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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는 100년에서 178년까지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더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단일한 척도에 입각하되, 방향을 북쪽으로 맞춘 지도 제작을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다.또한 그는 둥근 지구의 표면을 반듯한 평면 위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이미 알려진 세계(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외부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넓은 바다밖에 없다고 했던 호메로스의 관념을 뒤집었다. 뿐만 아니라 위도(가로)와 경도(세로) 지정해 당시 알려진 세계의 8000여 장소에 좌표를 부여했다. 이때 위도 지정은 상당 부분 매우 정확했지만, 경도 지정에는 오류가 많았다. 고대 세계의 경도를 조히 50% 정도는 더 넓게 봤기 때문이다. 그는 지중해의 동서 거리를 실제보다 거의 100km나 더 길게 묘사했으며, 그 밖에도 아프리카 남부에서 마다가스카르를 거쳐 수마트라 섬에 이르는 육지가 존재할 것이라고 추측하여 인도양을 내해로 만들어 버리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아랍학자들은 9세기경 <<지리학>>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해 연구에 활용된다.. 그리고 13세기에 막시무스 플라누데스Maximus Planudes 라는 그리스 정교회 소속 수도자가 아랍어로 번역된 이 책의 필사본 한 권을 발견하여 그는 이 책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최초로 지도를 그려 넣게 된다. 1400년경 피렌체로 들어온 이 책은 또 다시 신속한 번역 과정을 거쳐 필사본 형태로 복사된다. 1475년 빈센차에서 최초의 라틴어판이 출판된다.
<<기사 존 맨더빌의 약속의 땅 인디아, 중국 여행기>>의 실제 저자는 1372년에 사망한 뤼티히(벨기에의 리에주) 출신의 의사 장 드 부르고뉴Jaen de Bourgogne로 추정된다.
마르코 폴로보다 장 드 부르고뉴를 신뢰한 사람이 더 많았다. 그의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폴로가 말한 킨사이(항주)는 아마도 군주의 거주지를 일컫는 중국어 킹세King-sse에서 비롯한-이탈리아어-파생어에 다름 아닐것이다.
당시 성직자들이 제작한 최신 지리학적, 역사적 지식이 고스란이 녹아든 지도 가운데 최고의 작품은 가마돌리 교단 소속 수도자인 프라 마우로Fra Mauro가 베네치아의 섬 무라노에서 15세기 중반에 제작한 지도다. 그는 사상 최초로 옛 권위자들의 의견을 의문시한 인물이다.
“나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말한 것을 모두 믿지는 않는다.”
프라 마우로는 자신의 지도에 이런 문구를 적어 넣었다.
마리노스 폰 티로스Marinos von Tyros라는 학자가 바로 이 오류의 근원이다. 당시 그는 각종 여행기와 탐험기를 근거로 하여 아시아 지도를 제작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중국의 길이 측정 단위를 로마의 것으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켰고, 이로 말미암다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착오 때문에 아시아가 동쪽으로 무한하게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피렌체 출신의 수학자 파올로 달 포초 코스카넬리(1397~1482)는 마리노스 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제자된 지도를 세심하게 들여다보던 중 그는 포르투갈과 동쪽의 인도가 230도 가량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1도가 약 101km에 해당한다고생각한 그는 (그의 동시대인은 대략 1도를 113km로 계산했다) 배를 인도의 반대방향인 서쪽으로 130도(360도에서 포르투갈과 인도의 230도를 뺀것)만 항해 하면, 다시 말해 130 곱하기 101 즉 총 1만 3130km만 항해를 하면 인도 동부 연안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술 더 떠서 아시아 대륙의 동부 연안은 인도 동부 연안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 포르투갈에서 65도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점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에서 아프리카 남서부에 이르는 거리와 이 거리의 길이가 서로 일치한다고 하였다.
이것 말고도 토스카넬리는 또 다른 오류를 두 가지나 더 범하였는데. 그는 여행의 출발지로 상정했던 대서양의 카니라아 제도를 실제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밀어넣었다. 한편 마르코 폴로의 의견에 따라 지판구(일본)의 위치를 원래보다 훨씬 더 동족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아시아 대륙과 멀리 뚤 떨어뜨려 놓았다.
토스카넬리가 콜럼버스와 서신을 주고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로지 콜럼버스의 이야기에만 전적으로 메달린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자신이 구상한 서쪽 여행을 입증해줄 만한 근거를 찾아 다녔다. 그러던 중 소르본 대학 총장이자 캉브레 추기경인 피에르 아이Pierre d'Ailly가 1410년에 발행한 <<세계의 상>>에서 그토록 찾아 헤메던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이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콜럼버스 또한 <<세계의 상>>을 소장했는데, 그가 직접 써 놓은 수많은 주석이 달린 이 책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카나리아 제도와 일본이 경도(세로로 된선)상으로 약 58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대목에 밑줄이 그어 져 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콜럼버스스는 일본에서 카나리아 제도까지 거리를 3862km 로 추정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4345km로 추정했다. 둘 다 터무니없이 축소된 거리다. 실제는 자그마치 1만 7059km나 되기 때문이다.
고대의 학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뮌스터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은 신세계를 다루면서 다른 사안은 일단 뒤로 제쳐두고, 제일 먼저 ‘도대체 어떤 경로로 이 땅에 생명체가 생겨나게 되었을까?’ 하는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오로지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방주에 있던 동물뿐이었기 때문이다.
뮌스터의 <<코스모그라피아>>는 아메리카 대륙에 대해 뒤로 갈수록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럼에도 도입에서 전체 세계를 개괄하여 소개할 때는 여전히 “경험이 풍부했던 옛 사람들”, 즉 고대 그리스, 로마 지리학자의 견해와 세계를 “세 조각”으로 나누었던 그들의 세계 분할 방식을 지침으로 삼았다.
1540년 제바스티안 뮌스터가 발행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를 보면, 유럽과 아시아 대륙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과 대조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은 전설의 남쪽 대륙과 연결되어 있고, 이 전설의 대륙은 동쪽에서 다시 아시아 대륙과 이어져 있다. 그 결과 태평양이 내해가 되고 말았다.
