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 하느님을 만나는 법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 집에서 그의 장모 열병을 고쳐주신 이후로 밤늦게까지 당신을 찾아오는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셨다. 사람들은 아픈 게 사라지고 온전해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러니 그다음 날도 사람들이 아침부터 예수님을 찾아온 건 당연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마을을 떠나자고 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에도 복음이 선포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시려고 하느님은 사람이 되신 거다(마르 1,38).
그 마을에 아픈 사람들이 아직 더 있었는데, 질병과 마귀의 지배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마저 다 고쳐주고 가시지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들이 원한다면 예수님을 찾아가거나 모셔 오면 됐을 거다. 몇몇 사람은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지금은 지구 반대편 산불 소식도 실시간으로 알지만 그때는 사람이 직접 가서 알려줘야 했다. 예수님은 다른 고을 사람들에게도 직접 가서 그것을 알려주셔야 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그들 가운데 계시게 됐다는 거 말이다.
사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 중재자이다. 참된 사제, 대사제는 예수님 한 분뿐이다. 그분은 단순히 만남을 주선하거나 그분 말씀을 전달만 하시는 게 아니다. 예수님을 뵈면 하느님을 뵌 것이고, 그분께 청하는 게 곧 하느님께 청하는 거다. 그분이 하느님께 가는 길이고 다른 길은 없다. 그때는 그분을 찾아가 직접 만나 청해야만 했지만 지금 우리는 마음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청하고 말씀드린다. 그분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고, 특히 우리 마음 안에 더 잘 계신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다. 하지만 믿지 않고 소통하려고 하지 않으면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은 그저 교리고 남 얘기다.
하느님과 연결되고 소통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첨단 기계나 고도의 신학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다. 믿고 그분에게만 은밀하게 내 마음을 여는 것이다. 마음을 연다는 건 손님을 청소되지 않고 정돈되지 않은 집으로 그냥 맞아들이는 거와 같다, 마치 내가 내 방에 들어가는 거처럼. 그곳은 눈 감고도 물건을 찾을 수 있는 곳, 너저분하지만 익숙한 바로 그곳이다. 거기서 그분과 오만 걸 다 대화하고 나눈다, 험담까지도 한다. 바로 죄송하다고 하겠지만. 하느님이 이렇게 나와 가까워지기 위함이 아니라면 다른 무슨 이유로 사람이 되셔서 그 수고와 고생을 하셨겠나. 그냥 하늘에 계셔도 우리에게는 율법이 주어졌으니, 그것만 잘 지키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면 됐을 거다. 지금은 비록 육체를 지닌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찾아가지 않아도, 꼭 성당에 가지 않아도 그분과 참으로 진실하고 솔직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 나이가 들면 많은 친구가 필요 없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만나봐야 맨날 그게 그거고 그 소리에 또 그 소리다. 그들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나도 잘 모르는 내 마음을 그들이 알 리가 없다.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나를 풀어 주지 못한다(히브 2,15).’
예수님, 주님만이 저의 사제, 구원자이십니다. 주님과 친해진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고 제가 그런 기적들을 일으키는 건 더더욱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세상 집착에서 조금씩 벗어납니다. 제 꿈과 저에 대한 바람에서도 자유로워집니다. 그 형체가 점점 사라져가는 세상이 아니라 벌써부터 영원한 세상에 제 마음이 가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 계신 곳에는 항상 아드님이 계시니, 어머니를 부를 때마다 아드님을 만나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