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스페인 여행은 하나투어 패키지로 6박 8일이다.
인천-이스탄불-마드리드(1박)-톨레도-마드리드(1박)-푸에리토 라피세-코르도바-세비야(1박)-론다-그라나다(1박)-발렌시아(1박)-
몬세라토-바르셀로나(1박)-이스탄불-인천이고 스페인에서는 버스로 이동하였다.
스페인 관광은 스페인의 역사 부터 공부 한 후에 시작하면 이해가 빠를거 같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민족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로마 시대 옛 이름인 히스파니아는 로마제국의 일부였는데,기원전 210년에서 205년 사이 부터 이베리아 반도는 500년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중세 초반에는 게르만 족의 지배를 받았고, 그 시기 이후에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이끄는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연합군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피레네 이남의 안달루시아(포르투갈, 스페인)를 정복했다.
이때부터 781년 동안 스페인 지역에서 이슬람 왕국이 존재하였다.
1469년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의 결혼으로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성립됐다. 두 사람의 공동 왕국 출범 이후,
스페인은 1479년 카나리아 제도를 복속하고 1492년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이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781년 간의 스페인 내 무슬림 지배를 종식시키고
기독교도들의 왕국이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였다.
1492년은 스페인에 여러 의미를 지닌다. 통일을 이룬 해일 뿐 아니라 컬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하게 된다.
이후 절대 왕정과 식민지 개척을 추진하여 스페인은 가장 강대한 제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후 전쟁과 내분 끝에 이러한 전성기는 영원하지 못했으며,
스페인은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에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프랑코 독재 정권은 유럽의 마지막 군사 정권으로 불리는데, 집권 후 좌파 탄압, 비밀경찰을 통한 통제 등 독재 정치로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5년에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스페인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영단으로 스페인에서는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시작됐고. 고도의 경제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1986년에는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마드리드는 지리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정중앙에 있다.
메세타라고 하는 해발 635m의 기복이 진 고원에 자리잡고 있어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입지한 수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마드리드가 수도로 정해진 것은 16세기 스페인의 왕인 펠리페 2세와 그 후손들의 중앙집권적 통치의 결과이다.
즉 마드리드가 수도로 선택된 것은 전략적·지리적·경제적으로 중요해서가 아니라 이 지역이 당시 반왕권적 세력과 연계가 없었다는 점이 보다 주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맨 처음으로 외관이지만 왕궁 부터 본다.
같이 사진을 찍으려면 2유로다.
시내에는 여러 조각과 함께 분수대가 있다.
까만 지붕의 건물이 마드리드 역이다.
시내투어 버스를 여러곳에서 볼수 있다.
유럽 3대 미술관인 프라도 미술관이다.
프라도 미술관의 기반이 된 컬렉션은 15세기 스페인 왕실에서 시작되었다.
왕들이 취향에 따라 수집한 작품들, 왕실 화가의 그림, 그 밖에도 왕실 소유의 건물에 걸려 있던 작품 등이 기반이 되어
1819년에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3천 개 이상의 회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프라도 박물관은 단연 세계적인 수준의 규모를 자랑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프란시스코 고야, 엘그레코와 주세페 데 리베라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그랑 오달리스크가 앵그르의 전시회 안내 작품으로 보여 주고 있다.
오달리스크란 터키황제 슐탄의 잔 시중을 들던 후궁 또는 여자 노예들을 말한다.
오달리스크를 주제로 한 작품들로는 프랑스의 근대 화가 앵그르 Ingres 가 그린 '그랑 오달리스크'가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등을 돌린 채 뇌쇄적인 자세로 뒤돌아 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국적인 분위기와 함께 오달리스크 그림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아름답다.
미술관 입구에는 고야의 동상이 우리를 맞이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활동한 스페인 화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다
보통의 화가들과는 달리, 그는 귀족층의 후원을 얻었고 그것을 유지해가면서 평생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1774년에 고야가 왕립 태피스트리 제작소에 들어간 일은,
이후 그가 일생동안 네 명의 전제군주들의 섬기게 되는 왕실과의 오랜 관계의 시작이 되었다.
