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는 그 지형적 조건 자체가 강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초기 고구려의 성장 과정은 주변 여러 부족은 물론 세계 최대강국인 한나라와 싸워 이기는 과정이었다.
광개토 대왕 시대에 이미 한은 멸망한지 오래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5호 16국 시대입니다.
게다가 이런 소스가 분명히 존재하죠.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17쪽 :
고구려는 지리적 조건 자체가 강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고구려의 초기 성장 과정 자체가 주변 여러 부족은 물론 세계 최강대국 한나라와 싸워 이기는 과정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2) 소수림의 황비와 그 외척 무리들에게 질시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뭐 그럴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거 참, 이 경우는 어떻습니까.
유리왕의 총애를 잃은 화희의 아들로 외척 지지기반이 약한 해명태자는 유리왕의 정궁인 송씨의 친정인 비류부의 질시를 받는다.
그리고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제가 요약한 것이라 그다지 좋은 내용은 아닙니다만. 나름대로 고등학교때 열심히 읽던 만화였죠.
형민우, 태왕 사신기 중 :
담덕은 소수림의 황비 기황후와 외척 세력의 미움을 사며 소수림왕이 서거하자 정적들의 누명을 쓴다.
(3) 주안은 첫눈에 담덕에게 정을 느낀다. 그는 4백년 전 하늘을 향해 활을 쏘아올리던 주몽과 같은 미소를 가졌다.
우리 무휼왕은 주몽과 꼭 같다. 마치 그 주몽이 저 하늘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듯 싶구나 (8권 199쪽) 부터 시작해서, 무휼과 주몽의 연관관계를 말하는 부분이 몇몇 군데 되지요. 기억나시는 분들은 좀 추가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백호는 고구려 13대 서천왕의 아우 시우로 태어났었다. 당시 시우는 서천왕을 도와 발해의 대부분 영토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백호가 아끼던 서천왕의 둘째 아들 돌고가 그 형 상부(훗날 봉상왕)의 시기를 받아 역적으로 몰려 죽어버리자 인간에게 염증을 느끼고는 깊은 잠에 들어버렸다.
이건, 제가 예전에 서천왕의 아들인 돌고와 상부 이야기를 짤막한 소설로 써보려다가 말았던 적이 있어서 기억이 나는데요. 서천왕의 부친 동천왕은 관나부인에게 1남, 원비에게 서천왕, 달가, 일우, 소발의 4남을 얻었으나 관나부인이 사사된 이후 그 아들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국군 달가는 숙신을 정벌한 장수였으나 봉상왕 즉위 후 사사됩니다. 돌고는 달가가 죽은 다음 해 사사되었죠.
만에 하나 시우가 관나 부인의 아들이라고 해도, 관나 부인이 원비와 반목하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서천왕과 사이가 좋을 수 있을지..... 글쎄요, 제 상상력으로는. ^^;;;;;
고구려는 동천왕 때 발해만을 끼고 있었으나 관구검의 침입으로 오히려 발해만을 빼앗깁니다. 서천왕 때에는 서쪽으로 요하까지가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발해만이 아니라 숙신 지방을 정벌하였다고 알고 있는데요. 저기서 말하는 발해가 발해만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뭔가 방향감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구도는
해명태자가 유리왕의 손에 죽음을 맞은 뒤 백호인 괴유는 때를 기다리며 깊은 잠에 빠진다.
의 구도와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둘다 백호니까요.
(5) 왕위계승 서열에서 한참 아래였던 관계로 어려서부터 왕위 따위는 생각도 안하고 자라났다.
고구려는 고국천왕 때 까지 형제상속이 기본이었으며, 소수림왕에게 후사가 없으므로 소수림->어지지->담덕의 순서로 담덕의 계승 서열은 매우 높은 편이었죠. 그런 담덕이 즉위식에도 칼이나 만들며 놀고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 정권이 걱정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휼은 3남으로, 위로 도절태자(가 죽고) 다음으로 해명태자가 이미 있었죠. 그러니 왕좌따위 생각지 않고 잘 살수도 있었을 겁니다. 형들이 그리 줄줄이 죽어나갈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니, 그 점은 해색주도 마찬가지일까요. --;;;;; 누가, 4남인 해색주가 왕까지 되실 줄 알았겠습니까.
(6) 고국양왕이 된 어지지는 늘 몸이 약했던 탓에 마음도 심약한 인물이었다.
물론 만년에 병으로 드러누워 담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는 했습니만, 고국양왕께서는 즉위 이듬해인 385년 후연을 공격하고 현도성을 함락시켰으며 포로를 1만명이나 잡아오기도 했다 이겁니다. 몸은 모르겠지만 마음이 약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군요.
이건 오히려 태왕북벌기와 일치하는 코드가 아닌가 싶은데요.
소수림왕과 어지지는 병약하고 소심하여 외척 세력에 휘둘린다.는 느낌의 묘사가 있으니까요.
바람의 나라에 등장하는 유리왕 역시, 영웅이었던 아버지 주몽에 대해 컴플렉스가 남아 있어, 아들에게 폭군처럼 굴면서도 동시에 심약한 인물로 등장하죠.
(7) 순도와 아도의 무리는 고구려를 각기 자국의 이익에 맞게 움직이려고 온갖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병약한 고국양왕의 후계인 담덕을 자신들의 뜻대로 키우고자 온갖 계책을 꾸민다.
승려무리들은 뒤늦게 담덕을 제거하는 쪽으로 뜻을 모은다.
