에 갔을 때 피고인의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 받았다는 것이었다. 출장비가 책정되지 않은 현실에서 피고인 측의 요구로 현장검증을 나갈 경우 오랜 관행이었다. 송명관 형사법원장에게 사건 재배당을 요구했고 송 원장은 이를 받아들여 유태흥 수속부장판사에게 사건을 재배당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면서 영장을 기각했다. 검찰은 증거를 보강해 다음 날 새벽 다시 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이범렬 판사를 미행하고 이들을 접대한 여성들을 심문해 이 정보를 수집했다. 보도진의 요청에 구속영장 내용을 읽어주었다. 이 같은 행위는 형법 제126조의 검찰 등 법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들이 그 직무를 행함에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라고 규정한 피의사실 공표죄를 명백히 범한 것이었다.
-왜 이범렬 부장판사였나?
표적이 된 이범렬 부장판사는 검찰과의 관계에서는 서릿발 같은 위엄을 보이는 존경받는 법관이었다.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반공법 위반 사건등에 대해서도 무죄 혹은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 양헌 부장판사를 검찰은 얽어 넣기 위해 수사관을 구치소 잠입시키는 등 갖은 수법을 다 썼다.
최영도 홍성우 등 판사들은 7월30일 대법원장 면담을 앞두고 자신들의 입장을 보다 강력히 전달하기 위해 사법침해 사례를 1)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검찰과 견해를 달리한 법관을 용공 분자로 취급하여 협박하고 신원조사를 했다. 2) 판사실에 도청장치를 했다. 3)무죄선고가 나면 법관이 부정한 재판을 한 듯 비난하면서 예금통장을 조사했다. 4) 판사들을 미행 사찰하고 함정수사까지 했다 등으로 입장 정리를 하였다. 서울민사지법 법관들도 민사지법 판사 44명도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아울러 형사지법 판사들과 더불어 위의 7개항을 골자로 한 [사법권수호건의문]을 발표했다.
7월31일에는 가정법원 판사 4명, 휴가중이던 서울 민사지법판사 8명, 서울고법 판사 13명, 그 외에도 당시 법관의 정원이 455명이었는데 사표를 제출한 법관의 수는 총 100명을 넘어섰다. 판사들의 사표제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으로 확산되었다.
-수습을 위한 모색
사법파동은 7월 26일 개원한 제8대 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의석을 두 배로 늘렸는데 이들 중에는 판사출신이 변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법파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야당 의원들은 국회에서 이 문제를 파고 들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국회에 다시 진출한 양일동 의원도 질의에 나섰다. 그는 구속적부심 당시 직접 겪은 일이라며 중앙정보부원들이 유태흥 수석부장판사를 협박하던 일을 폭로했다. 많은 사람이 사법파동의 배후에 중앙정보부가 있다고 믿었지만 공안검찰이 사건을 주도했다고 믿었다.
법관들은 사표제출이 가장 단호한 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홍성우 변호사는 그런 방법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라고 회고했다. 민사재판은 재판이 좀 지연되어도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형사재판은 구속 피고인들이 일주일만 재판 안 하면 미결구금일수가 그만큼 늘어나고 영장 등 그날그날 처리해야 할 일이 줄지어 있었기 때문에 법관들이 사표를 내고 투쟁을 계속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최대의 무기라고 생각하고 사용했던 것이 별 쓸모가 없는 무기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사표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회고했다. 사법파동은 사법부 스스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에 맞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사법파동의 허망한 결말은 오히려 사법부로 하여금 저항의지를 잃게 만들었다. 이범렬에 이어 여러 판사들이 법원을 떠나고 다 잘려 나가면서 법원은 힘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유신 이후에는 중앙정보부원들이 대놓고 판사실을 들락거리게 된 것이다.
민복기는 박정희가 죽은 뒤인 1981년 법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중에 박정희를 만났을 때 박정희가 사법파동이 장기화 되었더라면 계엄을 선포할 예정이었다 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는 이 말을 그 후에도 몇 차례 되풀이했는데 이는 박정희가 그만큼 사법부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는 의미다. 1972년 다시 한번 헌정질서를 유린한 박정희는 이제 더는 사법부 문제로 골치를 앓지 않도록 근원적 해결책을 강구한다 사법부에 회한과 오욕만이 남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