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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조선) 光海君(광해군)
KBS 역사스페셜 – 왕의 꿈, 왕의 조건,
조선 15대 왕 광해.
- 천민 출신 상궁 김개시, 광해군의 최측근이 되다 1623년 3월 12일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밤, 조정엔 이미 정보가 입수되어 있었다. 역모의 움직임을 고발하는 한 통의 상소를 받은 광해군은 이 상소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고 한다. 왕이 이처럼 역모의 고변을 물리친 데는 한 여인이 개입돼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 여인의 이름은 상궁 김개시였다. 광해군은 왜 일개 상궁의 말에 역모의 고변을 물리쳤을까? 김개시. 끼일 개, 똥 시. 풀이하자면 개똥이다. 그녀는 천민의 딸로, 동궁 소속의 나인으로 입궐해 광해군을 보필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15년간 광해군의 최측근으로 활약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실록에 의하면 그녀는 나이도 많고 외모도 출중하지 않다고 하는데, 천민 출신에 미색도 아니었던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광해군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일까? 장자도, 적자도 아닌 광해군은 왕세자에 오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갑작스럽게 세자에 책봉되어 전란을 수습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다. 이후 영창대군의 출생으로 인해 왕위를 계승하는데 있어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선조의 궁녀로 활약하기도 했던 김개시와 대북파의 도움으로 1608년 왕위에 오르게 된다. - 신하들과 충돌하는 광해군의 개혁 드라이브 임진왜란의 경험을 통해 전쟁이 백성들에게 남긴 상처와 밑바닥 민심을 몸소 체험한 광해는 개혁을 강행한다. 대내적으로는 대동법으로 민생을 살피고, 대외적으로는 실리를 챙기는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펼친 것이다. 대동법은 세금을 토지의 소유량에 따라 부과하는 정책이다. 지주의 세금 부담이 강화되는 세법이기에 당시 기득권층과 방납 중개인과 결탁해 뇌물을 받던 사대부들의 반발이 컸다. 또한, 중립적인 외교정책도 명나라를 섬기던 사대부들의 성리학적인 세계관에 어긋난 것이었다. 당시 오랑캐인 후금과 통하는 것은 개,돼지보다 못한 것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파격적인 개혁으로 인해 광해군의 지지세력이던 대북파마저 등을 돌리게 된다. - 광해군, 측근 비리에 무너지다 광해군을 궁에서 몰아낸 인조반정이 정당성을 얻은 것은 측근들의 비리로 인한 부정부패가 한 몫을 했다. 광해군의 정치적 동반자로, 최측근인 김개시는 광해군이 재위한 15년 동안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벼슬을 얻으려면 김개시를 먼저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대북파의 영수였던 이이첨은 김개시에게 뇌물을 주어 결탁하고 붕당 경쟁에서 왕의 권력을 등에 업기 위해 살해사건을 역모사건으로 꾸며내기도 했다. 잇따른 역모사건에 광해군은 범인을 직접 취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만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광해군은 흔들리는 왕권에 대한 불안감에 궁궐공사에 병적인 집착을 보이게 되고,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해 민심은 땅에 떨어지게 된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 쫓겨나 묘호조차 얻지 못한 왕, 광해군. ‘역사스페셜’은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는 광해군의 일생을 통해 왕의 조건은 무엇이며 왕이 무엇을 잃었을 때, 성군에서 폭군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신역사스페셜 126회 – 왕의 꿈, 왕의 조건 조선 15대 왕 광해 (2012.12.13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yfAmjyxkAaU&t=233s
재위 | 1608년-1623년 |
전임 | 선조 |
후임 | 인조 |
섭정 | 왕세자 이질(1619년 11월 ~ 1620년 1월) 영의정 박승종(1620년 1월 ~ 1620년 2월) |
재상 | 영의정 [보이기] 이원익 이덕형 기자헌 정인홍 박승종 |
휘 | 이혼(李琿) |
존호 |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75년 6월 4일(1575-06-04)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사망일 | 1641년 8월 7일(1641-08-07) (66세) |
사망지 | 조선 전라도 제주목 (현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
매장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광해군묘 |
왕조 | 조선 왕조 |
가문 | 전주 이씨 |
부친 | 선조 이연 |
모친 | 공빈 김씨 |
배우자 | 폐비 유씨 |
자녀 | 왕자, 폐세자 이지 |
기타 친인척 | 폐세자 이질 |
종교 | 유교(성리학) |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재위: 1608년 ~ 1623년)이다.
