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을 읽고 제시문 (나)의 관점에서 제시문 (가)의 주장을 비판하되, 제시문 (가)와 같은 주장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비판하시오.
(가) 성(性)과 관련시키지 않는다면 여자도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여성도 마찬가지로 같은 기관들을 지니고 같은 욕구를 지니고 같은 능력을 지닌다. 여러 기관이 똑같이 구성되어 있고 그 각 부분도 똑같으며, 신체의 움직임도 같고 외형의 모습도 닮았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양자를 고찰해 볼 때 그 양자는 약간의 차이밖에 없다. 성(性)에서 비롯된 모든 점에서 여자와 남자는 어디서나 관련이 있고 어디서나 차이가 있다. 양자를 비교하는 어려움은, 양자의 구조에서 성에 딸린 것과 딸리지 않은 것을 밝혀내는 어려움에서 오고 있다. 비교 해부학에 의하거나 아니면 단순한 관찰만으로도 양자 사이에는 성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 같은 일반적 차이들이 발견된다. 실은 성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알아챌 수 없는 관계들에 의해서다. 그 관계들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양자에 공통되는 것은 다 종(種)에 딸린 것이고, 다른 것은 다 성(性)에 딸린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이러한 이중의 관점에서 우리는 양자 사이에 닮은 점과 반대되는 점들을 너무나 많이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이 두가지 존재를 그토록 다르게 조립해서 이토록 닮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은 자연의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닮은 점과 다른 점들은 정신에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 결과는 뚜렷하고 경험과도 일치하며, 여성과 남성의 우열(優劣)이나 평등에 관한 논쟁이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중략) 양성(兩性)이 맺어지면 저마다 공통의 목적을 위해 똑같이 협력하지만, 똑같은 식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다양성으로부터 양쪽의 정신적 관계 사이에는 결정적인 첫째 차이가 생겨난다. 한 쪽은 능동적이고 강하며, 다른 쪽은 수동적이고 약하게 마련이다. 한 쪽은 반드시 스스로 욕구하고 또 욕구하는 바를 행할 수 있어야 하며, 다른 쪽은 별로 저항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 원리가 인정된다면, 여자는 남자 마음에 들도록 일부러 만들어진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남자 또한 여자 마음에 들어야 한다 치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남자의 가치는 그 힘에 있기 때문에, 강하다는 것만으로도 여자의 마음에 들게 되어있다. 이것은 물론 사랑의 법칙은 아니며, 나는 그것을 시인한다. 그것은 사랑 그 자체보다도 앞서는 자연의 법칙인 것이다. 만약 여자가 남자의 마음에 들고 남자에게 순종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면, 남자에게 도전하지 말고 남자의 뜻에 맞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여자의 힘은 그 매력에 있다. 남자로 하여금 그 힘을 발견해서 사용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매력이다. 이 힘을 부추기는 가장 확실한 기술은, 저항을 시도하여 그 힘을 불가피하게 사용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러면 자존심이 욕망과 합쳐져 한 쪽은 다른 쪽이 가져다 준 승리를 거두게 된다. 공격과 방어, 남성의 담대함과 여성의 소심함, 그리고 강자를 굴복시키도록 자연이 약자에게 준 무기인 정숙과 수줍음이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중략) 남성과 여성이 지켜야 할 의무의 엄격함은 서로 같지도 않거니와 같을 수도 없다. 여자가 이점에 대해 남자가 두는 차별이 부당하다고 답한다면 여자의 잘못이다. 이 차별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적어도 편견의 소산이 아니고 이성의 소산이다. 양쪽 중에서 자연으로부터 아이들을 맡은 쪽이 딴쪽에 대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약속을 어기는 것은 분명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으며, 자기 아내로부터 여성의 엄격한 의무들에 대한 유일한 상을 가로채는 남편은 부당하고 야비한 남자이다. (중략) 남자와 여자는 모두 자연의 지시에 따라 합심해서 행동해야 하지만, 똑같은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일의 목적은 공통이지만 일 자체는 다르고, 따라서 일을 이끌어 나가는 취향도 다르다. 자연의 남자를 길러 내려고 애써 온 다음에는, 우리의 일을 미완성으로 두지 않기 위해 이 남자에게 알맞은 여자를 어떻게 길러 내야 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언제나 제대로 이끌어지기를 바라는가? 언제나 자연의 지시대로 따르라. 여성을 특징짓는 모든 것은 자연이 정해준 것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 루소, 『에밀』에서 (나) 이 같은 생물학적 조건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여성의 역사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고, 여자가 처한 상황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후의 서술에서도 우리는 부단히 이 조건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육체는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도구이며, 세계는 파악하는 방법 여하에 따라서 상이한 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생물학적 조건을 그토록 오래 연구했던 것이다. 이 조건은 여자를 이해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열쇠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여자에게 생물학적 조건이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이라는 생각이다. 