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서 죄송합니다. 굽신 굽신)
끊임없는 유기적 단상으로 엮어진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사회의 현상은 이미 좌절감, 무감함, 냉소가 스펙타클과 지지리도 얽혀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동시에 여러개 신문을 구독하는 독자가 아니었다면, TV가 없는 사람은 무관했을 법한 숭례문 전소와 방화범의 물색, 그의 이기적인 사연 및 가림막을 치는 문제와 어떤 재질로 할 것인가, 그리고 문화재청장의 사퇴까지 불러오면서 불거지는 책임설과 복원 과정과 예산 시간 규모를 둘러싸고 말들이 오고간다. 혼란하고 질퍽한 잿더미에 혼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혼란들은 몇 번의 클릭을 통해 살펴보는 황량한 숭례문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아니, 충분하지 않는게 있다면, 간혹 이용하는 501번 버스 창문을 통해 본 숭례문의 풍경이 과연 내가 직접 본 것인지, 뉴스로 접했던 그 모습 그대로의 장면을 상상해서, 횡단보도 옆에서 떼지어 휴대폰과 카메라로 찍기에 바쁜 군중 무리 속 하나로 상상적인 자신을 투사한 그 모습인지 헷갈린다는 점이다. CNN이 걸프전을 비디오게임화 했다면, 태안사태와 숭례문화재등으로 이어지는 참사의 현장을 담은 그 모습들은 드디어 트레디셔널한 가상현실 게임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럼에도 뭔지 모를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스펙타클이 영원한 것이라며 제공하는 것은 모두 변화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 기반과 더불어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스펙타클은 절대적으로 교조적이지만, 이와 동시에 실제로는 아무런 확고한 교리도 이룩할 수 없다. 스펙타클을 위해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이런 조건은 스펙타클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그 조건은 스펙타클의 성향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며칠간 심한 바람을 쐐고 다닌터라 몸살이 나 식은땀을 벌벌 흘려가며 기 드보르의 알쏭달쏭한 스펙타클 현상을 보고 또 보지만, 아무래도 아리송하다. 분명한 것은 저러한 명명만큼이나 복원될 숭례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속류 정치학 구도와 추상적 권력 유지의 기제가 어떻게 우리를 정상적인 담론에서 분리시켜 가는가일 것이다. 그렇게 말하기 좋아하고 리플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런 분리 가속기에 어떤 방식으로 맹목적으로 동참하는가?란 문제 역시 위 스펙타클의 서술 속에 미리 함축되어 있다고 그냥 생각하자!
이쯤해서 문화재의 정의와 문화재를 문화재로 만들어가는 것이 과연 배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오히려 숭례문에서 라면을 끓어 먹은 사람들이 문화재의 진정(?)한 가치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람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저 문화 행정의 일환으로 설비된 도시의 구조물들이 이런 사건이 아니라면 언제 주목을 받을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복제가능성이 드디어 제의의 요소를 벗어던지고 복제가능한 예술작품을 탄생, 진품성의 척도를 정치로 투사시켰다면, 문화제의 복원가능성이야말로 화재로 인한 손실가능성을 함축함과 동시에 상징적 요소를 벗어던지자 마자 우둔한 정치의 형국으로 재편입시키는 '합리화'를 단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마도 이런 종류의 반달리즘이 가속화되면서 정치는 오히려 정치화되지 못하고 위계성과 예산낭비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문화 행정? 바람직한 정치를 보기에는 문화재급 정치가들이 우리 주변엔 너무도 널려 있다는 것도 문제다. 역시 사물을 좀 사물답게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왜 정치가들에 대한 테러는 고작 달걀인가? 적어도 달걀을 푼 라면정도는 엎어주셔야 하지 않는가?