프라우언부르크의 성당 참사 위원이었던 코페르니쿠스가 1510년에 <<천구의 운동과 관련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제시한 가설에 대한 소고>>라는 소책자에서 몇쪽에 걸쳐 기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우주상을 보였다.이 저작물은 필사본 형태로 소량 제자되어 가까운 지인 사이에만 유포되었고, 사람들에게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한 1543년에야 비로소 그의 핵심 작품인 <<천구의 회전 운동에 관하여>>가 뉘른베르크에서 출판되게 된다. 하지만 이 책 역시 거의 주목받지 못하게 된다. 아마도 뉘른베르크 출신의 종교 개혁가 안드레아스 오지안더가 익명으로 작성한 서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행인이었던 그는 코페르니쿠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도, 또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 서문을 작성했다. 오지안더는 서문에서 이 책에 제시된 주장, 즉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것은 단순히 가정에 불과할 뿐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아마도 교회의 공격에서 이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예방책에 불과했다. 1616년 3월 5일, 이 책은 금서 목록에 오르고 만다.
뮌스터는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제시한 주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들을 기록할 수도, 또 기록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은 그가 보기에도 이단 성향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비단 뮌스터뿐 아니라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결과 16세기를 통틀어 코페르니쿠스의 저서가 재인쇄된 것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바로 1566년 발행인 크리스티안 부르슈티젠이 페트리 인쇄소의 다음 세대인 헨리쿠스페트리 인쇄소에서 이 책을 재인쇄했다. 신학자이며 바젤 대학의 수학 교수었던 부르슈티젠은 자신의 강의 시간에 코페르니쿠스가 제시한 주장을 가르치려 했다. 그러나 곧 그의 시도에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바젤 대학은 1564년에서 1586년까지 오로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반을 가르쳐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진다.
추기경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니콜라우스 폰 쿠에스Nikolaus von Kues, 1401~1464) 이미 100년에 지동설과 유사한 내용을 가르쳤다. 그는 적어도 지구가 우주가 중심이 아닐수도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다. 그는 인간이란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사물은 인식할 수 있을지언정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견해를 피력하면서,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사물은 다른 사물과 맺는 무궁무진한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우주란 이런 모든 개별 사물의 총합이어야 하는 동시에, 우주에는 그 어떤 중심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쿠자누스의 견해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작품 또한 출판된 예가 매우 드물었다. 그러다가 1565년 이후에는 아예 절판되어다. 쿠자누스 전집의 마지막 판본은 1565년 바젤의 페트리 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 그리고 그 발행인은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를 출간한, 즉 수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크리스티안 부르슈티젠이었다.
1450년 제노바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존 캐벗은 처음에조반니 카보트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 후 베네치아로 이주해 항해가 생황을 시작한 그는 1484년 영국의 항구도시 브리스틀로 건너가게 된다. 거기에 정착한 그는-추측건데 콜럼버스보다 앞서서-부유한 상인을 설득해 서쪽으로 항해를 떠나려 시도했다. 존 캐벗은 부자 상인에게 함대를 꾸려 자기를 서쪽으로 보내 주기만 하면 그 길고 지구를 빙 돌아 (아시아에 있는) 향신료의 섬까지 나아가 그때까지 아랍인이 이루어 놓은 기존의 독점 상권을 반드시 무너뜨리겠노라고 열변을 토했었다. 존 캐벗의 아들 세바스티안 캐벗은 1484년경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489년, 시민 도시이자 무역과 상업 도시였던 뉘른베르크의 성태 아래에 위치한 좁은 골목, 그러니까 오늘날의 부르크가街에 거주하던 몇몇 이웃이 힘을 합쳐 모종의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부르크가 3번지에느 인쇄업자이자 출판업자인 안톤 코베르거anton Koberger가, 9번지에는 부유한 상인인 제발트 슈라이어가, 19번지에는 뉘른베르크 세습 귀족의 아들인 하르트만 셰델Hartmann Schedel이, 21번지에는 목판화 작업장을 운영하던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가 살고 있었다. 특히 미하엘 볼게무트는 한때 29번지에 살던 기능공을 제자로 삼아 함께 일한 적이 있었는데, 이 기능공은 머지않아 스승을 뛰어넘어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될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알브레히트 뒤러 였다. (그는 1486년에서 1489년까지 볼게무트의 작업장에서 일했다.)
15세기 중후반기에 뉘른베르크는 경제와 예술 그리고 학문의 중심지였다. 노리스부르크 아래에 위치한 인구 약 2만 5000명의 이 도시는 독일의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고, 교외에만 2만 명 이사이 살고 있었다.
원거리 무역의 중심지였던 뉘른베르크는 황제가 하사한 몇가지 특권 덕분에 관세를 내지 않고도 유럽의 다른 70여 개 도시와 교역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셰델의 세계 연대기>>에 실린 그림 가운데 획기적인 것은 시가지의 정경을 다은 123편의 대형 목판화들이다. 그 덕에 이 책은 인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우데 한 권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목판화들은 어느 정도 이상화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사실감 있게 유럽 도시의 정경을, 특히 독일 도시의 풍경을 최초로 독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 책을 인쇄한 사람은 안토 코베르거였다. 1470년 뉘른베르크에서 서적 사업을 시자한 그는....
<<셰델의 세계 연대기>>의 라틴어 판이 출간된 지 이틀 후인 1493년 7월 14일, 하르트만 셰델은 포르투달 국왕 주앙 2세에게 서신을 보내 깜짝 놀랄 만한 일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탐험대를 꾸려 중국으로 가는 서쪽 뱃길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너무 때늦은 것이었다.
셰델이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당시에도 새로운 소식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지만, 콜럼버스의 항해 소식을 담은 기록은 1493년 말에야 비로소 뉘른베르크에 전해졌다.
하르트만 셰델은 포르투갈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친구이자 뉘른베르크 시민인 마르틴 베하임(1459~1507)을 거론 하며 자신의 제안이 타당함을 역설했다. 마르틴 베하임은 탐험가로 오랫동안 포르투갈을 위해 일한 사람이다.
16세기 사람 잘 들뤼모는 <<서양 세계의 불안>>이라는 연구서에서 “그 당시 뒤러는 세계 종말을 다룬 목판화 열네 점으로 유명했다. 뒤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아도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다-르네상스를 근대화의 추진력으로, 또는 무언가 유쾌한 것으로 체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엄청난 불안감을 느끼면서, 이제 인류가 노쇠할 때로 노쇠하여 그 기운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확신했으며, 콜럼버스는 늦어도 1656년에는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뒤러는 그의 그림에서 바로 이러한 시대 분위기를 표현했다.”라고 적었다.
16세기의 중유럽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대륙에 대해서 꽤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근동 지역에 관해서도 이런저런 다양한 지식을 갖추었고, 아프리카 해안 지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며, 남미와 인도의 몇몇 지역에 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극동 아시아만큼은 정말이지 아는 것은 너무나도 얺었다.