임진왜란 때 분조하여 의병을 이끌었으며, 즉위 후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노선을 취하였다. 또한 전후 복구와 대동법의 실시 등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형인 임해군과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왕후를 폐위시키는 등 정쟁과 외교 노선에서 도덕적 결함을 보였고, 이를 구실로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2] 반정으로 인해 폐위된 두 번째 왕이기도 하다.
目次(목차)
履歷(이력)
그의 姓(성)은 李(이), 諱(휘)는 혼(琿), 本貫(본관)은 전주(全州)이며 宣祖(선조)와 恭嬪(공빈) 金氏(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591년(선조 24) 宗系辨誣(종계변무) 때에는 특별히 광국 原從功臣(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으며, 壬辰倭亂(임진왜란) 이후에는 父王(부왕)의 牽制(견제)로 호성원종공신이나 선무원종공신에도 책록되지 못했다.
1592년(선조 25년)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世子(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募集(모집)하고 軍糧米(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壬辰倭亂(임진왜란) 동안 世子(세자)의 몸으로 父王(부왕)을 돕고 戰爭(전쟁) 勝利(승리)에 적지 않은 功(공)을 세웠으나, 父王(부왕)의 認定(인정)과 稱讚(칭찬)은커녕 牽制(견제)와 冷待(냉대)를 받아야만 했다.
壬辰倭亂(임진왜란) 이후 1608년 王位(왕위)에 올랐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의 뒷수습과 民生(민생) 安定(안정)을 위해 南人(남인) 李元翼(이원익)을 領議政(영의정)에 登庸(등용)하는 등 여러 努力(노력)을 기울였으며, 後金(후금)과의 戰爭(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줄곧 인목왕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패륜자로 일컬어져 왔으나, 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전에 폐위되었기에 사후 시호는 없으며, 임금이었을 때 쓴 존호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다.
治世(치세)
1608년 3월에서 1623년 3월까지 치세하는 동안 1608년 3월에서 1619년 11월까지 1차 친정하였고 1619년 11월에서 1620년 1월까지 왕세자 이지가 두 달 간 대리청정하였으며 1620년 1월에서 1620년 2월가지 영의정 박승종이 한 달 간 2차 대리청정하였고 그 후 1620년 2월에서 1623년 3월, 계해반정으로 인하여 폐위될때까지 2차 친정하였다.
生涯(생애)~世子(세자) 冊封(책봉) 以前(이전)
生涯(생애) 初期(초기)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김희철의 딸 공빈 김씨의 서차남으로 위로는 친형 임해군 이진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광해군(光海君)에 봉해졌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선조가 아들들을 불러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더니,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기뻐했던 부왕 선조는 왕자들도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하여 원종공신록에 넣는다. 광해군도 이때 친형 임해군 진, 이복동생 신성군 후, 정원군 부, 순화군 보 등과 함께 광국 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世子(세자) 建儲(건저)의 問題(문제)
당시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서자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질로 따지자면 광해군이 유력했으나 선조는 자신이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더군다나 서얼이라는 열등감을 가졌던 선조는 광해군이 정비에게서 나온 적자가 아님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다.
그러나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세에 이르자 더는 왕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의정부 좌의정 정철은 건저(建儲) 문제를 제기했다. 그녀는 동인의 영수인 영의정 이산해 및 우의정 류성룡 등과 함께 광해군의 책봉 문제로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경연에서 “나라가 어려울 때 빠른 시일 내에 세자를 책봉하는 것이 현명하다.”라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라는 건의를 했다. 선조는 공빈 김씨가 죽은 후 인빈 김씨를 총애하여 인빈의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세자 건저 문제에서 동인 이산해의 계략에 넘어간 정철 등의 견제로 실패하였다. 이산해는 정철, 류성룡 및 다른 대신들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한 뒤,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에게 달려가 서인에서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귀띔했다.
