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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 의궤(儀軌)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
의궤(儀軌)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이다.주로 훗날에 참고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작되었다. 대개 1∼4책의 필사본으로 제작되었지만, 8, 9책에 달하는 분량이 활자로 인쇄되어 폭넓게 반포된 것도 있다. 각 책의 제목은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와 같이 해당 행사를 주관한 임시 관서의 명칭에 '의궤'를 붙여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언제부터 작성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 이후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전하여지는 《의궤》로는 1600년(선조 33)에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에 대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19세기까지 시기가 내려올수록 종류도 많아지고 질적인 수준도 높아졌다.
《의궤》가 작성되는 주요 행사로는 왕비ㆍ세자 등의 책봉(冊封)이나 책례(冊禮), 왕실 구성원의 결혼, 선대(先代) 인물들의 지위를 높이는 추숭(追崇)이나 존호가상(尊號加上),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의 마련에서 능원(陵園)의 조성 및 이장에 이르는 각종 상례(喪禮), 신주를 태묘(太廟)에 모시는 부묘(祔廟)를 비롯한 여러 제례(祭禮)가 있다. 그밖에 국왕이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
화성성역의궤범(華城城役儀軌)
(親耕), 궁궐 건물의 건설 및 보수, 공신 녹훈, 왕실 인장(印章)이나 국왕 초상화의 제작 등에 편찬되었으며, 정조대에는 화성 신도시의 건설과 국왕의 수원 행차에 대해서도 각기 장편의 의궤가 작성되었다. 행사가 끝나면 의궤를 편찬할 기구와 담당자가 결정되고 주관 관서인 도감과 관련 관서의 기록들을 자료로 삼아 편찬하였다.
일반적으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명령 및 보고 또는 관서들 사이에 오고간 문서인 전교(傳敎)ㆍ계사(啓辭)ㆍ이문(移文)ㆍ내관(來關)ㆍ감결(甘結)들과 소요 물품의 제작과 조달을 담당한 부속 공작소(工作所)들의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공작소의 기록들은 각기 개별적인 의궤 형식을 갖추고 있다. 내용은 행사가 준비되어 진행된 과정, 업무의 분장, 동원된 인원, 물자 및 비품의 조달과 배정, 경비의 수입과 지출, 건물 및 비품의 설계 및 제작, 담당 관리와 동원된 인물, 행사 유공자에 대한 포상 등 관계된 사실 모두를 수록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필요하면 채색의 반차도(班次圖, 궁중의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와 같은 그림도 실었다. 대체로 5∼8부 정도가 제작되었는데, 임금의 열람을 위하여 고급재료로 화려하게 만드는 어람용(御覽用) 1부가 포함되며 나머지는 관련 관서 및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중 어람용을 포함하여 1860년대 이전의 의궤 중에서 강화도 외규장각(外奎章閣)에 보관되던 많은 수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약탈당하였다. 종합적인 자료이므로 경제ㆍ정치ㆍ미술ㆍ음악 등 여러 분야의 연구에 이용된다. 2007년 6월 '조선왕조의궤'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의궤는 ‘의식(儀式)의 규범(規範)’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정부가 치른 각종 행사와 공사(公事) 등을 기록한 일종의 ‘결과보고서’다
의궤(儀軌)는 조선 왕실에서 국가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 훗날 참고하기 위해 남기는 기록문서를 가리킨다. 조선 왕실에서 주관하는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임시 기구인 도감(都監)을 두어 이를 주관하게 했는데, 행사를 마치면 도감을 해체하고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하여 의궤의 편찬을 맡아보게 하였다. 의궤는 조선 건국 당시 태조 때부터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많은 관련 기록이 전하나 현재 조선 초기 의궤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전(現傳)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1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 기록을 남기기 위해 편찬된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懿仁王后山陵都監儀軌)》와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 (懿仁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이다.