그냥 풍비박산난 그대로 숭례문을 그 자리에 세워 놓고 관광상품화 하는 것은 또 어떤가? 얼마나 엄숙하고 숭고한 현장인가?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주저앉고, 국보가 타버린 후, 남은 것은 아파트? 육삼빌딩의 붕괴인가? 하며 손꼽아 기다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된 것을 복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일 뿐인가? 벤야민이 인류의 자기 소외에 대해 파시즘이 단행하는 파괴적인 정치의 심미화를 비판했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문화재의 정치화가 아닌 환상적 공동체에 불과한 문화재 지상주의자들을 모두 끌어내릴 수 있도록, 그 자리 그대로 숭례문을 놔두는 것이다. 사물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 문화란 그렇게 좀 썩고 냄새나게 버려둘 필요도 있는 것이다. 얼마나 숭고한가? 우리는 상대적으로 멀쩡한 듯 보이면서 너무도 안전하지만, 타버린 서까래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란.
첫댓글 문화재라고 하는 문화의 권위에 반사적 과잉반응을 보이고 있는 우리 내면의 단층들은 그만큼 스스로 우리가 아직은 문화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이번의 사태들로 ‘스펙타클하게’ 보여준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삭고 불타고 이즈러진 그림자체도 페허 그대로도 남길 수 있는 ‘숭고함’이 하나의 문화적인 저변으로 우리 내면에 편안해 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이런 염려아닌 염려의 유령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겠지요. 분명 우리는 이렇게 무엇인가에 쫓기고 강제된 스펙타클에 집단적으로 휘둘릴 때 아직은 어디엔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누리고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적극적으로 긍정해서 이것을 한편의 성장통이
라고 자위하고 싶지만---모든 것이 부정되었고 사물의 그 모든 것들이 연속적으로 부서지고 파괴되었던 지난한 과거력을 떠올리면 부서지고 불탄 것에 대한(전쟁들과 폭격에 대한 기억과 화재로 인한 소실의 현사태간 시간적 간격은 서로 마주칠 정도로 가깝다.) 폭력적 시선과 과잉반사들을 쏟아내는 사태들 또한 그렇게 멀고 낯선 얼굴들은 아닌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이렇게 너무 가까이 겹겹으로 중첩된 상처와 틈새들로 인해 협소하게 내몰린 내면에 비해 우리 사회의 광속 디지털 시스템은 너무 벌어져 있는 걸까요?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사유의 틈새를 그 광속의 기능적 속도가 대체하고 있고 이렇게 사태가 스
펙타클의 자극으로 직결, 과월해 버리는 범람들이 손쉽게 발생하고 있으니---결국 많은 그림이 몽환적으로 너울거리지만 그림이 없는---. 님의 글로 인해 늘 거기에 있을 수 있는 문화재의 자리를 새삼 고맙게 생각해 봅니다.
4차선 도로 한 복판으로 유폐되어 그저 버스를 타고 가면서만 바라볼 수 있던 숭례문, 한국 관광공사에서 발행한 카렌다 사진들에서나 '한국적인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공인'된, 그것도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주위를 질주하는 수많은 자동차들 한 가운데 섬처럼 고립되어 찍혀 '급속한 근대화 속에서도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아이러니컬하게 광고하던 숭례문은, 제가 보기엔, 결국 '전시적 가치'만을 지니고 있던 문화재였습니다. 오세영 시인이 국민일보에 특별기고한 저 과장된 복고풍의 글에서 처럼 정작 그것의 소실로 인해 '애통하고 애통해'할 사람들은, 거기에서 추위를 피하고 라면을 끓여먹었다던
노숙자들이겠지요. 차라리 숭례문에 비하면 애인과 데이트를 하며 거닐던, 혹은 그 곁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기울이던 덕수궁 돌담길이 더 우리의 문화적 기억에 남아있는 진정한 '문화재'일 것입니다. 저 과장된 상실과 애통의 제스쳐들은 오히려 그전까지 우리 삶으로부터 분리된 숭례문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그리고 거기에 그를 부여하려고 전혀 노력하지도 않던 어떤 '진정성'을 그것이 소실되고 난 후 상상적으로 불러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제게는 무척이나 의심스럽습니다. 이후 모든 문화재들에 더 많은 감시 카메라와 더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그것들은 더욱 우리 삶의 맥락으로 부터 떨어져 박제된 '전시품'으로 전락할
운명을 맞이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