정철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추천했으나, 신성군을 모함한다는 이유로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을 당하고 유배를 가게 되고, 동인은 이 일을 처리하게 되는데, 많은 서인을 외직으로 쫓아버리면서 선조는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서인을 멀리하며 동인들을 가까이 두었다. 이 일의 처리 문제 때문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은 정여립의 모반으로 일어난 기축옥사 때 정철에게 원한을 품어, 건저의 문제를 통해 서인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世子(세자) 時節(시절)~壬辰倭亂(임진왜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왕세자 책봉 문제가 거론되지 못하였으나,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해야 할 상황에 부닥치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을 했다.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위무하고 군량미를 모아 민중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부왕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왕 선조는 그런 세자 광해군을 오히려 경계하며 심하게 견제하였다. 1598년 임진왜란이 종전되었지만, 신성군, 정원군 등을 호성공신에 추가 수록한 데 반해 광해군에 대한 포상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王位(왕위) 繼承(계승)
의인왕후 사후 선조는 계비를 간택, 1606년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가 그 후 영창대군(적자)을 낳자, 광해군을 내심 탐탁치 않게 여기고 미워하던 부왕 선조는 다시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파의 유영경 등도 적통론을 내세워 영창대군 옹립계획을 세운 선조를 지지하였다. 특히나 선조 자신이 서얼에다가 방계승통을 했다는 콤플렉스까지 겹치면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1608년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영창대군이 어린 상태에서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린 후 약밥을 먹다가 갑자기 체하여 승하하였다. 일설에는 독살설이 돌기도 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이때 교서는 선조가 내린 것이 아니라 인목왕후가 현실성이 없다 판단하여, 광해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608년 음력 2월 2일, 광해군은 3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유영경은 사류사회(士類社會)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영경의 척신 정권에 대한 의도는 사류사회의 거부감만 가중시켜 유영경은 잇단 탄핵으로 주살되고, 사후에도 그 죄를 물어야 한다는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유영경 등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가 축출하였던 북인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大北)이라 하였다. 이후 소북파는 대북파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卽位(즉위) 以後(이후)~卽位(즉위) 初期(초기)
1608년 천신만고 끝에 즉위한 광해군은 이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다. 유영경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광해군을 정통으로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즉위 초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 하였다.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포함하여 북인에게 밀린 남인계 인사들과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않게 대우하는 등 초기에는 당쟁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대북파의 반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산림 숭용 정책을 추진하고 재야의 선비들을 채용하려 하였으나 곽재우, 정인홍 모두 고사하거나 취임 후 사직 상소를 한 후 내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은 뒤에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관직에 올라 북인 정권의 막후 실력자가 된다.
민생과 문화
임금이 된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궐을 지어 경제가 파탄났고, 이 점은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명기 교수 조차도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 정책을 궁궐 공사로 모두 말아 먹었다" 라며 비판한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서 쌀로 조세를 내도록 함으로써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내는 조세개혁인 대동법을 억지로 시행했으나, 두번이나 폐지하려고 하였다.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고 하나 선조 대의 계묘양전, 인조 대의 갑술양전 이외에는 양전을 시행한 기록이 없다. 이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설치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한의학책인 《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軍事(군사)와 中立外交(중립외교)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수도를 교하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1618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자 북방의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 방비에 힘썼다.
한편,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격하여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김경서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한다. 강홍립은 명나라군이 사르후, 상간하다, 아부달리에서 잇달아 패주하고, 부차 전투(이상 3월)에서 조선군의 주요 지휘관이 전사하고 병력의 2/3가 괴멸하자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후금에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함으로써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면서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치자 서인세력들은 크게 반발하고 대노하여 "후금(여진족 세력, 흔히들 오랑캐라고 불림)에게 사대를 대하는 것은 왜란 때 명나라에서 군을 파병하여 우리 조선군을 도와주었는데 사대를 저버린다는 것은 배은망덕하고 오랑캐만도 못한 천한 놈이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이 나중에 말이 씨가 되어 서인세력들이 이끌었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는 빌미를 스스로 제공해준 셈이었다.
그러나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의 주둔으로 긴장감이 갈수록 높아졌다.
