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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내가 아는 단어로는 그 일을 표현할 수가 없다."
- 베슬란 인질극 이후의 어느 북오세티야인
그날은 2004년 9월 1일, '지식의 날'이었다. 러시아 전역의 학교가 여름 방학을 끝나고 학생들이 새학기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초등학생들은 부모 손을 잡고 학교에 가서 방학 때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보고 담임 선생님에게 인사하는 날이었다. 학교에는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붐빈 상태로 교장선생님의 인사말로 개학식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북오세티야 공화국의 베슬란
북오세티야 공화국의 베슬란에 있는 제1공립학교(Shool Number One)도 예외는 아니었다. 새학기를 맞아서 마을에 있는 학부모들은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손에 꽃을 든채 아들, 딸을 데리고 학교에 찾아갔다. 시간은 아침 9시가 좀 넘은 상태였고 학교에는 777명의 초등 학생과 교사, 학부모를 포함해서 총 1,200명의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슬슬 개학식을 시작해야 될 시간이었다. 스피커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고 초등학생들은 운동장에 나와 있었다.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운동장에서 알파벳 모양으로 서 있던 초등학생들은 갑자기 학교 쪽을 향해 승합차 1대와 트럭 1대가 달려와서 학교 뒤쪽에 주차시키는 것을 목격했다. 학생들은 알지 못했겠지만 GAZ66 군용트럭과 경찰용 GAZ 승합차였다. 주차된 차량 안에서 검은색 마스크로 얼굴을 감싸고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렸다. 옆에 서 있던 어른들도 그걸 보았지만 처음에는 러시아군이 학교 근처에서 훈련하기 위해 온줄 알았다. 하지만 갑자기 총소리와 함께 군복 입은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학교 안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쳤다.
베슬란 학교 평면도
학생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옆에 있던 학부모와 선생들은 상황을 이해하였다. 체첸인들이 인질극을 벌이기 위해 온 것이다. 끔찍한 과거의 몇몇 사례들을 상기한 어른들은 옆에 있던 학생들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학생들은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 여기저기 뛰었지만 곧 사방에 군복입은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트럭으로 온 사람들 외에도 이미 반대 쪽에 주차되어 있던 승합차 안에서 내린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운좋게 도망가거나 숨을 수 있었던 50여명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1천명이 넘는 학생, 학부모, 선생, 학교 직원들은 학교 건물과 운동장 가운데에 몰려있는 채 에워쌓였다. 약 30명 정도 되는 군복입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체육관 안의 인질들
그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선생들에게 물어봤다. "이 학교 체육관이 어디냐? 지금 바로 이동하지 않으면 전부 쏴죽이겠다" 선생들과 학부모들은 신속하게 학생들과 함께 체육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길이 25미터, 폭 10미터로 1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가 있기에는 비좁은 곳이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서 학교 직원들은 문득 그 건물이 2004년 7월 경에 신축 공사를 하였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때 공사하러 왔던 사람들이 혹시 체첸인들이 위장하였거나, 아니면 그들을 통해 체첸인들이 건물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체첸인들은 학교 내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고 여기 저기에 미리 준비해뒀던 무기와 폭탄을 꺼내는 것이 목격됬기 때문이다.
체육관 안에 모든 인질들을 모아 놓은 체첸인들은 제일 먼저 인질들이 갖고 있던 핸드폰과 카메라를 압수했다. 이는 2002년 11월 23일의 모스크바 두브로스카 극장 인질극의 경험 때문이었다. 당시 인질들의 핸드폰이 제대로 압수되지 않았는데 그 전화를 통해 러시아 내무부는 극장 내부의 상황과 인원, 폭탄의 위치 등의 정보를 얻어서 이를 바탕으로 진압 작전을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육관에 있는 모든 창문을 깨뜨려서 환기가 잘되게 하였다. 역시 극장 인질극에서 독가스가 사용되었던 것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베슬란 학교의 체첸인들
그 다음 체첸인들은 인질들에게 러시아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다른 사람을 선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극장 안에 있던 700명이 넘는 아이들은 겁에 질려서 벌벌 떨었고 이를 보다 못한 루슬란 베트로조프라는 학부모가 아이들에게 진정하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만 자신도 모르게 북오세티야어로 말했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체첸인이 그에게 다가와서 할 말 다했냐고 물어봤다. 끝났다고 베트로조프가 대답하자 체첸인은 머리에 총을 발사했다. 다른 쪽에 있던 바딤 볼로에프라는 학부모는 무릎을 꿇으라는 체첸인들의 말을 거부하였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체첸인들은 그의 시신을 질질 끌고 갔고 바닥에는 핏자국이 흥건하게 남아 있었다.