이것만으로는 남녀의 계급을 결정하는데 결코 충분하지 않다. 또, 여자가 왜 타자(他自)인 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만으로는 여자에게 이런 종속적인 역할을 영원히 보존하도록 운명짓는 것도 되지 못한다. (중략) 인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기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메를로 퐁티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인간은 자연의 종(種)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개념이다. 여자는 응고된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생성(生成)이다. 이런 생성의 측면에서 여자를 남자와 비교해야 한다. 즉, 여자의 '가능성'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논쟁 과정에서 그토록 많은 오류를 범한 것은, 여자의 능력을 문제시하면서 여자를 과거나 현재의 상태로 환원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중략) 모성과 개체적 생명과의 관계는, 동물의 경우는 발정 주기와 계절에 의하여 자연히 규정되고 있지만 인간인 여자의 경우는 확정적이지 않다. 오직 사회만이 그것을 결정 할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출산의 다소(多少)에 따라, 또 임신과 분만이 이루어지는 위생적 조건에 따라 종에 대한 여자의 예속이 갖는 긴밀성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고등 동물의 경우에는 암놈보다 수놈이 개체적 존재를 좀더 강하게 주장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개인적 '가능성'이 경제적·사회적 상황에 의해 좌우된다. (중략) 요컨대 사회는 종(種)이 아니다. 종은 사회 속에서 실존을 통해 자기를 실현해 가고 있다. 종은 세계와 미래에 대하여 자기를 초월해 간다. 그의 윤리는 생물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개체들은 결코 그들을 자연에 맡겨 버리지 않고 개체의 존재론적 태도를 나타내는 욕망과 위구(危懼: 염려하고 두려워함.)를 반영하는 습성, 즉 제2의 자연에 복종한다. 주체는 자연적 육체보다는 금기나 법률에 예속된 육체를 통해 자기를 의식하고 실현해 간다. 주체는 어떤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서도 또한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은 결코 생리(生理)가 아니다. 오히려 실존자로부터 부여받은 가치가 생물학적 조건을 지닌 몸 위에 걸쳐져 있는 것이라고 할까. (중략) 그러므로 생물학적 조건은 존재론적·경제적·사회적·심리적인 전체의 관계에 잘 비추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종에 대한 여자의 예속, 그녀가 지는 개인적 능력의 한계는 극히 중요한 사실이다. 여자의 육체는 여자가 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상황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이다. 그러나 여자가 무엇이냐를 정의하기에는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왜냐 하면 사회 속의 행위로써 의식에 의해 받아들여질 때에 육체는, 살아 있는 현실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은 '왜 여자가 타자인가?' 하는 우리의 질문에 답변을 주지 못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이 어떤 형태로 여자 속에 나타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 인류가 여자를 어떤 것으로 만들었는가를 아는 것이 문제이다. - 시몬느 보부아르, 『제2의 성』에서
<1> 논제 분석 및 출제 의도 파악 설문으로 볼 때, 문제의 핵심은 제시문(나)의 관점에서 제시문 (가)를 비관하는 것이다. 여기에 제시문 (가)가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을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비관하라는 조건이 딸려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고전에서 제기하고 있는 주장을 현실의 문제와 연관시켜서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출제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논술문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 제시문을 꼼꼼히 분석히고 그둘의 주장이 어떤 측면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지 핵심 쟁점을 정확하게 찾아 내어 그것을 일상 생활의 구체적인 사례와 연관시키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먼저 이 두 글이 서로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대립적 견해를 보이고 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문제에 대한 제시문 (나)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때 제시문 (나)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제시문 (가)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는 어떤 관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시문(가)의 전체적인 주장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그런 주장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을 논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정한 추론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면, 출제자가 요구하는 답안의 내용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2> 제시문 분석 제시문 (가) 루소의 『에밀』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책에서 루소는 당시의 교육 제도가 개인을 구속하고 억압한다고 비판하면서 개인의 잠재 능력과 개성의 창출을 강조한 교육개혁론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서 루소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 조건, 지적 능력, 심리적 특징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남성은 합리적 이성을, 여성은 감수성과 열정을 발전시킬 수 있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시문 (가)에서 루소는 남성과 여성이 성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루소는 남성과 여성에게 같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한 전제일 뿐이다. 