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구인이 날조한 커피 이야기
▲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슬람 여성들
15세기 중반 어느 시점부터 예멘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커피 음료는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점차 메카, 메디나 등 인접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 둘 커피에 빠져들었다. 커피를 마시면 40명의 남자를 말에서 떨어뜨리고, 40명의 여자들과 동침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예언자 마호메트의 말씀이라는 황당한 주장도 등장하였다.
커피 음료가 유행하면서 이슬람교의 상징 도시인 메카에 1500년경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 카흐베하네가 등장해 많은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이 교차하는 레반트 지역(지금의 이집트·시리아·레바논·요르단·팔레스타인·이스라엘)을 통해 커피와 커피하우스 문화는 빠르게 터키로 전해졌다.
메카에서 최초의 커피 금지령?
낯선 음료 커피를 둘러싼 찬성과 반대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커피 금지령이 내려진 것이 1511년 메카에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강경파 이슬람교도들에게 지구상에서 인간에게 최상의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믿는 종교여야 마땅했다. 그런데 커피로부터 정신적 위안을 느끼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일종의 위협이었다. 그들은 와인을 금지하고 있는 마호메트의 규율이 커피에도 적용된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이 당시 메카는 이집트 왕국 술탄이 지배하는 땅이었고, 메카에는 술탄의 위임을 받은 지역 통치자 카이르 베이가 있었다. 카이르 베이는 모든 커피하우스의 폐쇄를 명하였다. 커피를 마시거나 판매하는 것 모두 금지되었고, 이를 어기는 경우에는 엄한 벌에 처해졌다.
카이르 베이가 소집한 자문가 회의에서 제시한 커피 금지 이유는, 첫째 커피가 사람의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 둘째 커피하우스에서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게임을 즐기거나 풍기문란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 셋째 커피를 정신적 스트레스나 육체적 통증을 치료하는 음료로 인식하는 사람들로 인해 소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던 의사들의 주장, 마지막으로 커피하우스가 정치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변하였다는 통치자의 우려 등이었다고 한다.
이 금지 조치로 메카에서는 커피하우스 단속이 이루어지고,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지만 카이로에 있던 술탄이 개입하여 이 조치를 무효화시킴으로써 정리되었다. 술탄이 커피 애호가였던 것이다. 결국 카이르 베이와 그 자문가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술탄에 의해 대부분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서양인들이 저술한 많은 커피 역사책들 속에 등장하지만 정확한 근거 자료가 뒷받침되고 있지는 않다. 많은 커피 역사의 첫 부분을 장식하는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1511년은 오스만터키제국이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반도 서쪽 지역을 점령하기 전이었다. 당시 이집트와 아라비아반도 서쪽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오스만터키와 다투던 맘루크 왕조였다.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와 인도에서 시작한 노예 후손들이 1250년에 카이로를 수도로 삼아서 세운 왕조로서 1517년까지 이집트와 메카를 비롯한 아라비아반도 서쪽 지역을 지배하였고, 오스만터키와 함께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큰 권세를 자랑하는 왕조의 하나였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커피 금지 조치의 주인공인 카이르 베이는 맘루크 출신의 지역 통치자였다. 그는 1517년에 이집트를 점령한 오스만터키의 술탄 셀림 1세의 명을 받아 이 지역 통치자가 되었다. 1520년 셀림 1세가 흑사병으로 사망하고 나서도, 1522년 그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이집트와 그 주변 지역을 지배했던 지역 통치자였다. 1511년 커피 금지 조치로 인해 그가 사형을 당했다거나, 고문을 당해 사망하였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메카에서는 1524년과 1526년에 다시 커피 판매가 금지되었고, 1531년에는 카이로에서도 공공장소에서 커피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하며, 1535년에는 커피하우스들이 강제로 폐쇄되었다고도 한다. 심지어 1539년에는 커피하우스를 이용하다 발각되면 투옥되기도 하였다는데 그 증거가 분명하지는 않다.
이런 이야기들이 유럽인들에 의해 발굴되고 기록되었다. 서구인들이 내세운 커피 탄압 이유는 대부분 상식적이지 않다. 코란에서 숯불을 불결한 식재료로 여긴다는 이유로 숯과 비슷한 볶은 커피를 추방하자는 주장을 했다거나, 마호메트가 커피를 마시기는커녕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커피는 반이슬람적이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다. 이런 우스꽝스런 주장들을 받아들여서 커피 판매나 음용을 금지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서구 기독교 세계가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없어졌을 수도 있는 음료가 커피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심리를 읽을 수 있다.
오스만터키의 재상이 커피점을 폐쇄했다?
메카와 카이로에서 꽃피기 시작한 이슬람의 커피 문화는 1543년 오스만터키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전해졌다. 콘스탄티노플에 커피하우스가 처음 문을 연 것은 1554년경이었다. 이후 불과 2~3년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에는 600개 이상의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고 한다. 신분과 직업, 남녀 구분 없이 출입이 허용되었다는 장점 때문에 융성하였고 "사람들이 놀고 쉬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는 기록이 있다.
