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비결정성의 지대’
여기서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만약 물질이 이미지의 총합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동차의 이미지는 곧 자동차라는 물질 자체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인가? 베르그송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이든 우리에게 알려진 이미지 이외에 엄청난 이미지를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도 사람들은 소금이 흰색과 고체, 짠맛의 이미지를 지니며, 물에서는 용해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금의 짠맛이 나트륨이라는 원소에서 비롯되며 나트륨은 단지 짠맛을 낼뿐만 아니라 과다 복용시 인체에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감각적 성질(이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오늘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였다 하더라도 소금이 지닌 무한한 감각적 성질, 즉 이미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지 사물이 지닌 무한한 이미지들 중 우리가 알고 있는 극히 일부분의 이미지들을 종합하여 그것에 대한 상, 즉 전체적인 이미지를 형성한다. 베르그송은 사물이 지닌 이렇게 무수히 많은 이미지 중 일부(짠맛, 흰 결정체, 물에 녹는 성질 등)를 종합하여 만들어진 통합적인 이미지(소금)를 ‘표상(répresentation)’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소금이라고 불리는 물질이 있다고 치자. 이 물질은 과거에도 존재하였으며 과거나 현재에도 똑같은 물질적 속성, 즉 이미지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금이라는 물질에 대해서 갖는 표상은 다르다. 과거에 사람들은 나트륨이라는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소금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건강상의 이유에서 그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소금에 대한 표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소금은 우리가 모르는 엄청나게 많은 감각적 성질, 즉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닌 소금의 표상이 곧 소금 자체는 아니다.
여기서 다소 난해하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비결정성의 지대(la zone de la indetermination)’라는 용어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금이라는 사물은 무한히 많은 이미지를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비결정성의 지대’이다. 경우에 따라서 소금은 짠맛을 내는 양념으로 표상될 수도 있고 혹은 의학적인 견지에서 나트륨으로 표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소금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금은 설탕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소금이 아무리 비결정성의 지대라는 특성을 지닌다고 해도 소금이라는 비결성의 지대와 설탕이라는 비결성의 지대는 엄연히 다르다. 다만 우리가 소금 혹은 설탕으로 표상하는 사물이 곧 그 사물 자체가 아닌 비결정성의 지대를 원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는 ‘지각(perception)’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것이다. 사물은 그 자체가 아닌 무수한 잠재적인 이미지들이 얽힌 ‘비결정성의 지대’로 우리와 마주한다. 이때 우리는 사물을 어떻게 지각하는 것일까? 과연 우리 인간은 앞에 있는 사물을 무수한 잠재력을 지닌 ‘비결정성의 지대’로서 마주하는 것일까?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체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미지와 ‘비결정성의 지대’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