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권을 말한 맥주, 블랙 이즈 뷰티풀
▲ 2020년 5월 26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시위대가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피켓을 들고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체포 현장을 행진하고 있다.
"연대(連帶), 잇닿아 있는 띠"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한 흑인이 편의점에서 위조지폐 사용 혐의로 체포된다. 이미 수갑을 차고 있어 신체적 저항을 하지 않았음에도 연행을 거부한다고 판단한 경찰은 그를 바닥에 눕히고 무릎으로 목을 눌러 제압했다. 남자는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했지만 경찰은 듣지 않았고 결국 길바닥에서 사망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살해된 조지 플로이드. 그의 사망 이후 미네소타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발생했고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메시지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곧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단체들이 유색 인종 차별에 대한 자성과 성찰의 목소리로 연대하기 시작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대한 축구 선수들의 세리머니를 허용했고 영국 시위대는 17세기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에드워드 콜스톤의 동상을 끌어 내렸다. 케이팝 스타 BTS도 미국 흑인 인권운동 기관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 연대의 띠는 전 세계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까지 닿았다. 이들의 작전명은 '검은색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 맥주 색과 연결된 고혹적인 메시지였다.
맥주가 사람들의 가치를 공유하고 이들을 이어주는 끈이 될 수 있을까?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있는 웨더드 소울스 브루어리는 '그렇다'라고 답한다. 이 양조장의 대표이자 헤드 브루어 마커스 베스커빌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크래프트 맥주에서 유색 인종뿐만 아니라 소수자들을 지지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맥주 판매 수익금을 지역 인권 단체에 전액 기부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지역 크래프트 양조장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있는 양조장까지 동참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서로 다른 맥주를 만들지만 '크래프트'라는 철학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래프트 맥주에서 '크래프트'는 단순히 '수제'라는 의미를 넘어 지역성, 다양성, 지속가능성 같은 가치를 의미한다. 이 가치들은 좁게는 지역 재료나 다양한 맥주 스타일, 친환경과 같은 뜻이 되지만 넓게는 지역 사람과 문화나 인권과 환경 문제 같은 이슈도 포함한다. 마커스는 이같은 철학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양조장들이 자신과 함께해 줄 것이라 믿었고 '검은색은 아름답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작전을 시작했다.
'블랙 이즈 뷰티풀'
▲ '블랙 이즈 뷰티풀' 로고
우선 그는 '블랙 이즈 뷰티풀'이라는 이름의 임페리얼 스타우트(Imperial Stout)를 양조하고 레시피를 공개했다.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18세기 영국에서 러시아 왕실로 수출하던 스타우트에서 유래된 스타일이다. 당시 러시아로 맥주를 보내기 위해서는 높은 알코올과 홉 함량이 필요했다. 이 두 조건이 맥주를 외부 미생물로부터 보호해 산패를 막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임페리얼 스타우트도 이 공식을 따르고 있다. 높은 알코올과 함께 다크 초콜릿, 견과류, 쿠키와 같은 아로마와 높은 쓴맛과 묵직한 단맛을 갖고 있어 강렬하고 기품이 넘친다.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이 프로젝트를 위한 완벽한 스타일이다. 고혹적인 흑색과 진득한 바디감은 가볍게 마시기보다 천천히 음미하게 한다. 반면 다크 초콜릿과 견과류 아로마는 친숙하고 편하다. 이런 면에서 인권이라는 주제를 표현하고 다루기 위한 맥주로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선택한 것은 좋은 판단이다.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양조장은 웨더드 소울스가 제시한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만들어야 하며 '블랙 이즈 뷰티풀'이 디자인된 라벨을 사용해야 한다. 단, 맥주의 알코올 도수, 부가물, 캐릭터 등은 양조장의 철학과 개성에 따라 변경될 수 있으며 라벨의 하단에 자신의 브랜드도 넣을 수도 있다.
정체성을 유지하되, 자유로운 창작과 변형이 가능한 '크래프트 맥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맥주 수익을 지역 인권 단체에 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웨더드 소울스는 홈페이지(blackisbeautiful.beer)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검은색은 아름답다' 계획은 유색 인종이 매일 겪는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일환으로 양조 커뮤니티와 소비자가 함께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우리의 미션은 세대를 연결하고 맥주가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두를 포괄하는 공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맥주 속 긍정의 힘
▲ 제이 웨이크필드 '블랙 이즈 뷰티풀'
웨더드 소울스의 계획에 놀랍게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무려 22개국, 1021개 크래프트 브루어리가 화답했다. 이 중에는 영국과 벨기에 같은 유럽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같은 아시아 브루어리와 브라질 크래프트 브루어리들도 있다. 한국 브루어리로는 제주도에 있는 맥파이가 함께 했다.
내가 마신 '블랙 이즈 뷰티풀'은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제이 웨이크필드 브루잉 버전이다. 맥주의 묵직한 흑색과 10% 알코올은 벌써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 맥주에는 매력적인 부가물들이 함께 한다. 헤이즐넛, 커피 그리고 바닐라 빈은 임페리얼 스타우트와 찰떡궁합이다. 이런 부가물들은 임페리얼 스타우트가 가지고 있는 강한 모습을 차분하게 다듬어 좋은 음용성을 선사한다.
한 모금에 벌써 진득한 향들이 몰려온다. 80% 농도의 다크 초콜릿, 섬세한 커피, 잘 구운 견과류 향은 마치 멋진 슈트를 입은 신사와 같다. 알코올 풍미가 살짝 코를 찌르지만 부드러운 바닐라 향이 각진 모를 다듬어 준다. 쓴맛은 꽤 세지만 뭉근한 단맛이 뒤를 받쳐 마시기 나쁘지 않다.
매우 무거운 바디감으로 한 잔 이상은 마시기 힘들 것 같다. 그러나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여러 잔이 아닌 한 잔을 충분히 음미하기 위한 맥주다. 이 맥주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이를 지지하는 마음을 즐기기에 이보다 더 좋은 음료가 없을 테다.
인간은 도움을 주는 것을 넘어 생각과 가치를 공유하고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된 상태를 지향하는 '연대의 동물'이다. 난 그 다양한 방법 중에 맥주도 들어 있다고 믿고 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것이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처럼 맥주라는 끈을 통해 우리는 가치를 공유하고 정서를 교감할 수 있다.
맥주가 우리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연대의 도구가 된다면, 충분히.
윤한샘 기자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