王權(왕권) 强化策(강화책)~政敵(정적) 肅淸(숙청)
1609년 광해군은 자신의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 승계 원칙을 주장하며 자신을 압박하던 명나라가 활용하던, 친형제이자 장자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하여 죽이고, 김직재의 옥과 계축옥사가 발생하자 1613년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과 북인은 인목왕후의 의인왕후 능(陵) 저주설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김제남은 죽은 지 3년 만에 다시 부관참시되었으며 그 일족 또한 막내아들과 부인을 제외한 세 아들이 화를 당하였다. 임해군은 자신의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다고는 하나, 광해군 자신의 유일한 친형제였고, 투명하지 못한 살해 과정으로 일부 신료들에게 의구심을 주기도 하였다. 영창대군 살해 역시 광해군과 북인들의 측근들이 치밀한 계획 아래 주도하여 결과적으로 광해군에게 패륜군주 이미지를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만 하고 말았다.
1614년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였다. 1615년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인 능창군까지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해버리고, 결국 목을 매어 자결하게 하는 등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이는 그동안 기가 죽어 있던 서인 세력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는 셈이 되었다.
광해군과 이이첨 일당은 영창대군 살해 시점 직후부터, 각종 조작설과 허균 등을 비롯한 강경파 관료, 유생들을 동원한 상소 릴레이를 펼치며 끊임없이 인목왕후 폐비 공작을 전개하였고, 1618년 폐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 사건으로 정국은 들끓었으며,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宮闕(궁궐) 復元(복원) 公舍(공사)
무리한 토목 공사를 연이어 강행하여 궁궐 복원 등으로 백성들의 민심도 이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광해군은 그동안 자신이 임진왜란 때부터 쌓아왔던 일반 백성의 민심을 점차 잃게 되었다.[5] 또한, 측근들의 월권과 부패가 문제 시 되었으며, 궁궐 복원 과정에서의 자금 문제도 민심이반의 원인이 되었다. 광해군 집권 당시의 실권자 이이첨, 유희분, 박승종은 부원군 칭호의 '창'자를 따 3창 부원군이라 일컬어졌다. 일부 신하들과 후궁들 사이에서는 뇌물로 벼슬을 팔고 사는 비리를 저지르게 되면서 서인과 반정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명분을 주게 되었다.
側近(측근)들 北人(북인) 勢力(세력)의 權力(권력) 濫用(남용)
광해군 재위 시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이첨과 상궁 김개시, 허균 등은 무수한 옥사를 일으켜 반대파 신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왕권을 위협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같은 행위들은 광해군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성리학의 도덕주의, 도의 정치, 왕도 정치를 기본 이념으로 삼던 조선 사대부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이첨과 정인홍이 무리하게 능창군의 역모와 영창대군의 옥사를 주관하고, 1617년부터 仁穆王后(인목왕후)의 폐모론을 주장하는 것 역시 사림의 반발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한편 옥사를 일으킨 또 다른 주역인 許筠(허균) 역시 다른 주역인 이이첨, 김개시 등에게 처형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당일 광해군은 처음 반정을 접하고 이이첨의 반역으로 오해하였으며, 한편 김개시는 인조반정 직전 정보가 누설되어 반정 세력들을 검거할 수 있었음에도 반정 세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등 광해군 정권에 결정적인 위해를 끼쳤다.
廢位(폐위) 以後(이후)
1623년 3월 14일 새벽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1641년 67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서인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등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을 받들어 ‘반정’을 단행하고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으로 끌고 가 정죄한 뒤 유배시켰다. 인목왕후는 광해군과 폐세자에 대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반정의 명분인 폐모살제(廢母殺弟)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 짓게 된다. 곧 반정군에게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은 죽고, 40여 명의 관리가 구금된다.