그러한 성적인 차이는 정신과 성격의 차이를 가져오는데, 남성은 담대함과 강함, 적극성을 갖게 되고, 여성은 소심함과 약함, 수동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의 법칙인 이상 여성과 남성에게는 각각 그들의 성에 맞는 일이 주어져야 하고, 그것이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ㄱ)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ㄴ) 그런 생물학적 차이가 정신의 차이를 유발시킨다. (ㄷ) 그래서 남성의 성격은 적극적이고 여성의 성격은 수동적이다. (ㄹ) 남성에게는 남성의 일이 있고, 여성에게는 여성의 일이 있다. (ㅁ)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남서과 여성은 가가 그들의 성(性)에 적합한 일을 해야 한다. (ㅂ) 여성을 자연의 법칙에 따라 교육시켜야 한다. 제시문 (나)는 시몬느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에서 발췌한 것이다. 제시문 (나)는 내용이 그리 쉽지 않지, 자세히 읽어보면 명백하게 제시문 (가)의 견해를 정면에서 반박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분명 생물학적인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것만으로 여성의 생존 방식이 규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 글에서는 여성의 생물학적인 조건이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견해를 거부하고 여성의 개인적 가능성이 경제적·사회적 상황에 의해 좌우된다는 견해를 펼치고 있다. 이는 곧 남성과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다르지만, 그 때문에 여성의 성격이나 역할은 자연적으로 미리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다. 오히려 여성의 성격과 역할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3> 논제 해결 방안의 모색 및 논거 찾기 주어진 논제를 논리적으로 풀어 가기 위해서는, 우선 여성의 성격과 역할은 자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제시문 (나)의 관점을 정확하게 숙지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제시문 (가)의 주장이 남성과 여성의 성격 및 역할의 차이에 대한 관습적인 통념을 생물학적인 근거를 들어 재확인함으로써,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고착화하고 사회적·경제적 차별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할 수 있다. 또한 남성은 적극적이고 여성은 수동적이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는 존재라는 점을 해부학이나 생물학 등의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도 비판할 수 있다. 즉,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존재라는 점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자연적 사실로 정당화함으로써 '남성의 일/여성의 일'이라는 성에 따른 역할 분담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제시문 (나)의 관점에 선다면 그것은 여성이 갖는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말살하는 일이며, 결과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우월과 열등으로 분류하여 양성 간의 불평등한 사회 관계를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교육의 측면에서도 가능하다. 즉 자연의 지시대로' 여성을 길러 내야 한다는 주장을 그대로 실천할 경우, 현실 생활에서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게 종속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곧 남녀 차별과 불평등을 영구화하는데 기여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논의를 전개할 때 유의할 점은, 우선 주어진 글을 꼼꼼히 읽지 않은 채 막연하게 제시문 (가)는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차이를 인정하지만 제시문 (나)는 이러한 성적인 차이를 부정하다는 식으로 문제를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시문 (나)의 필자인 보부아르 역시 남녀의 성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여성의 생물학적인 조건의 본질적이고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본다. 다만, 그녀가 거부하는 것은 '생물학적 조건이 여자에 대하여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보부아르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생물학적인 조건에 처해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인 요소가 여성의 성격과 역할을 규정짓는 유일 무이한 단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구체적인 예를 논술하라는 출제자의 요구에 맞게 주위해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 관념의 예를 찾아 쓰는 것이 필요하다. 이 때 그런 편견이나 고정 관념이 남녀 간의 불평등을 조장하고 정당화한다는 식으로 논점을 잡아가면 적절한 논술이 될 수 있다.
