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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부록_유명한 석학들의 논의 附 名碩議204)
허엽許曄(1517~1580)205)은 일찍이 향약을 급히 시행하자는 상소를 올렸고, 조헌도 향약
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삼사三司가 시행하기를 청하자, 선조가 향약을 시행할 것을 명하
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이李珥는 다음과 같이 반대 의견을 올렸다206.)
“향약을 시행하기에는 때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백성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고, 백
성을 가르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민생의 곤란이 지금보다 더 심
한 때가 없으니, 황급히 폐단을 구제하여 먼저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주고 난 뒤에야 향약
을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교德敎는 쌀밥이나 고기와 같은 것이지만, 비위가 상하여
죽도 내려가지 않는 상황에서 쌀밥과 고기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한들 먹을 수 있겠습
니까?”
향약의 일로 대신들과 의논하니, 어떤 이는 그만두자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만둬서는
안 된다고도 하자, 임금이 그만두라고 명령하였다.
허엽이 이이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향약을 그만두라고 하였소?”
이이가 답하였다. “의식이 넉넉한 뒤에라야 예의를 아는 것이오. 굶주림과 추위에 빠진 백
성들에게 억지로 예를 행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오” .
허엽이 말했다. “세상의 도가 오르고 내리는 것은 명수가 있으니 그것을 어쩌겠소” .
이이가 말했다. “공의 생각에는 민생의 곤란이 아무리 심해도 향약만 시행하면, 과연 백성
을 교화시켜 좋은 풍속을 이루어 정치가 태평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시오” ?
허엽이 대답했다. “그렇소.”
이이가 말했다. “옛날부터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도 예속을 이룬 일이 있었소? 부자간이 비
록 지친이라고는 하나, 만일 아들의 춥고 배고픈 것을 생각지도 않고 날마다 매질이나 하
며 학문을 권한다면 반드시 서로 이반하기에 이르게 될 텐데, 하물며 백성은 어쩌겠소” ?
허엽이 말했다. “지금 세상 사람이 착한 이는 많고, 착하지 않은 이는 적으므로 향약을 행
하여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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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향약의 역사적 배경과 기본 취지에 대한 이해를 통해, 당시 패촌퇴속敗村頹俗의 풍조를 야기하는 폐단을 시정하고, 화속化俗
과 근농勤農의 기풍을 진작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논에서 허엽, 조헌, 이황, 이이, 이후담, 유형원, 이해수 등 제현명
석의 향약론을 기록해 놓고 있다. 특히 향약의 시행과 관련해서는, 그 시기 문제와 서치序齒 문제에 대한 논의가 주축을 이루
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선조 7년 2월 향약 시행에 대한 이이의 향약태조론鄕約太早論은 향약을 그만두게 할 정도로 영향
이 컸으며, 그 후로도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이이와 허엽은 16세기 후반 향약 실시 시기를 두고 논쟁을 펼쳤는데, 이이
는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우선이다’고 하였고, 허엽은 ‘교화부터 하는 것이 우선이다’고 하였다. 이 논의가 중요한 것은 정
책 시행자인 용인用人 문제, 곧 적재적소의 득인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향약 가설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농정과 화
속 문제를 관장하는 지방관과 조직 임원 등의 득인을 하지 못함으로써, 농민 경제와 향촌 질서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폐단에
이른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에 모든 폐단의 원인을 제거하자면, 제도와 정책 운영의 근원이며 표준이 되는 양법미제良法美
制를 강구하여, 일체의 예식을 엄정하고 공평하게 시행한다면 누구나 준수하게 되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전망
하였다. 최홍규, 「조선 후기 수원지방의 향약-우하영의 『향약설』을 중심으로」, 『향토사연구』 4, 1992, 43~44쪽.