체육관 안의 인질들. 좌측 아래가 핏자국
눈 앞에서 시신을 보게 된 인질들은 숨을 죽이게 되었고, 상황을 통제했다고 생각한 체첸인들은 체육관 주변에 인질들의 주변을 에워쌓는 형태로 급조 폭발물을 여러개 설치하고 그들을 인계철선으로 연결하였다. 체육관 양쪽의 농구대에도 폭탄을 매달아 놓았다. 어느 한개의 폭탄이 폭발해도 연쇄적으로 터지게 되어 있으며, 특히 공중에 설치된 폭탄은 치명적이었다. 모스크바 극장 테러 당시에 폭탄이 불발되었던 것도 잘 기억하고 있던 체첸인들은 폭탄의 성능에도 신경을 썼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준비된 인질극이었다. 만약 섣부르게 러시아군이 진압하다가는 엄청난 참상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파란색이 체육관 안의 인질들. 붉은 색이 체첸인, 검은색이 설치된 폭탄
설치가 끝난 뒤에 체첸인들은 인질 중에 신체 건강한 남자들 15-20명을 추려냈다.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건물 2층에 있는 매점으로 올라간 뒤에 허리에 폭탄 벨트를 메고 있던 체첸인 여자 2명이 이들과 함께 자폭하였다. 대부분이 그 폭발로 죽었지만 체첸인들은 남아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확인 사살하였다.
인질들의 진술에 의하면 그 여자들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인질극을 하는 것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체첸인 지휘관은 그들을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남자 인질과 함께 폭사하도록 만들었다. 그 지휘관의 이름은 라술 하츠바로프, 일명 '대령'이라고 불렸다.
베슬란 학교 인질극에 참가한 체첸 여자
학교에서 도망친 사람들에 의해 이 엄청난 사태는 지역 경찰에게 먼저 알려졌고, 베슬란 경찰들은 즉시 학교를 향해 출동하였고 주변에 빠져나오는 다른 인질들을 보호하였다. 이 과정에서 체육관을 점거한 체첸인들과 교전이 벌어졌는데 체첸인 1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학교 내에 진입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사태였다. 소식을 들은 3만 5천의 베슬란의 시민들도 경악을 한 상태에서 손에 무기를 들고 하나둘 씩 모여들었다. 그 수는 무려 5천명이나 되었다. 베슬란 경찰들은 흥분한 채 학교에 들어서려는 시민들을 진정시키는데도 진땀을 빼야 했다.
러시아 언론에 이 사태가 보도된 것은 발생 이후 4시간 반이 지난 2004년 9월 1일 오후 1시 반이었다. 이 때는 러시아 FSB의 주도 하에 학교 주변에 러시아 정규군과 내무부 특수부대인 오몬(OMON), FSB 소속 특수부대인 알파와 빔펠이 포진해 있었다. 베슬란 경찰과 북오세티야 주둔 내무군도 물론 출동한 상태였다. 러시아군 현장 지휘관은 먼저 체육관 주변의 아파트 3동의 주민을 소개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스페츠나츠 들을 투입하여 체육관을 내려다보게 하였고, 학교 주변 약 225미터 거리로 원을 그린채 병력을 배치하였다. 체첸인들이 갖고 있는 RPG의 위험 반경이기 때문이다.
언론사들은 이 사태를 보도하면서 왜 체첸인들이 북오세티야의 베슬란에 나타났는 지도 분석하였다. 이 마을은 1992년 잉구세티야와 북오세티야의 내전 당시에 북오세티야 민병대가 주둔한 곳이었으며 그들의 본부가 현재 제1공립학교 건물이었다. 심지어 당시 북오세티야 민병대에게 잡힌 체첸인들이 지금의 체육관 건물에 억류되어 있었다는 설명도 있으며 그 중에 남자 체첸인들이 북오세티야인에게 끌려나가 사살된 사실도 있었다고 한다. 이를 잊지 않고 있던 체첸인과 같이 동행한 9명의 잉구세티야 인들이 그 곳을 목표로 지정했다는 말도 있다.
