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북정맥 제 2 구간 ▲▲▲ (성동고개~숫돌고개) 1. 산 행 일 : 2011. 4. 3(일) 2. 산 행 지 : 고양 3. 날 씨 : 맑음 4. 참 가 자 :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5. 준 비 물 : [1] 전 체 - 차량, 안전장구, 구급약, 사진기, 지도 [2] 개 인 - 비상식, 등산화, 배낭, 윈드쟈켓 및 우의, 예비옷(보온)과 양말, 모자, 장갑, 후레쉬, 식수, 세면도구, 신분증, 다용도칼, 휴지, 비닐봉투, 간식 등 개인용품 6. 회 비 : 7. 산행정보 및 일정 [1] 총 산행 거리 : 14. 4km [2] 산행개요 : [3] 구간별 거리 성동고개-(1.8)-예빛교회-(2.1)-현달산-(4.5)-39번국도-(1.5)-한양골프장-(4.5)-숫돌고개 [4] 산행 코스 및 시간 (1) 산행지 이동 ① 교통편 : 승용차(박상호) ② 이동경로 : 북수원 홈프러스 ---> 고양, 일산, 식사동 ---> 성석동--->성동재 ---한탄강 매운탕 (2) 산행코스 성동재(잣골고개)-<10분>-봉우리갈림길-<10분>-갈림길-<2분>-군부대정문-<5분>-갈림길-<8분>-예빛교회-<22분>-문봉동재(61m,포장도로군부대입구삼거리)-<8분>-현달산(139m,삼각점,체육시설)-<3분>-헬기장-<10분>-광목장-<5분>-포장도로갈림길-<5분>-포장도로-<4분>-군부대철조망-<18분>-묘역(전주이공묘)-<7분>-묘역(증통훈대부사복시정묘)-<5분>-갈림길-<10분>-포장도로갈림길(제512탄약중대표지판)-<2분>-철로(횡단)-<5분>-39번국도(고가차도횡단)-<8분>-서울외곽 순환 고속도로 지하차도 -<4분>-포장도로-<4분>-갈림길-<5분>-스카우트연맹(갈림길,직진)-<2분>-서삼릉보리밥집-<10분>-갈림길-<2분>-허브랜드-<6분>-서삼릉입구---농협대---포장도로갈림길(경주마목장표지판)-<18분>-철조망갈림길(뉴코리아CC옆길)-<12분>-철탑(NO13)-<3분>-삼각점(50m,깃대봉)-<7분>-묘지(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삼거리---고양중고후문-<15분>-숫돌고개(1번국도,군부대정문) (3) 산행 후 ○ 삼송역 ---> 원당 ---> 식사동 ---> 성석동(성동고개) ---> 수원 8. 산 행 기 [1] 산행전
정맥산행, 일반산행, 틈새산행 등등으로 거의 매주 마다 산행을 한 때문인지 주말이 가까워지면 은근히 산행이 기다려진다. 산행 계획이 없으면 광교산 헬기장에라도 다녀와야 한 週가 지루하지 않게 지나가는 것 같다. 아마도 알게 모르게 산행에 중독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3월 6일 한북정맥을 시작한 후 한배산악회 정기 산행인 낙동정맥 종주(3월 12, 13일)가 몇 회원들의 개인 사정으로 무산되었고 3월 20일(일요일)에는 한북정맥 종주를 계획했었으나 雨天으로 포기, 3월 26일(토) 일반산행 또한 知人의 자녀의 혼사로 참여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한 달 餘를 산행을 하지 못했는데 4월 9, 10일에 실시되는 낙남정맥 산행도 직장행사(검정고시장)로 참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답답한 마음에 3월 30일, 박사장에게 전화, 4월 3일(일요일)에 한북정맥 2구간을 종주하자고 요청을 했더니 집안 행사가 있어 그때 가봐야 된다고 한다. 광교산 헬기장이나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4월 2일(토요일) 23시경, 박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09 : 00시경에 출발하여 한북정맥 2구간을 산행하자고 한다. 쾌히 응낙을 했다.
산행 때마다 늘 05 : 00시~06 : 00시에 출발을 한 때문인지 아침 식사 후 산행 준비를 하고서도 09 : 00시까지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 박사장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섰다.
