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최석영-
4부 부활의 꿈 10회
지리산에도 봄이 와 양지에 분홍색 진달래가 피었는데 호랑골 할매네 집 뒷마당에 쌓인 눈은 쇠눈이 되어 녹을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오뉴월이 되어서야 녹아 없어질 참이다. 달구의 부러진 팔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도 마찬가지였고 수기의 발목은 배가 불러오면서 더 심하여 졌고 무릎으로 박에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달구 혼자 눈발이 녹은 산야를 돌며 나물을 뜯어 두 입이 먹고 살수는 없었다. 결국 배속에 애기를 가진 수기가 못해 부황이 들었다. 화전이라도 일구려면 한손으로 라도 일을 해야 했지만 부황 든 수기에게 풀이라도 뜯어다 먹이려면 하루 종일 산과 계곡을 헤매야했으니 한 손이 없다는 것은 의외로 큰 장애였고 고통 이었다. 수기 건사는 고사하고 제 목구멍도 채우기 힘들 판인데 추적추적 비마저 내려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는데 뒷마당 꽁꽁 언 쇠눈 속에 할매의 팔이 드러났다.
‘느그 아부지 먼 조상이 여그 옹구터 주인 이었는디. 저북쪽 어딘가에 무서운 나라사람들이 쳐들어와 전쟁이 나각고 무글거시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 괴기를 묵고 살아남아 할아버지 삼 남매를 나았드란다. 큰 딸이 인물이 곱상해 읍내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게 화가 되어 나라에서 공녀로 준담-성 잡아 가 불고 동생은 바다 건너 온 도적들 편들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그릇 구버 각고는 사람고기 끊고 살기 어렵다고 너메 집 날품팔이로 나서서 느그 아부지 대 까지 둘 아니믄 하나씩 대를 안이어 왔냐. 조상이 사람 궤기 무근거시 먼 자랑꺼리라고 너 한 테 꺼정 이 말을 전헐까 싶은디 느그 아부지 말이 사람은 어디서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살아남아서 좋은 세상 봐야 한다고 허드라. 그런께 느그 아부지 말은 이 앙당 물고 살으라고 이? 그 말이제 싶다.’
달구의 귓가에서는 어메 말이 맴도는데 손은 어느새 눈 속에 꽁꽁 얼어있는 할매를 파내고 있었다. 피가 그런 것일까? 굶주린 배때기가 눈깔을 뒤집은 것일까? 이집 씨는 사람 고기 파먹는 씨일까 싶지만 동서고금을 털어 난리 중에 사람 고기 안 먹는 지역이 없고 보면 흡혈귀니 사람 간을 먹는 구미호가 헛된 얘기 꺼리만은 아닐 것이다.
“미안허요 할매. 참말로 미안허요. 이런짓을 허믄 사람이 아닌디. 나가 그래도 사람 자식인디. 할매가 아니믄 우리가 죽소. 우리 한티 보시 좀 허쇼 얘? 할매…….”
먹지 못해 부황증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수기를 생각하면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목을 꺾어 잡아 먹일 판이다. 어린것이 원치도 않는 아이 때문에 부황증으로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살가죽은 부풀어 올라 퉁퉁 부어 눈조차 뜨지 못하는 몰골이니 차마 보지 못할 참상이다. 나이 들어 묏자리 봐둔 노인에게서 살점이 있으면 얼마나 있으랴만 꽁꽁 언 살점을 도려 끓는 물에 붙고 양지바른 나무에서 돋아난 새순을 뜯어다 죽을 끓였다. 기름지고 구수한 냄새가 정지(부엌)에 가득 찬다.
“오라비…… 머…머신가?”
“이-이? 응, 올무에 퇴깽이 한 마리가 걸랬드라고.”
차마, 차마 말하지 못하였다. 모르고 먹는 것이야 뭔 죄가 있을까. 죄가 있다면 달구 혼자서 다 짊어지고 가리라 맘먹는다.
“참말로? 참말로 퇴끼를 자븐 겨?”
“-이, 재주 좋재?”