205) 허엽許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창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담聃이고, 아버지
는 증이조참판 한澣이며, 어머니는 돈녕부판관 성희成喜의 딸이다. 봉篈·균筠의 아버지이다. 말년에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경민편警民編』을 보충하여 반포하고,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
다. 저서로는 『초당집』·『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6) 이하 운운云云까지의 내용은 모두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권상卷上의 「만력이년갑술萬曆二年甲戌」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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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가 일렀다. “공은 마음이 착하여 사람의 착한 것만을 보았으나, 나는 착하지 못한 사
람이 많게 보이니 이것은 필시 내 마음이 착하지 못하여 그러할 거요. 다만 전에 ‘몸소 가
르치면 좇고, 말로만 가르치면 시비만 일삼는다.’고 하였으니, 지금 향약을 시행하면 시비
가 일어나지 않겠소?”
허엽이 일렀다. “공은 굳이 고집부리지 말고 대죄하시오. 양사로 하여금 다시 논하게 하는
것이 옳소.”
이이가 일렀다. “나는 내 잘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대죄하지 못하겠소” .
허엽이 개탄해 마지않고,207) 물러나 사람들에게 일렀다. “백성을 부양하는 것도 속히 해야
하지만, 백성을 교화하는 일도 속히 해야 한다”.208)
이이가 임금께 아뢰었다. “향약은 임금께서 본시 행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므로, 소신의 한
마디에 이렇게 쾌히 결단하시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소인이라도 임금의 뜻을 잘 맞추
는 사람이면 정녕 말마다 꼭 들어주게 될 것입니다” .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향약을 시행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민생이 소생되기를
기다려서 행하려는 것뿐이다. 지금 사람들이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 의론을 분분하게 하
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이이가 일렀다. “분분한 의론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군자가 임금
을 잘 만나서 하는 일이 모두 이치에 합당하여 나라 사람들이 다들 심복하도록 하면 이것
은 선善으로 진정시키는 것이오, 소인이 나랏일을 맡으면 그 위세만 부리고 자기 의견과
한 마디라도 같지 않은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화를 입히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와
다른 의견을 내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불선不善으로 진정시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는 부디 선으로 이 한 시대를 진정시키소서. 대체로 정치를 시행하자면 반드시 학문을 근
본으로 삼아야 하고, 학문은 다름 아니라 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209)에 달려 있습
니다.”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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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이이, 「만년이년갑술萬曆二年甲戌」, 「경연일기經筵日記2」, 『율곡전서栗谷全書』 권29.
208) 이 구절은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없다.
209) 『중용中庸』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210) 이이, 「만력이년갑술」,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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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암쇄록太古菴瑣錄』 【숙종대 인물 이후담李後聃(1627~?)이 저자이다.】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향약鄕約을 시행할 수 없는 것은 연령순에 구애되기 때문이다. 향당鄕黨
에서는 연령순이 예禮이기는 하지만, 주자朱子의 향약鄕約에 ‘사류士類가 아니면 함께하
지 말라.’고 한 구문이 있다. 이것으로 보건대 사족과 서인의 분별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지벌地閥로 사류와 서인을 나누지 않고, 문학文學하는 자가 사류士類고 농공
農工 이하가 모두 서인庶人인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오로지 지벌地閥만 숭상하여 반족
班族·중인中人·천인賤人의 분별이 있고, 반족班族 중에도 사족士族·향품鄕品·서얼
庶孼의 분별이 있다. 이것이 바로 연령순에 구애됨이 있는 때문이다.”