09 : 10분, 북수원 홈프러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상경교장을 승차시켜 곧바로 오늘 산행의 출발지인 『성동재(잣고개 :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로 이동을 했다.
10 : 20분경 오늘 산행 출발지인 성동재 「한탄강 매운탕」집 앞에 도착을 했다. 지난 산행 때는 주로 파주시 탄현 지역을 산행했는데 지도를 보니 오늘은 고양지역에 위치한 산야를 산행하게 되어 있다. 현달산(132m)를 제외한 전 지역이 非山非野로 산행에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단 대부분 군부대를 지척에 두고 산행을 해야 한다는하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린다고나 할까.
[2] 산행 출발지 『성동재』
오늘 산행의 출발지인 『성동재』를 일명 『잣골고개』라고도 한다. 「잣골=잣굴」을 달리 「성동(城洞)」이라 부르는데 「城石里」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이다.
「城石洞」은 고양시 중심에서 북서쪽 방향에 위치해 있으며, 경의선 일산역에서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북으로는 파주시와 인접하고 있으며, 마을 중앙으로는 고봉로, 성석로, 성현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은 고봉산과 황룡산 사이에 형서 되어 있으며 행정지역은 「고봉동」으로 「사리현동, 지영동, 문봉동, 설문동」을 포함하고 있다.
「城石」이라는 地名은 마을이 「高峰山」으로 둘러싸여 마치 산으로 병풍을 쳐놓은 듯, 城을 쌓아 놓은 듯하다하여 ‘성(城)’자를 쓰고 또한 마을에 이무기도 무서워하는 두꺼비바위가 있다하여 ‘석(石)’자를 써「城石=구이동(성석의 옛 이름)」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로는 「高峰山」에 돌로 城을 쌓았다하여하여 「城石」이라고 마을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자연촌락으로는 진흙밭이 있어서 ‘진밭((=泥田 : 이전)’, 서당이 있어서 ‘서당’, 사당이 있다고 하여 ‘사당골(=사당굴)’, 큰 연못 주위에 ‘함종 어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함못’ 등의 마을이 있다.
‘高揚郡誌’에 의하면 성석동은 구이동면 성동리로 기록되어 있다. 구이동면에는 성석동 이외에 현재의 식사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성석마을에는 부사문촌(현재 웃감내=상감천), 감로촌(현재 아랫감내=하감천), 마위곡(현재 마골=마굴, 馬洞), 이전촌(현재 마골) 마을이 표기되어 있는데 모두 139호가 있었다. 이후 구이동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벽제면에 속하다 1980년 벽제읍으로, 이어 1992년 신도시 승격 이후 1996년 일산구 설치로 고양시 일산구에 속하다, 다시 2005년 일산구 분구로 일산동구에 속하게 되었다.
[3] 산행 출발부터 삐걱거리다.
10 : 30분, 「한탄강 매운탕(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888-6, ☎ (031) 901-4492, 메기, 장어, 빠가, 참게, 추어, 잡어탕)집」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도로를 횡단하여 「낙지마을」뒷산 능선에 올라(10 : 38분경) 좌로 잠시 진행하니 삼거리에 여려 개의 정맥 표시기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후미로 오는 박사장과 합류하여 右로 진행.
10 : 40분, 군부대 초소를 지나
10 : 48분, ‘思之思之 天神通知’라 쓴 차단기를 설치해 놓은 군부대 후문에 도착했다. 그런데 길이 창고형 건물들이 있는 곳으로 이어진다. 정맥 길을 벗어난 모양이다. 가던 길 멈추고 마을 우측 산으로 올라붙어 비포장 길을 만나 묘가 있는 사거리에 도착(11 : 00시) 해 보니 정맥 표시기가 여려 개 눈에 띈다. 군부대 초소에서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다.