광해군은 폐위 후 폐비 유씨, 그리고 폐세자 지와 폐세자빈 박씨와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고, 울타리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 후인 5월 폐세자와 폐세자빈은 탈출에 실패하고 자결하게 된다. 그때 폐세자는 다리미와 큰 가위를 이용해서 울타리 밑에 땅굴을 파고 도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었고, 인조는 그 소식을 듣고 한 달 뒤인 6월 사촌동생인 폐세자에게 자진을 명하고, 폐세자 질은 그 명에 따라 자진한다. 한편 폐세자빈 박씨는 남편이 잡히는 것을 보고는 나무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사흘 뒤에 깨어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해 10월에 부인 유씨와도 사별하는데, 유배 생활 중의 화병이 원인이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을 우려해 그를 충청도 태안으로 옮겼다가 강화로 다시 옮겼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 옆 교동도에 유배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인조 15년) 6월 6일, 광해군은 제주 어등포(魚登浦 : 현 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다. 다음날 6월 7일 광해는 제주 주성 망경루(望京樓 : 구 제주세무서) 서쪽 또는 제주 서성(西城) 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두문(杜門)하여 자물쇠로 봉한 후 도사(都事) 등 5인은 서울로 올라갔고 속오(束伍) 유진군(留鎭軍) 중에서 30명이 윤번으로 수직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광해군은 제주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외부 출입이 차단된 채 엄격히 통제된 생활을 하였다.
후금(청나라)측에서 丁卯胡亂(정묘호란)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폐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차례 역모 사건에 거론되었는데, 심지어는 광해군 스스로 친필 밀서를 역모 세력에게 전달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와 집권 서인은 그를 죽이지 않고 천수를 누리도록 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는 상궁과 포졸들로부터 영감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듣기도 했다.
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에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한편 그가 죽은 시기인 음력 7월 1일 무렵에 제주도에 비가 자주 오는데, 이를 “광해우”라 칭하기도 한다.
死亡(사망) 以後(이후)
사후 장례는 박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이 봉사하게 되었으며, 광해군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공빈 김씨의 아래에 묻혔다. 공빈 김씨의 무덤 옆에는 임해군이 묻혀 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반기 내내 친형 임해군을 죽인 패륜사건과 폐모살제(영창대군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하는 사건)를 이유로 연산군에 이어 패륜의 군주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조금씩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 중 강홍립을 파견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고 사대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조선 시대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광해군 대의 외교를 중립 외교 혹은 실리 외교로 보는 시각이 등장하면서 여러모로 재평가, 현재는 폭군으로서의 이미지가 많이 희석이 됐다. 그의 묘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광해군묘는 문화재보호에 따라 여행관광 및 방문이 제한된 곳으로 광해군 제향식날에만 한시 개방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출입이 금지되기 때문에 방문을 원하면 문화재청 사릉 관리사무소에 사전문의나 출입신청을 해야 한다.
時調(시조)
濟州島(제주도)로 流配(유배)될 때 그는 다음과 같은 時調(시조)를 남겼다고 한다.
風吹飛雨過城頭(풍취비우과성두)
瘴氣薰陰百尺樓(장기훈음백척루)
滄海怒濤來薄幕(창해노도래박막)
碧山愁色帶淸秋(벽산수색대청추)
歸心厭見王孫草(귀심염견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객몽빈경제자주)
故國存亡消息斷(고국존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연파강상와고주)
궂은 비바람이 성머리에 불고
습하고 역한 공기 백 척 누각에 가득한데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 근심어린 기운이 맑은 가을을 둘러싸네