이황이 조진趙振(1535~?)211)의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향당鄕黨에서의 배치법은 연령의 고하를 가지고 자리의 순서를 정한다. 만약 귀천을 나
눈다면 이는 관작으로 정할 일이지 어찌 연령순으로 한다고 할 수 있으랴?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왕태자王太子·왕자王子·군후群后의 큰 아들·경卿·대부大夫·원사
元士의 적자適子·나라의 백성 중에 선발된 자는 모두 취학한다. 그리고 모두 연령순으
로 자리한다.’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오직 나이순으로만 정하지, 귀천의 등급을 나누지
는 않는다.’고 했다.”212) “어찌 한 때라도 부끄럽게 미천한 자 아래에 있으며, 예로부터 지
금까지 변치 않던 법전을 바꾼단 말인가?”213), “천하의 달존達尊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덕
德·작위爵·나이齒이다. 학문은 덕망을 중시한다. 이 때문에 천자·제후의 자식조차 백
성 중에 선발된 자와 함께 연령순으로 자리한다. 하물며 향당鄕黨이 본래 연령이 높은 것
을 존중하는 기준으로 여기는데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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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조진趙振: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기백起伯. 충수忠秀의 아들이며, 우의정 정挺의 형이다. 이황李滉의 문인
이다. 1576년(선조 9) 생원이 되고, 1579년 천거로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고, 1596년(선조 29) 용강현령, 1599년 성천
부사를 역임하였다. 1605년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의 수뢰受賂 사실을 폭로하였다가 삭출당하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
하자 잠저潛邸시절에 세자를 보도한 공으로 복관되고 총애를 받는 한편, 동생 정을 이조의 요직에 앉히고 자신은 공신이 되어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1610년 삭주군수, 1614년 개성유수·판결사를 거쳐, 1618년 공조판서, 1622년 판중추부사가
된 뒤 8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광해군은 그에 대하여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그가 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경기관찰
사에게 명하여 그 상을 호송하게 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삭직되었다. 편서로 『상제례문답喪祭禮問答』 2권이
있다.
212) 「답조기백문목答趙起伯問目」, 『퇴계집』 권38.
213) 이황李滉, 「답조기백문목答趙起伯問目」, 『퇴계집』 권38.
214)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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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柳馨遠(1622~1673)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의 향적鄕籍에는 양반兩班만을 수록하고 학문, 덕행, 자질, 덕망이 있는 선비가 있다
고 해도 향적鄕籍에 수록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이는 선왕께서 사람의 도리에 기강을
잡은 의의가 결코 아니다.”, “옛적에는 ‘공경公卿의 자식도 서인庶人이 될 수 있었다.’215)고
하니 귀천貴賤이 세습하지 않는 것은 옛 도이다.”, “서얼庶孼은 그 가족家族에서 적서嫡
庶의 분별을 엄격히 하고, 향당鄕黨과 학교學校에서 서치序齒의 의의를 바로 한다” . 216)
이해수李海壽(1536~1599)217)가 일찍이 이이에게 일렀다. “연령의 순서대로 앉는 것은
성균관에서는 적절치 않다. 방榜에서는 장원壯元을 존경하는데, 이것도 역시 예속禮俗이
다. 어찌 연령이 많다고 하여 장원 위에 앉을 수 있단 말인가” ?
이이가 일렀다. “장원을 존중하는 것은 방회榜會에서나 시행하는 것이 옳다. 관중館中은
윤리를 밝히는 곳이니 장유長幼의 순서를 문란케 해서는 안 된다. 또 장원의 높음이 어찌
왕세자에게 비할 수 있겠는가? 옛날 왕세자가 입학해도 연령 순서대로 앉았다. 장원은 고
려할 바가 아니다.”218)
이제 여러 설을 참고하건대 국속國俗에 구애된 바가 많이 있는지라, 사류士類가 서인庶
人에게 있어 한계가 대단히 분명하니 서인庶人된 자는 실로 감히 사류士類와 함께할 수
없다.
그래서 이황이 “어찌 한때라도 미천한 자 아래에 처할 수 있을까?”라고 한 것은 그저 반족
班族 중에 다소 지체와 문벌의 고하만 있는 것을 말한 것이지, 상천常賤과 서인庶人을 이
른 것은 아니고, 유형원이 “비록 학문·덕행·자질·덕망이 있는 사士가 있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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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고금집보古文眞寶』후집 「류둔전권학문柳屯田勸學文」. “爲公卿不學, 則公卿之子爲庶人.”
216) 유형원柳馨遠, 『반계수록磻溪隨錄』 권10, 「공거사목貢擧事目」, 「교선지제敎選之制 하」.