보통 필사하여 제작하였으므로 소량을 제작하여 특별 제작한 1부는 어람용(御覽用)으로 왕에게 올리고 나머지는 관련 기관과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外奎章閣)에서 300여 책의 문서를 약탈하였다. 이들은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기록과 그림이 아우러진 왕실 행사 보고서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 과정을 기록으로 정리한 책이다. 필요하면 그림을 첨부하여 행사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하게 하였다. 한자로 풀이하면 의식(儀)과 궤범(軌)을 합한 말인데, 궤범의 軌는 바퀴, 範은 모범이란 뜻으로 바퀴의 궤도를 따라 가듯이 유교 이념에 따라 이전 행사를 잘 이어받고 그것을 정리하여 후대에까지 전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모범적인 전례를 만들어 놓고 이를 참고하여 선왕의 법도를 계승하는 한편,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는 것이 의궤를 만든 주요한 목적이었다. 후대인들이 앞 시기에 편찬된 의궤를 참고하여 혼례식이나 장례식, 궁중 잔치 등 국가의 주요한 행사를 원활하게 치르게 하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의궤는 조선 왕실의 주요 행사가 끝난 후에 제작하는 행사 보고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왕의 혼인을 비롯하여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치, 왕실의 장례, 궁궐의 건축 등과 같이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관련 기록을 모아두었다가, 행사에 끝난 뒤에 임시 기구를 만들어 의궤를 편찬했다. 국가적 행사를 추진할 전담기구 설치, 의궤라는 행사 보고서 작성, 국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비로소 행사를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국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는 일반 의궤보다 재로나 장식이 뛰어나 누구라도 한눈에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의궤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림이다. 의궤는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나 각종 건물 또는 물품의 모습을 그린 도설(圖說)을 수록한 그림책이기도 하다. 통상 천연색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서 우리는 행사가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문자기록 만으로는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물품의 세부 사항까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의궤는 기록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사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의궤가 지니는 희소성과 세밀한 기록, 300여년 이상 지속되어 온 기록 등을 근거로, 2006년 우리 정부는 의궤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 줄 것을 신청하였고, 2007년 6월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된 의궤는 ‘세계기록유산’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기록물로서 의궤는 세계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위하여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화성에 행차하였던 모습을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처용무를 추는 모습.
반차도(班次圖)
궁중의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반열도(班列圖) 또는 노부도(鹵簿圖)라고도 한다. 반차는 의식에서 문무백관이 늘어서는 차례를 말한다. 의궤도(儀軌圖)의 일종으로 연을 중심으로 늘어선 관원들의 정확한 배치상이 풍속적인 성격을 띤 기록화이다. 행렬의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시각인 조감법(鳥瞰法)을 사용하였으나 투시도를 보는 듯하다. 또한 그림의 앞과 끝에 행사 내역과 참가 인원 및 관직 등을 자세히 적어놓아 정확한 고증이 가능하다.
행사의 내용에 따라 사연도(賜宴圖)ㆍ진연도(進宴圖)ㆍ관례도(冠禮圖)ㆍ발인반차도(發靷班次圖)ㆍ생신 반차도(生辰班次圖)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많이 그려졌으며 당시의 각종 행사 규모 및 복장, 악대 구성 등 여러 가지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청계천의 광교~삼일교 사이에 그려진 정조반차도 벽화. 혜경궁 홍씨가 탄 자궁가교의 모습.
정조반차도(正祖斑次圖)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그림. 조선 22대 왕 정조가 어머니 경의왕후(敬懿王后;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가 묻힌 화성 현륭원(顯隆園)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1795년 음력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 동안 진행된 정조의 화성행차에는 경의왕후를 비롯하여 정조의 두 누이인 청연군주(淸衍君主)와 청선군주(淸璿君主)가 동행하였고 우의정 채제공 비롯한 문무백관과 나인, 호위군사 등 6000여명이 동원되었다. 정조 반차도는 이들 가운데 1천779명의 사람과 말 779필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 의궤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의궤에 기록된 각종 행사를 위해서는 도감(都監)이라는 임시기구가 먼저 설치되었다. 도감은 행사의 명칭에 따라 각각 그 이름이 달랐다. 즉 왕실의 혼례에는 가례도감(嘉禮都監), 국왕이나 왕세자의 책봉의식에는 책례도감(冊禮都監), 왕실의 장례에는 국장도감(國葬都監), 사신을 맞이한 행사일 때에는 영접도감, 궁궐의 건축과 같은 일을 행할 때는 영건도감(營建都監) 같은 이 름을 붙였으며, 이들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에서는 각기 맡은 행사를 주관하였다.
도감은 임시로 설치되는 기구이므로 관리들이 겸직을 하는 일이 많았다. 도감의 직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총책임자에 해당하는 도제조(都提調) 1인은 정승급에서 임명되었으며, 부책임자급인 제조(提調) 3∼4명은 판서급에서 맡았다. 실무 관리자들인 도청(都廳) 2∼3명, 낭청(郎廳) 4∼8명 및 감독관에 해당하는 감조관(監造官) 6명은 당하관의 벼슬아치들 중에서 뽑았으며, 그 아래에 문서작성, 문서수발, 회계, 창고정리 등의 행정 지원을 맡은 산원(算員), 녹사(錄事), 서리(書吏), 서사(書士), 고지기(庫直), 사령(使令) 등이 수명씩 임명되었다. 이외에 화원, 장인 등 실제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부서별로 배치하였고, 의궤가 만들어질 때 이들의 실명(實名)을 꼭 기록하여 책임감과 함께 자부심을 부여하였다.
도감에서는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 과정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문서들을 수집하였다. 일방, 이방, 삼방 등 부서별로 담당한 업무 내용을 정리하였고, 필요하면 도설과 반차도와 같은 그림 자료들을 첨부 하였다. 행사 후 도감과 각 방에서 모아진 문서들을 정리했고, 이를 토대로 의궤가 제작되었다.