남의 살이 뭐 맛있을까 만, 국물 한 그릇에 흐릿한 눈이 밝아지고 숨이 고른 것은 마른땅에 빗방울 적신 격일 것이다. 사나흘 국물이라도 먹으니 막혔던 똥구녕이 뚫리고 입맛 바짝바짝 마르던 소갈 병도 자자들어 장래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먹고 살까 싶어 일전에 인적이 있던 마을로 내려가 보니 여전히 그 할매가 소자녀석과 산다. 이래저래 물어보니 논과 밭이 없으면 화전이라도 일구면 먹을걸 구할수 있지 안겠냐 한다. 화전이라면 산에다 불을 놓아 곡식을 심어 먹는 일이고 농사 일로 날품을 팔았던 달구이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젊은이, 이거 귀한 씨종자이니 날짐승이 파먹지 않도록 잘 심어서 식량으로 쓰슈.”
아랫말 할매가 달구에게 건넨 것은 피와 조 수수와 강냉이(옥수수) 몇 알 이었다. 먹고 죽자 해도 먹을 게 없는 시절 꼭꼭 숨겨 두었던 씨앗을 주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고마운 마음에 절을 몇 번이고 한 달구가 집에서 가까운 인근에 산에 불을 놓아 화전을 일구고 씨를 뿌렸다.
“달구 오라비. 면목 없는 소린 줄 아는 디. 으논 헐 때가 없응께 이-? 얼라 띠기는 글럿고 얼라를 날라믄….”
작대기로 구멍을 파고 씨앗을 심던 달구가 맥없이 쪼그려 앉아 있는 수기를 쳐다본다. 가마터 굴뚝 구멍을 들여다보며 ‘달구 오라비?’를 부르던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어디로 가고 수치와 미안함에 주눅 든 눈빛만 남아 있었다.
“걱정 말어. 이 씨앗을 나눠 준 할매가 애 받아 주기로 했응께.”
수기의 눈이 빛났다. 비로소 안심하는 눈치다. 그러나 그것은 달구의 거짓말이다. 달구는 미처 아랫말 할매에게 수기의 해산을 부탁하지 않았었다. 솔직히 말하면 먹고 사는 일에 마음이 쏠려 수기가 애를 낳아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 인자 가서 부탁 드리-믄 되-제 뭐. 설마드라 안된다고 딱 잘라 말 허것어.’
부종도 빠지고 요기라도 하니 바깥출입을 하게 된 수기를 달구가 화전까지 부축해 나왔으니 이제 다시 집으로 데려가야 했던 것이다.
“달구 오라비 잠시만.”
한참을 걷던 수기가 한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합장을 하여 절을 하고 빌고 또 빌었다. 그곳은 호랑골 할매를 묻은 곳이다. 살을 바르고 뼈만 묻은 후 수기에게 위치를 알려 줬더니 멀리서라도 호랑골 할매의 무덤이 보이면 이리 합장을 하고 절을 하는 것이다. 달구가 죄책감에 또 끙-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달구는 아랫말 할매에게 이래저래 도움을 받은 처지라 가끔 아랫말로 내려가 일을 도왔다. 사람도 없고 일소도 없고 하다못해 나귀 같은 것도 없으니 팔 병신인 달구가 쟁기 끌어 밭을 갈고 지게를 져 거름을 내 주었다.
“할매- 지처 가 얼라를 가짓는디 한 쪽 팔도 못쓰고 사내고 혀서-”
“걱정 말고 염려 마슈. 산기 있거들랑 날 부르러 오슈-.”