제바스티안 뮌스터도 당시의 보통 지식인보다 더 많은 세계를 알고 있었지만, 그런 그조차 극동 아시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코스모그라피아>> 초기 판본을 보면 한반도에 대한 그 어떤 정보를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책에 첨부된 지도에조차 하반도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 지역의 정보가 너무나도 빈약했음을 알수 있다.
뮌스터가 출처까지 밝혀 가면서 열거한 대다수의 괴물이 발견된 곳은 인도였다.
<<코스모그라피아>>에 나오는 목판화는 책에 싣기 위해 따라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즉 <<코스모그라피아>>에 실린 목판화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1503년 출판된 그레고르 라이슈의 <<지혜의 진주>>에 수록되었던 것들로, 제바스티안 뮌스터가 이 책에서 많은 그림과 상당수의 자료를 차용하였다.
콜럼버스가 기록한 선상 일지의 원본은 사라지고 없다. 다반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라스 카사스의 필사본이 전해 내려올 뿐이다.
콜럼버스도 꾸며 낸 온갖 진기한 일들로 선상 일지를 가득 채웠다.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사이렌이나 개의 얼굴을 한 식인종, 꼬리가 달렸거나 이마에 외눈이 박힌 사람 또는 여성 전사 아마조네스가 우글거리는 섬에 관한 이야기 등을 기록했다.
가장 고귀한 학문은 신학이었다. 이것을 탑으로 이해한다면 신학아래 7자유학이 성탑의 아래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7자유학이란 세 가지 정규 언어 교육인 문법, 수사학, 변론법(논리학으로 불리기도 한다)으로 이루어진 기초 3학과 수학 교육에 속하는 산술, 기하학, 천문하, 음악으로 이루어진 상위 4하을 의미한다. 이 일곱 학문이 ‘자유로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찬양된 거은 돈벌이와 전혀 무관한 일이고, 따라서 생업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할 수 있는 공부였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는 수학보다 세 가지 언어학을 더 집중하여 가르쳤다.
16세기에는 학문 역구로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곳은 대학이 아니었다. 높은 학식을 갖춘 인문주의자가 주로 드나든 곳은 바로 궁성이었다. 반면 대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스콜라 철학의 중심지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말에 이르러 각 대학은 학생수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사태를 맞게 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매년 입학하는 신입생은 130명 정도였다.(결코 결코 많은 편이 아님)
15세기 후반부터 공식 보고문에는 표준 독일어 혼성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관청 소속 서기들에 의해 발전한, 이른바 “말하는 관청 언어”로, 적어도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면 어디에서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5세기 후반까지는 라틴어로 작성된 문헌이 모국어인 독일어로 쓰인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몽테뉴도 프랑스어보다 라틴어를 먼저 말하고 썼다. 몽테뉴의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그와 말할 때는 오로지 라틴어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당시 대학 수업도 오로지 라틴어로만 이루어졌다.
학생은 대학생 기숙사라 불리던 대학 부속 가옥에서 공동으로 생활했다. 대학생 기숙사는 대학의 통제를 받기는 하나 약간 자치권을 보유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라틴어만 사용해야했다.(수업시간 외에도 말이다) 규율 위반 시 처벌은 상당히 엄격했는데, 심하면 규율 위반자를 대학 감옥에 감금하기도 했다.
수도자들은 대학 교수에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었지만, 학위를 수여할 권한은 없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1223년 교황의 승인을 얻은 뒤 유럽에서 세를 확장해 왔고, 1260년에는 이미 전체 수도자가 1만 7000명을 넘어섰다. 프란체스코 수도사가 된다는 것은 아주 매력 있는 일이었다. 다른 수도회와 달리 여기는 속세를 등지기는 커녕 오히려 성장 일로에 있는 도시 속으로 파고 들었다. 생활 기반 역시 시골의 토지와 그 수확물이 아니라, 도시 사람들이 내는 기부금이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설득해 수도회에 입회시키렸는데 뮌스터도 1507년 서원을 하고 프란체스코 수도사가 되었다. 프란체스코 수도자들은 스스로를 ‘맨발’이란 뜻의 바르푸스Barfub, '어린 형제‘란 뜻의 미니오리트Miniorit 혹은 민더부루더Minderbruder라고 일컬었다.
수도사가 되면 물질의 안정등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연구 활동을 계속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초기 인문주의자에게 교양을 갖춘 인간이란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선한 인간을 의미했다.
원래 서적 인쇄업은 조합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이 사업은 학문과 관련한 직업, 즉 ‘자유로운 예술’로 간주되어다. 최초의 인쇄업자들이 바젤에 정착했을 무렵 그들은 견고한 결속력을 자랑하는 조합의 벽에 부딪혔다.
15세기 후반의 책들은 따로 표지가 없었고 장정용 제본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이런 일이 흔하였다.
제본되지 않은 책자는 그 분량에 따라 1~3굴덴, 제본이 완료된 책자는 3~7굴덴 정도에 가격이 형성되었다. 당시 7굴덴이면 살진 황소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책 장정에 관해서라면 다른 어느곳보다도 바젤의 출판업자들이 유명했다.
인쇄소를 운영하는 데는 적잖은 돈이 들어갔다. 최초 설비 비용이 200굴덴에 달했고, 여기에 비싼 종이 가격이 추가되었는데,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종이 또한 미리 대금을 지불해야 했다.
교회가 내린 이자금지 조치를 피해 다른 사업가에게 돈을 빌리고 대신 그들의 공장에서 직접 물건을 구입하거나 일부 현물을 그들에게 넘기는 방식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르트만 셰델의 <<셰델의 연대기>>, 그러니까 15세기 후반에 엄청난 돈을 드려 제작한 그 책이 경제적으로 뛰어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까닭은 수백 편에 달하는 목판화 제작으로 초래된 값비싼 장정 비용 때문이 아니라, 책이 출판되고 겨우 3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 즉 1496년에ㅡ이미 저렴한 불법 복제물-원본보다 조금 더 작은 판형, 이른바 문고판-이 등장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인쇄술이 발명되어 전파되던 최초의 50년 동안에만 4만여 종의 인쇄물이 고판본 형태로 생산되었고, 그것들의 총 인쇄 부수는 자그마치 200만 부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에는 인쇄물의 종류가 대략 20만 종으로 늘어났고, 이와 더불어 총 인쇄 부수도 약 1억 부로 증가하게 된다.
1480~1580년까지 독일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목판화 지도만 제작되었다.
