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교회들은 회중 예배의 도구로 교회 오르간을 대단히 존중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18세기 이후 개혁교회의 지도자들은 회중찬송에의 교회 오르간의 긍정적인 영향을 칭찬해왔다. 1911년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에 의해 출판된 예배에 관한 책에서 그는 “당회가 오르간주자들이 스스로 전면에 나서려고 하지 못하게 함만 확실하다면 오르간 음악에 대해 아무런 반대도 없다. 그들의 직무는 찬송을 인도하고, 보좌하고, 조절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다. 오르간에게는 결코 그 자체가 들려지도록 하는 권리가 주어져서는 안 된다. 오르간은 단지 회중 찬송을 섬겨야만 한다.”고 말했다(우리의 예배).
클라스 스킬더 박사는 스스로가 뛰어난 오르간 주자였다. 그는 오르간 주자가 잘 연주하고 예전적 원리들에 대한 좋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오르간이 실로 예배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들 중 더 나이가 많은 세대들은 스킬더가 얀 쯔바르트(Jan Zwart)같은 오르간 주자의 기술을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기억할 것이다. 스킬더는 쯔바르트의 연주를 “오르간석에서 나오는 예언”이라는 유명한 말로 묘사한 바 있다.
카이퍼와 스킬더가 기악음악에 단지 회중 찬송을 위한 반주 이상의 더 광범한 역할을 할애하도록 준비시켰다는 점을 지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카이퍼는 이러한 관점에 아무런 성경적 규칙이 없으며, 교회는 독립된 기악음악과 성가대 찬송을 위한 여지가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영적인 재량권을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교회가 “영적인 동기”에 의해 그러한 결정들에 도달하는 한은 그것은 좋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카이퍼와 스킬더는 회중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섬기고 증진시키는 한 예배 시에 악기연주의 독립된 역할을 장려했다.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예배의 전후에, 헌금하는 동안, 그리고 주의 만찬이 시행되고 있는 동안의 오르간 연주를 말하는 것이다. 스킬더는 심지어 오르간이 설교후의 회중 묵상의 시간을 위해 사용이 허락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나는 설교 후에 잠깐의 부드러운 오르간 연주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Om Woord en Ke가, Vol.2, p.36).
결론과 제안
이전의 글들에서 나는 예배에서의 음악에 대한 칼빈의 원리들을 기술하고 평가하였다. 나는 예배에서의 악기 사용에 대하여 몇 가지 결론들과 제안들로서 글을 맺으려고 한다.
첫째, 예배음악과 다른 용례에서의 음악에 대한 칼빈의 구분을 기억하는 것은 유익하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만남이라는 예배의 독특한 성격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회중찬송의 강조점을 이끈다. 이는 사도바울에 의해 주어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라”(엡5:19; 골3:16)와 같은 성경적 가이드라인에 기초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전체 회중은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라고 격려를 받았다. 예배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건간에 우리는 칼빈의 지도를 따라 회중 찬송의 우선순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배 안에서의 악기와 성가대 사용에 분명한 제약을 준다. 그러나 콘서트나 다른 모임들에서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우리가 성가대 찬송의 부요한 전통들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들 중에 잘 훈련된 음악가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이러한 전통을 계속해서 개발해 나가도록 하자. 이는 우리의 주일예배를 위한 강력한 원군들이다.
둘째, 칼빈은 예배로부터 성가대와 악기들을 폐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의 시대의 교회 속에서의 정황에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이해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 원리로부터 온 필연적인 어떤 것은 아니다. 우리는 카이퍼나 스킬더와 같은 사람들에게 동의한다. 악기는 회중찬송을 고양시키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연주의 질을 위해서도 분투해야 한다. 반주자들이 충분히 익힘으로써 그들의 연주가 회중 찬송을 (꺾는 것이 아니라) 용이하게 할 것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회중 찬송을 반주할 수 있게 그러한 악기들을 연주하는 것을 배우도록 권장할 것이다!
