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2장 1-12절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는 냉혹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럴수도 있지!”하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보면 “저 사람은 나뻐”이렇게 반응합니다. 똑같은 죄를 졌어도 자신은 원래 의로운 사람인데 작은 잘못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는 “그러면 안되지”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의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죄에 대한 유형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잘 이시듯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애서는 결코 작은 죄가 없습니다. 단 하나의 죄도 부정한 것이며 그것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속죄제사와 속건제사, 그리고 죄에 대한 보상제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선지자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 혹은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런 병을 고치고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병을 고쳐 달라고 구하실 수도 있고 복을 달라고 구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오신 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1장 2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에 대하여 침례 요한도 예수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자기 백성의 죄를 그들의 죄에서 사해야 할 만큼 죄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이 세상 누가 그렇게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합니까? 그럴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만일 그럴 수도 있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또한 선악과를 먹었다고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그 죄에 대한 저주를 선포하셨고 그 저주를 풀 여자의 후손이 후에 태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가 3장 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최초의 인류에게 십자가의 구속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죄를 짓게 한 뱀과 뱀의 꼬임에 넘어간 여자와의 관계는 서로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 관계는 뱀과 여자의 후손에게 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적인 싸움은 온 인류의 배후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사탄의 공격과 죽음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싸움은 교회와 마귀의 싸움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특이한 것은 예수님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세상의 권세에 비하면 분명 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세상 권세자들로부터 계속되는 박해를 받습니다. 마귀가 세상 권세 배후에서 교회를 멸하도록 시키기 때문입니다. 세상 권세 앞에서 무기력해 보이는 교회의 강한 힘은 무력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를 통해 보이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힘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랑에 있습니다.
세상은 사랑이 무슨 힘이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사랑은 악인들을 선한 사람으로 살도록 변화시키며, 죄인들로 하여금 거룩하고 의롭게 살도록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세상 권세는 급속도로 부어지는 용광로의 쇳물과 같은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은 교회는 마치 새벽이슬같은 약해보이고 느려보이는 역사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나라들은 한 때로 그 권세가 끝나지만 교회를 통해 보여지는 사랑으로 인한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고 강해집니다. 세상은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랑으로 변화가 되며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안에 자비와 긍휼과 용서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이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에 베드로가 살았고 또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고 있는 동네인 가버나움으로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왕이 떠나갔던 자리로 무엇인가를 마음에 두고 들어가신 것과 같은 분위기가 서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어떤 목적을 두고 가버나움 동네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거기서 한 집에 들어가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떼 사람들이 집 안팎으로 가득했습니다. 소문이 소문을 타고 사람들에게 들려져 너도나도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메워 가지고 왔습니다. 네 사람이 집 밖에서 보니 도저히 안에 계신 예수님께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상의한 끝에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뜨고 그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내리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침상 네 모퉁이에 줄을 매가지고 뜯어낸 지붕을 통해 예수님 앞에 달아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상한 일입니다. 이 사람이 죄를 회개한 것도 아니고 또 죄사함을 받기 위해 온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을 데리고 온 사람들은 이 사람의 중풍병을 고쳐주시기를 바라고 데리고 온 것이지 죄를 사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를 사해주셨다고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애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예수님은 그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이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중풍병자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그 죄를 사할 권세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으로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는 곧 자기가 누웠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습니다. 그것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다 놀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 백성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지냈던 대제사장들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그의 죄가 사람을 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들 말대로 예수님은 선생님이나 랍비 정도를 훨씬 크게 뛰어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바로 잡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두 가지 곧 죄를 사하시는 것과 질병을 고치시는 것을 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자기들의 생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를 사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은 하나님과의 동행의 시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가 의로운 줄로 알고 있기 때문에 죄를 사해달라고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저기가 건강한 줄 알고 병원에 가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가 죄인인줄 알게 될 때 그는 자기의 죄를 능히 용서해주실 수 있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를 찾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죄사함을 선포하십니다.
이미 죄를 용서하셨다고도 하실 수도 있고 또 지금 용서한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예수님은 “네 죄가 사함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사해주시는 행동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하는 죄를 범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죄를 짓기도 전에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2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이미 베드로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용서의 시간차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용서하시는 분과 용서받는 죄인의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는 십자가에 같이 달려서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했던 강도에게 선포하신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쑴하십니다. 그가 언제 죄사함을 받았습니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용서를 받았고 낙원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평소에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사십니까? 아니면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십니까? 성령은 여러분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런 한편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지복하며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왜 이것이 필요합니까?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죄가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과거에 지은 모든 죄가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갔고 새 것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매여 삽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계속됩니다.
여러분 죄를 사해주시는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질병만 심각하게 고쳐달라고 하지 마시고 죄도 심각하게 용서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의 죄를 옹서해 주시고 용서하셨다는 말씀을 선포해주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로인해 변화된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영광을 받기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서 다른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일을 하시며 그 위에 사랑을 더하시는 은혜로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복이 넘치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