목판화와 동판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쇄 방식이다. 목판화는 볼록 인쇄이다. 즉 목판화는 높이 톡 튀어 나온(양각 이라고 함) 부분이 인쇄된다. 동판화는 오목 인쇄방식이라 아래로 음푹 내려간(음각) 부분이 인쇄된다. 목판화를 제작할 때는 나중에 인쇄가 되지 않을 부분, 즉 여백으로 남아 있어야 할 부분을 파내야 한다. 그런 다음 위로 솟아 오른 부분에 잉크를 묻히고 종이를 덮어 인쇄를 한다. 요컨대 목판은 도장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이 당시 많은 인쇄물은 추후에 채색 과정을 거쳤다. 판화가들은 애초에 목판화를 제작할 때 면밀한 내부 묘사는 생략하고 윤곽선만을 표시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뒤러 같은 대가들이 나타나 정교한 음영 작업과 우아한 윤곽선 그리고 인쇄물에 깊이를 더하는 명암 조절 등을 하면서 목판화를 수공업의 범주에서 끌어냈다. 즉 그때까지 그저 서적의삽화 정도로만 이용되던 목판화를 독자의 예술로 발전시킨 것이다.
동판본은 목판화와 달리 활자와 동판화를 한번의 공정으로 함께 인쇄할 없다. 왜냐하면 동판화를 제작할 때는 반드시 동판을 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조각용 끌이나 산을 묻혀 그림 원본을 동판에 새겨 넣거나 부식시킨 다음에 오목하게 팬 홈속에 인쇄 잉크를 문질러 넣었다. 그런 다음 습기를 머금은 종이를 그 위에 덧내어 누르면 종이가 약간의 잉크를 흡수하면서 인쇄가 되는 것이다. 동판화는 목판화를 제작할 때보다 훨씬 더 높은 압력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오래된 인쇄물을 보면 흔히 동판 가장자리가 종이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판화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 손재주가 뛰어나지 않은 판화 제작자도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작업 속도오 목판화보다 빠르다.
도서전에서는 서적 주문은 물론, 주로 서적 직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때 주로 거래된 서적의 형태는 아직은 낱장으로 구성된 인쇄 전지였다. 고객은 일단 인쇄 전지를 구매한 다음, 추후에 서적 제본업자를 찾아가 자기 취향에 맞게 제본을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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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년 뮌스터(17세)는 고향 잉겔하임을 떠나게 된다.
뮌스터가 1529년 이후, 대학에서 받는 1년치 연봉은 60굴덴 이었다.
요하네스 슈퇴플러(1452~1531)는 1510년부터 튀빙겐 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했고, 1511년부터는 수학과 천문학 교수직을 겸했다. 15~16세기의 대학에서 천문학은 정규 교육 과정에 속하는 과목이었다. 부활절이나 성령 강림절 등 유동적인 교회의 연중행사 날짜를 정확하게 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문학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천문학은 미래를 예언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자연이 태양과 달 그리고 별의 변화 리듬에 네맡겨진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운명도 천체의 운행에 따라 좌우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요소 가운데는 신학적인 근거도 있었다. 별의 운행은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므르 신은 이러한 운행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슈퇴플러는 천체가 인간의 운명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제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이런 그의 생각은 모든 것 속에 신이 존재한다는 관점, 그러니까 심지어 별의 규칙적인 움직임 속에도 신이 존재한다고 여겼던 당시의 지배적인 신학 이론에 완전히 부합하는 관점이 아니었다.
뮌스터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자로 빈곤 서약을 한 처지라 그는 급료의 대부분을 수도원에 헌납해야 했다.
1504년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이 ‘콩고 강 저편(남쪽을 가리킴)에서 이루어진 항해에 대해 발설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명을 내린다.
당시에 지도는 흔히 국가의 기밀 사항으로 간주되었다. 새로 발견한 식민지 땅에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탐험가들이나 국가가 쉽게 접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앋. 한편 옛 도서관에서는 오래된 지도를 그저 부수적인 자료 정도로만 치부했을 뿐, 따로 보관하지는 않았다. 이 말은 곧 지도가 오래되어 낡으면 없애 버렸다는 뜻이다. 보관하기가 까다로웠던 낡은 벽걸이 지도는 특히 가차 없이 처리해 버렸다. 16~17세기에 제작된 대형 지도를 오늘날 거의 찾아보기가 힘든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마젤란이 마젤란 해협(남아메리카 대륙 남단의 해협)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 아니란 말인가? 1515년 이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독일어로 발행된 상업용 문서 하나가 이런 사실을 증명해 주는 듯 보인다. <<브라질에서 온 새로운 소식지 사본>>이라는 이 문서는 1502/1503년에 이미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위도 40도에 위치 한 곶을 돌아 항해를 한 적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문서에 따르면, 그들은 뱃길에 접어들어 97km 정도 항해를 했는데, 그 지점은 말라카 반도에서 966km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당시 대서양-태평양 횡단 항해를 보고하는 모든 문헌은 마젤란 해협을 위도 40도 지점 또는 그것보다 훨씬 더 북쪽(30도 정도)에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해협을 따라 97km 이상 항해를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문헌들을 보면 하나같이 플라타 강 합류점이 위도 35도 상에 놓여 있고, 플라타 강과 대서양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육지까지 거리가 350km가량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대략 위도 40도 지점에 산마타스 만이 놓여 있다. 문헌에 따르면, 이 만은 폭이 넓고 거대해서 만 안쪽까지 도달하려면 약 250km를 항해해야 한다.
탐험에 총 833만 3000마라베디의 거금이 들어갔지만, 빅토리아 호가 싣고 돌아온 26톤의 향신료 판매로 카를로스 1세가 벌어들인 수익만 이미 868만 500마리베디에 달하였다.
최초의 세계 일주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도 훨씬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지구의 모양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이제 태평양의 무한한 넓이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구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보다 훨씬 더 넓다는 것과 고대 사상가들의 생각이 틀려도 이만저만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대 사상가들이 추측했던 것과 달리 지구 표면의 대부분이 물로 뒤덮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뮌스터는 자신만의 수학과 지리학의 논리에 따라 유럽이 세계를 구성하는 세 부분 가운데 가장 먼저 생겨났지만 면적은 가장 작다고 보았다.
“비록 유럽이 아프리카나 아시아보다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다히 넓은 땅이다. 유럽은 에스파냐에서 그리스의 외곽인 콘스탄티노플까지 걸쳐 있는데, 이 거를 프톨레마이오스의 계산법으로 산출해 보면 550독일마일(4100km, 그러나 실제로는 3500km임)정도 된다.”