<4> 내용을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전개하는 방법 서론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다양한 방식으로 얘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일부에서는 생물학적인 차이에 근거한 논의가 가장 자연스럽고 순리에 맞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다음 이러한 주장이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남녀 간의 불평등을 초래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논점을 드러내는 적절한 문제 제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론은 두 개의 단락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 본론 첫 단락에서는, 제시문 (나)의 관점에서 제시문 (가)의 주장을 비판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 때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한 생물학적인 설명이 무용지물이라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기보다는, 그러한 생물학적인 차이가 사회 문화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 해석되어 여성의 열등한 지위를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기제로 악용된다는 점을 지적해 주는 것이 좋다. 본론의 둘째 단락에서는 이러한 편견이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는 예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면 된다. 결론에서는 본론의 내용을 요약·정리한다. 이 때 성적인 차이에 근거한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도 남성이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의 섣부른 결말은 논지를 흐리 수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오히려 남녀 간의 성적인 차별은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문제의 핵심을 재확인해 주자.
[주제특강] ● 생물학적인 성차와 사회적인 성차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해 왔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남녀의 차이에 대한 설명들은 대부분 남성이 주도해 왔고, 여성의 열등성을 공공연히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구 문화는 오랬동안 '인간'으로서의 남성과 '모자란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상정했다. 위대한 철학자로 기억되는 많은 이들도 실제로 여성에 대해서는, 뜻밖에도 매우 비하하는 말을 남겼다. 동양의 음양 (陰陽) 이론도 남녀를 상호 보완적으로 바라보는 듯하지만, 여전히 내용에서는 우열의 논리를 드러낸다. 이러한 설명들은 상식의 차원에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전통의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남녀 사이의 성적인 차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도 남녀가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일 것이다. 라쿠어에 따르면, 자연 과학이 남녀의 차이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쯤이다. 그 전까지는 사람의 몸은 오직 한 종류만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생식기조차도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17세기까지의 인체 해부도를 보면 남자와 여자는 단지 돌출과 함몰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모양의 생식기를 갖고 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남녀를 동일한 몸으로 바라보는 생각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생물학적 차이를 찾으려는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난다. 오늘날에도 성적 차이를 낳는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탐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남녀의 모든 차이가 생물학적 조건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회 생물학자들은 남녀간의 차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우리 몸 곳곳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도저히 변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현재의 위계질서에 저항하는 사회 운동에 대해서도, 그것은 진화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기원에 설명에는 많은 문제점이 숨겨져 있다. 그런 설명은 우선 생물학적 기원을 고정된 것으로 상정하면서 인간을 마치 초기에 설정된 프로그램처럼 바라본다. 그리고 생물학적 원인으로부터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떤 차이가 유래한다고 인과 관계를 설정 할 때, 그 중간에 설명되지 않은 간극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것이 '과학적 사실'임을 강변한다.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이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다고 주장하는 경우, 너무나 쉽게 진리와 동일시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실험 결과도 실험 주체의 해석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 될 수 있다고 본다면, 단순히 남녀 사이의 생물학적인 차이를 기준으로 남성과 여성의 차이-이를 '성차(性差)'라고 한다-를 강조하고 나아가 이를 근거로 여성이 열등한 존재임을 확인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비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의 예는, 남녀 차이의 생물학적기원을 탐구하는 과학적 활동이 남성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에 의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 18세기 중반부터 나타난 두개골학은 두개골의 크기나 뇌의 질량으로 남녀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평균적으로 볼 때 여성의 뇌는 남성의 뇌보다 무게가 덜 나갔으며, 크기도 더 작았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치명적인 반격에 부딪히게 된다. 바로 '코끼리 문제'이다. 만일 뇌의 절대적인 크기와 질량이 중요한 기준이라면, 사람보다 훨씬 큰 뇌를 갖고 있는 코끼리와 고래가 만물의 영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몇몇 학자들이 신장에 대한 뇌의 상대적인 크기(또는 체중에 대비한 뇌의 무게)를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 상대 수치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높게 나오자 그 증거는 '틀린'증거로 간주되었고, '올바른'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이유로 즉시 기각되었다. 위의 예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뇌의 크기의 차이로 알아본다는 가설(전제)은 물론, 실험 결과의 의도적인 조작이나 폐기 모두가 비과학적이다. 