돌아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의 꿈에는 제자주(서울)가 자주 보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 누웠구나
풍취비우과성두 장기훈음백척루는 비바람이 치는 척박하고 초라한 귀양생활을, 창해노도래박막 벽산수색대청추는 그러한 척박함과 비교되는, 노도처럼 치는 푸른바닷물과 가을빛이 든 푸른 산 등의 자연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척박함과 푸름의 대비는 화자의 마음을 자연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며 화자내면 속에서는 푸른 자연과 같이 아름다운 도읍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其他(기타)
2002년 11월 15일부로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 복위하고, 그의 부인 유씨를 “혜장왕후(惠章王后)”, 능호를 열릉(烈陵)으로하여 추숭하였으나, 이는 사시(私諡)로서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받지는 않는다. [13] 일부 한자문화권 사이트에서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등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家系(가계)
父母(부모)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부 | 선조대왕 宣祖大王 | 전주 | 1552년 - 1608년 | 덕흥대원군德興大元君 하동부대부인 정씨 河東府大夫人 鄭氏 | 제14대 국왕 |
법모 | 의인왕후 박씨 懿仁王后 朴氏 | 반남 | 1555년 - 1600년 | 반성부원군 박응순潘城府院君 朴應順 완산부부인 전주 이씨 [15]完山府夫人 全州 李氏 | |
인목왕후 김씨 仁穆王后 金氏 명렬대왕대비 明烈大王大妃 소성대비 昭聖大妃 | 연안 | 1584년 - 1632년 | 연흥부원군 김제남延興府院君 金悌男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光山府夫人 光州 盧氏 | ||
모 | 공빈 김씨 恭嬪 金氏 | 김해 | 1553년 - 1577년 | 해령부원군 김희철海寧府院君金希哲 정경부인 안동 권씨安東 權氏 |
王妃(왕비)
정비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폐비 유씨 廢妃 柳氏 문성군부인 文城郡夫人 | 문화 | 1576년 - 1623년 | 문양부원군 유자신文陽府院君 柳自新 봉원부부인 동래 정씨蓬原府夫人 東萊 鄭氏 |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
後宮(후궁)
작호 | 본관 | 이름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소의 | 소의 윤씨 昭儀 尹氏 | 파평 | 영신 永新 | ? - 1623년 | 윤홍업尹弘業 창원 유씨昌原 兪氏 | 인조반정때 처형됨 |
소의 홍씨 昭儀 洪氏 | 풍산 | 생몰년 미상 | 홍매洪邁 이천 서씨利川 徐氏 | |||
소의 권씨 昭儀 權氏 | 안동 | 권여경權餘慶 상산 김씨商山 金氏 | ||||
숙의 | 숙의 허씨 淑儀 許氏 | 양천 | 순정 貞純[19] | 허경許儆 평산 신씨平山申氏 | ||
숙의 원씨 淑儀 元氏 | 원주 | 원수신元守身 | ||||
소용 | 소용 정씨 昭容 鄭氏 | 동래 | ? - 1623년 | 정상헌 鄭象獻 | 인조반정때 자살 | |
소용 임씨 昭容 任氏 | 풍천 | 애영 愛英 | 1598년 - 1628년 | 임몽정任蒙正 | 인조 6년(1628년) 처형됨 | |
소원 | 소원 신씨 昭媛 辛氏[21] | 영산 | 생몰년 미상 | 신경 辛鏡 수원 김씨水原 金氏 | 인빈 김씨의 조카 | |
숙원 | 숙원 한씨 淑媛 韓氏 | 보향 保香[22] | ||||
상궁 | 상궁 김씨 尙宮 金氏 | 개희 介姬[24] | ? - 1623년 | 국정에 개입하여 권력을 휘두르다 인조반정때 참수됨[25] | ||
상궁 이씨 尙宮 李氏 | 생몰년 미상 | |||||
상궁 최씨 尙宮 崔氏 | ||||||
궁인 | 궁인 조씨 宮人 趙氏 | 한양 | 조의 趙誼 | |||
궁인 변씨 宮人 邊氏 | 변충길邊忠吉 |
王子(왕자)
군호 | 이름 |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비고 | |
1 | 왕자 | 1596년 - 1596년 | 폐비 유씨 | |||
2 | 폐세자 廢世子 | 지 祬 | 1598년 - 1623년 | 폐세자빈 박씨 廢世子嬪 朴氏 | 유배지에서 자결함 | |
3 | 왕자 | ? - 1603년 |
王女(왕녀)
작호 |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비고 | |
1 | 폐옹주 | 1619년 - 1664년 | 소의 윤씨 | 박징원 朴澂遠 |
光海君(광해군)이 登場(등장)한 作品(작품)~드라마
《조선로코 - 녹두전》(2019, 배우:정준호)
SBS
映畫(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 배우:이병헌)
演劇(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2013, 배우:배수빈, 김도현)
뮤지컬
《칠서》(2017, 배우:박강현)
關聯(관련) 文化財(문화재)
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 (중요민속문화재 제3호, 해인사 소장)
같이 보기
朝鮮 王朝 實錄(조선 왕조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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