뮌스터의 책에서는 이와는 조금 다른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책에 나타난 아메리카는 새로운 천국이 아니라, 때때로 공격성을 드러내 보이는 미지의 동물과 사람이 사는 낯선 세계이다.
남쪽의 파타고니아에는 거인 파타고네스Patagones(거대한 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가 살고 있었다.
남미(다른 대륙도 마찬가지다)에 거주하는 민족을 묘사할 때 뮌스터가 언제나 탐험가와 정복자의 관점을 견지해다. 마찬가지로 <<코스모그라피아>> 후기 판본을 보아도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아스텍과 잉카 제국을 정복한 과정을 상당히 상세하게 기술된 반면, 그들이 자행한 온갖 악행은 전혀 찾아 볼수가 없다. 이 사건과 관련한 책이 이미 발행되어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를테면 <<서인도 제도 국가들의 몰락 과정을 다룬 보고서>> 같은 책 말이다. 원래 이 보고서는 세비야 출신의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자 바르톨로메오 데 라스 카사스가 에스파냐 국왕을 위해 쓴 책이었다.1552년 세비야에서 최초로 출판되었고, 이어서 유럽 도처에서 발행되었다. 그는 정복자들이 저지른 만행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이 책을 개작해 발행한 사람들은 이런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일각수가 살고 있는 곳은 유럽이 아니라 메카(사우디아라비아의 거기)였다. 중유럽에는 이제 저 이상 상상의 동물이 머무를 장소가 없다는 보편적인 사고가 여기서 드러난다.
“진짜 용이 살아 있는 곳은 인도뿐이었다.”라는 글도 보인다.
항해가들이 이룩한 지리상의 발견 덕택에 날이 갈수록 커져 가던 16세기 초반의 세계는 그 후 수십년이 흐른 어느 날 갑자기 줄어들고 만다. 종교분열 시대에는 누구나 이곳저곳으로 여행 다니는 일이 무척이나 어려움을 겪었다. 언제 들고 일어날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농민도 문제였지만, 여행자 본인과 그의 종교가 도대체 어디쯤에서 경멸과 박해의 대상으로 돌변할지 모를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면죄부는 죄와 벌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가톨릭 교리에 근원을 두고 있다. 죄는 참외 의식으로 없어지는 반명, 죄 지은 몸을 정화하기 위해 서는 반드시 마음속 깊이 죄를 뉘우치고 속세의 삶 또는 정죄의 불길 속에서 신이나 교회의 심판에 따라 내려진 벌을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예수와 성령이 선행을 통해 ‘충분한 만큼 이상의’ 공로를 세웠고, 이때 남은 공로의 잉여분을 교회가 보물적처럼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이른바 ‘교회의 보물’), 결과적으로 교회는 죄인의 벌을 일부분 사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성직자는 선업, 기도, 순례 그리고 돈을 사면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다.
라이프치히에 있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자 요한 테첼은 1517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과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교구에서 어찌나 공격적으로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는지......루터가 테첼의 면죄부 판매 배후에 깔려 잇는 배경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그의 비판은 한층 도 혹독해졌을 것이다. 요컨대 테첼은 오로지 교황을 위해서만 돈을 끌어 모은 것이 아니었다. 끌어 모은 돈의 절반은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Albrecht von Brandenburg) 주교의 수중으로 들어갔는데, 주교는 이 돈을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상저에 진 부채를 변제하는 데 사용했다. 로마 교황처에서 한무더기의 성직을 사들였던 알브레히트 주교는(마인츠와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인 동시에 할버슈타트 주의 교구 관리자이기도 했으) 이렇게 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517년이 되자 반박문 필사본에 기초한 세 종류의 인쇄물이 뉘른베르크와 라이프치이 그리고 바젤의 아담 페트리 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 이런 책들은 1518년에 아담 페트리의 경쟁자인 요한 프로벤 인쇄소에서도 출판되었다. 프로벤은 1518년 10월, 루터의 초기 저작물을 한데 모아 첫 전집을 발간했다. 총 2000부가 인쇄됐지만, 반년 사이에 모두 매진된다. 프로벤은 총 인쇄 부수 가운데 3분의 1가량을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 판매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루터의 저작물 발행을 포기하게 된다. 그의 고정 저자 가운데 한 사라인 에라스무스가 루터의 저작물 발행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이제 아담 페트리가 나서서 루터의 저작물을 유포하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
1521년 4월 17일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 의회가 열리게 된다.
당시 21세 였던 카를 5세는 1년 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루터가 행한 라틴어 연설뿐 아니라 독일어 연설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할 줄 아는 언어는 프랑스어 뿐이었다. 그래도 그날 밤 카를 5세는 답변을 내놓는다.
황제는 루터의 국외 추방령을 끝까지 관철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종교개혁에 맞설 시간도 돈도 없었다. 당시의 정치 상황으로는 카를 5세라도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1521년, 부르군트와 이탈리아의 주도권을 놓고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1525년 독일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1526년에 재차 분쟁이 반발했다. 그리고 그 후로도 1544년까지 세 차례나 더 분쟁이 일어났다. 그뿐 아니라 1526년 헝가리에서 승리를 거둔 터키 군이 그 기세를 몰아 1529년에는 빈 문전까지 쳐들어왔다. 1541년, 헝가리는 터키의 영토가 되었다. 따라서 정치적, 재정적으로 모든 제후와 고위 성직자의 완전한 지원이 필요했던 황제는 그 대가로 그들의 의향을 반드시 고려해 주어야만 했다.
1356년에 공포된 ‘황금칙서’로 몇몇 제후에게 몇 가지 특별한 권한이 주어졌다. 이 권한은 단순히 그들의 안위를 보호할 뿐 아니라,그 가운데는 미래의 황제를 뽑을 수 있는 권한도 포함돼 있었다.
카를 5세는 이미 1555년에 자신에게 부여된 통치권의 일부를 포기했고, 1557년이 되자 마침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1520년대 까지만 해도 히브리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성경>>을 원전으로 읽기 위해서 였다-언어의 제반 현상과 그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 하나의 진지한 학문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1520년 이후부터, 특히 남부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랍비어(신 히브리어) 서적 발행이 점차 증가했다.