선조가 승하 하고 광해군이 임금이 됐을 때 남원성을 지키다 순절한 남원부민의 공적을 기리고자 충신의 공적을 기리고 그 위패를 안치하는 일을 시작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권모기로 하여금 그 일을 맞도록 하였다. 상감의 조서를 받아든 권모기의 안색이 파르르 떨었다. 초로에 숨어 그저 밥술이나 뜬다면 문제될 일이 하나 없었으나 입신양명을 하고자 하니 나라에 공을 세운 공적이 없을 뿐 아니라 동료를 버리고 전장을 이탈 하지 않았느냐는 의심을 받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가세를 바쳐 지원한 창녕대군이 대권을 쥐지 못하고 보니 권모기로서는 끈 떨어진 연이었다. 어찌어찌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1등에 이름 석자를 올려 가문의 위를 세우기는 하였으나 땅이 좁고 보니 조카 철기에게 금은보화를 얻어 요로에 선물한 것이 또 화가 되어 돌아왔다. 철기라는 놈은 재화를 모으고 키우는데 재주가 있어 얼마 되지 않는 가업을 물려받아 갑부 소리를 들을 만큼 일으켰다. 기실 운봉 박씨와 어깨를 겨루어 볼만큼 땅을 일군 것도 철기의 도움이었다. 하여 모기가 생각하길 조카의 재물은 흠이 없을 줄 알았더니 가산을 지키고자 왜놈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였다 한다. 그렇게 지킨 재화를 모기가 가져다 쓰고 그것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이름이 올랐다. 그러니 말이 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으리 운봉 현감(윤경남尹景男)께옵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운봉 현감이? 꼬장꼬장한 운봉 현감이 또 무신 일로?’ 운봉은 7년간의 왜란으로 인민이 피폐하여 현을 폐하였다가 피난민이 돌아오고 지주들이 소작을 경감하여 주자 외부에서 인구가 이주하여 십년이 채 못 되어 거주민이 늘었다. 하여 몇 년 전부터 운봉현을 복원하여 현감이 부임 하였는데 그자가 윤경남이라는 자였고 윤경남은 권씨집 사람들과 잦은 마찰을 빚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윤현감께서 어찌?”
“대감께서 정유년 남원성 싸움에 순절한 분들의 충신록을 만드신 다고요?”
“허-어 운봉 현감은 귀도 밝으시오? 내 오늘 상감의 조서를 받았거늘 고개 넘어 운봉에 있는 현감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오다니…….”
“대감 하늘이 무섭지도 안소이까? 대체 이게 말이 되냔 말입니다. 남원성을 버리고 명나라 장수의 길잡이나 하던 대감이 저 남원성에서 순절한 분들의 공신록을 쓰고 사당 짓는 일을 하다니요.”
“이보시오 현감. 아무리 나라에 녹을 먹고 고을을 책임지는 현감이라 해도 선무원종 1등 공신인 나에게 이리 대 할 수는 없는 법이오.”
“흥, 선무공신? 개나 물어갈 선무공신을 가지고 나를 겁박이겠다. 이겁니까? 허나 알아 두시오. 왜놈의 길라잡이로 취한 재물로 얻은 그놈의 선무공신을 내가, 이 윤경남이가 바로잡을 테니.”
윤경남은 모계의 애자제자였다. 모계가 누군가 유성룡과 교분이 두터운 선비고 의병장이다. 선무공신 삼등 에 올랐으나 공록에 관심이 없는 그의 성정으로 공과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함을 서해 유성룡이 늘 아쉬워 할 만큼 꼿꼿한 사람이고 윤경남이 그의 제자다. 그리고 그는 진주성과 순절한 김시민 목사의 딸을 며느리로 맞은 자였다. 김시민, 그는 진주성을 지키다 성민들과 함께 순절 하였으며 그를 시종 들던 논개는 왜장을 끌어 앉고 죽었다고 하던가? 어쨌든 그는 죽어서라도 선무2등공신에 올랐으니 남원일대에서 그 집안을 겁박할 자는 없었다. 의와 명분 그리고 든든한 뒷배를 들고 자격 없는 공신록을 지우고야 말겠다. 으르렁 대니 모기로서는 머리가 아플 뿐이다. 그렇다고 상감이 교지로 명한 일을 명분 없이 거절한다는 것은 모기 스스로 과오를 인정하는 꼴이라 이 또한 마땅치 않았다.