비포장 길을 따라 진행하다 뒤편으로 교회가 보여 조사해 온 자료에 안내 된「예빛교회」라 생각하고 되돌아갔으나「예빛교회」가 아니다. 마침 일요일이라 교인에게 길을 물어 갈림 길로 되돌아 나와 약 8분여를 진행하니 포장길이 나오고 『예빛교회』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4] 정맥 산행 길에 동향인(수원)을 만난 반가움
11 : 15분, 『예빛교회』표지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좌측 포장길을 따라 진행,
11 : 20분, 하이택수출 표장지 회사 앞 통과하고
11 : 25분, 안골마을 입구 삼거리(마을 입구 표지판)를 지나
11 : 30분, 친환경 우수기업 인선이엔티(주)를 지나는데 맞은쪽에서 정맥산꾼 2명이 걸어온다. 우리 배낭에 달린 한배산악회 표지기를 보더니 자기네도 수원 망포동에 산다며 반긴다. 모처럼 정맥 산행에서 만나는 同鄕人이라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좋은 산행 마련하라’며 德談을 하고 포장길을 따라 계속 진행을 했다.
[5] 문봉동재
11 : 33분, 타워골프클럽을 지나
11 : 39분, 310번 지방도로 삼거리인『문봉동재(61m, 군부대 입구)』에 도착을 했다.
『문봉동(文峰洞, 고양시 일산동구)』은 지영동의 서남쪽 그리고 설문동의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문봉(文峰)」의 유래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이곳에 문봉서원(문봉서원(文峰書院) :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문봉동에 있던 서원이다. 1688년(숙종14)에 창건되어 남효온 등의 위패를 모셨다.)이 있었기 때문에 생겼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부터 글을 숭상하고 받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하며 끝으로는 이 마을 앞쪽에 있는 見達山 봉우리의 생긴 모양새가 마치 붓과 같아 큰 文章家가 많이 나올 것 이라는 뜻에서 문봉(文峰)이라 했다는 것이다.
[6] 견달산(見達山)
11 : 43분, 현달산 입구(구 문봉동재)도착, 직진을 하다 마을사람을 만나 컨테이너박스 옆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라는 안내를 받아 『현달산』오름길로 들어섰다.
11 : 50분, 『견달산(見達山)』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벙크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삼각점도 두 개(3개?)가 눈에 띄고 통신탑, 체육시설, 의자 등이 설치되어 있다. 해발 132m로 낮은 산이지만 고양 市街地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眺望이 좋은 산이다.
『견달산(見達山)』은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과 고봉동/문봉동의 경계를 이루며 한북정맥 산줄기에 걸쳐있는 산이다. 정맥 종주꾼들에게는 「현달산/ 見:나타날 현」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본달, 번달」이란 이름도 가지고 있다. 풍수지리상 산봉우리가 마치 중국을 향해 절하는 형상이라 해서「逆賊山」으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http://blog.daum.net/san2000/15958814
이 견달산(見達山)은 예로부터 하늘과 잘 통한다고 하여, 고양지역에 비가 오지 않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군사요충지로 6.25 전쟁 당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기도 한 지역으로 지금도 산 곳곳에 군사시설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견달산(見達山)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明太祖 홍무년에 상서로운 기운이 명태조 세수대야에 비쳤다. 길흉을 점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기운을 따라가게 하였더니 그 산이 견달산(見達山)이었다. 산 정상에 올라가 보니 우물이 있는데 우물가에 감나무가 있었으며 그 감나무에는 홍시 한 개가 달려 있는데 크기가 옥쟁반과 같아서 그 기운이 남경 명태조 세수대야에 흘러 비쳤다 한다. 드디어 그 홍시를 따서 태조께 바쳤더니 이 산의 이름을 견달산(見達山)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7] 광목장(光牧場)
여러 시간 쉼 없이 걸은 터라 정상에 배낭을 내리고 박사장이 준비해 온 간식을 먹으며 넉넉한 휴식을 가진 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의자와 체육시설을 설치해 놓은 곳으로 진행을 해야 했는데 맞은편으로 진행, 다음 행선지인 『光牧場』을 찾느라 다리품과 시간을 다소 허비를 하고서야 『光牧場』정문애 도착(12 : 35분)을 했다.
[8] 탄약중대 후문
12 : 40분, 「고양 제일 화물 지게차」표지판을 세워 놓은 2차선 포장도로를 횡단, 여러개의 표지기가 눈에 띄는데 그중 한배표지기도 있다. 산악대장이 홀로 종주를 하며 달아 놓은 것이다. 대장을 만난 듯 반갑다.