뮌스터는 엘리야 벤 아셔 하 레비 하 아슈케나지, 줄여서 엘리아 레비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유대인 학자와 주로 교류했다. 뮌스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지몬 그리노이스를 통해 엘리아 레비타의 저서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1518년 이탈리아에서 출판된 문법책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두사람 사이는 냉각된다. 뮌스터가 문법학자 레비타를 찬양하고 유대인을 통해서 자신의 히브리어 지식을 넓혀 가려고 거듭 시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직접적이고 인간적인 교류는 피했다. 그의 작품 어디를 보아도 유대인을 좋게 말한 부분은 찾아 볼 수 없다. 이와 반대로 탐욕이나 부정직함 등 이른바 유대인을 특징하는 경멸조의 언급은 여러 차례 등장한다.
16세기에 유대인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연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전공 분야 때문에 ‘사악한 마술’을 부린다는 의혹에 쉽게 빠질 수 있었다. 이때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확실한 방법이 바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각 대학에 히브리어 교수직을 둔 것은 원래 유대인 서교라는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탄탄한 성서 해석을 통해 유대 신앙의 오류를 백일하에 밝히고 유대인을 설득해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1525년 5월 <강탈과 살인을 일삼는 농민 폭도에 대항해> 라는 글을 작성했는데 보면은 “농부들은 신과 인간에게 매우 섬뜩한 죄를 저질렀다. 그들의 육체와 영혼은 여러모로 보아 죽어 마땅하다. 우선 첫째로, 그들의 상전에게 충심으로 복종을 맹세했음에도 불손하고 파렴치하게도 그 맹세를 깨뜨려 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군주에게 저항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육신과 영혼을 잃었다. 악한과 범죄자가 흔히 그러하듯 그들은 신의를 저버렸고, 거짓 맹세를 일삼고, 거짓말을 밥 먹듯 했다. 둘째로, 그들은 포공을 일으키고 무도하게 자신들의 것이 아니 수도원과 성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그들은 노상강도나 살인범과 마찬가지로 육신과 영혼 모두 죽어 마땅하다. 불이 나면 제일 머저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곧장 불을 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과 마찬가지로 공공연하게 선동을 한느 사람들을 보면 보통 사람이나 재판관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사형 집행인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폭동은 단순히 살육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를 불태워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큰불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폭동은 살육과 유혈 사태를 초래하고 과부와 고아를 만들어 내며 가장 지독한 재앙처럼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폭동을 일으키는 인간보다 더 사악하고, 유해하고, 악마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앞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나 은밀하게 폭도를 두들겨 패고, 목을 조르고, 칼로 찔러야 할 것이다. 이는 미친개를 보면 반드시 때려 죽여야 하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만역 우리가 죽이지 않으면, 개가 우리를 죽일 것이다. 더불어 온 나라를 죽이고 말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그처럼 극악무도하고 섬뜩한 죄를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있다.”
농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루터파 제후들은 유리한 상황을 틈타 이른바 ‘군주 교회 간섭권’을 통과시킨다. 지방 영주들이 지정한 위원회가 각 교구를 점검하고, 통일된 예배 규정을 관철했으며,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영주의 권이글 보호하기 위해서 주교의 권력을 무력화하는 조치였다. 당시 여러 전쟁에 연루돼 있던 황제 카를 5세는 영주들의 요구에 반대하지 못해다.
카를 5세의 동생이자 훗날 그의 뒤를 잇게 될 페르디난트 1세가 1529년 슈파이어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모든 것을 무효화하는 명령을 내리고 루터 파 제후들에게 다시 가톨릭을 도입할 것으로 요구하자, 그들은 저 유명한 ‘프로테스타티오’로 이에 대응했다. 여기에서 ‘프로테스탄티즘’ 개념이 나왔다.
반면, 이듬해인 1530년에 열린 제국 의회에서는 카를 5세가 10년 이상 독일을 지배하던 종교 분쟁을 중재하려고 나섰다. 그가 보기에는 종교 분쟁을 끝낼 조건이 그럭저럭 갖추어진 듯 보였다. 프랑스와 전쟁을 끝낸 후 카를 5세는 이제 그 무엇도 거칠 것 없는 통치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코부르크 요새에 주둔하면서 필리프 멜란히톤을 대변자로 내세운 루터 파와 교황 파, 양 파벌 또한 타협에 응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다. 그들은 협상에 협상을 거듭했다. 멜란히톤이 루터 파의 교의를 요약한 글을 제시하자 황제와 교황 측 협상 대표자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러자 멜란히톤이 한 걸음 양보를 했다. 하지만 신학적인 견해 차 외에도 그들 앞에는 극복할 수 없는 또 다른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몰수한 교회 재산이 바로 그것이었다. 종교 개혁파 제후들은 한때 그들이 몰수했던 교회 재산을 이제 다시 돌려주어야 할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양심과 복으믈 근거로 들이대면서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 점에서는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카를 5세는 최후 시한을 통첩했다. 1531년 4월 15일까지 모든 교회가 옛 가톨릭 위계질서를 다시 도입해야 한다고 공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한 협박에 불과했다. 1532년 터키 군이 독일 국경 바로 앞까지 쳐들어 왔기 때문이다. 황제는 또다시 프로테스탄트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해졌다. 프로테스탄트는 슈말칼덴 동맹을 체결하고 황제를 지원하는 대가로 자신들의 통치 영역에서만큼은 독자적으로 종교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카를 5세는 이들의 요구를 수락했다. 단,일시적으로 말이다.
영주, 백작, 제국 기사들에게는 종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신하와 농노는 자신들의 영주가 선택한 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만약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바젤은 1450년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들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종교 회의 개최지(바젤 종교 회의 1431~1449)였던 이 도시는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종교 회의는 경기 부흥의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회의가 끝나자 바젤은 위기에 봉착했고, 주민 수도 대폭 줄어들었다. 시 당국과 주교 그리고 구성원 대부분이 수공업자 대표로 이루어진 대위원회는 경제 활성화 방안을 놓고 고심을 거듭해다.
1459년 여름, 바젤 시장인 한스 폰 플라흐슬란트는 교황으로 선출된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를 찾아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 자리에서 그는 새로 선출된 교회의 최고 수장인 비오 2세에게 세 가지를 청했다. 새로 열릴 종교 위원회 개최지를 바젤로 옮겨 달라는 것과 바젤에서 해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큰 시장을 열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것 그리고 대학을 설립해 달라는 것이었다. 교황은 첫 번째 요구엔 코웃움을 치면서 건성으로 넘겼고, 두 번째 요구는 들어 주려 해도 그렇게 할 수 가 없었다. 겨우 세 번째 요구에만 답을 보내왔다. 이렇게 하여 바젤 주교인 제후가 대학 총장이 되었다.
