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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에 대하여
왜 지금 이순신인가?
그분에게는 시대를 넘어 언제나 좌표를 제시해주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올린 동영상이 블라인드 처리되었군요,
해서 안 올릴까 하다가 스마트폰으로는 동영상이 그대로 재생되더군요.
공중파 방송사에서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최근의 작품도 아니고 해서 올렸던 것인데
아쉽습니다.
또 삭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만약 삭제된다면 스마트폰으로 보아주세요 ~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표상이다. 그런 추앙은 그를 수식하는 ‘성웅’이라는 칭호에 집약되어 있다. ‘성스럽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내지만, 천부적 재능과 순탄한 운명에 힘입어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돌파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런 측면은 ‘악성’으로 불리는 베토벤이나 ‘시선’ 이백(李白)과 대비되어 ‘시성’으로 지칭되는 두보(杜甫)의 삶과 작품을 생각하면 수긍될 것이다.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거칠고 파괴적인 것은 폭력이다. 그리고 가장 거대한 형태의 폭력은 전쟁이다. 이순신은 그런 전쟁을 가장 앞장서 수행해야 하는 직무를 가진 무장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돌파해야 할 역경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보다 훨씬 가혹했으리라는 예상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그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거대한 운명을 극복하고 위업을 성취한 인간의 어떤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만하다.
●가계와 어린 시절
이순신은 조선 인종 1년(1545) 3월 8일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다. 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이고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그와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와 요·순·우 임금에서 따온 것이다. ‘신(臣)’은 돌림자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는 아들들이 그런 성군을 섬긴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순신이 성군을 만났는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신하의 한 전범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의 가문은 한미하지는 않았지만 현달했다고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의 선조들은 우뚝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관직과 경력을 성취했다. 우선 6대조 이공진(李公晉)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정3품)를 지냈다. 가장 현달한 인물은 5대조 이변(李邊, 1391~1473)으로 1419년(세종 1) 증광시에서 급제한 뒤 대제학(정2품)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1품)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관직을 지내고 82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그런 신하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에 소속되는 영예를 누렸고, 정정(貞靖)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증조부 이거(李琚)도 1480년(성종 11)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정5품)과 병조참의(정3품)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비교적 순조롭고 성공적인 출세를 이어왔던 이순신의 가문은 그러나 조부 때부터 침체하기 시작했다. 조부 이백록(李百祿)과 아버지 이정 모두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당연히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 주요한 까닭은 이백록이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간주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묘사림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지만, 기묘사림이 시행한 별과(別科)에 천거된 120명 중 한 사람이었다. 기묘사림에 포함되는 인물들의 명단과 간략한 전기를 담은 [기묘록 속집]에서는 “진사 이백록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소했다”고 적었다. 이런 가문의 상황에 따라 혼인한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되는데, 외조부 변수림(卞守琳)도 과거와 벼슬의 경력이 없었다.
●몇 살까지라는 확실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이순신은 태어난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이순신은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뛰어난 인물을 만났다. 그는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었다. 서로 세 살 차이인 두 사람은 그 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에서 조선을 구원하는데 각각 문무에서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조선 태종의 가장 큰 치적은 세종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듯이, 유성룡의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순신을 적극 천거하고 옹호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의정의 혜안은 나라를 멸망에서 건졌다.