12 : 45분, 짧은 오름, 전주이씨 묘를 지나 비포장 넓은 길을 따라 진행, 잠시 후 군부대 초소가 있는 곳에서 철망을 따라 약 20여 분간 지루한 발품을 팔아 13 : 05분경 2차선 포장도로가 시작되는 군부대 후문에 도착을 했다.
[9] 세상에 공짜는 없다.
① 대궐고개약수터
쉼 없이 진행,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약 20m를 진행하다 산길 숲속으로 진입하여 약 3, 4분을 내려가니 넓은 길이 나오고 좌측으로 창고 같은 함석집이 있고 넓은 길을 따라 우측으로 약 2분여를 진행하니「대궐고개약수터」가 나온다. 정맥길 약수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차례를 기다려 바가지에 약수를 받아 마시니 더운 기운이 싹 가신다.
약수터 안내문에 「대궐(大闕)고개 약수(藥水)터의 유래(由來)」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해 놓았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주교동 산 44의 1
이 약수터의 샘물은 바위 틈에서 솟구쳐 넘쳐흐르고 있는 수질이 아주 좋은 생수로 고려(高麗) 34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제위 1389~1392)께서 다락골(왕릉골)에 피신해 있을 때 왕과 왕비(順妃盧氏)는 꼭 이 샘물만을 마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구전(口傳) 되고 있는 유서깊은 샘이다.
당초 노천의 옹달샘을 보다 맑고 깨끗이 보존하기 위하여 뚜껑을 덮고 편리한 급수시설로 개조하였다.
이 샘의 동북쪽 500미터 지점에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191호인 고려 공양왕 고릉이 위치해 있다.
② 배다리 누리 길
약수터 뒤로 바로 오르니 체육기구가 설치되어 있고 쉼터도 마련되어 있는데 여러 사람들이 이용을 하고 있다.
이쯤이면 정맥꾼들이 어디엔가 표시기를 달아 놓을 만도한데 눈에 띄지도 않고 준비해간 정맥 안내 자료에도 「대궐(大闕)고개 약수(藥水)터」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잘못 가고 있다는 의구심이 들면서도 선두로 가는 박사장을 따랐다.
약수터 뒤 나무계단을 지나 능선 삼거리에 올라서서(13 : 20분) 계속 진행하다보니 연속해서 「배다리 누리 길」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야기가 있는 배다리 누리길」
이 길은 고양시의 행정, 교통의 중심지인 주교동(배다리)에 있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교육적인 병풍바위 전설을 비롯하여 충신 박충원, 공양왕과 대궐고개 약수, 백석 차돌봉과 학(鶴), 박관용 선생과 시청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길입니다.
숲속 길과 황토길, 군사도로, 철책길, 산책길, 논길, 공원길로 이루어져 있어 지루하지 않게 주교동을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길입니다.
숲 사이로 고양시의 명산인 북한산이 보이는 풍경도 아름답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변화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어 건강과 사색의 길로도 좋은 길입니다.
주교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는 시민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이 길을 만들고 안내문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주교동 주민자치위원회>
<출처> http://blog.daum.net/kim5317/18304509
③ 배다리=주교동(舟橋洞)
「배다리」는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舟橋洞)」을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1925년 漢江堤防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강물이 마을까지 들어와 성사동과의 사이에 있는 하천을 배로 다리를 만들어 사람이 배다리로 건너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④ 식사동(食寺洞)
13 : 25분, 군부대 철망, 쉼터 삼거리에서 골짜기 길로 접어들어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인 큰 길에 도착했다. 산행 안내 자료에 표시된 제512탄약중 정문도 나오지 않고 횡단해야할 철길도 보이지 않는다.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도 모른단다. 정맥 길과 많이 멀어진 모양이다.
13 : 50분, 도로변에 있는 꽃집에 들려 탄약중대 정문, 서삼릉, 고양중고등학교 방향을 물으니 반대 방향(식사동)에 와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약 45분여를 엉뚱한 길을 걸었던 것이다.
우리가 엉뚱한 곳에 도착한「식사동(食寺洞)」은 일산동의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본래 원당읍 지역이었으나 分區 時 일산구에 포함되었다.
