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유월절 식탁과 똑똑한 아이
수천 년 동안 유대인 가족들은 유월절 세데르 식탁에 둘러앉아 이집트 탈출의 이야기를 되새겨 왔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식탁 위에는 말하지 않은 채로 같은 질문이 떠돌곤 합니다. ‘내 아이들 중 누가 현명한 아들일까?’
유월절 하가다—세데르를 이끌고 이집트에서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책—는 유대인의 신앙과 역사를 대하는 각기 다른 방식을 대표하는 네 명의 아들을 소개합니다. 현명한 아들이 있습니다. 악한 아들이 있습니다. 순진한 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질문하는 법조차 모르는 아들이 있습니다. 식탁에 앉은 모든 부모는 자신이 어떤 아들로 키우고 싶은지 알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자신이 어떤 아들이 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현명한 아들이 이깁니다. 경쟁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가다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상한 점이 드러넙니다. 현명한 아들은 묻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 명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은 무엇입니까?” 날카롭고 학식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자 하가다는 대답합니다. “그것은 유월절 제물을 드린 후에는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 율법의 미묘한 점을 정확하게 짚어낸 답변입니다. 대화는 여기서 끝납니다.
순진한 아들, 즉 ‘탐’은 훨씬 덜 인상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게 뭡니까?” 그러자 하가다는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 곧 노예의 집에서 이끌어 내셨다.”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유월절 밤의 핵심이죠.
그렇다면 과연 어느 아들이 더 나은 질문을 한 것일까요?
וַיִּגְדְּלוּ הַנְּעָרִים וַיְהִי עֵשָׂו אִישׁ יֹדֵעַ צַיִד אִישׁ שָׂדֶה וְיַעֲקֹב אִישׁ תָּם יֹשֵׁב אֹהָלִים׃
“소년들이 자라나자, 에싸브는 솜씨 좋은 사냥꾼이 되어 야외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으나, 야곱은 온화한 성품의 사람으로 천막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했다.” (창세기 25:27)
성경은 세 조상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자,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할 사명을 받은 민족의 열두 지파를 낳게 될 야아콥을 단 두 단어로 묘사합니다.
바로 ‘이쉬 탐(אִישׁ תָּם, ish tam)’, 즉 ‘순수한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을 소개하는 방식치고는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듯합니다.
20세기 위대한 종교적 시온주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하난 포라트(Chanan Porat) 랍비는 이 논의의 맥락을 완전히 새롭게 제시합니다. 그는 ‘탐(תָּם, tam)’이 토라에서 ‘미숙하다’는 뜻의 단어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사실 이는 성경 어휘 중 가장 높은 찬사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앞에서 ‘타밈(תָּמִים, tamim)’이 되라고 명령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온전한 마음(תָּמִים, 타밈)을 가져야 한다”(신명기 18:13).
다윗 왕은 시편에서 가장 긴 장을 시작하며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는 자들을 복된 자라 칭합니다. 아브라함은 타밈(תָּמִים)이 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노아흐는 그 세대에서 타밈(תָּמִים)으로 묘사됩니다. 타밈(תָּמִים) 이란 완전하고, 통합되어 있으며, 도덕적·영적으로 온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유월절 식탁에 앉은 ‘순진한 아들’은 결코 단순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는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입니다. 그는 눈을 뜬 아들입니다.
그의 질문—“이게 뭡니까?”—는 단순해 보입니다. 하지만 포라트 랍비는 그가 실제로 묻고 있는 바는 훨씬 더 심오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나에게 출애굽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는 율법이나 절차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집트의 재앙들, 바다의 갈라짐, 노예 생활에서의 탈출을 바라보며, 모든 정직한 신자가 결국 마주하게 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개입이 내 삶의 방식에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그것은 ‘현명한 아들’이 결코 묻지 않는 질문입니다. 그는 세부 사항에 너무 몰두해 있기 때문입니다.
마오르 아자르(Maor Azar) 랍비는 이 점을 명확히 지적합니다. 네 아들 중 ‘순진한 아들’만이 세데르 밤의 가장 중요한 계명, 즉 구원의 이야기를 전하고 마음에 새기는 일을 실제로 이행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현명한 아들’은 자신의 법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악한 아들’은 질책을 받으며, ‘물어보지 못하는 아들’은 아예 자리를 비운 상태입니다. 하지만 순진한 아들은 그 이야기를 받아들입니다. 그는 그 밤이 선사하는 것을 실제로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정신이 맑고 열린 마음을 가진 유일한 사람입니다.
학식이 있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야아콥 자신도 라반의 집에 발을 들이기 전, 쉠과 에버의 위대한 학원에서 14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탐(תָּם, tam)’은 무지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데르에서 현명한 아들의 결핍은 그의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의 지식에 ‘출구’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 지식은 서재의 네 벽 안에 갇혀 있을 뿐이며, 그는 창밖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볼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책에서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현인들은 이 점을 유머러스한 가르침을 통해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닥을 건너고 있을 때, 발밑은 진흙투성이였습니다. 한 이스라엘인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서서 말했습니다. “이집트에도 진흙이 있었는데, 여기 바다에도 진흙이 있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바닥을 걷고 있었고, 양쪽에는 성난 물결이 벽처럼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금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무릎 꿇게 만든 열 가지 재앙을 목격한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자신의 샌들에 묻은 진흙을 불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배은망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기적조차 뚫고 들어올 수 없을 만큼 완전한 인식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진흙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진흙만 보았던 그 남자의 영혼에 진흙이 묻어 있었지, 신발에 묻어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본성상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쿡(Abraham Isaac Kook) 랍비는 유대인들이 매일 세 번씩 낭송하는 기도를 해석하며 이 문제를 잘 포착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읽습니다. “우리의 눈이 자비로이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주님을 뵙게 하소서.” “우리가 시온으로 돌아가게 하소서”도 아니고, “우리가 시온에서 살게 하소서”도 아닙니다.
‘우리의 눈이 그것을 뵙게 하소서’. 쿡 랍비는 ‘뵙게 하소서’라는 단어에 주목했습니다.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온으로 데려오신다면 우리는 그곳에 있게 될 텐데, 왜 굳이 그것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그의 대답은 불안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기적 한가운데 서 있어도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신발에 묻은 진흙만 걱정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기적과 가까이 있다는 것이 기적을 알아볼 수 있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합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량 학살의 잿더미 위에서 재건된, 성경의 고향에 세워진 주권적인 유대인 국가입니다. 예루샬라임이 그 수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란과 전쟁 중이며,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사악한 정권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매일 이스라엘 도시들에는 미사일과 드론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 사상자는 놀라울 정도로, 거의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적습니다.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테러 기반 시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약속해 온 무라들은 자신들의 모든 계획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항상 진흙만 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도시들에 떨어지는 미사일을 보고는 위험만 보는 사람들, 이란과의 전쟁을 보고는 혼란만 보는 사람들, 출애굽 이후 유대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을 보고도 불평할 거리를 찾는 사람들 말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홍해에서도 자신의 샌들을 가리키며 서 있었습니다.
탐(תָּם, tam)은 다릅니다. 그는 순진하거나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의 눈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고, 그의 배움은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움직이실 때 그는 그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이번 유월절에 하가다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식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깨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해저의 진흙에서 고개를 들어 양쪽에 우뚝 선 물의 벽을 바라보고, 우리가 지금 무엇을 겪고 있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By Rabbi Avi Borgen
▶글 전체 목차는 아래 배너를 클릭하시면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