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의 리듬은 알 수 없다.
제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자연의 리듬은 알 수 없다.
그 리듬을 조정할 수 없고 記號化기호화 할 수 없다.
사람은 그 時空시공에 개입 하지 못한다.
자연의 모든 현상이나 일기변화는 제 스스로의 짓이다.
그들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視線시선 이 닿지 않는 그 너머의 時空시공이 사람들에게는 궁금한 일이지만 보이는 것은 現象현상 이고
本質본질은 안 보인다. 許容허용 받은 視界시계는 가장자리에 불과하고 그 너머의 권역은 인간에게 허락
되지 않는다. 끝없는 진기한 불가사이 만이 인간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알 수없는 영역이 무한하여 인간은 氣盡기진 하다.
강과 산은 서로 만나서도 모른 체 한다,
산이 강에게 나아갈 길을 양보해 준 것 인지 물줄기가 산을 뚫고 나간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물줄기는
낮은 땅의 유순한 곳만 골라서간다. 그 물줄기는 내륙산악지대의 산들이 맞닿은 계곡의 集水地집수지에서
흘러내린다. 물은 산골사이를 끼고 험한 낭떠러지를 휘돌아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그 물줄기는 신운하고
강력하다. 물의 發源발원은 산골이다. 산골 물은 가파른 바위 사이를 굽이치며 수렁에 빠져 쏜살 같이
곤두박질쳐 흘러간다. 사방에서 흘러드는 지류의 始原시원을 모두 거느리고 도망친다. 계곡은 바쁘다.
말을 걸 수 없는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은 남감하다.
세상은 자연과 사람사이의 첨예한 對局대국을 모른 체 한다.
인간은 자연을 좌지우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이란 것을 늘 잊고 산다.
사람들은 자연의 횡포니 이변이니 하며 벼락이 쏟아진 것처럼 여긴다.
‘장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났으며 도처에서 평등하려고 시달리고 있다’라고 하고 싶다.
자연은 ‘평등이니’ ‘불평등이니’ 할 대상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불가항력을 崇嚴숭엄한 마음으로 인간은 金科玉條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일이다.
우주의 생명인 물을 생각한다.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 우주적 생명력이 샘솟는 원천은 깊은 산속의 계곡이다.
국토水脈의 발원지로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꿰뚫고 알아야 한다.
진정 깊은 것들은 관심 밖의 후미진 곳에 숨겨져 있다.
국토순례는 길 따라한다. 호연지기로 백두대간 종주를 자랑한다.
그러나 나는 작심하고 말한다.
우리나라 강산을 굽이굽이 휘돌아 광막한 바다로 흘러드는 큰 水脈을 낱낱이 답사하는 일이, 어떤
이벤트보다 우리강산을 사랑하는 값진 학습이며 삶을 향한 투명한 의무란 것을 권고하고 싶다.
1. 이는 ‘삶의 기본’을 다지는 필수 훈련이며
2. 언제나 자신의 위치부터 확인하는 ‘실전 독도법’의 길이고
3. ‘객관적 思惟體驗’의 시발점이며
4. ‘과학적 지리탐험’의 실습을 통한 새로운 발상의 ‘국토 순례’이고
5. 몸을 던져 ‘국토를 사랑하는 自覺’이다.
나는 낙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의 수계는 1/5정도만 답사하였지만, 북한강과 남한강의 수계는
90%정도를 직접 내발로 답사 하였다.
산을 알려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먼저 알아야한다.
나를 알려면 나를 둘러쌓고 있는 자연과 인물과 환경을 먼저 알아야 하듯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일부 인사는 지식의 칸막이를 쌓고, 남과 소통하는 문화생활에 익숙하지 못하고
운둔을 하는 예가 많다. 빗 대여 말하자면 博士아닌 狹士협사 라고나 할까. 호기심과 열정이 결여되고
권위의식을 내세워 남의 분야의 지식을 융합 활용하는데 소극적이고 온실에 안주하는 형세이다.
학교나 학원 연구소 뿐 만이 아니라 일반 직장인도 가정에 가쳐서 늘 똑같은 나날을 반복하는 기백
없는 소시민적 삶도 문제이다. ‘Grand theory’적 총체적 統整性통정성에 의한 지식과 문화의 응용활용에
대한 나의 견해는 이미 ‘2012년 1월의 나침반’을 통해 언급한바 있지만, 이제 기능과 능률만을 앞세운
얄팍한 誡계 와 講강은 없어야한다.