대학이 설립된 후 처음 20년 동안은 해마다 100여 명의 학생이 입학했다. 그러나 그 후 학생수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고, 15세기 말이 되자 대학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이 학생과 교수의 수 그리고 재정 면에서 바젤 대학을 현저히 앞질렀다.
글라루스 지역의 목사이자 인문주의자 협회의 존경받는 회원이던 츠빙글리는 1515년에 에라스무스를 알게 된다. 츠빙글리는 그를 매우 존경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1523년에 단절된다. 그는 루터와 논쟁을 벌였고, 어린이의 세례를 믿지 않는 재세례파에 맞서 투쟁하면서 그들을 죽음으로 위협했다.
1520년대 중반이 되자 바젤도 종교 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바젤은 오랫동안 중립을 고수할 수 있었다. 바젤은 평온함과 독립성을 갖춘 피난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누구나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믿어도 되는 자유가 허용되었다. 그러다가 1529년 2월이 되자 마침내 종교개혁의 열병이 이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무장한 시민이 시청으로 몰려가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인정할 것과 가톨릭 파 의원을 추방할 것 그리고 시의 법규를 개정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성난 군중이 교회로 몰려가 벽에 걸린 그림을 찢고, 조각품을 부수고, 모든 것을성당 앞에 마련한 대형 장작더미에 던져 태웠다. 프로테스탄트의 득세와 함께 바젤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생겼다. 프로테스탄트를 표방하는 도시에 가톨릭 소속 대학이 있는데다 그것도 대부분의 교수와 학생들이 떠나 텅 비어 버린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제 바젤 출신의 초기 종교 개혁가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한 외콜람파트의 시대는 1529년 4월부터 대학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신학과를 필두로 하여 대학 조직을 개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7자유학과는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는 신약과 구약 성서를 담당하는 교수진을 기본으로 하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교수들을 추가했다. 글을 언어로 이해하는 일에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를 가르칠 사람으로는 하이델베르크의 지몬 그리노이스가 발탁되었고 이미 6월부터 강의를 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어를 담당할 사람으로 그리노이스의 동료이자 친구인 뮌스터를 발탁하는 일은 무척이나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랬다. 처음에는 외콜람파트는 슈트라스부르크 출신의 신학자인 보니파키우스 볼프하르트를 채용하려 했다. 시 의회 또한 1529녀에 이미 외콜람파트의 제안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볼프하르트가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리고 1년쯤 지났을 무렵 거부 이유를 밝혔는데, 바로 뮌스터가 자기 대신 이 자리를 얻어 수도회 교단에서 탈퇴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에 덧부텽 그는 물질적인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뮌스터가 가톨릭 교단을 떠날 결심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볼프하르트는 강직한 종교 개혁가로 선교 열정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 바젤 사람들은 바로 이런 교수를 원했다. 사실 히브리어에 관해서라면 뮌스터가 더 유명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에 대한 그의 모호한 태도가 문제였다.
실제로 뮌스터는 1526년에 베아투스 레나누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교단에서 탈퇴해 다른 선한 기독교인들처럼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내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네, 아니 적어도 지금은 그리 유익한 일이 아닐 성 싶네”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이동할때에 라인 강의 배를 이용했는데 한쪽으로만 통행이 가능했다. 즉 물의 흐름을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만 갈 수 있었다.
짐마차같은 보통 마차는 한 시간에 6km, 최대 8km 정도, 종종 이보다 느릴 때도 있었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하루에 약 60km 여행할 수 있는 속도였다.
뮌스터가 받은 60굴덴의 연봉은 전체 교수들 가운데서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당시에는 일정한 식비를 내고 교수들의 집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사실 교수의 처지에서 볼 때 이것은 대학에서 받는 보수를 보충할 수 있는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부유한 학생들이 내는 돈이 결코 적잖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학에서 월급외에 농산물을 추가로 지급받는 교수들이나 한번 해 볼 만한 장사였다. (식사비 문제등)
뮌스터는 바젤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안하 결혼을 했다. 이때가 1530년쯤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도 바젤 시민인 공증인의 딸이자 인쇄업자 아담 페트리의 아내였던 아나 젤버와 말이다.
이 당시 많은 전직 수도사들이 교단에서 탈퇴하면 결혼을 했었다.
16세기부터 각 대학들은 교수들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그들에 관한 자료와 초상화를 전시하는 갤러리를 설치했다.
당시 바젤 대학에서는 언어와 신학 개관 이외의 과목은 가르치지 않았다. 1532년에 와서야 비로소 대학은 완벽하게 새로운 조직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런데 바젤 대학은..어떻게 보면 대학 자체로 보자면 매우 긍정적인 이중 체제를 갖고 있었는데, 대학 총장이 바로 바젤 주교 였다. 즉 종교 개혁을 표방하는 도시에서 가톨릭 제후가 대학 총장을 맡은 것이다. 비록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총장에게는 압려글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총장은 10년마다 한 번씩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바젤 대학의 특권, 그러니까 학생들에게 석사 또는 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대학의 권리를 반드시 새로 갱신해야 했다. 따라서 학위 수여와 관련한 모든 것이 그의 동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그 결과 바젤 대학은 종파 문제에서 결코 어느 한쪽 편을 들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통합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이런 사왕 덕에 바젤 대학은 가톨릭과 프로스테탄트, 두 종파 모두에게 인정받는 대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독일어권에서 이런 대학은 매두 드물었다.
들어오는 학생층도 국제화 되었다. 당시 수강 신청한 전체 학생 5600명 가운데 족히 5분의 1 정도는 프랑스, 네덜란드, 폴란드, 리투아니아, 영국, 이타리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온 학생들이어다. 또한 볼로냐, 파도바, 시에나 등 이탈리아 대학에서 공부하던 독일 학생들 상당수가 바젤 대학에 와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개 부유한 계층의 이 학생들은 귀족의 후예가 많았는데, 이들은 여러 필의 말과 시종을 거느리고 바젤로 왔다. 하지만 그들이 대학에 머무른 기간은 단기간에 불과해다.
대학 구조를 개혁하는 동안 시와 대학의 관계도 새롭게 정립되었다. 이제 대학 총장은 대학 내의 재판관은 유지하는 반면, 시의 재판권은 내놓아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동시에 대학은 강제 기숙사 제도를 폐지햇다. 그렇지만 가난한 학생은 여전히 기숙사에서 생활 할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에게도 무기 소지가 허용되자 학생과 시민 사이에 심심찮게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학생들은 수공업에 종사하는 직인, 그중에서도 특히 금속 세공사나 철물공과 정식으로 약속을 하고 날짜를 잡아 패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그 장소는 주로 페터스 광장이거나 중앙 다리였다.