-주상 전하
정유년 남원성 싸움에서 의로이 산화한 충신들의 행적에 대하여 소상히 알아보라 하신 명을 받자와 소신 권모기가 아뢰나이다. 소신이 정유년 남원성에서 함께 싸우던 일을 더듬고 살아남은 자들의 구전을 듣사와 충신 일곱을 가리고 그 행적을 적사옵니다. 소신이 남원 군민과 함께 죽지 못하고 오늘까지 살아남은 것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정유년에 순절한 충신의 넋을 기리라는 하늘의 뜻이었사오니 충신의 공적을 기록하여 주상전하께 상소하는 일을 끝으로 죽음을 청하오니 정유년에 순절한 동지들과 의를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정기원(鄭期遠)
자는 사중(士重) 호는 견산(見山) 본관은 동래. 고려 좌복사 목의 후예 증령의정 내산부원군 상신(象信)의 아들. 24세에 국자시에 선발되고 27세에 문과에 올라 승문원에 선발되어 주서(注書)가 되어 선조의 총애를 받아 사헌부 감찰에 특명되고 호조 형조 사예조좌랑을 두루 거쳐 사간원 정언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30년)에 사은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구원병을 요청했다. 그 후 병조정랑,안악현감 겸지제교,수선 등을 거쳐 좌우승지에 이르렀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양원(楊元)이 3천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접반사와 조도사는 모두 도망가고 명나라 군사만 남게 되었다. 양원이 대피할 것을 권유하고 피하니 그는 성에 남아 3일동안 성을 사수하였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성이 함락되자 의관을 정제하고서 북향사배하고 자결하였다. 선조는 예조판서를 증직하고 다시 좌찬성 효충장의선무원종공신래성군(效忠仗儀宣武原從功臣萊城君)을 내렸다.
이복남(李福男)
자는 수보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본관은 우계, 개국공신 억의 후손 준헌(遵憲)의 아들.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벗을 믿음으로 사귀었다.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1588년(선조21년)무과에 급제,선전관이 되었다가 전라병사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30년)에 전라병사에 재임명되면서 정유재란을 당했다. 그는 수천 의사들과 바닷가에서 왜장 석만과 소서행장의 군사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 때 남원성에서 명나라 원병장인 양원이 구원을 요청하자 병사들에게 진충보국(盡忠報國)할 것을 강조하고 정병 5백명을 골라 남원으로 향했다. 왜적이 포위하고 있는 남원성에 입성하여 많은 전공을 올리며 싸웠다. 그 뒤
중과부적으로 동문이 무너지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성과 함께 죽기로 맹세하고 주위에 시초(柴草)를 쌓아놓고 불을 지르게하여 오응정, 김경로, 이원춘 등 여러 장수와 불더미 속에서 태연히 죽었다. 이 광경을 본 부하들이 죽기로 싸우다 모두 전사하였다.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이 증직되고 시호(諡號)가 내렸다.
임 현(任 鉉)
자는 사중(士重) 호는 애탄정(愛灘亭)
본관은 풍천(豊川), 몽신(夢臣)의 아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활쏘는 재주는 익히지 않았는데 능란한 솜씨였다. 1583년(宣祖 16년) 문과 내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가 되었고 승정원 주서를 거쳐 성균관 전적, 예병양조 정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持平) 등을 거쳐 함경병사에 이르렀다. 또 장연현감 평안도도사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다가 신묘사화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정유재란 때 원병장 양원이 문무겸비한 대관과 남원에 같이 가기를 원하니 그를 南原府使에 특명하였다. 남원성에 들어 임전태세(臨戰態勢)를 갖추고 군졸들을 격려하며 대비하였다. 8월 12일 남원성이 완전 포위되니 양원이 도망치려하자 성을 사수할 것을 독려하고 성과 같이 죽을 것을 맹세하였다. 중과부적하여 성이 함락되자 의관정제(衣冠整齊) 북향사배하고 적을 꾸짖다 적의 칼날에 맞아 순절하였다.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시호와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김경노(金敬老)
자는 성숙 본관은 경주(慶州), 원의 아들, 남원군 송동면 두곡리 출생. 어려서부터 용력이 출중하고 총명하여 열심히 경전을 읽었으나 중년에 안질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 1576년(선조9년)에 무과에 급제, 부장을 거쳐 비변랑관 전라군기경차관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여러 번 功을 세워 황해도방어사, 전라도방어사 등이 특명되었다. 정유재란 때 全州에 머물어 있었는데 북상하는 왜적을 막기위해 담양(潭陽) 금성산성으로 달려가 왜군을 대기하고 있었다. 한편 전라병사 李福男이 양원(楊元)의 구원 요청으로 남원성을 향하고 있었는데 순창군 동계면 감밭(목시)에서 그와 합세하였다. 이복남과 함께 남원성에 입성하여 북문을 지키며 분전하였는데 중과불적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주위에 시초(柴草)를 쌓아 불을 붙이게 하고 그 속에서 태연히 여러 장군들과 함께 죽었다. 이 광경을 본 부하들이 죽기로 싸우다 모두 전사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황성판윤(黃城判尹)에 증직되었다.