217) 이해수李海壽(1536~159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대중大中, 호는 약포藥圃·경재敬齋. 광양현감 맹희
孟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천군수 창형昌亨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탁鐸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龍仁李氏로 종번宗蕃
의 딸이다. 1563년(명종 18)에 생원으로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곧 검열에 등용되고, 이어 설서·봉교 등을 역임하였
다. 1567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응교·동부승지·호조참의·대사간·병조참의·공조참의를 역임하고,
1582년(선조 15)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서인으로 1583년에 도승지가 되었으나, 그때 점점 세력이 커
진 동인에 밀려 여주목사로 좌천되었다. 1587년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대사간이 되고, 다시 여주목사로 밀려났
다. 그해 서인 정철鄭澈이 건저建儲(세자 책봉 문제)로 유배되자, 그도 연루되어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 왕을 의주로 호종하였다. 이어 대사간이 되었다가, 1594년에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에 이르렀
다. 성격이 강직·단아하고 특히 시와 예서에 뛰어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약포집』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218) 이이李珥, 「만력이년갑술」,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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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에 참여함을 허용치 않는다.”고 한 것도 상천 서인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니라 반족
班族 중에 지체와 문벌이 드러나지 못한 자를 이른 것이다. 향당鄕黨에서 나이만을 존중
하고 신분은 대개 지체와 문벌의 의의를 따지지 않은 것이다. 어찌 상천常賤의 하배 따위
가 그 연령을 빙자하고서 도리어 사족士族의 위에 거하여 단호한 명분을 어지럽힐 수 있
으랴?”
적서嫡庶 같은 경우는 부자·형제간에 차등이 있는 것이지, 타인과 관련이 없어 일단 연
령에 따라 자리 순서를 정한다. 이 역시 선왕先王께서 연령을 존중하는 제도를 만들었던
의의다. 비록 그러하나 향당鄕黨의 모임에 서형庶兄을 적제嫡弟의 위에 앉힌다면 전혀
적자를 존중하는 뜻이 아니며, 적질嫡侄을 서숙庶叔의 위에 앉힌다면 거의 항렬을 존중
하는 의의를 잃었다고 하겠다.
이황이 “적자부嫡子婦·서모庶母는 의당 함께 가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대개 피차간에
선후를 따지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부녀자 간의 사적인 서열조차 그러하거늘 하물며
일향一鄕의 공회公會에 있어서랴?
본조인本朝人이 황조皇朝에 들어갔다. 현달한 관리가 수레를 타고 관도官道를 지나는 것
을 보았는데, 길에 어떤 연령이 어린 유사儒士가 나귀를 타고 길을 지나다 멀리서 보고 나
귀에서 내리자, 그 관리가 수레에서 내려 좆아 가서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 괴이하여 물어
보니 길 가던 사람이 일렀다. “귀국과는 풍속이 달라서 봐도 잘 모를 것이오. 저 달관達官
은 서얼이고 유사儒士는 적자라서 사士는 대부大夫이기 때문에 그에게 허리를 굽힌 것이
고, 달관達官은 그가 적자이기 때문에 굽힌 것이오.”219)라고 하니 중조中朝의 아름답던 풍
속이 실로 이와 같았다.