1535년 12월 22일은 뮌스터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날이다. 이날은 바젤 시의회가 ‘학식 높은 신사 세바스티아노 뮌스테로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날이다. 뮌스터는 이날이 오기까지 6년을 기다렸다. 아니, 6년 밖에 기다리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도시들은 이주자에게 이처럼 빨리 시민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초반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뮌스터가 펴낸 <<성경>> 주해에 거센 비판이-프로테스탄트 측의 비판을 포함해- 가해졌다. 루터는 뮌스터가 유대 성서 해석자의 견해를 분명하게 반박하지 않았닥고 질책하는 한편, 이것을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뮌스터의 작업 방식을 가리켜 ‘유대화’라고 불렀다.
뮌스터는 1542년에 스위스 서부를 비롯해 마인 지방 일부와 슈바벤 지방을 여행했다. 그는 취리히에서 말을 다려 콘라트 펠리칸을 방문하고 난 다음 뷜라흐로 향했다. 그다음 슈바벤의 퓌르스텐베르크Furstenberg백작령에가서 빌헬름 베르너 폰 치머른 Wilhelm Werner von Zimmern 백작을 만났다.
프톨레마이오스와 멜라 그리고 솔리누스 같은 작가들의 저서는 물론이고, 스트라보, 플리니우스, 카이사르를 비롯해 호라티우스나 베르길리우스 같은 고대 거장들의 작품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시선을 끄는 점은 뮌스터가 이 문헌들의 내용에 얾나나 얽매여 있었고, 또 그가 이문헌들에 얼마나 무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는지, 그리고 독자를 상대로 하여 프톨레마이오스가 기술한 내용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납득시키려고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하는 점이다.
당시 유럽 사람들이 보기에 아프리카 대륙은 그저 인도로 향하는 뱃길을 가로막고 있는 쓸모없는 땅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었다.
아프리카 종족을 설명할 때는 브라질에 사는 종족을 설명할 때와 달리 정확한 정보나 관찰이 결여되어 있다.
아시아를 설명할 때는 주로 고대의 여행기를 참고로 했고, 아메리카 대륙을 묘사할 때는 분명히 최근 새롭게 여행기에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도 그것을 모두 소개하지 않았다.
뮌스터에 따르면 아시아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사람들은 유럽이 아시아보다 훨씬 면적이 작은데도 유럽과 아시아의 인구가 동일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고 하였다.
뮌스터가 아메리카 대륙을 설명하면서 제시한 내용은 아무리 보아도 너무 빈약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특히 가까이 있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으로 무역업과 금융업에 종사하던 벨저 가문 사람들이 이미 1528년부터 베네수엘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나갔기 때문이다. 벨저 가문은 카를 5세의 채무를 면제해 주는 대가로 오늘날 베네수엘라 땅의 많은 부분을 식민화하고 착취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했다.
황금 제국의 전설은 오느날의 콜롬비아 땅에 살았던 치브차 인디어 부족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에겐 해마다 조장을 선발해 그의 몸을 온통 황금 가루로 뒤덮는 풍습이 있었다.
경이로움과 혐오감이 한데 섞여 나타난다. 아니, 오히려 브라질 원주민에 대한 경이로움이 좀 더 우세하게 나타난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들의 용맹스러움은 찬양되는 반면, 그들의 행동에 이교저이라거나 잔혹하다거나 아니면 야만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예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끝부분에 가면, 그 사람을 먹는, 즉 식인 식사가 아주 맛이 좋았을 것이라는 대목까지 등장한다.
<<코스모크라피아>> 초반은 1544년에 출판되었고, 최종판은 1628년에 출판되었다.
그리고 1628년까지 총 7만 부가 팔려 나갔고 그 중 독일어판만 27쇄를 기록했다.
극동 아시아의 몇몇 나라에 대한 약간의 정보가 <<코스모그라피아>> 후기 판본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1628년에 출판된 <<코스모그라피아>> 최종판은 1800쪽이 너믄 방대한 분량이다. 여기에서 한국에 대한 10줄짜리 짤막한 소개를 볼수 있다.
“성능이 우수한 배” ,“다이코사마(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에 진출할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 나라를 공격했다.” (한국에 대한 부분에서)
이 후 한국은 쇄국 정책을 펼쳤는데, 이것이 이 나라가 널리 알려 지지 못한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지도층 인사들은 중국은 제외한 나머지 외부 세계와 접촉을 철저하게 차단하려 하였다. 그 결과 가뜩이나 빈약한 정보가 한층 더 빈약해지기에 이르렀다. 게르하르트 메르카토르는 물론이고 얀 얀소니우스 같은 저명한 지도 제작자 조차 1648년에 제작한 아시아 지도에서 한국을 섬으로 묘사했는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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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년 루프레히트Ruprecht 1세(붉은 얼굴의 루프레히트 공작)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설립했다.
1375년 카를4세는 팔츠의 궁성을 포기했으며, 1402년부터는 그곳에 새로운 거주 지역이 형성된다.
1459년 바젤 대학 설립
1487년 포르투갈 페드루 다 코빌하Pedro da covilha가 육로를 이용해 인도에 도착.
비텔스바흐의 궁정백 오트하인리히Ottheinrich
중세 후기에 ‘두려움’이란 말은 오늘날 통용도는 의미만이 아니라 ‘경외심’을 뜻하기도 하였다.
인문주의 서적 인쇄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인쇄업자 요한 프로벤...
마르틴 발트제뮐러는 보주 산맥 인근 생디에에 있던 로트링겐 공작 르네 2세의 궁성에서 생활하던 몇몇 학자들이 만든 단체인 김나지움 포스기아눔Gymnasium Vosgianum의 구성원 이다.
뮌스터는 1547년 한스라는 형제를 언급하며 그와 22년만에 만나는 것이라고 편지에 적고 있다.
16세기에는 포도주가 병이 아닌 통에 담긴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변질되었고, 그 때문에 방금 담든 포도주가 저장 포도주보다 훨씬 비쌌다. 심지어 3~4년 이상 된 포도주는 상해서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괴물Monstrum, 16세기에 “몬스트룸”이라는 개념은 더도 덜도 아니고, 바로 평범하지 않은 모양 때문에 라틴어 ‘monstrare'라고 불린 것들을 지칭하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