아직 어렸고 나중에는 상당히 다른 길을 걷게 된 두 사람이 그때 어떻게 어울렸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뒤 유성룡은 “신의 집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고 선조(宣祖)에게 아뢸 정도로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런 기억에 따라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인상 깊게 회고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인생의 방향 등도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유년 시절에만 국한된 관찰은 아니라고 추정되는데, 유성룡이 기억하는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기개가 넘쳤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은 그 눈을 쏘려고 했다”는 대목은 어린 아이로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례하거나 거칠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혼인과 급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그 뒤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으로 이주했다. 아산은 지금 그를 기리는 대표적 사당인 현충사(顯忠祠)와 묘소가 있어 그와 가장 연고가 깊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시행되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 때문이었다.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이 풍습은 자연히 부인과 그의 집안인 처가(외가)의 위상을 높였다. 가장 익숙한 사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상징하는 대표적 지역이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친정이 있던 강릉(江陵)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 뒤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尙州) 방씨(方氏)와 혼인했다. 장인은 보성(寶城)군수를 지낸 방진(方辰)이었는데, 과거 급제 기록이 없고 군수라는 관직으로 미루어 그렇게 현달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李薈, 1567년 출생), 이울(李蔚, 1571년 출생), 이면(李葂, 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그동안 이순신은 문과 응시를 준비해 왔다. 10세 전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보면 그는 10년 정도 문학을 수업한 것인데, 무장으로는 드물게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여러 유명한 시편을 남긴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쌓은 데는 이런 학업이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인 1년 뒤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앞서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는 유성룡의 회고는 이때의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5년 뒤인 1572년(선조 5) 8월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무장으로서 이순신의 공식적인 경력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시작되었다. 그는 1576년(선조 9) 2월 식년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그의 나이 31세였으며,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일생 전체가 그러했지만, 이때부터 부침이 심하고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험난한 관직 생활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종9품)이었다. 동구비보는 험준한 변경이었다. “석문과 사곡은 호랑이들의 소굴로 우리 영토를 엿보네. 골짜기가 갈라져 하늘은 틈이 생겼고, 강이 깊어 땅은 저절러 나뉘었네(石門與蛇谷, 虎穴窺我藩. 峽坼天成罅, 江深地自分)”라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시([동구비보를 지나며(過童仇非堡)], [학봉속집] 제1권)는 그런 거친 환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 동안 근무했다. 그렇게 만기를 채운 뒤 1579년(선조 12)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 종8품)로 배속되었다. 앞서는 거친 환경이 힘들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사람 때문에 불운을 겪었다. 병조정랑(정5품)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8개월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8품의 봉사가 반대한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즉각 불리한 인사조처로 이어진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많은 위인들이 그렇고 바로 그런 측면이 그들을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지만, 이순신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면모는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처음 표출된 그런 자세는 일생 내내 그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징비록]에서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고 썼듯이, 그런 현실적 불익은 그의 명성을 조금씩 높였고,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역사의 보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종4품)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좀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는 이때의 사건이었다.
특별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의 항명은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판단되지만,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불거졌다. 서익은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년(선조 14)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말직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이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올 뻔했다. 국왕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한 것이다. 그때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유성룡에게서 그런 의사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그러나 거절했다. 같은 가문(덕수 이씨)이므로 만나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권력이나 재력 같은 인간의 주요한 욕망은 궁극적으로 어떤 자리나 직위의 획득과 관련된 측면이 많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높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면 권력이나 재력도 그만큼 팽창하기 때문이다. ‘지음(知音)’이라는 오래된 성어가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그 사람을 알아주고 후원하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며, 그 사람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겨우 9세 차이였지만 탁월한 능력과 눈부신 경력으로 조선의 핵심적인 정치가로 자리잡은 같은 가문의 이조판서가 그때까지도 변방과 중앙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던 종8품의 말단 무관을 만나보고 싶어했을 때, 부적절한 정실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거절한 이순신의 태도는 그 기록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그렇게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이순신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년(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정7품)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3년상을 치렀고, 1585년(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종6품)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그의 관직 생활은 이때 그동안의 부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이순신의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년(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1589년(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년(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종3품)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년 2월 진도군수(종4품)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변방의 말직만을 전전하다가 삶을 마감했을 장수도 분명히 적지 않았을 것을 감안하면, 그의 역정은 수준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눈앞에 다가왔지만 거의 대비하지 않았던 거대한 국난을 생각하면, 전쟁 직전 그가 북방의 말단 장교가 아니라 남해의 수군 지휘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공교로운 천행이었다.
●임진왜란-승전과 백의종군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월 2일) 선조는 급히 몽진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월 22일). 개전 두 달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왜란에서 이순신은 임진년 5월 7일 옥포(玉浦)해전부터 계유년(1598) 11월 18일 노량(露梁)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크다고 할만한 고난이 닥친 것은 1597년(선조 30) 1월이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그 날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초1일 신유(辛酉).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인용자. 이하 같음)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菶)․분(芬), 아들 울(蔚-이순신의 차남),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같은 방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고,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이순신(李純信)이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喜壽), 이상(貳相, 찬성)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동지 곽영(郭嶸)도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주목하고 뛰어난 통찰력과 감동적인 문장으로 표현했지만, 이 날의 일기는 이순신의 내면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자료의 하나로 생각된다. 일기는 기본적으로 자신만의 내밀한 기록이다. 후세에 공표될 가능성을 고려하거나 그럴 의도를 담은 일기도 적지 않고 [난중일기]도 그런 측면이 있다고 평가되지만, 그럼에도 이 날 그의 문장은 전율과 놀라움을 안겨준다.