이덕회(李德恢)
본관은 용인. 무과에 급제하여 1597년(선조30년)에 남원부 판관이 되었는데 그 때 정유재란을 당하였다. 관청에 비축해 둔 모든 재물을 처분하여 소와 술을 사 매일 장졸들을 배불리 먹이고 남원성을 사수할 계책을 도모했다. 8월 12일 남원성이 왜적들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되자 몸소 판삽을 잡아 사병들과 노고를 함께하여 사기를 북돋았다. 4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전을 벌였는데 전세가 기울어 중과부적으로 성의 함락되자 함께 순절하였다.
이원춘(李元春)
본관은 경주, 어모장군 현근(玄根)의 아들 어려서부터 용력이 출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무과에 올라 북도 변장이 되었고 다시 군자판관(軍資判官)을 거쳐 구례현감(求禮縣監)에 이르렀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갈 때에 구례고을 사람들이 흠모하여 소청하니 기복(상주로 벼슬하기를 명함)하기를 특명하니 다시 구례현감이 되었다. 이 때 정유재란을 당하여 지리산 석주진(石柱鎭)의 길목을 막고 복병을 세워 죽이고 사로잡은 왜적이 상당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이 각자 도망하여 단독으로 왜적을 막기는 힘이 모자람을 알고 구례읍성의 창고를 불태우고 남원성에 입성하여 싸우기로 하였다. 앞밤티(前栗峙)에 이르러 보니 그 동안 따르던 군사는 모두 도망하고 오직 현감인(縣監印)을 지니고 따라온 손공생(孫貢生)뿐이었다. 공생과 같이 입성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남원성과 함께 순절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오흥업(吳興業)
자는 백현(伯顯) 호는 송은(松隱) 본관은 해주, 기복(麒福)의 아들. 남원 말천방 목과동에서 출생. 성품이 영매하고 마음이 강개하여 어려서부터 장부의 기지가 있었다. 정유재란을 당하여 창의(倡義)하여 군향도유사의 임무를 맡고 鄭期遠, 李福男, 任鉉, 金敬老, 申浩, 李德恢, 李元春 등과 협력하여 성을 사수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노친에게 순절할 뜻을 전하니 답(答)하길 ‘....忠과 孝는 두 가지를 온전히 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어찌 私를 돌보고 충성을 다하지 않을까’라고 말하고 북향사배하고 다른 장수들과 함께 화약고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통정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이 증직되었다.
양대박(梁大樸)
호는 청계(靑溪)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본관은 남원(南原) 牧使 의 의 아들. 성휘(成渾)의 문인. 문장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다. 1572년(선조5년)에 학관으로 제술관에 기용되고 종부사 주부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50명을 모집하여 단양(端陽)에서 고경명(高敬命)을 만나 맹주(盟主)를 삼고 5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全州에서 義兵 2천명을 모았다. 모병(募兵)의 피로로 발병하여 진산의 진중(陣中)에서 세상을 떠났다. 글씨에도 뛰어났고 특히 임란시 창의격문(倡義檄文)은 문장의 유려함과 기개의 고결함으로 이름 있다. 1796년(정조20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겸병조판서판(兼兵曹判書判) 의금부사(義禁府事)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
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 지훈련원사 오위도총 부도총관의 증직과 그의 아들 경우와 함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박계성(朴繼成)
자는 이술(而述) 호는 초곡(草谷) 본관은 죽산(竹山), 참봉 세훈(世勳)의 아들. 남원 수지면 호곡리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성리(性理)에 전심하였고 효성 또한 지극했다. 친상에 3년을 여묘(廬墓)하며 정성을 다하였기에 그 효행이 알려져 참봉이 되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가재를 기울여 병기를 제조하고 군량과 의병을 모아 아우 승선(承成)과 종제(從弟) 언정(彦貞)을 시켜 고득뢰(高得賚) 의병소에 보내고 전공을 세워 충찬위 사직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南原으로 적이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창의 모병하여 300여명을 이끌고 구례(求禮) 석주(石柱) 산동(山洞) 등지의 길목을 지켰다. 남원성이 포위되고 부사 임현(任鉉)이 원병을 요청하자 율치(栗峙)에 이르러 추격해 온 적을 맞아 싸웠다. 또 숙성령(宿星嶺)을 넘어 오는 적을 맞아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적탄에 맞아 순절했다. 이 때 그 부인이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노비를 불러 어린 자식을 부탁하고 자결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가 증직되었다.