만약 과학자들이 좀더 과학적이고 공평했다면 두개골학의 상대 수치에서 여성이 더 높게 나왔을 때 여성이 지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결론을 내리든지, 아니면 두개골의 수치에 따라 능력을 구분하는 전체 자체를 의심해 보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따라서, 두개골의 크기로 성차의 우열을 가늠할 수 있다는 주장에서 우리는 과연 그러한 생물학적 근거로 성차가 나타나는 것인지, 아니면 부당한 불평등이 생물학적 근거를 빌려서 합리화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생물학적 성차가 강조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이미 그 배경에는 당시의 정치적인 지형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18세기는 신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다양한 집단의 사회 운동을 중심으로 정치적 영역이 확장된 때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역설은 신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동시에 집단- 여성과 남성, 흑인과 백인, 빈자와 부자, 식민지와 제국-간의 차이를 부각시키려는 시도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 때부터 남녀뿐만 아니라 인종이나 민족의 차이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때 발견되는 차이는 단순한 다름이 아니라 월과 열등이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불평등한 사회 관계를 정당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현상적으로 남녀에게서 차이가 발견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가 얼마만큼 생물학에서 기원하고 얼마만큼 사회 문화적 요인에서 기원하는지는 어느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예컨대 '남성상(男性性)', 여성성(女性性)'이라는 말에는 생물학적인 성차 외에도 사회적인 성차 개념이 개입되어 있다. 이를 젠더(gender)라고 하는데, 흔히 생물학적인 성차인 섹스(sex)와 구별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지만 체격이 왜소하고 섬세한 사람을 여자답다라고 한다거나, 생물학적으로는 여자지만 체격이 크고 괄괄한 성격의 여자를 남자답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젠더에 의한 구분이다. 이처럼 성차에는 생물학적인 차원과 사회 문화적인 차원이 있으며, 현실 생활에서 이 두 가지 차원은 명확하게 나뉘어 있기보다 서로 긴말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구분할 수 없다. 사회적 성, 즉 젠더에 관한 논의들은 사회화의 결과로 성 역할이 학습되는 측면에 주목한다. 부모, 가족, 학교, 대중매체 등은 성 고정 관념에 따른 모델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여자와 남자라는 성 정체성을 직·간접적으로 내면화한다. 이렇게 해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라는 관념이 통용되는데, 이러한 고정관념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투명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러한 신념을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기 기술자라고 하면 당연히 남자일 것이고, 회사 사장이라고 할 때도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낮에 집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주부일 것이라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여성적 일과 남성적 일에 대한 고정 관념의 산물이다. 이러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은 곧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논리로 이어지고, 그것은 자신의 본성에 맞는 역할이 있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본성론적인 접근은, 특정 본성을 미리 상정하고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들을 예외로 치부함으로써 동어 반복적인 논리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정상적인 여성이라면 살림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잡안 살림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만일 그것을 원치 않는 여성이 있다면 그녀는 비정상적인 여성으로 평가된다. 여성이 살림을 담당하는 성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당위(當爲)의 차원에서 먼저 존재하고, 그런 성향이나 행동을 보여 주지 않는 여성은 자신의 본성(여성성)을 갖추지 못한 비정상인으로 진단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이 본래 집안 살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성 역할 규범이라는 당위의 관점에서 나온 해석인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이처럼 남성성과 여성성에 근거하여 남성의 일/여성의 일을 구분하는 식의 성 역할 규범이 다소 억압적이며,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폭을 좁힌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결과 가정에서 남성이 가사에 참여하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사회에서도 남성이 미용사나 간호사 일을, 여성이 버스 운전사나 의사, 변호사 등의 전문직을 맡음으로써 성차에 의한 노동의 차별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성 역할 분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즉, 소수의 예외적인 슈퍼우먼들과 유리한 조건에 있는 여성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여성들에게는 그들의 현실적 조건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남성적'인 모습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일수록 현모양처 노릇을 잘 하고 있음을 증명해야만 한다. 왜냐 하면, 여성의 일차적인 자리는 '가정'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아 실현을 하면 할수록 여성성에 위배되는 방향으로 나아가, 결혼 또는 남성과의 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여성과 남성 사이의 차이를 지워 버리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불평등에 대항하기 위해서 모든 차이를 외면하는 방향으로 일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입장만큼이나, 남자와 여자는 모든 면에서 같다고 하는 입장 역시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차이대로 인정하되, 그것이 현실 사회 속에서 남성과 여성사이의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구조적인 모순으로 작용되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러한 현실 모순을 타개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그 동안 억압받아 온 여성의 해방이며, 이를 통해 진정한 인간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