그 글에서 작성자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을 적었다. 그동안 승전을 거듭해 국망의 위기를 극복했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갑작스레 압송되어 혹독한 고초를 겪은 사람에게서 상상할 수 있는 고통과 억울함과 분노는 철저하게 제어되어 있다. 그는 오직 사실에 입각해 사고하고 행동했고, 승리의 원동력과 그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다는 한 관찰과 평가는 정곡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 짧은 일기는 그런 측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이순신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의종군을 시작한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4월 13일). 그는 나흘 동안(4월 16~19일)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했다. 이때의 일기, 특히 맨 마지막 구절은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마음을 느끼게 한다.
16일 병자.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中方浦)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남쪽으로 떠날 일도 급박했다. 부르짖어 통곡하며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정유재란-복귀와 전사
그동안 소강 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되었다.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월 16일)과 전주(8월 25일)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8월 3일). 임명 교서에서 국왕은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3척이었다.
그 함대를 이끌고 한 달 뒤 그는 명량(鳴梁)해전에 나아갔고(9월 16일),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다. 그때 그의 마음과 자세는 전투 하루 전에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글씨에 담겨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속히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이순신의 절망과 피로는 셋째 아들 이면의 죽음으로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고 수많은 죽음을 집행했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52세의 아버지는 다시 한번 통곡했다.
(10월) 14일 신미. 맑았다. ····· 저녁에 사람이 천안(天安)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열어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정신 없이 뜯어보니 겉봉에 ‘통곡’ 두 글자가 써 있는 것을 보고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고 통곡했다. 하늘은 어찌 이렇게 어질지 않단 말인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마땅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어찌 이렇게도 어그러진 이치가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밝은 해도 빛을 잃었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해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지금 내가 살아있은들 장차 뉘게 의지한단 말인가. 부르짖으며 슬퍼할 뿐이다. 하룻밤을 보내기가 한 해 같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휘호. 이순신이 명량해전에 나아가기 하루 전에 쓴 휘호다. 절대적인 열세의 전투에 임하는 그의 자세가 그대로 담겨있다.
거대한 전란과 그 전란의 가장 중심에 있던 인물의 생애는 동시에 끝났다.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왜란도 종결되었다. 그뒤 구국의 명장을 국가에서 추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1604년(선조 37) 선무(宣武) 1등공신과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책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793년(정조 17)에는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고 2년 뒤에는 그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그는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국가적 시책은 그의 위상에 부동의 공식적 권위를 부여했지만, 견고한 갑각 안에 가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측면과는 달리 이순신의 인간적 내면을 깊이 조명함으로써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것은 김훈의 [칼의 노래](2000)일 것이다.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비평과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 소설은 구체적인 서사보다는 이순신의 마음과 생각을 추적한 작품이다.
작가는 오래 전부터 주관이 배제되고 사실만이 남은 문장을 쓰고 싶었는데, [난중일기]에 그런 문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이순신의 마음과 문장을 이렇게 파악했다. “암담한 패전 소식이 육지로부터 전해오는 날, 이순신은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고 썼다. 슬프고 비통하고 곡을 하며 땅을 치고 울고불며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다. 거기에 무슨 형용사와 수사학을 동원해서 수다를 떨어본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를 당할 도리가 없다. 이것은 수사학의 세계가 아니라 아주 강력한 주어와 동사의 세계다.” 그는 그것을 “죽이는 문장”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순신에 관련된 글은 수없이 많이 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러 측면에서 비평은 그 주체와 대상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수준에 있거나 오랫동안 깊이 관찰하고 생각해야만 합리성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그렇지 못한 이 글은 부족하기만 하다.
●영웅이라고 이름하기에는 너무나 큰 인간...이순신... 우리는 그를 그가 사랑했던 조선의 바다에 묻는다. 그러나, ....우린 아직 그를 보낼 수 없다. 왜적을 맞아 전승을 기록한 위대한 군인으로만 그를 기억코자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그를 보내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싸워야 할 적이 자기 자신임을 깨달을 때... 원칙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할 용기가 있을 때... 백성이 하늘로 알고 마음을 다하여 섬길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아직도 친일파와 그후손이 지배하고 국민을 억압하는 작금의 현실을 보여드리는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적극 공감합니다. 그리고,
'역사에 가정이 있다면'하고 근현대사를 읽으면서 생각해보는 때가 많습니다.
역사적 인물들은 과장과 억지를 조금 섞어서 영웅으로 만들지만,
이순신 장군께서 산 삶 자체가 한편의드라마라서 조금의 억지와 과장, 거짓말이 없는 영웅 그자체죠..
우리 역사에서 광개토대왕, 세종, 이순신은 찬란히 빛나는 별이지요,
그분들이 있기에 우리 역사는 풍부할 수 있는 것인가 봅니다.
갑오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