베슬란 학교 인근에 배치된 러시아군 장갑차
언론은 동시에 체첸인들의 요구 조건에 대해서도 확인하려고 했다. '대령'은 샤밀 바사예프의 명령에 따라 이 인질극을 실행했으며,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게 전달한 샤밀 바사에프의 서한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북오세티야 대통령 알렉산더 드자소호프가 협상을 중재해주기를 원했다. 러시아 FSB를 직접 상대하는 것 보다는 자국인들이 인질로 있는 북오세티야 대통령을 통해 협상하는 것이 더 유리하며, 러시아도 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의 부탁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체첸인들은 북오세티야 대통령이 반드시 자신들을 만나러 와야 된다고 하면서, 그 때까지 인질들에게 물과 식량을 공급하게 하지 않겠으며 자신들도 물과 식량을 먹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다. 알렉산더 드자소호프 대통령은 자신이 기꺼이 교섭을 하겠다고 했지만 러시아 FSB는 이를 강하게 거절하였고, 그가 베슬란 공립학교 근처에 오게되면 체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로 인해 인질들은 물과 식량을 얻지 못한 채 극도의 공포 속에서 보내야 했다. 그렇게 인질극의 첫날이 저물었다.
2004년 9월 2일, 러시아 정부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날에 결성된 위기대책본부를 통해 체첸인과의 협상을 하려고 하였다. 이 시점의 공식적인 러시아 정부의 입장은 무력 진압을 고려하지 않은 평화적인 해결이었다. 이는 마침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를 만난 푸틴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질이 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이며, 현장에 있던 모든 러시아 요원들은 인질 구출에 있어 이를 가장 우선하여 행동할 것이다"고 발언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협상단은 체첸인들과 교섭을 하려 했으나 체첸인들은 전일 말한 대로 북오세티야 대통령이 오기 전에는 물과 식량의 반입은 물론 죽은 인질의 시신을 전달하지도 않겠다고 말했다. 9월 초의 더운 날씨에 그 비좁은 체육관에 갖혀 있는 인질들은 물과 음식도 먹지 못한채 극도의 더위와 습기 속에서 발을 뻗지도 못한 채 쪼그려서 앉아 있어야 했다. 더위를 참지 못했던 초등학생들은 속옷만 남기고 옷을 벗어버렸다. 시간이 지날 수록 탈진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체육관 안의 인질들과 체첸인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9월 2일 오전 10시 경에 루슬란 아우세프 전 잉구세티야 대통령이 베슬란 초등학교에 나타났다. 현 잉구세티야 대통령인 무라트 자지코프에 비해 체첸인이나 잉구세티야 인들은 그를 존경했기 때문에 체첸인들은 학교 안에 아우세프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루슬란 아우세프는 '대령'과의 교섭을 통해 11명의 초등학생과 15명의 학부모를 석방시킬 수 있었다.
'대령'은 그에게 학교를 제압한 뒤에 체육관 내에서 찍은 비디오 테이프와 샤밀 바사에프의 서한을 전달하였다. 그 서한의 내용은 '우린 우리의 독립과 러시아의 안전을 교환하는 평화 협상을 하길 원하며, 모스크바와 볼고돈스키 아파트 폭발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지만 책임을 져야 한다면 이에 대해 성의를 다하겠다. 우리의 목적은 체첸의 독립이지 러시아 연방의 파괴가 아니다. 우린 평화를 원한다' 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아우세프는 한장의 메모를 더 받았다. 거기에는 24명의 잉구세티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난 2004년 6월 21일 밤 나즈란 공격 이후 러시아군의 '자키스트카'로 체포된 잉구세티아인들이었다. 체첸인들은 그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자리를 일어서려는 아우세프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체첸인 1명이 다치면 인질 20명이 사살될 것이고, 체첸인 1명이 죽으면 인질 50명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체첸인 5명이 죽으면 모든 폭탄을 터트리겠다. 학교 조명과 통신이 1분이상 차단될 경우 인질 10명을 사살할 것이다."
현장에 배치된 러시아군
루슬란 아우세프는 학교를 나선 뒤에 러시아군에게 체첸인들에게 받은 것을 전달하였다.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 측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당시 러시아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체첸인들의 요구조건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그저 아무 이유없이 수백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인질 1천 100명을 잡고 있는 미치광이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거기에 인질의 숫자는 불과 300명이라고 발표되었다. 자신들의 요구조건이 언론에 나오지도 않고 인질의 숫자는 턱없이 줄였다는 사실은 체첸인들을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고 학교 밖으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총을 쏘거나 RPG를 날리게 하였다.