「食寺」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생긴 지명으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즉 공양왕이 식사동의 대궐고개 부근에서 태조 이성계의 군사들에게 쫓겨 숨어있을 당시에 고개 아래에 있는 절(寺)에서 밥(食)을 해서 날라다 주었다는데서 이러한 명칭이 생겼다 한다.
⑤ 삼교리 동치미 막국수 일산점
점심시간도 한 시간을 넘긴 터라 좀 전에 지나왔던 「삼교리 동치미 막국수 일산점(소양시 일산동구 식사동 471-1, ☎ 031- 969-3951)」에 들려(14 : 00시) 막국수로 점심 식사를 한 후(14 : 40분) 뒤 산으로 올라붙어 배다리 누리길을 따라 탄약중대 후문으로 이동을 했다.
잠시 느슨한 마음 때문에 점심시간을 포함하여 약 2 시간 가량을 마루금을 벗어나 빡시게 알바를 했다. 알바로 대궐고개약수로 산행 중 갈증도 풀었고 이야기가 있는 배다리 누리길도 걸어보았으며 배다리(주교동 : 舟橋洞)와 식사동(食寺洞)의 유래도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막국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즐거움도 누렸다. 그러고 보니 시간 소비와 된 발품으로 계획에 없는 소득을 얻은 것 같다.
[10] 39번 국도를 횡단
15 : 20분, 된 알바를 한 후, 탄약중대 후문 2차선 포장도로 도착, 포장길을 따라 계속 진행
15 : 38분, 512 탄약중대 표지판을 세워 놓은 삼거리에 도착을 했다. 드디어 정맥길로 들어섰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도로 횡단, 장명산 방향으로 진행하는 정맥 산꾼을 만나 길 안내를 받아 좌로 진행, 현대주유소 직전 상수도관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우측 좁은 길을 따라 내려 가 철길에서 사진 한 장으로 흔적을 남기고 밭을 가로질러 39번 국도에(15 : 50분) 도착을 했다.
우측으로 진행,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고가도로 밑을 통과하여 SK 주유소 앞 신호등에서 도로를 횡단, 고가도로 밑을 다시 되돌아 가 우측 서삼릉(표지판) 방향으로 진행을 했다.
[11] 견물생심(見物生心)
16 : 00분,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굴다리 통과
16 : 10분, 서삼릉 청국장
16 : 12분, 한국스카우트연맹 중앙훈련원 표지석을 세워 놓은 삼거리
16 : 15분, 서삼릉 보리밥 집을 지나
16 : 20분, 표고버섯을 판매하는 곳에 도착하여 휴식 겸 버섯을 구입(1kg, 중 20,000원, 상 25,000, 최상 35,000원) 했다. 집에 가면 한소리 들을 줄 짐작하며 ---- 딱히 필요치도 않은데도 물건을 보면 見物生心이 생겨 앞뒤 가리지 않고 사고보는 버릇으로 퇴박을 맞고 서운해 두 번 다시는 사지 않으리라 다부지게 마음을 다지지만 그때뿐이니 ----
[12] 제200호, 서삼릉(西三陵)
16 : 40분, 영화촬영 장소「허브랜드」에 들려 허버와 꽃 관람
16 : 50분, 서삼릉 입구(600m)에 도착을 했다.
『서삼릉(西三陵)』은 사적 제200호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세 능(陵)이다. 즉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의 세 능을 말한다.
희릉(禧陵)은 조선 제 11대 왕인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며 효릉(孝陵)은 조선 제 12대 왕인 인종과 비 인성왕후의 능이고 예릉(睿陵)은 조선 제 25대 왕인 철종과 비 철인왕후의 능이다.
이외에도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懷墓),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紹慶園), 의소세손의 묘인 의령원(懿寧園),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孝昌園), 의친왕의 무덤 등도 같이 있다. 이 중 효창원은 현재의 효창공원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5년 5월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 안타깝게도 모든 능이 공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효릉과 소경원 구역은 비공개 지대이다. 중종의 정릉(靖陵) 역시 처음에는 이곳에 있었으나 1562년 현재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 곁으로 이장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 효릉(孝陵) : 중종의 아들 인종(仁宗)과 그 비(妃)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朴氏)의 능이다. 효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난간(欄干)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의 제도로 썼으며, 왕릉에는 양우석(兩隅石)에 운채(雲彩)와 면석(面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돌리었다. 당초 시대적인 상황으로 상례절차를 감쇄(減殺)하여 산릉(山陵)공사에 소홀한 점이 많았던 모양으로 선조(宣祖) 10년에 효릉의 개수를 명하여 병석 등 석물(石物)을 다시 고쳐 넣었다.