고야의 초기 작품들은 말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어두운 화풍과는 대조적으로, 산뜻하고 밝은 느낌을 주었다.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 재차 낙방하게 되자, 고야는 마드리드를 떠나 1770년에 로마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독일인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를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멩스는 산타 바르바라 왕립 태피스트리 제작소의 밑그림 작업을 위해,
고야를 1774년에 마드리드로 부른 인물이다. 이 일을 계기로 고야는 궁정에서 일하게 된다.
고야는 섬세하고 화려한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이에 대한 귀족들의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대담하고 빠른 붓질로, 초상 인물들의 감정 상태뿐만 아니라 부와 권력까지도 묘사해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고야의 그림중 카를로스의 4세의 가족,누드 마야부인과 옷입은 마야부인등이 있다.
난청과 격동적인 시대 상황으로 고통을 받던 고야는 말년에 어둡고 기괴한 작품을 다수 제작 한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등이 말년 작품이다.
1층 입구에는 호세 알바레스 쿠베로의 "the defence of zaragoza" 조각품이 전시 되어 있다.
다른 작품들은 촬영이 금지 되어 머리속에 넣어 둔다.
화장실 칸막이가 특이하여 찍어 본다.
점심은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 건물에 있는 중식당에서 한다.
레알 마드리드 축구팀의 홈구장은 마드리드에 있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이며 수용인원은 8만 354명이다.
팀의 애칭은 메렝게춤을 뜻하는 메렝게스, 흰색을 뜻하는 블랑코스이다.
중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경기를 관람 할수가 있는데 우리는 경기장만 구경 하는것으로 만족 한다.
경기장 반절은 조명시설(?)로 덮여 있다.
구장안에 관광 할려면 15유로다. 티켓을 구입 입장 하는 모습
톨레도 관광후 뿌에르따 데 솔 광장에 간다.
솔 광장(Puerta del Sol)
마드리드의 심장이라고하는 광장. 이베리아반도의 0KM로 시발점(기준점)이되는 곳이기도하다.
원래의 이름은 '뿌에르따데솔(태양의 문)광장'이라고하나, 간단히 줄여 'SOL(태양)광장'이라고 부른다.
솔광장의 역사는 마드리드의 역사라고 할만큼 숱한 사건과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최초로 가스등이 커졌던 곳, 최초로 전차가 다녔던 곳, 최초로 전기불이 켜졌던 곳,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되었던 곳으로써
모든 시작의 중심이되었고, 마드리드의 모든 길은 이곳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또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든다.
연말에는 모든 시민들의 함성과 함께 재야의 종을 울리는 곳이기도하다.
마드리드 사람들이 여기에 다 모인 것 처럼 북적이는 곳이다.
마드리드의 상징인 곰 동상이다.
마드리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카를로스 3세 동상이다.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가까이에있는 솔광장과 함께 구시가지에 중심을 이루는 광장. 1617년 펠리페 3세에 의해 건축시작, 1621년에 완성.
1672년 화재로 부분적인 파손을 가져왔다.
현재의 광장은 18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광장가운데에는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이 서있다.
모든 시민 집회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고 종교재판도 열렸었으며, 1846년까지는 투우경기도 이곳에서 열렸었다.
현재에도 모든 축제, 공공행사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매주 일요일에는 우표, 고화시장, 연말의 크리스마스 나무 및
장난감시장등이열린다
산 마구엘 전통시장이다.
스페인 3대 전통시장 중 하나로 1916년에 문을 연 과일과 채소를 파는 청과물 시장이다.
시간이 없어 들어 가 보진 못하고 사진만 찍는다.
저녁 식사는 한국식인데 보다시피 제육볶음 약간과 반찬 4가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