언론에 공개되지는 않아도 러시아 측 위기대책본부는 이 요구 사항들에 대해 검토는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아우세프를 포함한 몇명의 교섭인을 통해 추가로 협상을 할 것을 준비하거나 정확한 상대의 의사를 확인하려고 하였다. 대책본부에는 러시아 전역에서 초등학생들을 대신하여 인질이 되겠다고 한 러시아 저명인사 700명의 명단이 도착해 있었다. 심지어 체첸 반군의 수장인 아슬란 마스하도프도 자신의 부대는 이 인질극에 단 한명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 인질극을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만행"이라고 부르며 러시아측이 신변 보장만 해주겠다면 자신의 전권대사 아흐마드 자카에프와 함께 베슬란 학교로 가서 교섭하겠다고 하였다.
위기대책 본부 수장인 러시아 FSB 북오세티야 지부 수장인 발레리 안드레에프는 이런 모든 사정에 대해 복잡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사건이 너무나 엄청나고 책임이 막중했기 때문에 신중히 접근해야 했다. 그러나 해법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던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대책 본부 외에도 추가로 조직된 비밀 위기대책본부가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언론에 공개된 공식적인 위기대책 본부가 체첸인과의 협상과 교섭을 하는 동안에 비밀 위기대책본부는 진압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체첸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협상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셋째날이 밝았다.
2004년 9월 3일 오후 1시, 체첸인들은 2대의 구급차를 탄 4명의 구급요원들이 인질 20구의 시신을 옮기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런 뒤에 2대의 구급차가 학교 쪽으로 이동하여 운동장에 들어섰다. 정확히 3분 뒤, 체육관 안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안에 있던 체첸인들은 구급차를 향해 사격해서 2명의 구급요원이 죽었다. 다른 2명은 차량 뒤로 가서 숨었다. 22초가 지난 뒤에 두번째 폭발음이 들렸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상한 폭음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약 1분 정도 지난 오후 1시 5분, 체육관 지붕에서 폭발로 인해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불길이 솟아오르고 건물 잔해가 바닥에 있던 인질들의 위에 떨어졌고 조금 뒤에 지붕 전체가 붕괴되어 내려 앉았다.
인질들이 있는 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쌓였으며 생지옥이 벌어졌다. 놀란 인질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건물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건물 밖에 있는 러시아군과 스페츠나츠 요원들, 몰려 있던 무장한 북오세티야 주민들과 체첸인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벌어지자 러시아군은 가능한 모든 무력 수단을 동원했으며 인근 아파트 건물에 있던 스페츠나츠 들은 학교 건물을 향해 RPO-A 화염발사기로 기화탄을 최소 3발에서 최대 9발을 발사했다. 현장에 있던 T-72 전차 2대도 학교 건물을 향해 주포를 최소 6발 발사했다.
9월 3일의 베슬란 학교
체육관 안에 있던 체첸인들은 일부는 인질 틈에 섞여서 빠져나가려고 시도했고 일부는 인질들을 몇명 붙잡아서 2층 매점 베란다로 가서 러시아군에게 사격을 중지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러시아군 BTR-80 장갑차는 14미리 기관총을 체육관 2층을 향해 난사했고 체첸인과 같이 있던 인질들은 그곳에서 죽었다. 다른 체첸인들은 학교의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러시아군을 향해 사격하고 RPG를 날렸다.
교전은 벌어진 지 2시간이 지난 오후 3시 무렵에 러시아 정부는 베슬란 학교를 장악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해가 떨어질 때까지도 학교에서 전투가 게속됬으며 약 13명의 체첸인이 학교를 빠져나갔다. 이 중 몇명은 인근 건물에 들어가서 농성했는데 러시아군이 전차와 RPO-A 화염발사기로 기화탄까지 날리면서 밤 9시까지 전투가 벌어졌다. 심지어 베슬란을 빠져나가 인근 고속도로를 향한 체첸인들도 있어 러시아 하인드 헬기가 이들을 추격해야 했다. 완전히 총성이 멎은 것은 최초로 폭발이 난지 12시간이 지난 9월 4일 새벽 1시였다.