☞ 의궤에 기록된 다양한 왕실 행사
의궤에는 조선시대에 행해진 다양한 왕실 행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이 왕조국가인 만큼 주로 왕실행사와 관련된 것들이며, 왕실의 일생을 보여주는 의궤들이 많다. 왕실의 태(胎)를 봉안하고 주변에 석물을 조성한 과정을 보여주는 태실의궤를 비롯하여, 왕이 자라면서 죽을 때까지 겪는 삶의 과정 대부분이 의궤의 기록으로 구현되었다.
먼저 왕자가 왕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왕세자의 책봉 의식과 선왕을 이어 왕이 되는 책봉 과정에 관한 의궤가 있다. 왕비도 왕과 함께 왕비 책봉식을 하는데 이에 관한 행사는 ‘책례도감의궤(冊禮都監儀軌) ’로 정리하였다. 대개 왕세자 시절인 15세 전후에 이뤄지는 왕의 혼례식도 꼭 의궤로 정리하였다. 왕실의 혼례식을 가례라 하였는데, 혼례식을 정리한 ‘가례도감의궤’는조선 왕실의 최대 축제였던 만큼 그림도 많이 첨부되었고 내용도 풍부하였다.
의궤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왕실의 장례와 관련된 의궤이다. 유교사회인 조선사회는 왕부터 백성까지 조상의 장례를 잘 거행하고 이후의 제사 의식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이다.
왕이나 왕비가 사망하면 장례식이 엄숙하게 행해졌고, 장례식의 전 과정은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로 편찬하였다. 이어 왕의 무덤을 조성한 과정을 정리한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가 편찬되었고, 왕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은 ‘부묘도감의궤(祔廟都監儀軌)’로 정리되었다.
이제 왕이 되면 주관하는 행사가 많아지는 만큼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의궤가 편찬되었다. 왕이 친히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종묘의궤(宗廟儀軌)’ 와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를 비롯하여,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왕이 친히 농사를 짓는 과정을 정리한 ‘친경의궤(親耕儀軌)’가 편찬되었다. 여성이 옷감을 짜는 것이 중시되었기에 왕비는 누에에서 실을 뽑아 옷을 짜는 친잠 행사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행사의 전 과정은‘친잠의궤(親蠶儀軌)’로 편찬되었다.
왕실 행사 중 잔치의 비중도 컸다. 대왕대비나 왕대비 등 왕실의 최고 여성을 위해 벌이는 잔치 행사, 왕이 40세, 50세, 회갑이 되는 것 등을 기념하는 행사가 추진되었고, 잔치가 끝난 후에는 ‘풍정도감의궤(豊呈都監儀軌)’ ‘진연의궤(進宴儀軌)’ ‘진찬의궤(進饌儀軌)’ ‘진작의궤(進爵儀軌)’ 등 잔치 관련 의궤가 만들어졌다. ‘진연’은 ‘잔치를 베푼다’는 뜻이며, ‘진찬’은 음식을 대접한다는 뜻이며, ‘진작’은 ‘작위(爵位)을 올린다’는 뜻으로 모두 경사를 맞이하여 잔치를 베푸는 의식을 말한다. 왕실에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식 후에는 ‘존호도감의궤(尊號都監提調)’가 만들어졌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조선 정조(正祖)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연을 기록한 책.
궁궐의 건축이나 성곽의 건축을 한 후에도 꼭 의궤를 만들었다. 건축 관련 의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조가 지금의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고, 건축의 전 과정과 각 건물의 도면까지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이다. 창경궁, 창덕궁, 경운궁 등 조선의 궁궐을 수리한 과정을 정리한 의궤들도 있으며, 화기(火器) 제작의 과정을 기록한 ‘화기도감의궤(火器都監儀軌)’가 제작되었다. 이외에 자격루, 측우기 등 과학기구들을 활용하고 보관하는 건물을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보루각수개의궤’와 ‘흠경각영건의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왕이 성균관에 친히 행차하여 신하들과 활쏘기 시합을 하고 과녁을 맞힌 수에 따라 상과 벌을 주고받았던 의식의 과정을 기록한 ‘대사례의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사신을 맞이한 상황을 정리한 ‘영접도감 의궤’,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위하여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화성에 행차하였던 모습을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 궁중에서 필요한 악기를 만들었던 상황을 기록한 ‘악기조성청의궤’ 등을 통해서는 조선시대 다양한 왕실 행사의 생생한 현장 모습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세상에 태어나는 첫 징표인 왕실의 태를 봉안하는 의식부터 시작하여 왕의 혼이 종묘에 모셔져 영원히 기억되게 하는 의식까지, 왕의 일생은 의궤의 기록으로 남았다. 이런 점에서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문화 전통을 복원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다.