(2) 희릉(禧陵) : 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이다. 왕후가 승하하자 처음에는 능터를 광주(廣州) 헌릉(獻陵) 구역 내에 택정하였으나, 이를 둘러싼 권력다툼의 결과로서 새로이 길지(吉地)를 찾아 현재의 위치에 모시게 하였다. 그 후 중종의 정릉이 희릉 곁에 정해지면서 정자각(丁字閣)을 양릉 사이에 옮겨 세우고 동원이강형식(同原異岡形式)을 취하게 되었다. 능제도는 병석 없이 난간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석물의 배치며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의 수법이 전기 능석물(前期陵石物) 양식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3) 예릉(睿陵) : 국말(國末)의 철종(哲宗)과 철인왕후 안동김씨(哲仁王后安東金氏)의 능이다. 능제도는 양릉을 나란히 놓아 난간으로 연결된 쌍릉제도를 취하고 있으며 능석물 양식상 융건릉(隆健陵)의 영향이 보인다. 즉, 융릉(隆陵)에서 8각 장명등과 4각 장명등의 운족양식(雲足樣式)을 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이루고 있다. 능전 3계(陵前三階)는 이미 2계로 줄어들었고 장명등이 전방으로 나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출처> 고양시 덕양구청 홈
http://gu.goyang.go.kr/deogyang/gyintro/guintro/famous/1185196_1552.html
[13] 有備無患이 아쉽다.
600m 거리에 있는 역사적 유적지『서삼릉(西三陵)』을 시간 여유가 없어 관람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너무 아쉽다.
16 : 55분, 농협대 정문 도착, 후미로 오는 박사장을 기다리다 시간이 지체 되 그대로 직진, 「약수 낚시터」입구에 도착을 했다. 박사장으로부터 전화, 정맥길 벗어나고 있으니 대기하고 있으란다. 잠시 후 박사장 도착, 농협대 정문으로 들어가 산길로 가야 된다고 하는데 이미 지나온 터라 낚시터로 진입하여 약수터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붙었다.
[14] 능주주씨(綾州周氏) 신안주씨(新安朱氏) 墓群
17 : 17분, 뉴코리아CC 철조망 길을 따라 진행
17 : 25, 綾州朱氏 家族墓에 도착했다. 姓本이 의아해 산행 후 인터넷 자료를 뒤져보니「능주주씨(綾州周氏)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91가구 3,31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姓本이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출처> http://user.chol.com/~namiaz/origin/ja/ju-set.htm
綾州朱氏 家族墓를 지나 고양~삼송지구 도로건설 절개지를 통과하여 약 3분여를 진행하니(17 : 29분) 「新安朱氏」墓群이 있다.
新安을 本官으로 하는 「朱氏」는 중국 송나라 때 중국사람 주희(朱熹, 1130~1200)를 중조로 하는 성씨이다. 주자의 증손자 주잠(朱潛)이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도를 거쳐 화순 능주에 정착하였다.1573년 나주 금천에 살았던 주홍명(朱鴻鳴)의 큰아들 신안주씨 22세손 주수(朱壽)가 진도 군내면 덕병에 들어오면서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둘째 주번(朱藩)은 진도군 임회면 구분실로 옮겨왔고, 셋째 주보(朱寶)는 봉상리에, 넷째 주현(朱弦)은 처가인 송정의 옛 마을인 히리굴에 자리 잡았다. 현재 전라남도 진도군에 모두 98가구 253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15] 숫돌고개=여현(礪峴)=여석령(礪石嶺)
17 : 35분, 「신안주씨」묘군과 송전탑 13번을 지나 89m봉에 도착했다. 식별이 불가능한 삼각점과 깃대봉이 세워져 있다.
17 : 37분, 묘, 철망, 침목 쉼터를, 가선대부 밀양박씨 묘를 지나(17 : 40분)
17 : 45분, 고양 중고등학교 뒤 삼거리에 도착하여 간식을 하며 잠시 휴식을 가졌다.