진정으로 우리의 국토를 사랑하는 열정이 있고 몸이 건강하다면, 발이 부르터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설악산 그리고 오대산의 한강 발원지에서 한강 하류까지 직접 탐험하는 박진감으로 인생을 말하자는
은유적 설명이다.
왜 이다지도 열을 올리는가?
사회지도층이나 지식인일수록 ‘산지식’을 행동으로 결판내자는 것이다. 활달 하지 못한 일부 도시인들
중에는, 생계형 일과 작은 것에 목숨을 걸고 자연과 어울리는 취향생활을 소홀이 하는 시례를 흔히 본다.
문명의 혜택을 뜻 없는 곳에 소비하며 도시 언저리에서만 맴도는 내향적 삶이 염려스럽다.
生을 향한 높은 열망을 넘어 무엇이던 행동을 수반하는 嚴決엄결하고 섬세한 ‘인문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知的 긴장이 얼마나 신나는 놀이인가!! 일과 餘暇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고착된 습성을 유연하게 풀어
代價없는 성취감에 흠뻑 빠져 열린 낯선 하늘 아래 눕는다. 땀과 눈물로 얼룩진 몸으로 감성을 유연하게
마음껏 풀고 세련되고 우아한 품격의 세계인으로 자연을 포옹하는 삶을 염원한다.
지식을 말하되 인간의 머리로만 이해되는 지식이 아니라, 자연에 역행되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맞는
지식을 말한다. 인간성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만 인간에게만 통용되는 이해득실의 인간성이 아니라,
자연과 먼저 관계를 맺고, 생태학적으로 종행무진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한 소박하고 맑은
조화된 인간성을 안으로 품는다. 인간중심의 관념에서 자연중심의 깊은 안전망을 바탕으로 하는 죽음
까지도 떠날 시간에 평화롭게 포옹하는 壯麗장려한 상부구조의 가치를 갈구한다.
이른 봄에는 산 정상에 오르는 등산보다는 갈수기를 이용한 심산계곡의 ‘서바이벌 탐험’이 도전의 성취감을
더해준다. 험난한 돌 자각의 늪을 ‘수중양륙작전’으로 헤치고나간다.
깊은 산골의 계곡에는 잔설과 어름이 군대 군대 남아있다.
갈라지고 조각난 어름사이로 졸졸 물이 흐른다.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은 원시의 너덜을 엉금엉금 긴다.
숲 덤불을 뚫고 물길을 헤 졌고 나가는 전투이다.
여름에도 가끔 이런 서바이벌 ‘람보 전쟁놀이’를 철없는 아이들처럼 감행한다.
왜 이런 짓을 하는가?
이런 식으로 살지 않으면 밋밋해서 견딜 수 없다.
산속을 헤매다 집에 오면 찜질방이다(나는 찜질방에 가본적은 없지만)
산속의 물소리, 바람소리, 낙엽 밟는 소리, 새 소리, 내 발자국소리···
이런 하잘 것 없는 것들에 비해 여지 것 소중히 여겼던 신변의 잡다 한 것 들이 오히려 한낱 거추장스러운
일로 여겨져 혼자 고요하다.
물안개 휘감고 진달래 떼 지어 사분거리는 계곡···
마음을 멈추게 하는 꽃들의 성찬···
찬란한 봄을 혼신의 힘으로 느끼며 어느 하늘 한쪽을 헤맨다.
가슴에 철철 넘치는 생기로 이봄을 꽉 쥐어 잡고 울고 싶다.
한강의 발원지를 힘차게 딛고 서서, 4월을 불끈 움켜쥔다.
숲과 계곡은 봄기운 웅성대며 이 세상 모든 것을 향해 당당하다.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 물음을 사람 세계에 묻는 게 아니라, 자연에게 행동으로 묻고 행동체험으로 답을 구하는 야생의 열망을
불태운다. 관념 따위는 필요 없고, 오직 나의 늙은 행동만이 나를 지탱하는 천연한 힘이다. 나의 연인은
물어도 대답 없는 자연이다. 자연을 향해 간절한 짝사랑으로, 한 번은 땅에게 이여 하늘을 향해 애걸한다.
자연에게 허락받을 수없는 아니, 영원히 허락 받지 못할 나의 ‘짝사랑의 변명’이기도하다.
흐르는 물은 거들 수 없고 흙속에 숨이여 논다. 그 힘은 생명줄이다.
물은 노을에 젖고 바람에 스치며 잠들지 않는다.
물줄기는 억압받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일없는 물길은 혼자 놀며 마냥 간다.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을 말하지만 나는 자연의 오묘함에 더 놀란다.