이용제(李容濟)
자는 여우(汝優) 호는 후주당 본관은 전의. 1591년(선조24년)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고 비변을 겸하였다가 곧 순변사로 옮겼다. 그 뒤 사헌부 감찰을 거치고 군기사 부정을 거쳐 흥덕현감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兵使 李福男이 격문(檄文)을 보내니 달려가 성을 방어하였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될 때 다른 장수와 함께 순절하였다.
오응정(吳應井)
자는 광포(光甫) 호는 송곡(松谷) 본관은 화순(和順), 경연(景連)의 아들. 무안 석진면 가처동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기골이 준걸(俊傑)하였고 효성도 지극하였다. 특히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다. 임진왜란 때 내금장(內禁將)으로 호종(扈從)의 공이 있어 도총부 도사(都事)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전라방어사(全羅防禦使) 겸 문안사(問安使)가 되어 남원성에 다다르니 이미 왜적에게 성이 포위되어 있었다.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포위망을 뚫고 입성하여 성의 사수에 진력하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될 때 순절하였다. 부인 張씨는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오윤업(吳胤業)
자는 중현(仲顯) 호는 설강(雪岡) 본관은 해주(海州), 지평(持平) 흥업(興業)의 아우. 문장이 숙성(夙成)하였으나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정유재란 때 兄 흥업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남원성에 입성하여 순절하였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증직되었다.
마응방(馬應房)
자는 정숙(靖叔) 호는 용암(龍菴) 본관은 장흥(長興), 희정(希禎)의 아들. 어려서부터 품질(稟質)이 강과(剛果)하고 기식(器識)이 굉심(宏深)하여 사우(士友)들의 추중(推重)한 바 되었다. 음사(蔭仕)로 군기사참봉(軍器寺參奉)이 되었다가 뒤에 흥덕(興德) 진안현감(鎭安縣監)을 역임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용정(龍井) 내동(內洞)에 서재를 짓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정유재란을 당하여서는 남원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이 74세임에도 불구하고 창의(倡義)하여 남원성으로 달려가 성을 사수하다 순절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官)이 증직되었다.
황대중(黃大中)
초명(初名)은 유(萸) 자는 정숙(正叔) 본관은 장수(長水). 윤정(允禎)의 아들. 어려서부터 영오(潁悟)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모병(母病)에 허벅지 살을 베어 공진(供進)하는 효행을 보여 천거(薦擧)되어 정능참봉(貞陵參奉)으로 불렀으나 부모 공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별사장사(別沙壯士)로 뽑혀 여산(礪山)에서 공을 세우고 왕이 몽진하여 개성(開城)에서 평양(平壤)으로 갈 때 종묘신주(宗廟神主)를 봉환(奉還)하는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진주(晉州)에서 동문(東門)을 지키다 성이 함락하여 모두 전사하고 200여인만 남았는데 그도 자결하려다 살아남아 왜적과 싸울 생각으로 죽지 않고 이순신에게로 달려가 한산도에서 공을 세웠다. 남원성이 위급해져 군사 200여 인을 이끌고 입성하여 성을 사수하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성이 함락되자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 선영재배(先塋再拜)한 뒤 굳게 앉아서 적탄에 조용히 순절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문기방(文紀房)
자는 중률(仲律) 호는 농제(聾齊) 본관은 남평(南平), 형(炯)의 아들. 어려서부터 용력(勇力)이 출중하여 1579년(선조12년)에 무과에 올라 벼슬이 남해현령(南海縣令)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수문장(守門將)으로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 밑에서 중군(中軍)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될 무렵 달려가 아우 명회(明會)와 더불어 용감히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증직되었다.
