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의 아량(Tolerance) - 한국의 '정(情)'이란 단어가 외국어로 번역되기 쉽지 않듯이, 프랑스의 '똘레랑스(tolerance)'도 우리말로 옮기기 쉽지 않다.
우리의 '정'이 감성의 표현인데 반해 '똘레랑스'는 이성의 소리로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 자신의 이념과 신념이 귀중하면 남의 것들도 똑같이 귀중하며 자신이 존중받기 바란다면 남을 존중하라는 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요구이다. 똘레랑스가 강조된 사회에선 강요나 강제 대신 토론하고 상대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한다.
똘레랑스가 있는 프랑스에서는 주장과 주장, 사상과 사상이 논쟁하는 데 비해, 똘레랑스가 없는 사회에서는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 자체를 미워하여 결국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미워하게 된다. '똘레랑스'의 두번째 말뜻은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된 자유이다. 약자에 대해 똘레랑스를 요구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똘레랑스가 프랑스 사회에 흐르게 된 것은 '끄 쎄-쥬?(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로 표현되는 프랑스의 철학 전통인 회의론에서 나온 것 같다. 즉 '끄 쎄-쥬? (Que sais-je?)'라는 회의에 의해 자신의 사상과 행동만이 옳다는 아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똘레랑스의 근본 개념이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도 똘레랑스가 정립되기를 바라며---
영어에 tolerance(관용, 포용력)라는 단어는 불어의 '똘레랑스'에서 온 말이다. 똘레랑스는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에서 유래된다. 칙령이 있기 전까지 국민은 왕의 종교와 항상 일치해야 했다. 그러나 칙령이 반포됨으로 개신교가 하나의 종교로 인정받았다. 유럽 최초로 한 왕국에 두 개의 종교를 용인한 대변혁이었다. 그러나 똘레랑스의 관용은 12년 뒤 앙리 4세가 광신적인 카톨릭 교도에게 암살을 당하고, 절대 왕권을 자랑했던 루이 14세에 이르자, 수십 만명의 개신교인들이 순교를 당하는 비극을 가져왔다. 이 피의 역사는 왕정을 무너뜨린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중단됐지만, 결국 똘레랑스는 세계 최대의 개신교 순교라는 대가를 지불한 프랑스 사람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단어로 기억되고 있다. 이런 피로 얼룩진 역사를 갖고 있기에 프랑스는 모든 종교에 대해서 똘레랑스, 즉 관용을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에 대해서는 어떤 나라보다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다.
앵똘레랑스(intolerance) : 관용하지 못함, 불관용(不寬容)
똘레랑스(tolerance, 라틴어 tolerare)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무엇을 "지탱한다 혹은 감수한다(supporter)"라는 뜻에서 유래한 외래어로 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관용"이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있다. 흔히 관용은 사전적 의미로 남에게 베푸는 너그러움이나 자선이라는 다소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동양의 미덕을 상기시키는 단어이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어떠한 억압된 상황에 묶인 무엇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앵똘레랑스(불관용, intolerance)"는 일반적으로 지배적이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외래어(불어)인 "똘레랑스"는 우리의 전통적 계급사회에서 통용되었던 "관용"의 개념과는 다소 의미적인 차이를 보인다. 오랫동안 우리의 가부장적 사고에서 특히 유교문화의 미덕이라는 개념에서 이해되는 동양의 관용은 우선 가진자 혹은 지배자를 말하는 베푸는 주체와 그 수혜자인 객체와의 분명한 계급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부처님이 베푸는 자비, 주인이 죄지은 하인이나 구속된 자들에게 주는 사면, 혹은 가진자들이 서민들을 위해 만든 빈민구제 제도 등에서 볼 수 있는 동양의 "관용"은 절대자 혹은 지배자의 선행이 피지배자에 대한 "동정"으로 행하는 일방적인 진행을 가지며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불평등적인 계급체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서양의 똘레랑스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사고방식 혹은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행동의 자유를 "존중한다"라는 뜻이며 적용되는 두 개체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는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물론 "불관용"은 이와 반대로 언제나 타자와의 구별 속에서 자신의 주체를 모든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 일반적으로 서양의 입장에서 발견자로 기록되는 콜롬부스가 당시 원주민이였던 인디언의 상대적 입장에서는 침략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니체의 상대적 이론)은 이러한 관용의 상대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개체 사이의 똘레랑스 개념은 계급관계가 아니라 평등관계 즉 동등한 두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그 철학적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소외된 개체의 존재론적 인정(승인)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개체 사이의 계급관계에서 야기되는 동정이나 자선 혹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미덕이 아니라 동등한 수평관계에서 이해되는 "상호 존재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실상 동양의 관용과 서양의 똘레랑스는 근본적으로 그들의 개념적 출발을 서로 달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여기서 언급할 "관용"은 동양의 관용사상과는 다른 단순히 개념적 맥락에서 본 "똘레랑스"의 번역어로만 지칭될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오랫동안 학문 혹은 진리라는 절대적인 의미(특히 수학적 논리)에 순응하여 왔기 때문에 분명한 논리와 명분 특히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의 숭배를 앞세우는 도덕과 이성의 세계에서 똘레랑스의 진정한 개념을 쉽게 감지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천동설을 믿었던 시대에 누군가가 하늘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사람들에게 설명했을 때 아무도 믿지 않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성(합리론)은 언제나 흑백논리나 공리주의와 같은 과학적 사고가 갖는 절대적 기준을 그 성립 배경으로 하는데 이러한 기준에 따른 한 집단의 가치관이 바로 불관용 혹은 편견을 만든다.
관용과 불관용의 개념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 한편으로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개체론적 규명이며 또 한편으로는 집단 이데올로기의 편견과 포용을 들 수 있다. 원래 존재론(存在論 / ontologie)이라는 말은 무엇이 "있다(onta)"라는 것과 "학문(logia)"이라는 두 용어가 결합된 합성어이며 이때 "존재"라는 것은 흔히 인식론적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코키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논리적이든 감각적이든 혹은 인식적이든 비 인식적이든 여하간 이 세상은 마치 우주의 무한한 별들의 존재들처럼 무엇으로 채워져 있다는 개념 쉽게 말해 조물주적 관점(형이상학)에서 본 용어다. 그래서 (생성)존재론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흔히 세상은 어느 특정한 종교에서 지칭하는 절대자의 창조물이 아니라 가상적인 절대자인 "조물주(혹은 조화의 신 Demiurgo)"의 창작품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우리를 둘러 싼 모든 만물과 모든 정신적 현상(인식적이든 감각적이든)들은 조물주의 작품들이며 그 작품들의 총체가 바로 우리의 세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