이제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편의를 갖출 방편을 정한다면, 대수代數의 한도로 정하는 것
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4대째가 되면 종당宗黨 간의 관계는 끝난다. 그 연대年代를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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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유형원柳馨遠, 「향약사목鄕約事目」, 「교선지제상敎選之制上」 『반계수록磻溪隨錄』 권9. “嘗聞本國人入中朝 見達官乘軒過官
道 有年少儒士 騎驢田邊道 中國街路 中央堤路爲官路 官人由之 兩邊平路爲邊路 士庶由之 望見下驢 達官下軒趍進致恭者 怪而
問之路人 皆曰 爾國俗殊 故見而不知焉 彼達官庶孽也 儒士其嫡也 士爲大夫屈 達官爲嫡屈耳 此蓋天下之通義也 本國唯以門地
爲重 故抑塞庶孽 使不得齒 庶孽有才者 又多踰分不良 是交相賊也 今人皆曰若通庶孽則名分必大亂 此亦徒見末弊 而未究厥由
也 今取人以聲律詞藻 而浮薄傲爭成習 故觸事生獘 若取人以德 而禮讓之風興行 則賢才不廢而自無挾貴凌分 以喪其德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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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면 역시 대략 100여 년 정도의 기간이다. 그 나이를 순서 지을 때에는 비록 종족宗族
간의 관계가 다하였으니, 의당 항렬을 논할 것은 없으나 동당同堂의 관계가 형제숙질兄
弟叔侄 간이면 공회公會의 자리에서 서로 양보하고, 연령이 적은 것을 대체하는 데는 비
록 한도를 정하지는 않으나, 연세가 지긋한 자인 경우는 역시 연배가 적은 자들의 위에 앉
는 것을 허락하여 돈후敦厚한 풍속을 힘써 존중해야 한다.
옛날 향약鄕約의 조약과 선대 명망 있는 석학들이 논의하던 바는, 모두 세속을 인도하고
치세를 구현하던 도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소견을 절목 사이에 부친 것은 실로 벗
어나기 힘든 참람된 짓임을 알지만, 대저 예의禮儀가 번잡하면 잃기 쉽고 교령敎令이 번
잡하면 따르기 어려우며 사업事業이 번잡하면 새나가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개인적인 견해를 그 사이에 넣고, 쉽고 간편하게 행할 수 있는 방도를 취해서, 세속을 혼
란케 하여 민심을 저버리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부디 식자들이 재단하
여 취사선택하기 바란다.
요순의 다스림과 교화는 구름처럼 자취가 없어졌다. 경전과 역사서에서 대략 드러난 것
으로 말하자면, 안으로는 고요皐陶·기夔·직稷·설契이 있고, 밖으로는 사악四岳·구
목九牧이 있어 오교五敎220)·오형五刑221)으로 서로 찬양贊襄하고 권계勸戒하였으니, 요
순시절 성정을 도야하고 사람 간에 화목했던 것은 애초부터 인위적인 행위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삼대 이래로 예악禮樂과 문물이 주대에 이르러 크게 갖춰졌다.
삼물三物과 팔형八刑이 모두 통치의 도구이고, 위로 조정의 사도司徒부터 아래로 정井·
전甸·향鄕·수遂의 갱노更老222)·서리胥吏까지 모두 덕교德敎를 널리 전해서, 나태하
고 완고한 자들을 인도하던 수단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 교화가 점차 느슨
해져,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공적이 그저 장부나 정리하는223) 데에만 그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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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오교五敎: 다섯 가지 가르침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
友有信의 오륜을 말한다. 순 임금이 말하기를 “설契아, 백성이 친목하지 않고 오품五品이 순하지 않아 너를 사도司徒로 삼으
니, 공경히 다섯 가지 가르침을 펼치되〔敬敷五敎〕, 너그러움에 있게 하라.” 하였다. 『서경書經』「순전舜典」.
221) 오형五刑: 오형은 묵墨, 의劓, 비剕, 궁宮, 대벽大辟의 형벌을 말한다. 오류는 사형죄에 해당되는 다섯 가지 형벌을 범한 자에
대해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유배하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순전舜典」에, “오형에 복죄하게 하되, 오형에
복죄한 자들을 세 곳으로 나누어 행형行刑하며, 다섯 가지 유형流刑에 머무는 곳이 있게 하되, 다섯 가지 유형에 해당하는 자
들을 세 곳으로 나누어 거처하게 할 것이다.[五刑有服 五服三就 五流有宅 五宅三居]” 하였다.
222) 경노更老: 삼노오경三老五更의 준말임.