17 : 55분, 휴식도 잠시, 『고양중고등학교』 후문을 통과하여 『삼송 사랑교회』에서 좌로 방향을 틀어 마을로 접어들어(18 : 05분) 아스팔트길을 따라 잠시 오르니 나무 송신탑이 나온다. 우측으로 담장을 따라 1분여를 진행하여 18 : 07분, 오늘 산행의 목적지「7163부대」정문 앞,『숫돌고개』에 도착을 했다.
『숫돌고개=여현(礪峴)=여석령(礪石嶺)』은 고양시 신도동과 원신동 경계가 되는 지점으로 우리나라의 국도를 대표하는 1번 도로며 통일로와 한북정맥이 이 고개를 가로질러 지나는 곳이다. 예전에「열두굽이고개」라고도 불렀는데 길이 넓어지기 이전에 고갯길이 ‘열두굽이’여서 붙었던 이름이라고 한다.
숫돌고개란 이름이 붙게된 것은 임진왜란 때 明나라 「이여송(李如松)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삼송리 쪽에서 왜군 부대와 대치할 때 이 고개 꼭대기에 있던 바위에 칼을 갈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전한다.
옛날에는 『숫돌고개』를 한자를 사용해 「여석현(礪石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숫돌고개로만 통용되고 있다.
<출처> http://blog.daum.net/san2000/15958812
[16] 산행 후
잦은 알바로 예상보다 한 시간 삼십여 분 지체된 터라 주차를 해 둔 성동재로 이동을 하기 위해 택시를 불렀으나 올 수 없다하고, 버스 정류장도 없어 고양중고등학교 앞에 있는「삼송역」까지 걸어 내려갔다. 70년대 후반만 해도 2차선 비포장도로가 큰 도로로 바뀌었고 단층집들은 고층 빌딩으로 변해 옛 모습을 전혀 찾을 수가 없다. 桑田碧海를 절실히 실감할 수 있는 변화의 모습이다.
택시 승차, 원당, 식사동 거리를 지나며 차창 밖을 보니 서쪽 하늘에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라는 신호가 아닌가.
오늘 산행은 알바로 시작해 알바로 마감을 한 산행이 아닌가 싶다.
18 : 30분, 아침에 주차를 해 둔 성동고개 한탄강매운탕집에 도착을 했다. 차를 주차시켜 준 고마움도 있고 저녁 식사시간이라 매운탕 집에서 산행 뒤풀이 겸 저녁 식사를 하는 것으로 한북정맥 2구간 일정을 마쳤다.
2011. 4. 7
[참고자료 1] 고양시의 유래
「고양시」는 고구려 때는 달을성현(達乙省縣), 신라시대에는 고봉현(高峰縣)이라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고봉·덕양·부원·황조현을 합쳐 덕양현(德陽縣)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1394년(태조 3) 처음으로 감무를 고봉에 두어 3현을 다스렸으며, 1403년(태종 3) 고봉·덕양을 합쳐 고양현으로 개칭하고 1470년(성종 1) 군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이 군을 폐하고 유행처(遊行處)로 만들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경성부로부터 8개 면, 양주군으로부터 1개 면이 편입되었다가 1936년 4월 행정구역 변경으로 용강(龍江)·연희(延禧)·한지(漢芝)의 3개 면이 경성부에 편입됨 으로써 9개 면이 되었다.
1949년 다시 은평(恩平)·숭인(崇仁)· 뚝섬의 3개 면이 서울시로 편입되어 6개 면이 되었으며, 1967년 화전(花田)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3년 신도면(神道面)의 구파발·진관내·진관외리의 3개 리가 서울시에 편입되고, 그해 7월 신도면이 신도읍으로 승격하였다.
1979년 5월 원당면이 원당읍으로, 1980년 벽제면이 벽제읍, 중면(中面)이 일산면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85년 지도면이 지도읍, 신도읍 화전출장소가 화전읍으로 승격하여 6읍 1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2년 법률 제4417호에 의거 고양군이 고양시로 승격하였다.
1996년 3월 1일 일산구와 덕양구가 설치되었고,2005년 5월 16일 일산구가 일산동구와 일산서구로 분구가 되었다.