형 연(邢 璉)
자는 대옥(大玉) 호는 제안재(濟安齋) 본관은 진양(晋陽), 사보(士保)의 증손(曾孫). 용맹이 영개(英槪)하였고 문과(文科)를 겸비하였다. 부상(父喪)에는 3년 여묘(廬墓)하였다. 임진왜란 때 천거되어 나갔다가 병을 얻어 도중 집에 돌아왔다. 정유재란 때 창의(倡義)하여 남원성이 함락될 무렵 입성하여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조익겸(趙益謙)
호는 송탄(松灘) 본관은 옥천(玉川), 참봉(參奉) 세걸(世傑)의 아들.이이(李珥)의 문인. 벼슬은 운량관(運粮官)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의(剛毅)하고 재주가 문무를 겸하였으며 부상(父喪)에 3년 여묘(廬墓)하여 효행으로 이름 있었고 모상(母喪)을 당하여서도 3년 득묘(得墓)하였다. 정유재란을 당하여서는 창의하여 가재(家財)를 기울여 군량(軍糧)을 사들여 이걸 남원성내에 보내고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을 만나 임진년에는 노모가 살아 계시어 차마 전장에 나갈 틈이 없었는데 이제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셨는지라 협전(協戰)을 다할수 있다 하고 남원성을 사수하다 순절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정민득(鄭敏得)
자는 자구(子求) 본관은 진주(晋州), 복일(復一)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창의(倡義)하여 동지 수십 인과 함께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막하(幕下)에 들어가 성을 사수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사복사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박기화(朴起和)
호는 백헌(栢軒) 본관은 밀양(密陽), 경공(慶恭)의 아들. 함양(咸陽) 출생. 이현보(李賢甫)의 문인. 성품이 굳세고 절개(節槪)가 곧아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학식이 고명(高明)하였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위급해짐을 듣고 평소 안면이 있는 임현(任鉉)의 막하(幕下)에 들어가 군기감관(軍器監官)이 되어 성의 사수를 맹세하였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병기를 적의 손에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투신하여 폭사(暴死)하였다.
강덕복(妻德福)
자는 도관(道官) 호는 인암(仁菴) 본관은 진주(晋州), 민첨(民瞻)의 후예.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 견정(堅貞)
하고 재지(才智)있는 사람을 발탁할 때 선발되어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이 되고 남원 숙성령(宿星嶺)을 방어하여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창의(倡義)하여 의병을 이끌고 숙성령을 지켰는데 남원성이 포위되자 입성하여 싸우려 했으나 입성할수 없다 돌진하여 많은 왜적을 베이고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 부인 남원양씨(南原梁氏)는 남편이 죽자 남편의 시신 옆에서 자결하였다. 뒤에 가동(家 ) 충남(忠男)이 시신과 궁검(弓劒)을 거두어 장사지내니 사람들이 이 골짜기 이름을 궁장동(弓藏洞)이라 하였다.
태 색(太 穡)
자는 군보(君寶) 호는 공북재(拱北齋) 본관은 합계(陜磎). 응천(膺天)의 아들. 10세에 모상(母喪)을 당하여 성인(成人)과 같이 하였고, 노부(老父) 공양에 정성과 효도를 다하여 효행으로 이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 견정(堅貞)하고 재지(才智)있는 사람을 발탁할 때 선발되어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종제(從弟) 우(瑀)와 재종질(再從姪) 귀생(貴生),시경(時慶) 등 40인을 독려하여 창의하고 가재(家財)를 기울여 군량 300석과 4종질을 거느리고 남원성
에 입성하여 분전하다가 오숙질(五叔姪)이 모두 순절하였다.
손공생(孫貢生)
본관은 밀양(密陽). 이름은 미상(未詳). 구례현감(求禮縣監) 이원춘(李元春)의 통인(通引)으로 그 직급을 따라
공생(貢生)이라 호칭하고 있다. 정유재란 때 구례현감 이원춘이 남원성의 위급함을 듣고 남원성에 입성할 때 관인(官印)을 가지고 함께 갔다. 남원성이 함락의 위기에 몸을 피할 것을 말하니 ...천생(賤生)도 역시 나라를 위해 죽을 것... 이라 하며 인궤(印櫃)를 허리에 차고 최후까지 분전하다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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