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1517~1578)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조선 최고의 기인(奇人) 재사다.
서울 마포나루 어귀 토정동 138에 토담집을 짓고 살았다는 데서 토정(土亭)을 그의 호로 삼았다.
지하철 5호선 마포역 1번 출구로 나가면 그의 이름을 딴 도로 토정로를 만난다. 마포음식문화거리다.
옛 마포나루(삼개포구)의 영화를 재현한 듯 무려 169개의 음식점과 가게, 유흥시설이 빽빽하게 진을 치고 있다.
토정로를 중심으로 31길과 32길이 갈라지는 네거리 오른쪽 보도 위에 그의 구휼 활동을 재현한 재미있는 4개의
브론즈 작품상이 있다.





토정로 주변은 온통 아파트와 높은 건물이 가득하다. 건물 숲에 둘려 쌓인 토정로를 건너 강변 방향으로 직진하면
왼쪽에 한강삼성아파트가 나온다. 그 아파트 정문에 들어서면 102동 앞에 ‘토정 이지함 선생 집터’를 알리는 표석을 만난다.
아파트 단지에서 자체적으로 세운 기념석이다.
"이곳은 조선 중기 명현(名賢)으로 성리학자(性理學者)였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선생이 살던 집터 부근이다.
해방 직후까지는 이곳에는 토정의 옛 집터로 전해지는 빈터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토정의 옛 고을의 이름에 아랫토정,
윗토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예전부터 토정리로 불리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안 어린이놀이터 옆에는 토정 이지함을 기리기 위한 영모비가 있다.
영모비에서 토정 이지함에 대한 마포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집터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그의 도덕적 애민 사상과 업적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마포인의 마음에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포천현감과 아산현감 등을 지내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먼저 그의 문집 ‘토정유고’에 전하는 일화다.
“선생이 포천 현감으로 부임하던 첫날, 아전이 음식상을 올렸다. 선생은 음식을 살피더니 젓가락도 대지 않고 말했다.
‘먹을 게 없구나’. 아전은 ‘고을에 특산품이 없어 반찬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하고는 다시 상을 차려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수성찬이었다. 한참을 들여다본 선생이 다시 말했다. ‘먹을 게 없구나’.
똑같은 대답에 아전이 두려워 어찌할 바 몰라 하자 선생이 호통을 쳤다.
‘백성들이 민생고에 허덕이며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밥상에서 편히 식사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는 잡곡밥 한 그릇에 검은 시래기국 한 그릇만 준비하도록 하라’. 이후 아전은 밥상을 쓰지 않고
밥과 국 한 그릇만을 선생이 쓰던 삿갓 상자에 담아 올렸다.”
토정은 평생 물욕(物慾)을 멀리해온 ‘검약의 화신’이었다. 한끼로 3~4일을 지낸 날도 많았다.
그는 쇠붙이로 만든 철삿갓을 쓰고 다니면서 식사때는 밥짓는 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가 아산 현감 재직시 ‘걸인청(乞人廳)’을 세워 부랑인 구호사업을 펼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 선조(宣祖) 11년에 쓰여진 율곡 이이의 『경연 일기』에는 토정 이지함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인물평이 실려 있다.
『아산현감 이지함은 어려서부터 욕심이 적어서 외계(外界)의 사물에 인색하지 않았다.
기질을 이상하게 타고나서 능히 춥고 더운 것은 물론 배고픈 것도 견딜 수 있었다.
겨울에 벌거숭이로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앉아 견딜 수 있었으며 열흘 동안 곡기를 끊고도 병이 나지 않았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두터워서 형제간에 있거나 없거나 자기 소유를 따지 않았다.
그가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목사가 그를 객관으로 맞아들이고 예쁜 기생을 뽑아
같이 자게하고, 창고에 가득한 곡식을 가리키며,
"네가 이 분의 사랑을 받으면 상으로 곳간 곡식을 다 주겠노라" 하였다.
기생이 이지함의 됨됨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갖은 유혹을 다하였지만
이지함이 끝내 그 꾀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에 목사가 더욱 존경하였다.』
이지함에 대한 기록은 조중봉(趙重峰/본명 조헌/趙憲-1544~1592)이
선조(宣祖)에게 고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臣)은 세 분의 스승을 섬겼는데, 이지함, 이이, 성혼이 그분들입니다.
세 분이 성취한 덕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 마음을 맑게 하고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않아 그 행적이 세상의 규범이 된 점만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성인과 현인 그리고 큰 선비들은 모두 마음을 맑게 하고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않은 일을 도리의 요체로 삼았습니다. 마음이 탁하면 근본이 썩고, 사
사로운 욕심이 앞서면 사물에 얽매여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람이 겉을 억지로 아름답게 꾸미고 스스로 착한 척하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
이 나날이 마음속 가득 쌓여 끝내 본성을 잃고 욕망에 빠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