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근무지,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
해미(海美), 참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다. 이름 그대로 해석하면, ‘바다가 아름답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실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이 통합됨에 따라 생겨난 지명이다. 오늘날 충남 서산시에 속하는 해미면은 내포지방의 진산인 가야산(678.2m)의 동쪽 끝자락이자 넓은 들이 막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다.
해미읍성의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海美內廂城)’이다. 태종 16년(1416)에 서산 도비산에서 강무(군사훈련을 겸한 수렵대회)를 하고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던 임금은 주변 지역을 살펴본 뒤에 이곳이 서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에 최적지로 판단했다. 곧바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충청병영: 충청도 지방의 육군 사령부)을 이곳으로 이전함과 동시에 새로운 성을 쌓도록 명했다.
태종 17년(1417)부터 쌓기 시작한 해미내상성은 세종 2년(1421)에 완공되었다. 그 뒤로 230여 년 동안 충청도 지방의 모든 군사를 지휘하는 충청병마절도사영성(충청병영성)이 되었다. 이곳에는 종2품 벼슬의 병마절도사 휘하에 850여 명의 군사가 주둔했다. 선조 9년(1576)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 장군도 3년 뒤에 이곳에서 열 달 동안 군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도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열흘 동안 이곳에서 첫 귀양살이를 했다.
충청병영이 청주로 옮겨간 효종 3년(1652)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240여 년간은 충청도 5개 군영의 선임 군영이자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하는 호서좌영이 들어섰다. 그와 함께 해미현감이 호서좌영장을 겸하는 겸영장제가 시행됨에 따라 해미현 관아를 성안으로 옮겨 왔다. 그때부터 성 이름도 해미읍성으로 바뀌었다.
오랫동안 해미읍성 내에 남아 있던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면사무소, 학교 등의 공공기관이 들어섰다. 이 공공기관과 160여 채의 민가들도 해미읍성 복원사업이 시작된 1973년부터 모두 성 밖으로 옮겨졌다. 오늘날 사적공원으로 조성된 읍성내의 넓은 잔디밭에는 근래 복원된 몇 채의 건물만 자리 잡았다. 그래서 휑한 느낌도 들지만, 성 자체의 아름다움만큼은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빼어나다.
공사실명제가 적용된 해미읍성 축조공사
해미읍성은 전형적인 평지성이다. 성벽 위에만 올라서도 사방으로 거침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뒤쪽으로는 가야산이 우뚝하고 앞쪽으로는 마을과 들녘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러나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대규모 간척공사로 인해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천수만 바다가 깊숙하게 만입(灣入)해 있어서 지금보다 훨씬 가까웠다. 그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왜구들의 침입과 노략질을 적잖이 겪어야 했다.
해미읍성은 둘레 1,800m에 높이가 4.9m, 총면적은 196,381m²에 이른다. 성곽은 처음에 토성으로 축조됐다가 성종 22년(1491)에 석성으로 보강되었다. 이 공사에는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성벽 아래쪽의 큰 돌에는 해당 구역의 공사를 담당한 고을 이름이 새겨졌다. 공사실명제가 적용된 셈이다.
해미읍성의 성벽 밖에는 해자(垓字)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러쳐서 이중 방어벽을 구축했다. 적들이 접근하기 쉬운 평지성이라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이다. 한때 ‘탱자성’이라 불릴 만큼 많았던 탱자나무는 이제 서문 주변에만 일부 남았고, 해자는 모두 메워져 버렸다. 해미읍성의 정문은 진남문이다. 조선시대에 세워져서 여태까지 남았다. 반면에 동문(잠양루)과 서문(지성루)은 1974년에 복원되었다. 진남문의 문루 아래를 가로지른 받침돌에는 붉은 글씨로 ‘皇明弘治四年辛亥造(황명홍치4년신해조)’라 새겨져 있다.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데, 홍치 4년은 성종 22년(1491)을 가리킨다. 그때 진남문이 중수됐다는 뜻이다.
진남문을 통과해 동헌으로 가는 길가에는 신기전, 검차, 투석기 등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병장기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이 늘 외적과의 싸움에 대비하는 병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병장기들이다.
해미읍성의 나무와 숲 이야기
해미읍성의 한복판에는 키가 크고 몸통이 굵은 고목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이곳 사람들이 ‘호야나무’라고 부르는 ‘회화나무’이다. 수령이 300년쯤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병인년인 1866년부터 약 6년 동안이나 계속된 병인박해 당시 호서지방의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더욱이 1868년 봄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조선 천주교인의 협조를 받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크게 분노한 흥선대원군은 호서지방의 천주교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도록 명했다. 호서좌영성인 해미읍성에 끌려온 천주교인들은 이 ‘호야나무’에 매달려 효수되거나 성 밖 해미천 근처의 여숫골과 진둠벙에 생매장되는 등의 방법으로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호야나무 바로 옆에는 당시의 옥사를 원형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커다란 느티나무들 아래의 동헌과 내아, 객사 건물 등도 1997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동문 앞쪽에는 서리의 집, 상인의 집, 부농의 집 등 조선시대의 민가 여러 채가 새로 지어졌다. 민가에서는 지역 노인들이 직접 시연하는 다듬이질, 짚풀 공예, 삼베 짜기 등을 관람할 수도 있다.
동헌 옆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해미읍성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한 청허정이 눈앞에 보인다. 성종 22년(1491)에 충청병마절도사 조숙기가 처음 세웠다는 정자이다. 멀리 천수만까지 보일 정도로 전망이 탁월해서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로도 활용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청허정이 있었던 자리에 신사가 세워지기도 했다. 현재의 청허정은 2011년에 복원됐다.
청허정 주변의 비탈과 언덕에는 솔숲과 대숲이 울창하다. 단순히 풍치를 즐기려는 숲이 아니라, 무기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얻는 숲이었다. 예컨대 소나무의 송진은 화약을 만드는 데 쓰였고, 대나무는 화살의 중요한 재료였다. 이 솔숲과 대숲은 현재 해미읍성에서 가장 운치 있고 멋스러운 공간이다. 두 숲의 조붓한 길을 찬찬히 걷노라면, 그윽한 솔향기에 머릿속까지 상쾌해지고, 한줄기 바람에도 서걱거리는 댓잎 소리에 세상만사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듯하다.
글, 사진. 양영훈(여행작가, 여행사진가)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2023-01월 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