셋째, 만약 교회가 음악가들이 회중 찬송을 반주해 줄 것을 기대한다면, 교회는 반주자들을 위해 예전 훈련 역시 제공해야만 한다. 누구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연주와 반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회중 찬송을 반주하기 위해서는 음악가도 예전의 원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예배가 무엇인지, 예배 안에 있는 회중 찬송의 기능이 무엇인지, 여는 시편, 율법 낭독 이후에 불려지는 시편, 그리고 기타 다른 찬송의 특별한 기능이 무엇인지 등). 화란에 있는 우리의 자매교회들은 반주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코스를 제공하는 교회 음악가 연합회를 가지고 있다(개혁교회 음악가 협회
넷째, 우리는 복음 설교가 은혜의 가장 중요한 방편이라고 하는 칼빈의 관점을 마음에 새겨야만 한다. 성령께서는 우선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믿음을 일으키신다. 강단이 중앙을 차지하는 것이 언제나 개혁교회 건물들의 특징이었다. 내가 이를 특별히 거론하는 것은 우리 주변의 많은 교회들이 “예배의 음악화”를 향해 가는 추세에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커다란 부분이 워십 밴드와 리더들에 의해서 이끌려진다. 때로는 찬양 사역이 믿음을 창조하는 성령님의 손에 있는 도구인 것처럼 보인다. 한 호주 신학자는 음악이 거의 “새로운 은혜의 방편”이 되었다고 기술했다(Dr. Barry Chant, "Retuning the Church“). 이 말은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묘사해 준다: 무대 위에 강대상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드럼세트와 워십 밴드의 다른 기구들에 의해 떠밀려진 강의대에 불과하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자.
다섯째, 우리는 예배 안에서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문화적 측면들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다른 시대와 다른 문화들이 예배의 다른 전통들을 이끌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기독교 강요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합당한 예배와 관련하여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지만 “그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의 세부를 규정하지는 않으셨다”고 쓰고 있다. 칼빈의 견해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에 적합한 한 가지 유형을 염두하신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는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들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각 나라와 시대의 풍습에 따라 다양하게 수용되어야만 한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때에는) 전통적인 행습들을 바꾸거나 폐지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칼빈은 예배에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네바 시편은 새로운 것이었다. 심지어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칼빈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은 것이라고 대단히 확신했음에도 제네바의 방식이 유일한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시대들과 다른 문화적인 환경들이 다른 예전적 형태의 발전을 이끌 것이라고 기대했다.
따라서 다른 문화들 속에 있는 교회들이 다른 실제를 가진다는 것은 정황상 아무런 잘못된 것이 없다. 우리가 북미에서 오르간과 피아노에 익숙한데 반해 남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이 기타를 선호한다고 해서 염려할 필요는 없다. 또한 우리는 제네바 멜로디에도 문화적인 국면이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이 멜로디로 노래하도록 한 번 가르쳐 보라.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멜로디는 그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예배에 적합한 아프리칸 멜로디를 사용하는 한에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아마도 칼빈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예배를 특성짓는 근엄함을 전달하는 데 합당한 멜로디를 사용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이 무슨 멜로디를 사용하든 개의치 않는다.”
여섯째, 노래가 회중적인 활동이라는 원리는 예배에 적합한 악기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에 우리가 대답하는 데 방향을 찾도록 도울 수 있다. 이 사실은 이러한 정황에서 교회 오르간이 회중 찬송을 반주하기 위한 최고의 악기라는 점을 재확인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주의 신학자요, 음악학자인 해롤드 베스트(Harold M. Best) 교수는 최근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르간은 서구 문화가 아는 한 찬송을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악기이다. 오르간의 디자인과 찬송가를 노래하는데 대한 현명한 사용에서 그것은 한 가지 목적을 이루는 도구이다. 즉 틈을 메우는 것, 곧 회중의 목소리를 지탱하는 것과 꽃피우는 것 모두를 제공하기 위하여 현명하게 사용됨으로써 찬송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동반상승 효과를 낸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것이다. 사람들은 압도되지 아니하고 대치되지 아니한 더 마음에서 우러나온 노래에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의 자연스런 훈련되지 않은 목소리는 의미있게 실증되고, 증진된다.”("Traditional Hymn-Based Worship" in Exploring the Worship Spectrum, Six Views)
우리가 가진 오르간 전통에 대해 책임있게 행하도록 하자. 오르간을 우상화할 필요는 없지만 또한 오르간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다른 악기로 대치되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근시안적이다. 오르간의 지속음(sustained sound)은 회중 찬송을 위한 강력한 기초를 제공한다.
