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7월 혁명(1830년)

부르봉 왕가(Maison de Bourbon)에 대한 분노는 1830년 7월 27일부터 29일에 이르기까지 3일간의 봉기로 나아가게 된다.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 그림에도 잘 표현되어 있는 이 봉기는 브루봉 왕가를 다시금 쫓아내는데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7월 혁명의 결과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왕을 앉히게 되고 그가 바로 시민왕 루이 필리프이다. 루이 필리프는 혁명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으며 혁명의 전통을 온건하게 받아들이는 왕으로서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된다. 1830년에서부터 1848년에 이르기까지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은 나름 프랑스 대혁명의 성과를 받아들이게 된다. 삼색기를 다시 국기로 인정하고 라 마세예즈(La Marseillaise)를 국가로 지정한다.
루이 필리프는 상류 부르주아 계급에 의존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자유주의에 대한 열렬한 신봉자임을 자처하였지만 그의 지지기반이 상류 부르주아 계층이다 보니 선거권 자체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3천만 인구에서 선거권을 가진 사람은 24만명에 불과하였으니 말이다. 부르주아 계층을 대변하는 부르주아 군주이다 보니 자연스레 금융 자본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어 자본을 가진 상류 부르주아 계층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나름 의미있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결국 7월 혁명의 근본정신과 배치되는 것이다.
7월 왕정은 노동자에 대해서 매우 억압적이었다. 선거권의 확대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상류 부르주아가 요구한 것은 아주 단순 명료하다. 한마디로 부자가 되라는 것이다. 부자가 되면 너희들도 유권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산업 전반은 철저한 자유방임주의에 놓이게 된다. 노동자의 고통은 노동자의 문제일뿐 사업주나 정부의 문제가 될 수 없다. 도시에서 빈민들이 창궐하고 인간다운 삶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상류 부르주아 계층은 이에 관심이 없다. 더욱이 1832년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된다. 삼색기는 휘날리고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자유도 평등도 우애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는 자연스레 또 다른 혁명을 불러올 수밖에 없게 된다. 1830년대에 이르러 다시금 곳곳에서 바리게이트가 쳐지게 되고 그 위에는 붉은 깃발이 휘날리게 된다. 이 붉은 깃발은 오늘날 노동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무정부주의를 의미하는 흑기도 휘날리게 되는바 이는 더 이상 삼색기가 자신들을 대변하는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년∼1885년)의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에서 중심에 서게 되는 1832년의 사건은 사실 정말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다. 그들이 내세운 붉은 깃발이 의미하는 급진적 노동운동으로서의 성격 정도만이 중요할 뿐이다. 아마 빅토르 위고가 자신의 소설에서 이 사건을 소개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건에 불과할 것이다. 이 사건이 터진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7월 혁명 그 자체가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는 바로 부르주아의 계몽의 정신에 존재한다. 계몽이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는 멋져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는 차별과 억압의 요소가 담겨져 있다. 즉 계몽은 타인의 객체화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權利宣言)의 본의(本意)는 분명 진일보한 인권선언(人權宣言)이지만 부르주아 중심이라는 한계를 가지게 되고 그 문제점이 7월 혁명 이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계몽의식(啓蒙意識)과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입각한 상류 부르주아는 자신들을 기존의 귀족과 다를 바 없는 위치에 자리매김을 한다. 선거권은 다시금 축소되니 사실상 구조 자체는 바뀌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니 7월 왕정 그 자체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일련의 과정을 빅토르 위고는 소설을 통해서 이야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