223) 부서기회簿書期會: 일 년의 회계를 장부에 기록하여 기일 안에 조정에 보고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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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았다. 그래서 백성을 잘 다스린 자로 한대에는 공수龔遂·황패黃霸를 일컬었고, 나라
를 잘 경영한 자로 당대唐代에는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를 일컬었으며, 민첩하기
로는 왕맹王猛·유목지劉穆之와 같은 부류가 있었지만 역시 결재 처리하고 장부 정리하
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漢·당唐대 이래로의 치세는 요·순·삼대에 교화를
일으켜 치세를 이뤘던 근본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 나라 안에 각 도가 있고, 한 도의 안에 각 고을이 있고, 한 고을 안에 각 방
坊이 있고, 한 방坊 안에 각 동洞이 있다. 나라를 경영한다는 것은 곧 묘당廟堂의 책무로,
도백道伯이 선포하고 읍邑의 수령이 받들어 전례에 따르고 법규에 따라 백성에게 임하여
정사를 시행한다.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를 죄다 펼쳤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교화
를 일으켜 풍속을 인도하는 방편에 대해서는 고을의 수령이 집마다 권장하고 호戶마다
설파할 방도가 없는지라, 임시로 공수龔遂·황패黃霸의 전례를 가지고 정사를 하다 보니
그 직분을 다하는 도리가 그저 가까운 자에게만 아량을 베풀고 인정을 베풀어 은자를 살
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태만하고 완고해져, 직분을 어긴 부류와 야박
하여 반목하는 무리가 민소民訴를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지 않으니 처결하고 징계할 방
도가 없다. 더구나 먼 방坊이나 먼 동洞과 같이 이목이 두루 미치기 어려운 곳에 동헌洞憲
이 없다면, 그 어찌 일일이 권선징악할 수 있겠는가? 대저 사람 몸의 백체百體·피부·모
발 등은 모두 기혈氣血이 유통하는 것이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가 능히 백체百體로 하
여금 움직이게 하여 피부·모발까지 미치니, 역시 백체百體를 움직이지 않은 채로 능히
그 털 하나, 머리카락 하나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지극히 가늘고 약한 모발이라도 피부의
끝을 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니, 백체百體가 마음을 따르고, 피부가 백체百體를
받아들이고, 모발이 피부에 전달받는 식으로 차례로 명령을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정에서부터 도道의 관찰사에게 전하고, 도道의 관찰사는 고을의 수령에게 전하
고, 수령은 다시 방坊·동洞에 전한 뒤라야, 소민으로 하여금 전부 정교政敎의 중정中正
을 따르게 하여 태만하고 완고하며 야박한 습속이 거의 징계되고 회유될224) 수 있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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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명제命提: ‘면명이제面命耳提’의 준말로, 간곡하게 타이른다는 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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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이것이 바로 향약鄕約을 반포할 것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인 것이다. 최근
혹자가 “향약鄕約을 시행한다면 향촌의 무단武斷한 무리들이 필시 이를 빙자하여 소민을
핍박하고 함부로 수탈하여 소민이 버티기 어려운 폐해를 당할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역
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무단한 무리들은 원래 방坊마다 동洞마다 있는 자들이 아니라 서너 주州마다 혹
은 서너 방坊마다 간혹 한 두 무리 정도 있으니, 백성들을 수탈하는 폐해와 풍속을 인도하
는 효과를 견줘보면 절로 서로 현격한 이해 차이가 있다. 게다가 무단한 무리란 이를 통해
권한이 많아지고 세력이 중해지는 자들이니, 그들이 핍박하고 함부로 수탈하는 것은 본
래 향약의 유무에 있지 않다. 설령 이를 빙자하여 폐단이 일어날 징조가 있다면, 이는 그
저 영읍에서 규찰하고 검속하는 데 달려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인성이 본래 선한지라 성대
한 사단이 감동을 통해 반응하게 마련이니225), 여러 약조를 거듭 밝혀 권장할 즈음에 자신
을 반성하여 보고 감동하는 효과가 있을 줄 누가 알랴? 그저 단호하게 시행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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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소학제사小學題辭』 “凡此厥初 無有不善 藹然四端 隨感而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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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영의 천일록 -- 풍속 교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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