서울은 궁궐을 비롯하여, 종묘와 사직, 성곽, 청계천까지 전통의 유산들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기록유산인 의궤의 기록에 나타난 궁중 행사들이 역사와 문화 공간인 궁궐이나 종묘 등에서 활발하게 재현된다면, 우리만의 독특한 왕실 문화를 내외국인들에게 널리 보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기록문화의 꽃, 의궤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정조국장도감의궤(正祖國葬都監儀軌) 중 반차도 부분. 국장행렬을 그린 반차도는 발인하기 열흘 전까지 완성되어야 했다. 발인은 엄숙하고 장중하게 치러야하므로 반차도를 통해 미리 연습하고 행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숙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과정을 정리한 의궤
조선 정조의 장례 절차 등을 기록한 ‘정조국장도감의궤(正祖國葬都監儀軌)’ 중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반차도’
<조선왕조의궤(朝鮮王朝儀軌)>에는 행사의 과정에 사용딘 각종 공문서를 비롯하여, 업무의 분담, 담당자의 명단, 동원된 인원. 소요된 물품, 경비의 지출, 참가자의 경우 관리의 직위와 맏은 이름까지 매우 세세하게 내용을 적어 놓았다. 이름을 적을 때에도 양민과 천민의 구분 없이 장인의 이름까지 적었고, 행사에 사용한 물품의 경우에는 재료와 수량, 크기 모양과 빛깔까지도 알 수 있도록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글 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표현하여 기록의 충실함은 물론,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다. 마치 당시 행사의 현장 상황을 중계하는 영상물처럼 생생하다.
의궤(儀軌)의 편찬과 보관-의궤는 필사본 또는 할자본으로 하여 5~9부를 편찬하였는데, 1부는 왕에게 전달하고 나머지는 각 부처와 사고 등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왕에게 전달한 의궤는 규장각에서 보관하다가 1782년(정조6)에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건설하고 왕실 관련 물품을 이곳으로 옮길 때 함게 옮겨갔다. 방어시설이 완비된 강화도에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배려 였으나, 오히려 1866년 프랑스군의 침입 당시 어람용 의궤 297책을 약탈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어람용 의궤는 왕게게 직접 전달되는 만큼 가장 정성들여 만든 것으로 예술성과 가치가 돋보인다.
조선왕조의궤(朝鮮王朝儀軌)가 지닌 가치-의게에 담긴 정보는 정치사, 경제사, 건축사, 미술사, 언어사, 복식사, 음식사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영역에 걸치고 있어 이 방면 연구에 있어 일차 자료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사라진 궁중문화를 복원하고 재현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참고해야 할 귀중한 자료이다. 지금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의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이궤의 덕택이다. 의궤는 행사의 진행 과정을 날짜순으로 자세하고 적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천민의 장인(匠人)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기록했으며, 행사에 들인 비용과 재료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는 등 내용이 치밀하다는 점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의식(儀式)에 쓰인 주요 도구와 주요 행사 장면을 천연색으로 그려 놓아 시각적 효과와 현장성을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반차도(班次圖)-행사기록화
의궤도(儀軌圖)의 일종으로 왕실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班次)는 ‘나누어진 소임에 따라 차례로 도열하는 것’을 일겉는 말로 반차도를 통하여 행사 참여 인원, 의장기의 모습, 기마의 배치 등 생생한 현장들을 접할 수 있어, 당시의 각종 행사 규모 및 복장, 악대 구성 등 여러 가지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다. 반차도는 행사 전에 미리 참여 인원과 물품을 배치해 봄으로써 행사 당일에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최대한 줄이는 기능을 하였다.
반차도(班次圖)-청계2가 삼일빌딩 아래 청계천변 옹벽에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과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다녀오는 8일간의 의전 행렬을 그린 대형 타일 벽화가 있다. 바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수록된 <정조대왕능행반차도(正祖大王陵幸班次圖)>이다. 이 반차도에는 행사에 동원된 인원과 행사의 규모와 방식 등이 생생히 드러란다. 반차도를 비롯하여 의궤에 그려진 그림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모인 화원에서 그린 것으로 작품성 또한 매우 높다. 궁중 잔치를 기록한 의궤의 경우에는 행사의 모습을 병풍으로 제작하여 왕실에 바치거나 의식에 참여한 관리들에게 포상 형식으로 나누어주기도 하였는데, 이 병풍 그림들은 천연색으로 그려져 있어 조선시대 왕실문화의 멋과 화려함이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국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는 일반 의궤보다 재료나 장식이 뛰어나 누구라도 한 눈에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조 19년(1798)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으로 행차한 배경과 경위, 절차 등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는 필사본으로 제작되었던 종래의 의궤와는 달리 활자본으로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