세계 커피사에는 이즈음 커피 박해를 상징하는 또 다른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 오스만터키의 재상 쿠프릴리(1586~1661)이다. 술탄 아무라드 4세(1612~1640) 시대의 재상이었던 쿠프릴리가 칸디아(크레타)와의 전쟁 중에 반정부 선동을 두려워하여 도시의 커피하우스들을 폐쇄시켰고, 이를 어기는 경우에는 매질로 다스렸으며, 반복해서 커피를 마시다 걸리면 가죽 포대에 넣어 보스포루스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모든 커피 역사책에 등장한다.
쿠프릴리의 이야기 역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쿠프릴리는 궁중 요리사를 시작으로, 말 관리인, 지역 통치자를 거쳐 80세였던 1656년에 이르러서야 수상이 되었는데 당시 술탄은 아무라드 4세가 아니라 메흐메트 4세(재위 1648~1687)였다.
칸디아전쟁은 크레타섬을 차지하기 위한 베네치아와의 전쟁으로 1645년에서 1646년 사이에 절정에 달했다. 쿠프릴리가 권력을 잡기 이전이었다. 쿠프릴리는 17세기 후반, 지중해 주변에서 커피가 이미 일상화된 시대의 인물이다. 커피가 오스만터키 군대의 주요 보급품이었던 시대였다.
쿠프릴리는 오스트리아 빈을 공격하여 신성로마제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인물이었다. 자신의 수상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준 최초의 인물이었다는 것과 그 아들이 알코올 남용으로 죽었다는 것 등이 더해져 유럽인들은 그를 비이성적인 인물로 묘사하였다. 터키인들에게는 어린 술탄을 도와 나라를 안정시킨 영웅인 그를 유럽인들은 커피 억압의 상징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아들 파질 쿠프릴리 시대에 오스만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하였고, 유럽인들에게는 가장 공포스러운 시대였다.
17세기 초반 교황 클레멘트 8세에 의해 커피가 기독교 세계에 공인되고, 베네치아, 런던, 파리를 비롯하여 많은 유럽 도시에서 이미 커피가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수백 개 이상의 커피하우스가 있던 콘스탄티노플에서 17세기 후반에 쿠프릴리에 의해 커피하우스와 커피 음용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이슬람 세계의 커피 탄압은 17세기 이후 유럽인의 음료로 자리 잡기 시작한 커피 역사 서술을 시작하면서 커피를 향한 동양인들의 비상식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태도와 서구인들의 합리적 판단 능력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서양인들의 욕망이 그려 낸 가짜 역사의 전형이다. 터키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는 터키 역사인 것이다.
이후 서양인들이 주도한 커피역사 서술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중에서 서양인들은 대부분 로맨틱하거나 용기 있는 모습으로, 비서구인들은 우스꽝스럽거나 비합리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17세기와 18세기 유럽 지성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프란시스 베이컨이 드러냈던 강한 서구 중심주의와 같은 맥락이다. 베이컨은 이슬람 문명 시기를 "학문이 빈약하고 수확이 거의 없는 흉작과 불모의 시대"로 폄하한 바 있다. 베이컨의 후예들이 개척하기 시작한 커피사 서술 속에서 이슬람 세계의 영웅적 인물들이 긍정적으로 묘사될 가능성은 없었다.
이슬람의 음료로 자리잡은 커피
200년간(1095~1291) 지속되었던 십자군전쟁과 그로 인해 형성되었던 이슬람 세계의 반기독교 정서, 반포도주 문화를 형성하는 데 새로 등장한 음료인 커피가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기독교 문화의 상징인 포도주를 대체하는 음료로서의 이미지는 커피가 이슬람의 음료로 자리 잡도록 만들었다.
이슬람 음료로 자리를 잡은 커피는 19세기 후반 서부 개척 시절에 미국 서부에서 청바지가 그랬듯이 성별, 계절, 사회적 신분 그리고 장소의 제한 없이 누구나, 어느 때나, 차별과 부담을 느끼지 않고 마실 수 있는 친숙한 음료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커피하우스 덕분에 밤에도 외출이 가능해졌고, 집에서 손님을 맞을 만한 여건이 안 되는 사람들이 손님을 접대할 수 있었으며, 여성들에게도 커피를 핑계로 외출이 허용되었다. 지금의 이슬람 문화와는 달랐다.
커피하우스에서는 낯선 사람이 함께 앉아 긴 시간 잡담을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적인 토론과 종교적 논쟁도 가능하였다. 커피하우스는 메크텝 이 이르판 Mekteb-i-irfan, 즉 '교양인들의 학교'가 되었다. 커피를 반대하는 이유는 손에 꼽을 수 있는 몇 가지였지만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수백 가지였다.
2016년에 BBC 다큐멘터리 '무하마드의 콩: 이슬람과 커피의 비밀스런 역사'를 만든 저널리스트 압둘 레만 말리크의 표현대로 예멘이 커피의 정신을 발견한 곳이라면, 콘스탄티노플은 커피가 하나의 예술로 재탄생한 곳이다. 터키가 커피 탄압의 상징 지역으로 기록될 수는 없다.
이길상 기자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