이 말은 오르간이 회중 찬송을 반주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유일한 악기라는 말은 아니다. 피아노나 기타 역시 적절히 잘 사용될 수 있고, 특히 오늘날 우리들은 그러한 악기들의 소리를 증폭시켜 줄 수 있는 기술적인 도구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다른 악기들은 그 악기들만의 제약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플룻과 트럼펫은 노래의 멜로디는 연주할 수 있지만 회중 찬송이 의지할 수 있는 화음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타악기는 리듬을 고조시키고 흥분케 하지만 멜로디와 하모니를 제공할 수는 없다.
결국 오르간이나 피아노 대신 다른 악기들을 사용할 때는 부수적인 문제점들이 발생한다.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악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연주자들의 앙상블이나 워십 밴드가 필요할 것이다. 무대에 사람들의 그룹이 들어서자마자-거의 필연적으로- 회중 찬송에 두어졌던 강조점이 앙상블이나 밴드의 공연에 대한 강조점으로 옮겨갈 위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일곱째, 우리는 찬송이 기도의 한 형태라고 한 칼빈의 원리를 잘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찬송하는 회중은 자신의 생각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그 우편에 앉아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린다. 이러한 활동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떠한 것이라도 피해야먄 하고 막아야만 한다. 심지어 이것이 악기 사용에의 제한을 의미한다고 해도 말이다.
회중에게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라는 성경적 권면이 주어졌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칼빈의 견해를 최고로 존중하게 될 것이다. 전 회중이 찬미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만약 악기가 이 찬미의 사역에 있어 회중을 돕고 증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다.
루터와 칼빈의 찬송에 대한 시각은 달랐습니다. -조진형(음악 평론가)
칼빈은 카톨릭 전통을 배제하고 원시 초대교회 전례를 따르려고 하였다. 칼빈의 개혁이념은 루터와는 상반되는 좀더 엄격한 점이 많았다. 루터는 카톨릭의 전통을 지키며 그의 개혁이념에 따라 적절한 수정을 가한 것으로 음악도 카톨릭교회의 전통을 배제하지 않고 그래도 모방한 듯한 루터식 코랄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칼빈은 카톨릭 정신을 배제하고 원시 초대교회 전례를 좇으려 했으며, 교리도 거기에 기초를 두고자 하였다. 1536년 칼빈이 제네바에 망명하기 전에는 예배의식에 회중 찬송가가 없었다. 그 원인은 프랑스어로 된 찬송가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쯔빙글리(Zwingli, 종교개혁가)가 인도하던 쥬리히에서도 처음에 찬송가가 없었다가 1598년에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칼빈이 스트라스브루크에서 독일의 루터 코랄을 들어본데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칼빈의 찬송의 근원은 스트라스브루크에서 루터의 찬송에서 영향을 받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가사에 구약시편을 고집하여 프랑스 운율에 맞게 만든 것이 시편가 등장으로 본다. 칼빈은 루터처럼 음악을 좋아한 증거도 없고 소양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시편가와 몇 개의 캔티클만 부르도록 주장하였다.
찬송은 우리가 찬송을 부름으로서 마음이 충만해 지는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 드리는것 즉, 찬송의 초점도 우리에게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이 핵심 입니다. 실제로 칼빈의 견해도 인간이 만든 찬송을 부르지 않고 시편찬송만 불러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시편은 찬송곡으로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칼빈은 인간이 만든 악기인 오르간,피아노와 같은 악기 조차 금지 하였습니다.
말씀(가사)에 집중되기 보다 음악적 아름다움,즐거움등에 조금이라도 가려질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이런 신학적 이유로 유럽권의 개혁주의 교회와 북미 개혁교회들 중에서도 무악기,오직 시편찬송을 추구하는 교회도 다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르간,피아노 선별된 시편찬송외의 찬송을 부르는것은 ”소극적으로“ 허용된 방식 입니다. “시대가 변할수록 찬송도 변해야 된다”는건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시대가 지나면서 세련되어 져야 한다는 것은 정말 얼토당토 없는 소리입니다. 종교개혁이전 타락한 카톨릭의 음악은 고전음악임에도 당시에 얼마나 아름다운 음악이었습니까? 그러나 다수의 종교개혁자들은(루터는 이 부분에 있어서 카톨릭의 찬송방식을 그대로 이어나갔지만,) 그 세속적임과,성도들에게 성가대가 찬송을 빼앗았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개혁해서 되찾은 하나님께 드리는 바른 찬송을 싸그리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하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며 찬송을 부르며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고, 핵심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입니다. 악기 사용 등은 최대한 소극적인 방식으로 고심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찬송의 말씀과 그 방식의 정통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논의 하며 사용해야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