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2월 혁명(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은 1848년 혁명의 한 흐름으로 프랑스에서 1848년 2월 22일에서 24일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다. 의회 내 반대파가 일으켰으며, 이 사건으로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이 해산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 1세가 입헌 군주로서 즉위하였지만, 입헌 군주정은 소수 부유한 지주층이 권력을 잡은 체제였다. 프랑스의 산업 혁명으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지는 선거법의 개혁을 요구하고 민주적 입헌정과 공화정을 갈망했다. 한편 근대공업의 성립과 함께 노동자 계급이 성장, 그 비참한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반영하여 사회주의 사상도 점차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1847년에 성립된 기조 내각이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했기 때문에 개혁파는 ‘개혁연회(改革宴會)’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847년 불황은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미 1846년의 소맥 흉작은 농민 폭동을 일으켰는데, 도시의 식량 부족과 물가 오름은 생활을 압박하고, 중소기업 도산으로 실업 증대도 겹쳐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경제 공황에 대해서도 정부는 아무런 타개책도 강구하지 못했고,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의 전국 개혁연회에 대한 금지령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튿날 기조 내각이 사임하였으나 민중의 폭동은 가라앉지 않고 격렬한 시가전으로 확대되었다. 24일 왕이 퇴위하였다.
2월 혁명 결과 루이 필리프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공화주의파와 루이 블랑 등의 사회주의파가 대립했으며 무산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국립작업장(Atelier nationaux)이라는 조직이 생겨났다. 1848년 4월 말 제헌의회(制憲議會)를 구성하는 선거를 실시했는데, 이때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낙선했다. 1848년 6월, 정부가 국립작업장을 폐쇄하자 많은 노동자들이 바스티유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고 정부는 카베냐크(Cavaignac) 장군을 보내 시위를 무참히 진압했다. 그동안에 은행가ㆍ대지주ㆍ산업자본가들이 힘을 되찾아 질서당을 결성, 온건한 헌법을 의회에서 승인하게 했다. 앞선 혁명으로 부유층은 떠났어도 다시 기득권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사회는 다시 혼란에 빠졌고 사람들은 강력한 힘으로 프랑스를 이끌던 나폴레옹에 향수를 느꼈으며 그 결과, 남성 보통 선거의 도입으로 농민들이 선거권을 가지게 된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보나파르트가 승리하였고 제2공화정이 성립되었다. 농민들은 나폴레옹 1세의 영광을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다시 재현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제2제정시대를 열었으며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2월 혁명은 7월 혁명보다 유럽 사회의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을 완벽히 바꾸어 새롭게 하는 변화를 몰고 왔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추방되고 빈 체제가 붕괴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통일 운동이 일어나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고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통일을 회의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La Giovine Italia, 1831년)이 등장하였다.
또한 계급적 관점에서도 이 혁명은 상당히 중요한데 부르주아들과 대중들의 갈등 구도가 이 혁명을 통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프랑스 혁명과 7월 혁명의 경우에는 부르주아들과 대중들이 동맹 관계에 가까웠다. 부르주아들이 자유주의, 계몽주의와 같은 이념적 로드맵을 제시하는 역할이었다면 대중들은 정부를 전복시키는 물리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1830년대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성장하면서 노동자들을 포함한 대중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부르주아들이 이에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두 세력 간의 결별이 시작된 것. 실제로 1848년 혁명 이후 유럽 전역에서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손에 쥔 부르주아들은 기득권화되어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하는데 몰두한다. 다음은 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한 1848년 혁명에 대한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년∼2012년)의 평론이다.
1848년 혁명들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혁명으로부터 몸을 뺐다. 그들은 프랑스의 지도 아래 서로 보강해 가면서 옛 지배자들의 부활을 막거나 연기시키고, 러시아가 개입해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다시 한 번 ‘위대한 국민’이 된다는 보수와 그것에 따르는 위험보다는 국내의 사회적 안정 쪽을 택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