현장에 있던 러시아 알파 부대
학교가 제압될 때 러시아 이타르 타스 통신은 안에 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무사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연기가 걷힌 뒤에 사람들은 그 끔찍한 참상에 말을 잃어버렸다. 체육관 안에 불탄 시신이 160구나 되었다. 2층에 있던 체첸인과 같이 죽은 사람들의 수는 100명이 넘었고 학교를 빠져나오다가 죽은 사람들도 엄청났다. 현장에 있던 구급차를 통해 부상자를 북오세티야 수도 블라디카프카즈의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러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334명의 인질들이 죽었다. 그 중 학생들이 186명이었다. 대부분이 체육관에서 죽었다고 한다. 다친 사람은 700명이 넘었다. 사실상 체육관 안에 있던 거의 모든 인질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정신적인 충격 속에서 여자 인질 1명은 귀가 후에 자살하기까지 했다.
교전으로 인해 발생한 러시아군의 전사자는 11명에서 20명 사이였고, 30명이 중상을 입었다. 죽은 사람 중에는 지휘관급 3명이 포함되어 있다. 빔펠 부대의 올레그 일리인 대령과 드미트리 라즈모브스키 중령, 알파 부대의 알렉산더 페트로프 소령이었다. 체첸인은 러시아 정부측 발표에 의하면 전체 32명의 체첸인 부대가 학교에 들어서서 그중 31명이 죽었고 1명이 생포되었다. 누르 파시 쿠라에프라는 체첸인이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 있던 체첸인은 50명이 넘었으며 몇명은 탈출에 성공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부가 학교를 빠져나가서 12시간이나 교전이 벌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설명이다.
붉은 화살표가 체첸인들이 학교를 빠져나온 뒤의 도주로
이 모든 비극이 벌어지게 된 최초 2번의 폭발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판명이 되지 않고 있으며 몇가지 가설이 있다.
첫번째는 우연한 사고라는 설명이다. 체첸인 중 누군가가 인계철선을 잘못 건드렸거나, 설치해둔 폭탄 중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서 폭발과 함께 화재가 났다는 것이다.러시아 정부의 최초 공식 발표도 체첸인들이 매달아둔 폭탄 중 일부가 떨어져서 생긴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를 본 목격자는 없었다. 비슷한 설명으로 건물 안에 있던 누군가가 실수로 수류탄을 터트려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자극했다는 가설도 있다.
두번째는 러시아군 저격수가 진입을 위해 체첸인에게 사격을 했는데 기폭 스위치를 밟고 있던 체첸인을 넘어뜨렸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설명이다. 아우세프가 얻은 테이프 안에는 기폭 스위치를 밟고 있는 체첸인이 나와 있으며, 특수부대가 돌입하기에 앞서 사격을 가한 것이 결과적으로 폭발을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생포된 누르 파시 쿠라에프가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이며 이에 대해서는 목격한 인질들이 존재한다. 정확히 그 사람을 저격하지 않았더라도 폭발 직전에 외부에서 총격이 가해졌다는 증언 역시 존재한다.
세번째는 러시아군이 발사한 RPO-A 화염발사기의 기화탄이 화재의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교섭에 참가한 러시아 하원의원이자 폭발물 전문가인 유리 사벨리에프가 주장한 것으로 현장에 있던 체첸인들의 폭발물은 거의 터지지 않는 상태에서 러시아군이 체육관을 향해 발사한 기화탄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는 첫번째 폭발은 체육관 근처 37번가 건물 5층 위의 지붕에서 발사된 RPO-A 슈멜에 의해, 두번째 폭발은 인근 41번가 건물에서 발사된 RShG-1 유탄 발사기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폐허가 된 학교 건물 2층
러시아군이 학교 진입을 하게 된 것이 의도된 작전인지 우발적인 상황인지도 정확히 판명되지 않는다. 현장에 있던 북오세티야 베슬란 경찰관인 엘브로스 노가에프는 폭발 뒤에 무전으로 "사격 중지! 사격중지1"와 "공격!'의 말을 동시에 들었다고 한다. 이는 그야말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상황에서 현장 지휘관들의 판단이 엇갈렸거나, 아니면 최초부터 러시아 특수부대는 진입을 의도하고 있는 상태에서 지역 경찰에 대해서는 이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거나 두가지 가능성을 모두 제시해준다. 그러나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생긴 엄청난 비극인지, 아니면 애초에 인질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는 무차별한 진압작전인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한 설명이 없다.