산속의 부산한 물소리··· 숲을 잠재우는 저물 한 그 소리···
샛바람에 매달려 정갈한 초생 달 기울 때까지 그 소리 같이하고 싶다. 어두워져 혼자인 적막이 얼마나 자족
한 것인가. 작고 작은 ‘현호색’ 꽃이 떨며 나와 마주하고 있다.
차마 말할 수 없고, ‘현호색’에게 저 노을 나와 같이 볼 일이라 했다.
暮色모색속의 저뭇한 풍경의 글은 누군가가 대신 써다오···
지구를 한편으로는 水惑星수혹성 이라고 부른다.
물이 풍부한 天體천체 라는 뜻이다.
지구는 46억 년 전에 생성되어, 최초의 수억 년 동안에 85%의 해수를 뿜어내오다 현재의 해수 량이 된 것은
약 1억 년 전 이라고 한다. 그 해수가 수증기로 증발하여 구름이 되어 비와 눈을 내리게 하고, 강과 호수
빙하를 거쳐 다시 바다로 되돌아가는 생태계에 생명을 베푸는 순환의 섭리이다. 사람의 인체에도 70%의
수분이 차지하고 있어 물과 생명은 한 몸이다.
이런 緣由연유로 봄이 되면 나는 오지의 계곡을 찾는다.
어떤 소망과 기대도, 싫고 좋고를 가르지 않고 마냥 걷는다.
어디까지 내 땅인가? 理性과 결합된 치유의 영역은 끝이 없다.
물소리는 생각을 지우고 나를 혼자이게 한다.
흐르는 풍경이 고독과 인간을 만든다.
흐르는 물줄기는 ‘포텐셜 에너지potential energy’ 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중력의 ‘位置 energy’이다.
지상의 물은 수증기로 氣化기화되어 ‘kinetics energy’로 역동한다.
즉 땅위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機械的 energy’로 구름이 되어 떠돈다.
물은 높은데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으로만 알고 있으나, 온도가 상승하면 분자가 팽창하여 가벼워져 기체로
변해 구름이 된다. 높은 단계의 珍奇진기한 知的여행이 자유와 방랑의 친구이다.
봄 산은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모든 것이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숲은 나날이 자라는 게 분명하지만 그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똑같은 순간은 단 한 번도 없다.
계곡에 들면 세상을 향해 고아가된다.
혼자서만 느끼는 충족감은 고독의 절정이다,
세상만사 다 잊고 텐트를 싸 짊어지고 깊은 계곡에 들어, 적어도 하루 이틀쯤은 몸이 계곡이 되어 인간과
세상 사이를 훔쳐볼 일이다.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듣고 떠났다. 가랑비는 나의 초대장이 됐다.
텐트를 조근 조근 적시는 빗소리는 폐부를 찌르는 바하의 ‘꿈속의 몽상’곡의 랩소디로 가슴을 친 다.
세상은 보일 뜻 되사라나며 새잎이 불가능에 대한 희망을 준다.
정말로 세상을 떠도는 자로 자연과 나와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너무 기뻐 나는 속으로 울었다. 나의 빈곤한 언어로 이 봄을 다 말 할
수 없는 응답이다.
한강하류 자유로를 따라 임진강변에 이르는 길은 낙조의 길이다.
바삭거리는 갈대군락을 넘어 석양과 저무는 갯벌 너머의 먼 바다를 바라본다. 소리를 낼 수 없는 갈대는
바람에 스치어 소리를 내준다. 제소리가 아닌 대신내주는 소리는 결핍이고 쓸쓸하다.
이런 희망 없는 대역을 물길은 모르는 채 흘러만 간다.
이제 설악산 오대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한강하류 임진강과 한 몸이 되여 갈매기의 마중을 받으며
서해로 흘러든다. 이제 한강 水系探險의 대장정은 끝났다.
이 강산의 뿌리는 변함이 없다.
사람들이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갖고 보아주고 보듬어주고 가꾸어 주느냐만 남았다. 사람도 한강의
水脈처럼 자유롭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새봄···
어딘가로 떠나야한다.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을 만들어야한다.
잠든 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다.
도시를 버리고 탈출한다.
갈 곳은 모른다.
그냥 간다.
가다보면 행간이 생길 것이다.
늘 그래왔으니까.
자연에 빨려들어 스러진다.
마음에 묻는 생각을 그대로 띠워 쫓으면 된다.
가벼이 따르련다.
발길 따라, 물길 딸, 구름 따라··· 깐돌이 박 상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