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희미해져 가는 온기
한밤 잠에서 깨곤 했던 날이 떠올려질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그런 날들은 제법 많았는데 조곤조곤한 이야기 소리, 그보다는 더 시끄러운 TV 소리, 몰아치는 비바람 소리, 천둥소리……. 소리가 나를 깨웠을 것 같은 날들은 많았고 이내 눈꺼풀을 닫는 것으로 그런 날들의 기억은 희미해진다. 기억에 남는 밤은 언제인가. 눈꺼풀을 닫았음에도 다시 잠들지 못한 밤일 수밖에 없는데, 희미한 기억 한편으로 어린 나를 휘감았던 감각이 오롯이 되살아나며 몸이 떨릴 때가 있다.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한 떨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을 겪은 일 없는 내가, 앞으로도 전쟁과 맞먹을 정도의 공포와 두려움이라면 모를까, 전쟁을 직접 체현할 일이 있을까.
이런,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새삼 분단국에 살고 있음을 실감케 되는 일이 많아졌다. 자명하게 평화는 기본과 상식이고 위협은 구호이자 선언에 불과했다면, 이제 도자기 상점 속 코끼리는 경험하지도 않아도 될 일들을 끊이지 않게 경험하게끔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정점이 전쟁이 될까?!
이십여 년 전 영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가 6월 25일 재개봉했다. 6.25 전쟁 74주년에 재개봉된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폴란드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이 겪은 홀로코스트를 이야기한다. 끊이지 않는 총격과 포격 소리가, 사이렌 소리가, 밀어버리고 되돌아와 또다시 사람을 밀어버리는 탱크의 움직임이 전쟁의 끔찍함을 뚜렷이 보여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유혈에 대해서는 무뎌져 간다. 눈감고 귀를 막아서 감각을 상실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끝날 즈음엔 전쟁은 총격소리나 유혈이 아니라 잿빛 도시에 나 홀로 서있는 피아니스트 포스터가 보여주는 그 이미지로 기억되었다. 아니 그것으로 감각되었다. 세상에 오로지 나 홀로 있다는 나 홀로 버티고 있다는 고독과 적막. 코트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주위를 흐르는 냉기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그런 감각. 그러니까 온기를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런 감각 말이다.
그저 온기 없던 어느 밤을 이야기하려는데 불쑥 전쟁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 밤의 기억을 말하기가 무안해진다. 기억도 감각도 무척 기인 날이었대도 전쟁에 비할쏘냐만,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고 그 순간에 내가 떠올린 것이 그 날 밤의 온기였으니 어쩌랴.
어린 내가 잠이 깬 건 소리가 아니라 점점 사그라지는 온기 때문이었다. 어슴푸레 비추는 달빛으로 그 밤 홀로 자고 있었음을 알았다. 옆에서 함께 자고 있던 이가 사라져버렸다. 잠결에 언니가 나간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화장실을 간 것인가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나 저제나 언니를 기다렸다. 밤은 참 길~고 조용했다. 어둠 속에서 무섭다기보다는 춥다는 생각을 했다. 이불을 온 몸에 뒤집어썼다가 곧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그 밤을 보냈다.
그 이후로도 언니의 밤마실은 계속되었다. 언니의 밤마실은 부모님 모르게 진행되었지만 굳이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었다. 대문을 열고 나간 것이 아니라 어쨌든 우리집에 머물러 있었으니 말이다. 언니는 이제 막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옆방에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모녀. 할머니와 딸-가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자고 오는 것이었다. 피아노 선생님은 기껏해야 이제 중학생이 된 언니와 무엇이 그리 통했던 것일까.
피아노에 빠진 소녀인지, 유혹에 넘어간 소녀인지 모를 언니의 부재는 늘 한밤에 희미해지는 온기 속에서 알게 되었다. 언니가 그 방으로 가는 것을 알게 된 후, 기다림과 쓸쓸함으로 온 몸을 뒤척이던 밤마다 피아노가 내 방의 온기를 모두 가져가고 온갖 냉기를 몰아다 놓는 것만 같았다.
사람이 옆에 없다는 것, 사람이 주는 온기가 모두 사그라진 공간에 나 혼자임이 주는 외로움과 쓸쓸함 또한 공포와 다름없다. 전쟁이란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체온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는, 사람이 온기를 잃어가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이 온기가 한순간에 희미해져 가는 그런 일들이, 너무나 허망하게, 반복적으로. 그러니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는 것과도 같은 삶이다. 박노해 시인은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고 했는데, 하루하루 전쟁같은 삶을 마치고 난 쓰린 가슴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사람에게 충성해야겠다고, 사람 사람마다 가진 가치를 알아야겠다고 그래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