[참고자료 2] 주교동(舟橋洞)
○ 주교동(舟橋洞)
주교동은 교통, 지리적으로도 중심에 해당한다. 주교동 소방서 앞으로는 고양대로, 시민대로, 덕양대로, 행주대로가 교차하고 있는데, 이 도로들은 서울, 의정부, 일산, 능곡 지역으로 이어지는 고양시 도로 교통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주교동에는 옛 농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 즉 독곶이 마을, 박재궁, 윗배다리, 장터거리 마을이 있다. 최근 옛 도당산과 아랫 박재궁, 마상골에는 20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원당지역 초고층의 건물로 남아 있다.
주교동 관내의 주요기관으로는 고양시청, 고양시의회, 고양시 문예회관, 고양소방서, 덕양구보건소, 고양덕양등기소 등이 있으며 농협 고양시지부, 고양문화원 등 유관기관이 있다.
○ 주교동의 명소
① 마상공원
‘마상공원’은 고양시청 북쪽, 원당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공원으로 시민들이 좋아하는 산책로가 있다. 약수, 야외전시장, 게이트볼장, 배드민턴장, 비호정이란 국궁장이 있으며, 나무가 많이 있어 좋은 숲속 길을 이루고 있다.
② 대궐고개 약수터
‘대궐고개 약수터’는 윗 박재궁 뒤편에 있는 유명한 약수터이다. 이 약수터는 고려 공양왕이 마셨다고 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맑고 깨끗한 영천수일 뿐 아니라 소나무 향내 짙은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어 이곳을 즐겨 찾는 고양시민들의 건강과 정서 순화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③ 고양탁주(배다리막걸리)
‘고양탁주(배다리막걸리)’는 주교동 장터거리 마을에 위치한 술 막걸리 공장이다. 현재 이곳에는 배다리 출신인 박 관원 선생이 4대째 배다리 술도가를 하고 있으며 2007년부터 박상빈 대표가 5대째 주인으로 ‘배다리 막걸리, 주교주, 아사달’이란 대한민국 전통술을 전시하는 배다리 박물관을 경영하고 있다.
○ 주교동 문화유산
① 단산부원군 이무 선생 묘소
영글이 마을에 위치한 ‘단산부원군 이무 선생 묘소’는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이무 선생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인물로 세계 최초의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김사형 등과 함께 만들었다. 묘비 글씨체의 특이함과 사각 봉분의 양식에 있어 뛰어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② 박충원 선생 묘 및 신도비
‘박충원 선생 묘 및 신도비’는 능골 밀양 박씨 선산 내에 있고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전기의 무덤으로 당시의 석물이 훼손됨 없이 잘 보전되어 있다.
[출처]우리동네 - '덕양구 주교동'|작성자고양시
[참고자료 3] 고양시 덕양구 삼송리(三松里=세솔, 세수리, 삼송)
본래 고양군 하도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 셋이 있으므로 세솔 또는 세수리, 삼송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삼송리라하여 신도면(읍)에 편입 됨
<출처> 한국지명유래 총람 권 17, p165
[참고자료 4] 원당(元堂)의 지명 유래
원당은 1413년 고봉현이 고양현이 되면서 관청이 들어선 최초의 관아지터이다. 이로써 이곳을 ‘으뜸 원(元 )’자와 ‘집 당(堂)’자를 써서 ‘원당리(元堂里)’ 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이 관청은 강경왕후의 묘를 이장한 희릉이 들어오면서 대자골로 이전했다.
또 다른 유래로는 이곳은 정승이 많이 나며, 그분들의 묘 자리로 널리 쓰이던 명당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서삼릉인데 이곳에 왕실의 큰 재실(정사각)이 있어 역시 으뜸 원자와 집 당자를 써 원당이 되었다고 한다.
기타 자연촌락 이름 유래로는 전쟁 때 진을 쳤다는 진텃말, 왕능이 있어 왕릉골, 누각이 있었다는 루곡[다락골], 제청이 있던 제청말, 푸른 청태콩을 많이 심어 청대골, 벌판 가운데 섬같은 섬말, 절이 있는 절골, 오기안 부자가 살았다는 오기안터골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