베슬란 학교 인질극은 체첸인들이 독립의 이름을 걸고 행한 가장 처참한 일이었다. 그들은 수백명의 초등학생을 포함한 인질들을 데리고 러시아 정부와 교섭하기를 원했다. 샤밀 바사예프는 이 인질극이 '리야드 알 샬리힌' 부대에 의해 벌어졌으며, 애초에 러시아 모스크바나 샹트 페테르부르크의 학교 1곳을 대상으로 하려고 했지만 자금의 부족으로 가까운 북오세티야 베슬란을 노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북 오세티야를 대상으로 한 이유는 "러시아의 북코카서스 주요 거점"이자 침략의 전진 기지라는 것이다. 특히 베슬란은 1차 체첸전 당시에 러시아 공군이 사용한 비행장이 있는 곳이었다.
슬픔의 나무
베슬란에서 죽은 아이들의 추모비
샤밀 바사예프는 인질극을 벌이면서 러시아가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는 점을 너무 과소평가했으며, 그토록 잔혹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베슬란과 같은 일을 몇번이라도 벌이겠으며 그 이유는 '러시아가 우릴 그렇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2010년 10월 현재까지 이와 같은 대규모 인질극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인질극도 진압될 수 있다면 그 어떤 곳에서 벌인다 해도 결국에는 진압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데노프스키는 이제 재현할 수 없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
".. 우리는 앞으로도 베슬란과 같은 작전을 계속 준비할 것이다. 러시아가 우릴 그렇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우린 러시아가 우릴 죽이는 것을 멈추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체첸인들, 적어도 샤밀 바사예프는 자신들이 독립을 위해서 그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러시아는 체첸의 독립을 막기 위해 그 어떤 것도 감수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들의 사이에 낀 베슬란의 아이들은 아무런 이유없이 죽었다. 그리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출처 : http://www.martinfrost.ws/htmlfiles/beslan_siege.html
http://en.wikipedia.org/wiki/Beslan_school_hostage_crisis
http://www.esquire.com/features/ESQ0606BESLAN_140
http://www.guardian.co.uk/world/2004/sep/05/russia.chechnya
http://www.guardian.co.uk/world/2004/sep/06/schoolsworldwide.chechn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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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가장 끔찍한 일이었죠
아니.. 독립운동 취지상 인질극까지는 그렇다 치겠는데 초등학교... 당시에도 충공깽이었죠. 그건 그렇고 테러범 중 고려인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구란(Guran) 족 1명이 있었는데 바이칼에 있는 소수민족이라고 합니다
이건 아닌데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드네요 ㅜㅜ
이건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충격과 공포......이거 보면 인디언 도끼로 외과수술 해대는 미국인이 자비롭게 보임여 ㅇㅈㄴ
두번 다시 생겨선 안되는 일이죠
아무리 봐도 '독립투쟁'이라는 명목으로 면죄부를 줄 시기는 이미 지난 듯 합니다.
바사예프는 자신들을 학살하는 일을 멈추게 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인질 갇혀 있는데 거기에 전차포 등등을 갈겨댄 러시아군도....쩝.
인질 구출 작전이라고는 도저히 말하기 힘든 수준이죠
옛날에 뉴스로 이 참상을 본 기억이 납니다..그래도 이 인질극을 주도한 체천이나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러시아나 모두 큰 잘못이라고 느껴집니다..인질로 있다가 죽은 아이들만 불쌍하군요..
아직까지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진상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목적이 아무리 타당하다고 해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인질로 잡는 행위는 매우 잘못됐군요.. 아버지가 나쁜 놈이라고 자식들을 괴롭히면 누가 욕을 먹을까요??
악을 악으로 갚아도 되는 지 생각을 해봐야겠죠.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정말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충분히 정당한 행위입니다 러시아가 체첸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지르는 만행에 비해면 저건 아무것도 아니죠
저는 정당하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저들이 저렇게 까지 밀려버릴정도로 혹독한 상황에 내몰린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인들이 체첸에서 자비롭게 행동했다며 최소한 저기까지는 가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인들이 벌인 전쟁중 끔찍하지 않은 전쟁이 없습니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한짓은 아무것도 아닐정도로 러시아군대는 악랄합니다 아프간스탄에서 했던짓들 체첸에서 했던 짓들 그들이 저지른게 되돌아 온것입니다 전쟁에 그 누구도 승자가 없다고봅니다 그 누구의 잘못을 따질계제가 아니라 러시아 정책그리고 러시아인들이 저지른던 짓에 대해 러시아인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강자의 논리며 된다는 그것이 부른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ㅠㅠ
러시아나 체첸이나 너무 강경하게 나가다가 비극을 맞았군요. 체첸 측에서 요구한 자치 공화국 정도는 러시아에서 들어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죠.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