먼저 순도와 아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아도 : 위나라 사신 아굴마와 고구려 여자 고도령 사이에서 태어나 위에서 유학하였으며,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순도 : 천축 혹은 위나라 출신으로 불상과 경문을 고구려에 가지고 귀화하여 불교를 전했다.
나름대로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한, 막 말해서 전도사고 제대로 말해 진리를 전파하러 애쓰신 훌륭한 스님들이시죠. 물론 바람의 나라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시대입니다. 초반에 불교관련 단어가 몇개 나옵니다만(도솔천, 삼도천), 후반에는 불교 관련 단어는 찾아볼 수도 없죠. 그만큼 단어선택에까지도 시대고증에 노력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잠시 버닝한 팬의 모드)
하지만 뭐가 되건, 저 스님들이 고구려의 내정을 좌지우지하며 왕자까지 죽이려 하였다고 말씀하신다면, 불교계의 반발을 많이 사실 텐데요. 자신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이쪽과 비교하시면 어떻습니까?
부여는 끊임없이 고구려의 왕자들을 죽이려 하며, 도절은 요절하고 해명은 유리왕의 명에 따라 자결하였으며 무휼 역시 죽음의 고비를 넘깁니다. 비류부는 비류부 출신 왕비가 낳은 무휼을 통해 비류부의 부흥을 꾀하죠.
(8) 전진이 멸망한 이후 성립된 후연, 서진, 후량들이 중국의 북방과 서방에서 세력을 확대하였고, 남방의 맹주 동진은 꾸준히 영토를 확장해오고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또한 산동과 요서 지역을 차지한 백제가 가야와 왜 등을 끌어들여 연합세력을 형성하여 고구려에 대항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길게 말 안하겠습니다.
박영규, 웅진출판 신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1997년본 299쪽, 300쪽:
전진이 멸망한 이후 성립된 후진, 후연, 서진, 후량 등이 중국의 북방과 서방에서 세력을 확대하였고, 남방의 맹주 동진은 꾸준히 영토를 확장하며 신진 세력과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한반도에서는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 백제가 가야와 왜 등을 끌어들여 연합세력을 형성하고 고구려에 대항할 움직임을 보였고, 신라는 강성해진 고구려에 조공하며 백제의 연합세력을 경계하려 하였다.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이죠? ^^
(9) 그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낸 철기부대가 이후 죽음의 철기부대로 불리게 될지는 그들도 몰랐다.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라는 책을 펴보니, 동천왕 시절에 이미 고구려 철갑기병은 관구검과의 전투에서 그 위용을 자랑했다는 말이 나오는군요. 동천왕은 저 앞서 언급한 서천왕의 아버님이십니다. 이들의 신이시여 역사왜곡!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10) 395년 패수 대전에서 진무가 이끄는 3만 이상의 백제 군대는 담덕이 직접 이끌고 온 7천의 정예병에게 대패하고 만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만 나와 있습니다.
4년(395) 봄 2월에 살별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없어졌다. 가을 8월에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이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
여기까지는 잘못된 거 없죠.
그런데 저 3만이라는 숫자가 어디에서 나왔느냐가 문제입니다.
위에 위에 있는 게시물이 신경쓰여 찾아보니, 3만 대군이라는 수치는 박영규, 웅진출판 신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1997년본에 나오는 추정치더군요.
참고로, 그 책은 역사에 문외한인 저도 한권 두고 보는, 일반인이 읽기 편하게 나와있는 역사책입니다. 1년간 연구하신 분이라면 저 3만이라는 숫자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직접 계산하신 것이라면, 근거를 들어주세요. 설마 이번에도 우연은 아니겠지요. ^^
(11) 화약을 이용한 대포를 만들어내어 수의 함선을 증강시킨다.
두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화약이 국내에서 제작된 것은 고려시대 최무선 이후입니다. 아니, 세계사적으로도 화약의 제조시기는 물론, 대포의 제작시기까지도 무시한 이 대단한 설정으로 외국에 수출하면요......
중국에서 우리나라 역사는 저 시대까지도 신화 및 판타지 시대인 줄 알고 덥석 먹으려고 들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역사왜곡은 支那인들이나 하는 거라니까요.
(12) 철광촌에서 자라나 가장 훌륭한 철을 만들어내는 제련법을 개발해냈다.
BC 15세기에 이미 소아시에아에서는 연철을 목탄과 접촉시켜 탄소가 화합된 강철을 제련했고, 이는 민족 이동경로를 따라 전파되어 우리 민족에는 BC 4~BC 3세기부터 철기가 들어와 BC 2세기 위만조선 시대에 이미 강철을 사용하였습니다.
BC 1세기 말 한군현의 설치와 함께 한반도는 본격적으로 철기시대가 발달하여 부여, 고구려,옥저, 동예 등의 북방지역 부족국가와 한반도 남방으로 전파되었죠. 변한의 철 제련 유적과 가야의 철기 문명은 광개토대왕 시대 이전이며, 광개토 대왕 시대에는 이미 금관가야가 세를 잃고 대가아갸 세를 잡은 시기입니다.
물론 송작가님은 부처님이 아니시고, 저는 그 제자인 가섭이 아니니, 염화시중의 미소로 보충설명을 알아먹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설명을 더 붙여주시던가요......
첫댓글 보면볼수록 이 굉장한 역사왜곡에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정말로 훌륭하시기 그지없으십니다.
해명태자님 정말 대단하세요.
오옷.. 어쩌면 화약을 사신의 술수로 둔갑시킬지도 모릅니닷~! 수고 많으십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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