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지공원
<2>
강 문 석
한껏 멋을 부린 양장점 마담은 요리 뺀돌 저리 뺀돌 확인서를 써주지 않고 시간을 끌더니 어디로 어떻게 연락했는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대형 오토바이들이 세 대나 나타나 민식을 둘러싸고 위협했다. 깡다구로 살아온 그인지라 어설프게 검은 안경으로 폭력배처럼 위장한 시골구석 신문지국장들에게 절대 민식은 밀리지 않았다. 경찰도 그들이 지역에서 다스리기 힘든 독버섯이란 걸 아는 모양이지만 민식이 워낙 강경하게 나오자 당장 눈앞에선 가시적인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한심한 것은 나이가 쉰에 가까운 관할 주재소장은 낮부터 막걸리라도 한 잔 걸쳤는지 양장점으로 전화를 걸어와 민식에게 잘 봐주라며 횡설수설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도 일본은 도전이란 낱말 자체가 없었는데 우리나라는 전기다소비 업종인 정미소나 제강 제철회사 그리고 호텔 등 숙박업이 도전을 공공연하게 저지르고 있었으니 도둑을 지켜야하는 입장에선 그만큼 힘이 들었다.
민식은 서울 여의도에서 김포로 비행장이 옮겨갈 때 서울에서 고학했다. 그래서 공항이름이 바뀐 역사를 알고 있다. 그러고 부산 수영비행장이 김해로 옮겨가 김해공항이 될 땐 부산에 살았다. 그런데 부산이 팽창하여 서낙동강까지 부산으로 편입되었는데도 부산비행장으로 바뀌지 않은 게 그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후일 들으니 부산에서 명칭을 바꾸려고 시도하자 김해에서 극력 반발했다는 얘기다. 김해평야 그 넓은 옥답까지 다 뺏어가고 공항이름까지 바꾼다면 우리 김해에 너무 가혹한 짓이 아니냐며 심하게 반발하여 공항이름을 바꾸지 못했다니 이런 못난 짓도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의 업무처리 태도인가 싶었던 것이다. 민식은 김해가 팽창하는 모습을 지켜본 산 증인이라 할 수도 있다. 김해는 강을 끼고 있는데다 대도시 부산과 창원이 양쪽으로 붙어있어 발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민식이 김해에서 골탕을 먹은 첫 번째 일은 논 49평이었다. 부산지방법원 행정주사로 있던 친구가 어느 날 문제의 땅을 그에게 사라고 권해왔다. 봉황초등학교 운동장과 붙은 논 2천 평을 법원 직원들이 덩어리째 매입하여 지목도 바꾸지 않은 채 분할했던 것. 그 친구는 훗날 되팔아도 몇 배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그를 꼬드겼다. 부동산 세계를 잘 모르는 민식은 그 친구의 말만 믿고 쉽게 빚을 내어 땅을 샀다가 매년 농지세 내느라 김해를 찾아가야 했고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아 골탕을 먹다가 10여 년이 지나서야 거의 절반 가격에 겨우 처분할 수 있었다.
민식은 현직 때 매년 열흘씩 5년 동안 김해를 체험한 적도 있었다. 직장 부산본부에서 정기적으로 수행하는 감사업무였다. 그때 오래 전 신어산에 들어선 신어사 절에 전기를 공급한 현장도 확인할 일이 생겼다. 지금처럼 길이 제대로 나지 않아 안내한 직원과 경사진 산을 걸어서 오르느라 애를 먹었다. 안동공단을 비롯하여 주촌 장유지역도 그때 감사업무로 답사하면서 발 디뎠고 연지공원이 들어선 내동과 그 옆 외동까지도 서울 명동처럼 환락가로 변한 걸 그때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다.
업무감사 기간 중 야간에 벌인 테니스대회도 민식은 잊히지 않았다. 김해지점에선 차를 타고 옛 시가지를 찾아가야 코트가 있었다. 당시 총무과장 Y선배는 김해 출신으로 그야말로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옆에서는 수군댔다. 나이가 민식보다 대여섯 위인 그 선배는 연하의 H지점장과 자주 농담을 주고받았다. 지점장이 약간 민망할 정도였지만 당시에도 골프에만 매달리던 Y선배가 그래도 감사팀을 위해 테니스장에 함께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배구감독 출신 C선배도 함께 시합에 참가했는데 두 선배는 모두 이제 이승을 떠나 만날 길이 없다.
외환위기로 5년 일찍 직장을 떠나온 민식을 전문대학에서 불렀다. 겸임교수라 했지만 실제론 강사대우였다. 따로 매인 데가 없으니 그는 주야간 학생들에게 정성을 쏟았다. 그 앞서 민식이 부산진구청과 금정구청 민방위강사로 출강하면서 50분 강의에 7만원을 받았다. 그것도 일본 고베지진 이후 두 배로 오른 강의료가 그랬다. 그런데 전문대는 25000원이 채 안 되었다. 돈을 바라고 출강한 건 아니라 하더라도 의욕이 솟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전기과 교수실에 어려운 문제가 닥쳤다. 부산권 전문대학 중에선 전기과 졸업생 취업률이나 4년제 대학 편입학 비율로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최상인 D전문대였는데 2억5천 지원금 수령에서 구포의 B전문대에 밀렸던 것이다.
전력회사에서 전국 시도별 전문대학 전기과에 매년 주는 그 지원금도 사상 유례가 없는 무소불위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천방지축이던 J사장이 급조해서 만든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 시절이었다. DJ가 국내에 있지 못할 만큼 위중한 일이 생겨 미국에 도피해 있을 때 동향인 J사장의 미국 집에서 신세를 졌고, 권력을 잡자 보은으로 그를 전력회사 사장자리에 앉혔던 것.
J사장은 지능이 좀 떨어졌든지 아침마다 벌이는 임원회의에서 청와대 국가최고 존엄과 통화하는 퍼포먼스를 벌였고 눈치 빠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전무들도 푸른기와집에 다들 줄이 닿아 있어 그 쇼에 넘어가질 않았다. 민식의 전문대학에선 그러한 사정은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B전문대에 밀렸으니 그 지원제도가 없어지기 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음 해엔 꼭 수령해야 하는 것이었다. 전문대학 전기과 전임교수 6명은 재단이사장에게 체면이 서질 않아 죽을 맛이었다. 전기과 전임교수 선임인 C교수도 젊은 날 대졸 후 전력회사에 입사하여 학위를 취득하여 대학으로 직장을 옮긴 인사였다. 한전 재직 때 맺은 인연으로 그가 민식을 전문대로 불러들였다.
C교수는 자기를 좀 살려주는 셈 치고 적극 나서서 한전 지원금을 받게 해달라고 민식에게 매달렸다. 사실 민식은 그 해법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었다. 당시 한전 K부사장은 C교수 대학 후배이기도 했고 민식과도 K는 친했다. K부사장의 절친한 대학동기 H가 그때 마침 한전 거창지점장이었다. 민식은 교수 3명을 거창으로 보냈고 그의 지략은 적중했다. 2억5천만 원은 큰돈이었다. 학생들이 단체로 대형 쾌속여객선에 올라 일본 구주전력을 견학했고 가스가 분출하는 아소 활화산도 올랐다. 후쿠오카 지역 명승지도 서너 곳 단체로 둘러봤다. - 다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